2013학년도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합격수기
한영과 정혜리(연세대 사학과)
참으로 감사한 일만 가득했던 2012년 한 해가 벌써 다 가고 있네요. 아직도 합격했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지만 올 한 해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합격 수기를 써 봅니다.
‘영어가 밥 먹여주겠지’
이 근거 없는 자신감 하나가 저를 통번역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영어권 국가에 체류한 경험이라곤 호주에서 농장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한 3개월이 전부이지만, 어려서부터 유달리 영어를 좋아하고 가까이 한 편이었습니다. 외국인 친구를 사귀거나 미드 보기를 즐겼고, 국제고를 졸업해 운 좋게 학창시절 조금 더 깊이 있는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며, 토플 등 어학 시험에선 늘 만점에 가까운 성적이 나왔기 때문에 영어는 항상 저에게 자신감과 기회를 주는 언어였습니다. 입시공부를 하며 스스로가 얼마나 부족한지 깨닫게 된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감 하나로 통번역 공부에 뛰어든 제가 무모하게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이 ‘근자감’ 덕분에 입시 준비 동안 크게 흔들리거나 일희일비하는 일 없이 스스로를 믿고 정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통번역대학원 진학을 결심한 것은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지난 겨울 즘이었습니다. 대학 입학 이후 NGO, 정부 기관, 방송국 등 다양한 곳에서 인턴 혹은 프리랜서로 일하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으려 노력했지만, 결론은 늘 하나였습니다. 영어라는 언어를 활용할 때, 이를 통해 다른 이들의 소통을 도울 때 제가 가장 보람을 느끼고 진가를 발휘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자연스레 통역사라는 직업에 관심이 생겼지만, 순수 국내파인데다 구체적인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선뜻 통역사가 되리라 마음먹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진로 고민이 한창이던 때, 감사하게도 프리랜서 통역사로 활동하고 계신 분을 만나 통역사로서의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와 조언을 들을 수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영어를 활용할 뿐 아니라 분야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점에 끌려 통대 입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기초로 돌아가세요”
김수연 선생님 수업을 처음 접한 것은 올 2월 겨울 방학 때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늘 ‘기초로 돌아갈 것’ 그리고 ‘이미지화할 것’을 강조하셨는데, 어려운 단어를 써서 복잡한 문장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정말 기초적인 단어를 이용해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영어스러움’을, 또한 추상적 내용을 머릿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미지화할 때 메모리스팬과 논리가 극대화됨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수업 자료도 ‘Dear Abby’나 어린이 동화책 같은 가볍고 기초적인 것부터 TED, ABC News, NYTimes나 Economist 등 좀 더 무거운 내용까지 두루두루 다루어 지루하지도 않고 다방면의 취약점을 고루 보완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수연 선생님 반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선생님과 학생들 간 가족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학생 개개인의 실력과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애정 어린 코멘트(때로는 신랄한 크리틱)를 아끼지 않으시며, 학생들 또한 서로 의지하고 격려해주며 힘든 수험생활을 함께 견뎌내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단순한 입시 준비 파트너를 넘어 좋은 친구들을 얻었다는 점이 가장 큰 수확이었던 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 것은 학부를 졸업하고 다시 학원으로 돌아온 8월이었습니다. 사실 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영어 보고서를 쓰거나 미드를 보고, 영어 소설을 읽는 것 외에는 별달리 영어 공부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입시가 얼마 남지 않은 8월부터 공부를 시작하려니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수업을 듣고 스터디 그룹에 합류해 수업 자료 예습/복습, 실전 대비를 시작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9월부터 시작한 한국외대 1차 대비 요약/확장 스터디는 입시 경험이 없어 실전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주일에 한번 스터디 파트너들이 돌아가며 모의고사 문제를 준비해오고, 실전과 똑같은 조건에서 요약/확장 문제를 풀었는데 다양한 주제를 다루어 무엇보다 좋았고, 분량과 시간 조절에도 많은 보탬이 된 것 같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제 영어가 그리고 모국어인 한국어가 얼마나 부족한지 깨닫고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수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어 어설프게 알고 사용한 영어 표현들을 재정비하고 한국어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입시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표현을 익히고 외우기보다는 정말 기초적인 표현, 이미 알고 있는 표현, 즐겨 사용하지만 쓰임이 한정돼 있던 표현들 위주로 정리하고 활용 범위를 넓히는 연습을 했습니다. 