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기 서구인들에게 비친 서울상
Images of Seoul reflected to Foreigners in the late Cho-Sun dynasty 최승규 (Choi, Seung-Kew) 연세대 국제학부 미술사 초빙교수 2-073-9503-04 pp.99-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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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서론
19세기말 정식국교가 성립되고 서울에 온 서구인들은 나라의 주권이 박탈당하는 숨막히게 급변하는 동서분쟁의 현장에서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조선의 현실을 관찰했다. 많은 서구인들은 직접 정치적 혼란기에 왕실의 고문이나 관리, 외국 사신과 선교사로서 조선의 정치·사회문제에 직접 참여했고 자기들의 체험을 적지않은 기록으로 남겼다. 그들은 자국의 사업적인 이윤과 정치적 헤게모니 이외에도 조선의 편협한 배타성과 미신을 타파하고 기독교와 과학, 교육, 그리고 인간애를 도입해 조선의 개화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그들이 본 조선인과 서울의 인상은 외국 문헌에 투고되어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본 논문은 19세기말 개화기에 한국에 온 서구인들이 받은 서울의 인상과 풍물, 조선인에게서 받은 사회, 정치, 문화에 대한 체험과 인상을 조명하려는 의도로 썼다. 이 논문은 역사적인 차원보다는 문화적 측면에서 백년전(1882∼1905년간)의 서울상을 서구인의 저서를 통해 알아 보는데 의의가 있다.
Ⅱ. 본론
1.서울의 옛 풍속
1) 조선의 개방과 서울의 첫 인상
서울은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오랫동안 서구인에게는 닫힌 도시였다. 심지어 외국인들이 조선에 호기심을 가질까 염려해서 해안 지방은 일부러 나무를 베고 풀까지 깎아서 삭막하고 황무지같은 인상을 주어 외국인이 조선국에 상륙하는 것을 막았다 1) 그러나 1876년(고종 13) 한일조약 이후 서구와의 외교관계가 수립된 후 많은 서구인들은 제물포, 지금의 인천에서 가마나 말 혹은 배를 타고 서울에 왔다.
서양인들이 처음 본 서울은 높은 산에 둘러싸인 이상적인 곳에 위치한 도시였다. 불교사원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동양에서는 특수한 도시였다. 1880년대에 서울은 가난에 허덕였으나 거지도 폭력도 없어 서구인에게는 평화롭고 마음놓고 다닐수 있는 수도였다. 양반과 서민으로 사회적 신분이 확연히 분리된 조선사회는 지적인 중산층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서울에는 전 인구의 10분의 1밖에 안되는 소수의 양반 지배계급이 특전과 특권을 누리며 세금도 안내고 일반 서민을 착취하며 사는 것이 서구인의 눈에 띄었다. 2)
서울의 양반들은 서민이나 종들이 메는 가마를 타고 다녔다. 양반집 부인네들은 바깥 세계와 격리된 채 안채에서 살았다. 때로는 문을 닫은 가마를 타고 낮에 외출했다. 서민의 여인들은 생계를 위해 개울가나 계곡에서 낮에 흰옷 빨래를 빨거나 고된 일을 했다. 3) 남자들은 긴 흰옷을 입고 상투를 튼 머리에 갓을 쓰고 다녔다. 남산에 올라가 서울 거리를 보면 길에는 여기저기 눈이 녹은 것 같이 흰옷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한가하게 산책하는 것이 보였다. 열심히 농업에 종사하는 시골 사람들과는 달이 서울 사람들은 게으르다는 인상을 서구인들은 받았다. 도리어 서구인들의 시선을 끈 계층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서민 노동자(cooly)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고 사는 것이 서구인들에게는 신기하게 보였다.
“코리아의 대다수 사람들은 굶어 죽는 위험이 없는 한 지나치게 부지런해야 할 동기가 없다. 지금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옛날 정상적인 생활조건하에서는 양반 관리들, 부유한 지주들, 한마디로 말해서 착취계급은 서민들의 수입과 저축을 등쳐 먹고 삶을 지탱하기 위한 것 이상으로 일하는 것은 쓸모없고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소위 ‘문화인’ 이란 것이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4)
게일 선교사도 무일푼의 한국의 유한한 양반이 어떻게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한국 양반의 가난 또한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였다. 오늘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한가한 사람이 내일까지 어떻게 살아 남는가를 나는 몇해 째 생각해 보고 있다. 그러나 양반은 여전히 살면서, 옷도 그전같이 잘 입고 식사도 한끼도 거르지 않는다...몇달이 지나도 그는 여전히 똑깥은 상태에 있다.” 5)
2) 서울의 밤 거리
서울에 와서 받는 서구인들의 감명깊은 인상은 남산과 북한산쪽으로 올려쌓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여덟 성문이었다. 해가 지면 남산 봉화대에 불이 켜졌다. 동서남북 모든 나라안이 평안하다는 보고를 임금에게 올리면 궁전 악대의 음악이 울리고 성문은 닫혔다. 웅장한 종루의 종소리는 서구인들에게는 신기한 서울 장안의 명물이었다.
