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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어머니>, 이인북스, 2014.
착하고 강한 어머니
맹문재
1.
이번 학기를 마치고 나면 학생들을 데리고 나의 고향에 갈 예정이다. 매년마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학과 행사로 학술답사가 있는데, 이번에는 나의 고향으로 가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와 학생들은 어른들을 모시고 마을의 전설이며 풍습을 듣고, 어른들의 말투를 들으며 지역 방언을 살피고, 문화유적지의 답사를 통해 역사의식을 높이고, 시골의 풍경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담은 수필이며 시작품을 창작할 것이다. 부족한 농촌의 일손을 돕고 마을 청소도 할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난 고향은 외부 사람들의 유입이 많지 않고 원형을 나름대로 유지해오고 있는 산골마을이므로 전해오는 전설이나 풍습, 방언 등을 조사하는 학술답사의 장소로는 적합한 곳이다. 그래서 의미 있는 학술답사를 기대하고 있다.
나는 고향으로 학술답사를 가는 데 망설인 것이 사실이다. 학과의 동료 교수들이 나의 고향으로 학술답사를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곧바로 답을 하지 못했고 며칠 동안 생각했었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안 계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지난해 갑자기 돌아가셔서 나는 아쉬움과 아울러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큰아들이 학생들을 데리고 고향에 와서 이런저런 공부를 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셨으면 참으로 뿌듯해 하셨을 텐데, 인정이 많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분명 따뜻한 밥을 사셨을 텐데, 참으로 아쉽고도 아쉽다. 그래서 기쁜 일이었지만 학생들을 데리고 고향을 찾아가기가 망설여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니 홀로 계신 어머니께라도 큰아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뜻밖에 돌아가셨듯이 어머니께서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 않는가. 나는 사람의 운명을 믿지 않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안 계시어 아쉽기는 하지만 어머니를 찾아뵙기로 한 것이다.
보름 정도 남은 학술답사가 기다려진다.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 때보다도 더 기다려진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어머니께서 고향에 계시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일이 왜 이리 바쁜지 자주 찾아뵙지도 안부 전화를 드리지도 못하고 있다. 지난달의 어버이날에도 찾아뵙지를 못했다. 아버지 없이 혼자 맞는 어버이날이어서 다른 때보다 쓸쓸하셨을 텐데 나는 자식 된 도리를 제대로 못했다. 그래서 이번 학술답사 때라도 찾아뵈려고 하는 것이다.
2.
늦은 저녁, 들일을 마치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어머니. 어머니의 수많은 모습들 중에 그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어머니의 그 모습이 어린 나의 가슴에 가장 깊게 박히었기 때문이리라. 저녁 시간이 넘었는데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기다리다가 지쳐 나는 어느덧 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끓어올랐다. 그렇게 있다가 보면 어머니는 점심 그릇 등을 넣은 고무 함지를 머리에 이고 마당에 들어선다. 나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신경질을 냈다. 동생들도 배가 고프다고 야단이었고, 어떤 동생은 잠에 들어 있었다. 다른 친구들의 어머니는 때가 되면 돌아와 저녁을 짓는데 왜 어머니만 그러느냐고, 그렇게 일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게 있느냐고, 나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아주 맹랑하게 따져들었다.
내가 신경질을 낼 때마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저 부엌에 들어가 저녁을 지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부랴부랴 차려내온 밥상은 시커먼 꽁보리밥에 김치 조각. 또는 쌈을 싸먹으려고 들에서 뜯어온 야채와 거무튀튀한 된장. 꼭 그러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꽁보리밥과 거무튀튀한 된장의 모습이 지금 내 눈앞에 선명하다. 나는 저녁을 늦게 해주는 어머니에게 신경질을 내었지만 차려온 밥상은 투정하지 않았다. 나이가 어렸지만 맏이로서 나름대로 집안을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음식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는다. 음식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맛을 따지지도 않는다. 밥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나는 어린 나이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다가 음식에 머리카락이 들어간 것을 발견하고 난리를 치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음식에 들어 있는 머리카락 한 가닥이 무슨 대수인가. 나는 생선뼈도 다 씹어 먹고 과일 껍질도 다 먹고 상한 음식도 끓여서 먹는다. 외식을 할 때도 음식이 남는 것이 아까워 가능한 한 다 먹는다. 이와 같은 식사 습관이 몸을 상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지난해에 수술을 하고 나서는 음식을 조금은 조심해서 먹는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음식을 가리거나 맛을 따지지 않는다.