한국어 보충을 위해서는 신문을 소리 내어 읽거나 뉴스 앵커 멘트를 셰도잉하는 정도의 공부밖에 하지 못했는데 고급 한국어 실력 배양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평소 독서 습관을 탓하며 합격하면 꼭 다독해야겠다는 다짐만 몇 번이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밖에 부족한 메모리 스팬 또한 큰 고민거리였는데, 잘 듣고 이해를 해도 디테일을 기억하지 못해 내용이 불완전하거나, 나중에야 생각난 디테일을 억지로 끼워 넣느라 내용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는 등, 부족한 기억력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늘 강조하신대로 내용을 이미지화해 기억하고 연상하는 방법을 사용하니 메모리 스팬이 점차 늘어나 훨씬 쉽게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It's not over till it's over’
그렇게 결전의 날이 왔고, 떨리는 마음으로 1차 시험을 치렀습니다. 1번 청취 문제에서 수업시간에 이미 다룬 TED 스피치가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1-1 문제에 더욱 집착하게 돼서 시간 조절에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지나치게 심혈을 기울여 1-1 문제를 끝내고 나니 남은 세 문제는 각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써내야만 했고, 특히 예상보다 훨씬 길었던 2번 지문은 제대로 읽을 시간도 없이 닥치는 대로 요약하고 확장 문제를 써내려갔습니다. 이렇게 시간에 쫓기다보니 세련되고 정제된 표현 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최대한 간결하고 편한 영어로 논리만 잡아가며 모든 글을 완성해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네 문제를 다 풀고 나온 게 기적적일 정도로 아찔한 경험이었습니다.
1차 시험 이후 그야말로 ‘멘붕’ 상태에 빠져있던 중, 감사하게도 1차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솔직히 떨어진 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2차 시험을 칠 수 있게 된 것만으로 정말 기뻤습니다. 예정보다 하루 일찍 합격 통보가 나서 그 동안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던 2차 준비를 그제야 제대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스터디 파트너와 함께 영한/한영 통역을 거의 하루 종일 집중적으로 연습했는데, 이 며칠 동안 정말 다양한 주제를 다루어 어떤 주제가 나오든 당황하지 않고 해내리란 심적 준비에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2차 당일에는 한영 시험 방식이 읽고 통역하는 것으로 바뀐 데다 교수님들 앞에 앉자마자 무척이나 떨리기 시작해 퍼포먼스가 생각처럼 나오질 않아 당황스러웠습니다. 빌 게이츠가 원자력 전도사로 나섰다는 내용의 한영은 아이컨택을 유지하며 나름대로 흐름 있게 끝마쳤는데 문제는 오히려 평소 자신 있다 생각했던 영한이었습니다. 외국 거주 경험의 이점에 관한 지문이었는데 내용이 크게 어렵거나 길지 않았음에도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중심 내용 이외의 것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디테일은 모두 제하고 생각나는 대로 중심 내용 몇 문장만 말씀드렸는데 급 자신감이 떨어지다 보니 시선도 떨구고 목소리도 작아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고, 다행히 교수님들께서 엄마 아빠 미소를 지어주셔서 마음을 추스르고 퇴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전에서 마인드 컨트롤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제 시험장에서 얼마나 많은 변수가 생길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최종 합격 소식에 정말 기쁘고 감사한 마음도 잠시, 운이 좋아 아직 부족한 실력으로 입학하게 된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도 됩니다. 그렇지만 뛰어난 동기들과 함께 공부하며 통역사로 성장해나갈 제 모습을 생각하니 무척 설레고 다시금 힘이 납니다. 왕지각쟁이 제자를 사랑과 관용으로 이끌어주신 멘토 김수연 선생님,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스터디 멤버 언니들, 학원 관계자 분들, 모든 소중한 사람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정혜리, 정말 잘썼다!^^
정작 내가 많이 배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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