“대단히 감미롭고 장엄하게 낮게 울려퍼지는 종소리가 들리면 거창한 대문들이 움직여 닫힌다. 똑같은 종소리가 다음날 첫 새벽에 울릴 때까지는 사대문은 다시 열리지 않는다” 6)
성문이 닫히면 성안에 못 들어가기 때문에 제물포에서 말이나 가마를 타고 오면서 서구인들은 시간 안에 못 들어가 성문에 밧줄을 걸치고 법을 어기며 넘어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1897년(광무 1)에 서울에 다시 온 비숍부인은 성문이 닫힌 후 서울에 왔으나 미리 약속이 되어 장사 열사람이 열어야 했다고 썼다.
성문이 닫히고 해가 지면 거리는 여자들만 다니도록 되어 있었다. 남자들은 관료와 그들의 일행, 외국인들의 하인들과 눈먼 사람들만 빼놓고 거리 통행이 통제되었다. 밤거리는 여인들이 흰 옷을 입고 초롱불을 들고 이웃에 가는 조용한 풍경이었다.
불이 켜진 램프나, 불켜진 창문도 없이 거의 인적이 없는 거리에는 빈 벽과 울타리만 서 있었다. 유일한 불빛은 몇 행인들의 초롱불이었다.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깊숙이 얼굴을 가리고 초 심지에서 희미한 불빛을 비쳐주는 작은 종이 초롱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통행금지의 종소리가 울리고 새벽에 문을 열기까지 성문을 닫으면 고관의 추종자들을 제외한 모든 일반 남자들은 배제되고 거리는 여자들에게 넘겨진다. 여자들은 이 도시의 자유를 만끽하고 즐기며, 이때 친지를 방문하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약간의 운동을 한다. 7)
이렇게 고요한 밤, 1884년(고종 21) 12월 4일, 알렌 의사는 자기집, 지금의 미국 대사관저에서 멀지 않은 우정국 파티에 갔다가 난자당한 민영익 대신을 치료해 소생시켰다. 그가 민영익을 살린 후, 사람들은 멈춰 버린 손시계와 벽시계까지 고쳐달라고 찾아왔다. 사례로 민씨 집에서는 한국 도자기를 보냈다. 무가치한 줄로 알고 서운했던 선물이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의 자랑인 고려자기였다. 아마 이때부터 그가 모은 한국의 고려, 이조 자기는 지금 위싱턴시 스미소니안 박물관에 있다. 8)
3) 흰옷 입은 상투쟁이 조선인
서양의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흰옷 입은 조선 사람들의 상투와 갓이었다.
서울의 거리에서 흰옷 입은 상투쟁이를 보고 서구인들은 신기하게 생각했다. 조선사람들이 입는 흰 무명옷은 가장 거추장스럽고 한반도같은 극단의 기후에서는 쓸모없는 옷으로 보였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는 조상과 관계가 있는 의복으로서 가장 품위 있고 잘 어울리는 의복이라고 생각한 선교사도 있었다. 9) 부모나 왕과 왕후가 죽으면 삼년씩 흰옷 입는 습관을 아예 영수화시켰다고 알레 선교사는 흰옷의 근원을 설명했다. 10)
흰옷을 입은 조선사람의 상투는 틀어 맨 단순한 머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 남성의 대명사였다. 갑신정변 이후는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개혁파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원인의 하나는 상투문제였다. 익명의 어느 서양인은“조선 상투”에 대한 논문을 월간 영문 잡지(Korean Repository)에 기고해 조선인과 상투의 상징적 관계를 설명했다. 11)
“상투는 국민성과 오랜 관습, 조상숭배와 애국심등과 연결된 주요한 상징이었다. 조선인의 상투는 일본인과 중국인의 것과 형식과 상징성에서 다르게 보였다. 조선사람의 상투는 일본사람의‘와스’라는 머리형이나 청나라의 긴머리와도 달랐다...일본사람들은 불편한‘와스’를 별 탈없이 버리고 개혁을 했다. 서양사람들이 돼지꼬리(pigtail)라고 부르던 중국의 긴 딴머리는 한300년 전에 청나라 사람들이 중국인에게 강요한 머리 스타일이었다. 명나라때에는 상투를 했기에 긴머리는 중국인들에게는 굴종과 정부에 대한 충성쯤으로 받아들여졌다.”