어머니는 저녁이 늦었지만 평소에는 음식을 넉넉히 하셨다. 어머니가 장만한 음식이 남아 소여물이 되거나 먹지 못할 정도로 쉬어 텃밭의 거름으로 버려지는 일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별로 아까워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할머니께서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께서는 큰며느리의 손이 크다고 오히려 자랑하셨다. 어머니가 음식을 많이 하는 것은 할머니로부터 배운 것인지 모른다. 할머니께서는 항상 음식을 많이 하셨다. 그리하여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나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음식을 내셨다. 이웃 사람들이나 우편배달부나 면사무소 직원들이 마루에 앉아 음식을 나누는 것은 흔한 모습이었다. 밥을 들거나 찐 고구마나 감자, 옥수수, 과일 등을 들거나 막걸리나 냉수를 들거나 아니면 곰방대를 나누어 피는 것이었다.
우리 집이 마을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마당과 마루가 넓어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할머니나 어머니가 남을 험담하지 않고 품는 성격이기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며느리와 싸운 시어머니가 할머니를 찾아와 하소연하거나,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장보러 갔다가 당한 일이나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의 소식을 알리거나, 집안의 대소사를 준비하면서 의논하는 등 사람들은 할머니를 찾아와 답답함을 풀거나 궁리를 찾았다. 그리고 먼 곳에서 방물장수나 생선장수나 약초장수 등이 장사를 나오면 꼭 우리 집에서 며칠씩 묵고 갔다. 하루의 장사를 끝내고 돌아온 저녁마다 할머니의 방에서는 이야기꽃이 만발했다. 그 이야기들의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장사꾼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 미지의 세계에 호기심을 가졌다. 얼른 커서 넓은 세계에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의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어디에 살고 계실까.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들을 맞이했던 할머니도 아버지도 이웃 사람들도 어느덧 이 세상에 안 계시지 않는가. 모두 옛날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유한한 삶이 새삼 안타깝고 그 시절이 참으로 그립다. 그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의 허풍과 신세 한탄과 웃음과 울음들.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했는지 모른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는 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계시어 나서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본래 그러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저 당신이 할 일을 묵묵히 하시는 것이었다. 들에서 일을 끝내고 늦은 저녁 집에 들어서면 큰아들이 대표 자격으로 신경질을 내어도 묵묵히 듣기만 할 뿐 별 말씀이 없으셨다. 어린 자식이 무례하게 대들었을 때 어머니의 속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참을성이 없고 예의가 없는 자식을 나무라기보다는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고 당신 스스로를 자책했을 것이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자식들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3.
이모님 댁에 왔다가 시골로 가시려는 어머니를 붙들었지만
상 한번 차리지 못했다
백년 만에 처음이라고 텔레비전이 떠들어대듯
눈이 너무 오기도 했지만
직장 일을 핑계로 늦게 들어오느라고
외식 한번 못했다
그렇지만 제대로 씻지 않는다고
공부를 안 한다고
아이들 야단치는 일은 빠트리지 않았다
씀씀이가 헤프다고
아내를 탓하는 버릇도 숨기지 않았다
뛰는 집값이며
노동자를 패는 경찰들을 욕하느라고
집안을 긴장시켰다
어머니가 얼른 내려가고 싶다고 할 때마다
동네 사람들이 아들 흉본다고
붙들어 놓고도 설쳐댔다
하루 종일 양계장의 닭처럼 갇혀 있던 어머니가
새우잠을 자는 밤
어디선가 청개구리 울음이 들렸다
― 졸시 「어머니를 울리다 」 전문
내가 어머니를 뵙는 일은 한 해에 몇 번 되지 않는다. 추석이나 설이나 할아버지 제삿날 같은 때나 고향집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뵙는다. 살아가기가 바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기에는 그저 부끄럽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죄송할 뿐이다. 오히려 어머니께서 아들을 보러 오시는 경우가 많다. 주로 집안의 결혼이나 장례식에 참석하러 오셨다가 집에 오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요즘은 뜸하다. 내가 결혼 전에는 큰아들의 밑반찬을 해주려고 자주 오시는 편이었는데, 내가 가정을 이루고 나서는 아무래도 덜 오신다. 또 어머니가 집에 오시는 것은 아무래도 손자들이 보고 싶어서일 텐데, 어느덧 손자들이 중고생이 될 정도로 커 걱정을 덜 하셔도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머니께서 집에 오실 때마다 잘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마음만 그러할 뿐이다. 아침 일찍 출근해 자정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직장 생활로 인해 어머니께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대접해드리지 못했다. 또한 아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안 한다고 야단을 치고, 아내에게 살림을 제대로 못한다고 잔소리를 하느라고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드리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집값이며 전세금이 뛰는 뉴스를 듣거나, 집회에 나선 노동자들을 범죄자 취급을 하며 짓밟는 경찰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큰소리를 쳤다. 비리에 연루된 정치인들의 뉴스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를 그저 불편하게 한 것이다.