중국의 긴 댕기는 조선의 상투가 갖는 성년과 결혼, 종교적인 의미가 없었다. 중국인은 머리가 길면 머리를 땄다. 황제의 명령이라면 중국사람들은 순순히 저항하지 않고 머리를 깎았겠지만 조선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상투를 머리 꼭대기 한 가운데 자랑스럽게 꼿꼿이 세우고 다녔다. 물론 많은 짧은 머리들이 아래로 처진다. 이를 막기 위해서 망건이나 망사를 사용했다. 망사를 머리둘레에 쓰고 리본을 머리 뒤로 매어 끈으로 망사를 꽉 고정시켰다. 서양인들은 이 끈을 단단히 매기 때문에 망사는 혈액 순환을 멈추게 하여 골치를 아프게 하고 생각을 막는 최상의 장치같다고 생각하였다.
조선사람들은 그들의 갓을 통해서 위신을 세운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갓은 실용성이 전혀 없는 모자였다.
“실용적인 면에서 이 갓은 아마도 머리에 쓰는 가장 빈약한 모자 같았다. 하도 필름같이 얇아서 여름 햇볕에 별로 보호도 안되고 겨울 추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젖으면 못쓰게 되어 부서지거나 쭈그러진다. 모자는 아주 가볍고 머리에 잘 맞기에는 너무 작기 때문에 끈을 매지 않으면 물론 벗어진다. 상관 앞에서도 갓은 벗지 않는다. 갓을 머리에 쓰는 것은 존경의 표시다. 관리들은 틀림없이 왕 앞에서 갓을 쓴다. 왕이나 어느 조선사람도 방에 들어갈 때는 신을 벗는데 모자는 쓰고 있다.” 12)
아마도 모자는 벗고 신은 신고 방에 들어가는 미국사람에게는, 정반대로 신은 벗고 의관은 방에 들어가서도 쓰고 있는 조선사람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요즈음 베레모를 쓰고 강연장이나 음식점에서도 벗지 않은 한국의 노신사들을 보면 이런 구식 관습이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생각해본다.
1886년(고종 23) 12월30일(음력 15일)의 단발령은 나라안에 불을 지른 것 같았다. 증오하는 외세의 등장과 명성황후의 살해와 왕의 실질적인 연금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던 조선사람들에게 단발령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고 비숍 부인도 당시의 상황을 전해준다. 13)
조선인들이 상투폐지에 반발한 이유는 단순히 머리깍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현실적인 문제와 함께 정치, 사회, 종교적인 의미도 있었다. 여러 가지 다른 이유 중에는 삭발하고 집집마다 다니며 구걸하는 승려의 연상이 나쁘게 작용하지 않았는가 생각했다. 또 머리를 삭발하면 최근까지도 성문 출입이 금지되었던 중과 같이 신분이 저하된다고 조선사람은 생각했었다. 또 다른 이유는 머리 깎는 일은 임진왜란과 최근의 명성황후 살해사건으로 증오의 대상인 일본사람 같이 보이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싫어했다. 14)
상투에 대한 공격은 한국민에 대한 마지막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이것은 낙타의 등을 깬 마지막 밀집이었다. 혹은 사건의 상대적인 힘과 무게를 고려한다면 이것은 민초의 등을 깬 마지막 낙타였다. 15)
비숍 부인은 상투가 떨어져 나갔을 때 조선 사회의 기반이 위협당했다고까지 생각했다. 1896년(고종 32) 2월 11일 고종이 경복궁으로부터 러시아공사관으로 탈출했던 그날 첫 칙령에서 왕은 배신자들에 의해 강요당했던 단발령을 취소했다. 단발령 후에 왕을 만난 비숍부인은 고종이 상투를 다시 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6)
상투는 조선인의 일본 억압에서의 해방과 사회적 신분과 개인의 인격, 더 나아가서 생명을 의미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에 와서 머리를 깎인 시골 사람이나, 상인, 관리, 기독교인들은 생명의 위협때문에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머리를 깎인 한 현감은 시골서 겨나 서울로 왔다. 시골서 들어오던 장작과 식료품의 물가도 머리를 끽이기 싫어 올아오지 않는 상인들 때문에 올랐다. 17)
언더우드 부인은 미국남자들이 조선사람 마냥 상투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는 농담으로 한국에서 본 풍습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집안에서 상투를 쥐고 흔들 수 있다면 누가 밖에 나가서 권세를 내휘두르기를 신경 쓰겠는가? 잘 틀은 상투를 잡고 단단히 화가 난 한 아내가 술집에서 자기 남편을 집으로 끌고 가는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 상투를 단단히 쥐고 남편과 상전에게 체형을 가하는 화가 난 여성을 한번만 본게 아니다. 조선의 아내들은 남편이 식사하는 동안 시중들고 담배필 때 일한다. 그러나 가정사가 위기에 부닥치면 그녀는 돛을(상투를) 손에 잡고 배를 저어간다.” 18)
4) 돌던지기 편 싸움
서울에는‘돌싸움’이란 서양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는 풍습이 있었다. 돌이나 벽돌짝을 외국인에게 던지는 습관은 중국에서도 보았지만 두 마을 전체가 이른 봄에 얼어붙은 들에서 돌을 던지며 편 싸움을 하는 모습은 재미있지만 야수같은 면이 없지 않았다. 돌던지기는 장엄했다. 정말 거인들의 작은 전쟁을 방불케했다. 장안에서 돌을 잘 던지는 최상의 석총사들이 수백명씩 편을 갈라 돌을 던지는 편 싸움은 알렌 의사는 후년까지 잘 기억했다.
“새끼줄을 머리에 헬멧처럼 돌려매고 몽둥이를 든 선발대가 중간선에 먼저 진격한다. 그러면 수비하는 후방 세력들이 언덕을 내려와 반대편 세력들에게 돌을 날린다. 주된 싸움은 이 나라사람들이 던지기에 능숙한 돌 싸움으로 전개된다. 한 편이 다른 편을 제압하며 외치는 소란한 전투가 시작된다. 이웃 언덕을 덮고 있던 수 천명의 구경꾼들은 쫓아오면서 던지는 비오는 듯한 돌 미사일로 부터 도망친다.” 19)
언더우드 부인은 지나가다가 이 돌 싸움에 쫓겨 한 한옥으로 피했지만 자기쪽으로 상당히 큰 돌이 떨어져 좋은 가운을 입은 채 다른 남자선교와 함께 남의 담을 넘어 피신했던 경험을 가끔 회상하고 웃었지만, 당시에는 확실히 무서웠고 비극적이었다고 덧붙였다. 20)
이런 돌 싸움에는 던지는 1, 2파운드나 되는 돌의 크기 때문에 다치는 부상자는 물론 희생자도 생겼다.
“먼지를 덮어쓰고 땀을 흘리며 가까이 가서 공중에 돌을 던지는 싸움은 소름끼쳤다. 그러다가 휴전이 된다. 목표물이 맞은 듯 함성이 들리고 적의 최상의 포수 한사람이 머리 정면을 얻어맞고 죽어갔다. 그의 시체가 들 것에 들려나가고 싸움이 다시 시작된다. 석양이 되기 전에 반대편에서도 한 사람이 죽어 넘어지고 점수가 동점이 되면 끝난다.” 21)
알렌 의사는 실전만 구경한 것이 아니라 그의 병원에 실려온 돌 싸움의 피해자인 한 남자를 치료한 경험이 있었다.“얼굴뼈들이 부서지고 그 밑에 뇌가 다드러나 보였다. 이런 게임을 지켜본 군인들은 이 스포츠를 극렬하게 하는 사람은 좋은 군인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22)
사실 서울사람은 정확한 목표를 맞추는 사격수로 갑신정변때 후퇴하는 일본인에게도 일종의 무기로 돌세례를 주었다. 그들은 백년후의 민주주의를 위해 화염병을 던졌던 대학생들의 선구자들이었을까?
5) 옛 서울의 악취
서울에 온 서구인들은 좋은 인상만을 기록한 것은 물론 아니다. 좋은 일만 쓰고 듣기 싫은 말은 안하는 선교사나 외교관도 있었지만 서구인들을 괴롭혔던 일도 써서 남겼다. 특히 1890년대초 서울은 냄새가 심한 도시였다. 이것은 비단 김치 냄새가 아니라 시체썩는 냄새였다
“대체로 서울은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소름 끼치게 하는 것도 많다. 하지만 사람들은 친절하다. 내가 잔인한 족속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동양의 나라들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각 나라마다 이방인에게 몸서리 쳐질 정도로 못된 습관이 있다. 바로 시체를 버려두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부활해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슬픔으로 시체를 친절히 보이지 않게 파 묻는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렇지 않다. 시체를 거적에 싸서 여름 햇볕에 마르라고 괴롭게 놓아둔다. 이래서 대기는 탁해지고 우리는 동아시아의 보통 냄새와 콜레라에 의한 희생자들의 지독한 악취를 식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고 만다.” 23)
게일 선교사는 동대문 밖에서 백여개의 거적에 싸인 시체를 발견했다. 왜 땅에 묻지 않느냐고 물었다. 좋은 자리가 생겨야 묻는다는 조선인의 대답이었다. 또 말을 타고 가다 목이 잘린 세 구의 시체도 보았다. 이 소름끼치는 주검을 보고 불쾌한 조선을 떠나고 싶었지만 세월이 기적을 행한다는걸 터득했다. 서울사람들도 시체를 싫어하지만 유교나 풍수지리적 관습이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선교사적인 해석으로 생명의 빛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24)
게일 선교사의 관찰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1894년(고종 31) 서울에 온 영국 비숍 부인의 여행기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녀는 북경을 보기 전까지 서울은 지구상에서 가장 악취가 나는 도시라고 했다. 문제는 죄인의 목을 벤 후 성문밖에 내버리는 악습때문이었다. 그녀는 서소문밖 시장터 가까이에서 캠프장의 주전자 마냥 세 막대기 위아래에 하나씩 걸린 동학군의 머리들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땅에 버려진 머리들도 있었다. 25)
서소문 밖은 아마 당시의 처형장이었던 것 같다. 이 서소문이나 서대문밖에서 많은 카톨릭 신자들도 처형당했다. 지금의 광희문이 시구문(屍口門)으로 알려진 것같이 이 서소문 지대도 죄수의 처형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목자르는 악습은 법으로 금지된 1894년까지 지속되었다. 김홍집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후 시민들에게 타살되어 거리에 끌려 다니다가 길에 내버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26) 서울은 비숍 주인이 떠나던 1897년(광무 1)쯤 많이 깨끗해지고 냄새도 제거 되었다. 27)