어머니는 집에 오자마자 얼른 시골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애들을 봤으니 되었다고 하신다. 나는 그럴 때마다 마음 푹 놓고 쉬다가 가시라고 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집에 할 일이 많다며 내려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혹 내가 예의 없이 굴어 어머니가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까. 나는 어머니가 편해 마음 놓고 행동한 것인데 어머니는 다르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아마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앞으로는 어머니께 예를 갖춰 행동해야겠다고, 좀 더 잘해드려야겠다고 다짐한다. 어느덧 어머니도 많이 늙으셨다. 머리가 세고 얼굴의 주름이 늘고 허리가 굽은 어머니, 분명 노인이시다. 어느 날 틀니를 빼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나는 가슴이 찡하여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정말 어머니를 보살펴드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어머니의 늙으신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서글프다. 그리고 죄송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어머니께서 일찍 늙으신 데는 그만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나의 두 아이를 키우느라 힘드셨기 때문이다. 나와 아내는 맞벌이를 해야만 되어 부득이 어머니께 두 아이를 부탁했다. 어머니께서는 싫은 내색을 전혀 하지 않고 아이들을 맡아주셨다. 맡아주신 정도가 아니라 정말 두 아이를 건강하게 잘 키워주셨다. 둘째는 태어날 때부터 병원 신세를 질 정도로 몸이 약했는데 아주 건강하게 자라났다. 그 세월 동안 어머니는 늙으신 것이다. 아이들을 맡아주실 때만 해도 어머니는 머리가 세지 않았는데, 어느덧 백발이 되셨다. 틀니도 하셨다. 두 아이를 키우느라고 얼마나 신경을 쓰셨을까, 그저 감사하고 죄송하다.
아이들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 부득이 집으로 데리고 왔다. 시골에서 그냥 자라게 할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부모와 자식이 너무 떨어져 지내는 것이 좋지 않아 데리고 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품에서 떼어서 올 때 아이들이 싫다고 발버둥을 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어느새 아이들은 다 잊어버렸다. 요즘은 시골 할머니께 자주 전화를 드리라고 해도 아이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잘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어머니께서는 손자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해야 된다고 말씀하실 분이다. 어머니께서는 그저 자식들이 잘되기만을 바라는 분이다. 당신의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에게 손해가 되어도, 또 당신에게 어떠한 섭섭한 일이 있어도 자식을 위해 기꺼이 감수하는 분이다.
4.
지난 토요일에 형삼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보름 전엔 광락이 아버지 장사가 있었고……
아들의 밑반찬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에 오실 때마다 어머니는
별들의 부음을 전한다
부음을 들을 때마다 나는 부끄럽다
이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영어단어를 외우면서
별들을 위한다고 했지만
나는 막걸리 한 사발도 못 낸 것이다
별들은
서울에서 포장마차를 하거나 하수구를 치거나
울산이나 포항의 공장에서 볼트를 조이거나 운전을 하거나
부산 같은 데에서 신발이나 청바지를 박는
새끼들을 남겼다
커피숍이나 밤업소에 나가는 새끼들도
버리지 못했다
새끼들은 별의 별이 되려고
이 사막 같은 세상을 담쟁이같이 타고 오르다가
무좀에 걸리고
때로는 허리를 다치고
도로교통법을 어기고 연체 이자에 쫓기는 것이다
입 안이 헐고
눈물을 눈물로 흘리며 술을 마시고
종합병원 응급실에도 다녀오는 것이다
나도 별들이 남긴 한 새끼라고 생각한다
―졸시 「별 새끼」 전문
어머니는 집에 오실 때마다 고향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려주신다. 누구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누구네 아들이 결혼을 했고, 누구네 아들이 일하다가 다쳤고, 누구네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누구네 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았고, 또 누구네가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아들이 잘 안 되어 땅을 팔았고 등등을 알려주신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분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모두들 이러저러한 인연이 있는 분들이다. 어머니께서는 그러한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조의금이나 축의금을 내 이름으로 냈다고 알려주신다. 고향의 분들이 객지에 있는 나에게까지 길흉사를 잘 알리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인사를 드리기가 어려우니 어머니께서는 아들의 체면을 살려주시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식을 생각하는 깊은 마음에 그저 감동한다.