6) 조선사람들의 구경거리“서구인들”
19세기 한국에 살던 서구인들이 겪었던 또 하나의 괴로움은 그들이 조선인들의 구경거리 대상이란 불쾌한 사실이었다. 이런 체험은 비단 19세기말에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1653년 (효종 4) 제주도에서 파선해서 피납되어 서울에 온 금발과 푸른 눈의 홀란드 선원들은 장안의 구경거리였다. 특히 고관들의 부녀자와 애들한테는 그들은 구경거리로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부인과 애들은 우리를 보고 싶어 야단이었다. 왜냐하면 제주도의 천한 것들이 우리를 괴물같고 물을 마실때는 코를 귀 뒤로 구부려야 한다는 헛소문을 퍼트렸기 때문이다. 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 때문에 서울 양반집 사람들은 우리가 그 나라 사람들 보다 잘 생겼다는걸 보고는 놀랐다. 무엇보다도 그들 모두가 우리의 얼굴이 희다는걸 감탄하고 보러 떼지어와 거리에서는 군중들한테서 빠져 나오기가 힘들었다. 우리를 집에 가만히 놓아두지를 않았다. 마침내 한 장군이 누구든지 그의 허락없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을 금해서 이런짓을 막았다. 더욱이 대감들의 종들이 대담히 와서 우리를 방에서 데리고 나가 말을 시켜보고 우리와 놀아났다.” 28)
19세기 말 서구인들 특히 여자들이 얼마나 조선사람의 구경거리가 된 것을 난감하게 느꼈는가를 언더우드와 비숍 부인의 증언을 통해서 알수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이야기는 시골을 여행하면서 겪은 일로 서울에서도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수 많은 서구인들이 겪었을 이야기 같다.
갓 결혼을 한 한 신혼부부가 기독교를 전하고 의료봉사를 하면서 그들만의 시간이 필요했을때의 괴로웠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들의 첫 여행(신혼)중 여관에서 겪은 가장 귀찮았던 일은‘구경꾼’들이었다. 종이로 바른 문들은 남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문구멍들로 신속히 뚫리기 좋게 되어 있다.‘외국인’, 더구나‘외국여자’란 말이 들불 마냥 사방에 퍼져 갔다. 미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 온 사자나 코끼리도 이와같은 흥분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한 여관에 우리가 들어가는 순간 그 집은 즉각 둘러싸여 포위된다. 모든 문에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약간 눌러 구멍을 낸다. 우리 둘만 홀로 있다고 상상할 때 굶주린 눈들로 메운 구멍들을 보고 실망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나는 야생동물이나 사람을 구경간일이 없다. 나는 돈 안들이고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쾌락이 이들에게는 없다는 것을 동정한다.” 29)
서양 여자를 본 일이 없는 한강변의 어느 시골 여관에서 당한 비숍 부인의 경험은 언더우드 부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저주였다.
“내 여관 방에는 세 개의 종이 문이 있었다. 벽이 없는 공간에는 이내 남자와 여자와 애들로 메워졌다. 문의 모든 종이는 찢겨지고, 그 자리에는 더러운 몽고계 얼굴들을 가진 무리가 차지했다. 나는 캠부릭 커튼을 쳤다. 그러나 긴 막대기로 내 커튼을 방 한가운데로 쑤셔 넣었다. 무리들은 문을 부수고 들어와 내 짐이 놓이지 않은 곳을 채워버렸다. 여자들과 애들은 무더기로 내 침대에 앉아 내 옷을 조사하기도 하고 내 머리핀을 빼내기도 하고 내 머리를 잡아 당기고 내 슬리퍼를 벗기고 내 옷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고 내 팔을 그들의 살과 피와 똑같은지 보기 위해 내 양 팔을 꼬집었다. 그들은 내가 지니고 있는 몇 가지 소지품들과 모자를 써 보고 장갑을 껴 보고 살폈다. 왕서방이 그들을 세 번이나 쫓아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비교적 잘 생기고 머리 한가운데를 따고 긴 댕기를 한 시집 안간 처녀들이 떼지어 왔다.” 30)
이 기록들은 과장같지는 않다. 신랑 신부의 첫날밤, 손에 침을 발라 문에 구멍내던 우리 시골 아낙네들의 호기심의 연장선에서 본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은 대문에 철문을 달고도 안심이 안되어 자물쇠를 담그는 세상이 되어 자난날의 이 풍습도 사라져갔다.
2. 서울의 옛 궁궐
조선의 왕궁들은 단층 초가와 기와집의 갈색 바다같은 시가지 위에 화려하게 높이 솟아 서양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왕실에 초대되어 서양인들이 방문한 조선의 궁전들은 변화무쌍한 정치적 시련과 침략의 마수에 많은 왕궁이 파괴된 채 오늘날까지도 원상복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생명의 위협을 벗어나 안전한 곳을 찾아 전전한 백년전의 왕실의 모습이 서양인들의 눈을 통해 우리에게 여실히 전달되고 있다. 왕과 왕비는 왜 항상 거처를 바꾸어야 했는가?
1) 창덕궁
1873년 명성황후의 침전 근처에 불이 나서 경복궁의 자경전(慈慶殿) 순희당(純熙堂)과 자미당(紫薇堂)이 불에 탔다. 때문에 고종과 민비는 창덕궁으로 옮겨 인정전 뒤에 있는 선정전을 침전으로 쓰고 있었다. 선정전 동쪽에 희정당과 대조전이 있었다. 이 건물이 불타 버린 후 그 자리에 경복궁의 교태전과 강령전을 1919년 이쪽으로 옮겨다 지었다.
1884년(고종21) 갑신정변 때 왕은 선정전에서 급히 경운궁으로 피신한다. 다시 그 다음날 계동궁으로 옮겼다가 다시 창경궁으로 옮겼다. 청나라 군사가 선인문을 통해서 공격하며 입궐하자 왕은 피신해 연경당에서 최후로 개화내각과 작별했다. 민가를 본받아 지은 연경당은 왕비의 궁중 식사를 준비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이러한 불행한 경험 후에 왕실은 창덕궁에서 다시 경복궁으로 옮겨 살았다. 명성황후의 사랑을 받고 자주 궁전에 초청되었던 언더우드 부인은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진 창덕궁의 삭막함을 이렇게 묘사했다. 31)
“뛰어나게 아름다운 공원에 둘러 싸인 그림같은 이 궁전에 왕비는 다시 살지 않았다. 왕비께서는 살해당한 친구들의 통고하는 울부짖음 때문에 밤에 거기에서 잠을 잘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왜 내가 살해되었어, 왜 내가 살해되었어.” 하고 계속해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폐기된 방들 사이로 바람이 괴롭게 스쳐간다. 아름다운 대리석 계단 틈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아름다웠던 연꽃 못에서 녹색 이끼가 자란다. 매력있는 여름 정자들은 폐허가 되어가고 긴뱀과 도마뱀이 석좌(石座)위를 기어간다. 넓은 잔디밭에는 긴 풀들이 우거지고, 잘 가꾸어진 산속 굴에는 호랑이들과 표범들이 그들의 거처로 사용한다고들 말한다. 저 건너편의 아름다운 전망을 위해 출입구까지 다양하고 매력있게 장식된 산책로는 담쟁이 넝쿨과 잡초들이 거칠게 자라고 있다. 이 버려져 돌보지 않는 궁궐에서 우리는 피와 공포로 얼룩진 그날 밤의 일들을 떠올린다. 소름이 끼치도록 싸늘한 나뭇잎 소리에 ‘귀신이 나올 것 같다’는 말을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2)경복궁
갑신정변 후 불안하다고 생각해 옮긴 후 다시 옮겨 온 경복궁도 왕에게는 안전한 곳이 못 되었다. 1895년(고종 32) 경복궁 내에서 민비는 살해되고 고종은 연금되었다.
당시의 경복궁은 지금과는 달리 돌담에 궁전문들이 다 있었다. 경복궁에 들어가는 정문은 광화문이었다. 왕을 위한 문이었으나 가끔 미국이나 외국 사신을 환영하기 위해 열렸다. 광화문 앞에는 돌난간이 있었고 난간위에는 신화의 동물들 조각이 있었다. 광화문 앞길 양쪽에 있는 해태는 화재의 재앙을 막기 위해서 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용을 구해다 궁전 못에 살게 했는데 독살당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관악산에 사는 화신의 직통로에 있는 남대문과 궁전이 세 번이나 화재를 입자 해태를 광화문 앞에 세우고 남대문 앞에 물이 담긴 못을 팠다고 사양사람들은 들었다. 32)
광화문은 일제에 의해 건춘문 근처로 옮겨졌으나 6·25때 포탄에 상해 목조대신 콘크리트로 현위치에 재건했다. 광화문 옆에는 당시에는 군대의 병사가 있었다. 광화문 안에 들어서면 옛날 군인들을 훈련시키는 광장이 있었는데 일제는 여기에 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이 때문에 제2의 홍예문도 헐렸다. 홍예문 뒤에는 돌바닥에 동물무늬가 새겨진 영제교가 개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외국 사신은 제 3의문 근정문에서 가마를 내려 궁전으로 걸어가야 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조선 주둔군 사령관 원세개는 가마를 타고 궁 안에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외국사신은 불평등을 고종에게 항의했고 그 타협으로서 생긴 것이 비 안 맞고 진흙 속을 걷지 않도록 마련된 긴 목조 갤러리였다.