나는 어머니께서 전하는 고향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서글픈 마음을 갖는다. 소식의 대부분은 잘된 경우보다 잘되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이다. 내가 아는 분이 세상을 떴거나 다쳤거나 큰 수술을 받았거나 집안의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거나 등등인 것이다. 나는 고향의 분들이 어려운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모두 가난하기 때문이다. 또 배우지 못했고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보력도 인맥도 가지지 못해 돈을 벌기 힘들다. 병이 나도 제때에 치료를 받기 힘들다. 명예를 갖기는커녕 살아가는 것 차제가 힘든 것이다.
그들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식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식들 역시 가진 것이 없고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회의 하층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 힘든 노동을 하다가 몸을 다치고, 서러운 일을 당하고,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고향 사람들의 안된 얘기를 들을 때마다 자연스레 민중의 개념을 떠올린다. 착하고 인심이 좋고 열심히 일하는데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민중들. 배움과 사회적 경험이 부족해 선거를 하면 항상 여당을 찍는 순종적인 민중들. 세상을 주체적이고 바라보지 못하고 자포자기로 살아가는 민중들. 나의 어머니 역시 그러한 민중들 중의 한 분이다. 나도 그러한 민중들의 한 자식이다. 따라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고향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아니 민중들을 생각하며 일해야 한다. 그들에게 어떠한 도움을 되는지를 생각하며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사주신 양말 속으로
발을 쑥 밀어넣는다
양말 속의 발가락들이 서로 기대고 히히덕거리며
야단들이다 목욕탕에서 물장난을 치는 아이들처럼
서로의 별명을 부르며 좋아라 한다
꼼지락거리는 발가락들을 다독거리며
출근을 한다 발가락들이 기대하는 눈빛을 떠올리며
결혼 기념 시계를 차고 출근복을 입고
머리 빗고 구두를 신고
집을 나가 언덕을 오른다
전철역으로 가는 봄 언덕에서 바라보는
앞산은 연둣빛이다
산은 나무들로 이루어져
양말 속의 발가락들처럼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숨바꼭질을 하고
휘파람을 불며 새들을 꼬드기고
햇살 틈에서 나붓거린다
일터로 가는 나의 발걸음 또한
연둣빛이다
―「연둣빛 발걸음」 전문
나는 아침에 출근해서 자정이 되어야 퇴근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일이나 공휴일에도 그렇게 생활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일중독자라고 말한다. 나는 그와 같은 주위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해야만 되는 일을 할 뿐이다. 때로는 일이 힘들기도 하고 하기 싫은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들일을 끝내고 늦은 저녁에 집안에 들어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아무리 일을 한다고 해도 어머니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머니께서는 일의 숭고함을 가르쳐주셨다. 한평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일을 해야 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어머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착하면서도 강한 분이다. 나는 어머니의 그와 같은 모습을 따라 살아갈 것이다. 내 삶의 거울인 어머니, 감사합니다.
맹문재
1991년 『문학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물고기에게 배우다』『책이 무거운 이유』『사과를 내밀다』『기룬 어린 양들』 있다. 전태일문학상, 윤상원문학상, 고산문학상 등을 받았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로 있다.
첫댓글 마음 따뜻해오는 글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훌륭한 교수님을 뵙게 됨은 제 인생에 최고의 행운인거 같습니다.
단양팔경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으로 학술답사
학생들에게 유익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겠네요.
교수님의 건강 행운을 기원합니다.
늦은 들일을 끝내고 고달픈 황토 밭길을 혼자 걸어 오시던 외할머니,
어둔 부엌에서 금방 만들어 밥상에 올려 주시던 가지무침과 호박쌈, 검은 된장 맛이 그립습니다.
불러보기도 전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친정 어머니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