서양부인들은 정문보다는 옆의 건춘문이나 영추문에서 가마를 내려 걸어들어가곤 했다. 비오는 어느 날 자기가 타고온 가마를 궁 안에 가지고 오라는 명성황후의 명령에도 궁전관리는 곤란하다고 거절했다고 언더우드 부인은 회상했다. 33)
왕의 거처는 궁전 북쪽 끝, 지금의 민속박물관 자리에 있었던 건청궁이었다. 건청궁은 장안당, 신영각, 건영전, 옥호대의 여러 건물로 형성되었다. 건청궁에는 대신과 환관과 궁녀가 있는 접견실(장안당)과 내실(신영각)이 있었다. 접견실에는 작은 옆방이 딸려 있어 영국 전권대사의 딸 파크스양(Miss Parkes)과 푸트스 부인(Mrs Footes)는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저녘의 불꽃 놀이를 즐겼다고 회상했다. 안에 있는 건영전은 왕의 침전이고 왕비의 침전은 옥호대였다. 1895년 왕비는 이 침실에서 난입한 일본 자객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34)
3) 경운궁(덕수궁)
고종황제는 러시아 영사관에서 1년 동안(1896년 2월 11-1897년 2월 20일) 피신했다가 1897년(광무 1) 경희궁(덕수궁)으로 개조한 후 이사갔다. 고종이 이사한 경운궁은 1904년(광무 8)에 난 큰 화재로 많은 전각이 타버렸다. 35)
덕수궁의 대한문은 1904년 불에 타기 전의 대안문으로 정문이었다. 지금의 함영전 앞에는 광명문이 있었다. 비숍부인은 이 광명문에서 가마를 내려야 했다. 중화전에서 왕을 뵈었다. 흰 상복을 입은 왕과 왕세자의 박비, 엄비도 동참했다. 중화전 두에 있는 준명당이 왕의 편전인데 중화전과 함께 1904년에 불탔다가 1906년 (광무 10)에 다시 지었다. 준공 당시에는 중간에 큰 방을 그리고 양쪽 작은 방은 한지로 바른 미닫이문을 이용해서 분리된 왕과 세자의 침실이었다. 비숍 부인은 방에 깔린 흰자리(mat) 위에 연한 푸른색 요가 놓여 있어 침실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기록했다. 가구라고는 열폭 흰 스크린과 병풍 뿐이었다. 36)
이 중화전 건너편에는 단장된 갤러리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민비의 사당이 있었다. 이 사당에 상복을 입은 700여명의 군인들이 민비의 시신을 모셨다. 경운궁 왕의 침전 뒤에는 돌 테라스가 있었고, 그 집 뒤에 있는 즉조당에서 엄비가 1911년까지 살았다. 이 즉조당 동편에 석어당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왕세자가 이곳에서 살았다. 많은 경호원들에 불구하고 이 내실 궁전 뒤에는 왕의 침전에서 나갈 수 있는 두 개의 출입문이 있었다. 문 하나는 러시아 장교들의 숙소로 갈 수 있고 다른 한 문은 조선군인 교관들이 사는 병사가 있었다. 만일의 경우 왕은 전자를 통해서 영국 공관원에 일분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재가 난 후 왕은 석조전 도서관에서 한동안 기거하며 창덕궁에나 창경궁에 옮겨가기를 거절했다. 아마 그의 지난 비극의 체험을 통해서 경운궁의 탈출 가능성들이 제일 먼저 고려가 된 것 같다고 비숍부인은 부기하고 있다. 고종은 하야후에 그가 승하할 때까지 함영궁에서 살았다. 37)
이외에도 서구인들에게 뽕나무 궁전(Mulbery Palace)이라고 불리던 경희궁이 지금은 없어진 옛 서울고등학교자리에 있었다. Maetens가 1884년 누에를 명주를 생산해 한국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뽕나무를 심었으나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3.서구인들이 본 명성황후
1) 똑똑하고 지적이고 친절한 명성황후의 첫 인상
모든 점에서 훌륭한 여성이라고 서구인들은 그를 칭찬했다. 지성있고 교육받았고 성격이 강해 굽힐 줄 모르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대원군이 감당하기 어려운 적수라고 외교관들은 그녀를 칭찬했다. 특히 서양 여성들이 그녀의 매력과 친절에 끌렸다. 그들에게 비친 명성황후는 폭력과 음모에 겁이 많은 고종을 돕다 자기 생명마저 잃어야 했던 비운의 왕비로 보였다.
1884년 서울에 온 영국의 전권대사인 아버지 파크스 경(Sir. Harry Parkes)을 동행한 딸 파크스 양은 5월 7일 궁전에 초대되어 만난 민비의 첫 인상을 이렇게 서술했다. “왕비는 키는 아주 작지만 당당하고 처신할 줄도 알고 영리하고 명랑하며 적은 남자인 왕을 다스릴 줄 아는 용감한 여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38)
여왕은 진찰하기 위해 1885년 (고종 22) 알렌 의사과 함께 경복궁에 간 여의사 벙커(Annie Ellers Bunker)는 민비를 강한 의지와 성격의 여인이지만 친절하다고 표현했다. 벙커부인은 여자로서 민비의 옷차림과 머리모양도 잘 관찰했다. 39)
“그녀는 명주 치마를 아름답게 입고 까마귀같이 검은 머리단에 보석을 수없이 장식했다. 작은 체구에, 흰 살결과 검은 눈과 검은 머리를 한 여왕은 대단히 반갑게 나를 대했다. 그녀는 거창한 머리쪽 없이 자기 자신의 윤기나는 머리만을 잘 어울리게 틀어 올려서 목까지 낮게 닿도록 했다. 그녀는 앞이마 위에 그녀의 지위를 알리는 조선 문휘를 달고 있었다. 다른 고관부인들도 비슷한 장식들을 달고 있었으나 저질의 싼 것이었다. 왕비의 얼굴은 미소 지을 때면 특히 아름다움에 가득차 그분은 최상의 여자요 지성과 성격의 강한 힘을 가진 마음이 아주 친절한 여자라는 인상을 나는 받았다.”
1888년(고종 25) 벙커부인의 안내로 민비를 만난 여의사 언더우드 부인도 민비는 대화하면서 웃으면 얼굴에 생기가 도는 매력있는 얼굴의 성품이 강한 친절한 왕비라고 그녀의 첫 인상을 기록했다. 40)
“왕비는 물론 나의 가장 깊은 관심을 끌었다. 좀 창백하며 아주 가는 약간 날카로운 용모, 빛나는 눈을 가진 그녀의 처음에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얼굴에는 사람을 알아보는 지성과 힘이 있다는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대화할 때 발랄함과 소박함과 윗트, 그 모두가 왕비의 얼굴을 빛내고 단순한 신체적인 것보다도 훨씬 놀라운 매력을 발산했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운 한국의 왕비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명성황후의 지식이란 중국의 고전의식에 불과하지만 세계의 강대국들과 그들의 정부에 대해서 지적인 높은 안목을 소유하고 넓고 진보적인 정책을 가진 애국적이고 국가에 헌신하는 왕비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는 따뜻한 마음, 어린애들을 위한 부드러운 사랑과 섬세함을 지녔고, 어느 유럽 고관에게도 명예그러울 만큼 우리 선교사들에게 사려깊었다. 그분은 외국의 궁전을 본 일이 없는 한국인이지만 완전한 숙녀였다.” 41)
영국에서 온 비숍(Lady Bishop)이 여왕을 방문했을 때는 벌써 조선 왕실은 1894년 7월에 일본인들이 점령한 후여서 일본 군인들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었다. 일본과 청나라를 지지하는 개화파의 정치적 반목과 대원군과의 정권쟁탈에 생명의 위협까지 체험한 명성황후의 신경은 예민했고 시선은 차고 날카로웠다. 42)
“왕비께서는 사십을 갓 지났는데, 아주 좋은 얼굴의 가녀린 여인으로서 빛나는 까마귀색 검은 머리에 아주 흰 피부를 갖고 있다. 흰 얼굴은 진주 가루분으로 화장해 한층 더 희게 보이게 했다. 두 눈은 차고 날카로워 보편적인 인상은 명석한 지성이었다. 그녀는 아주 폭이 넓으며, 곱게 수놓아 접은 줄이 긴 허리단이 달린 마자린 청색 치마를 팔 밑에 입고 있었다. 그리고 폭이 넓은 긴 소매가 달리고, 수를 놓은 목부분을 산호색 장미꽃으로 여미었다. 그리고 허리는 크림손 색과 여러개의 줄로 매고 있었는데 허리춤의 줄에는 장미꽃 산호가 매달리고 끈마다 크림손색 수술이 달렸다. 그녀의 모자는 털이 갓에 달린 관이 없는 검정 명주인데 이마에 뾰죽 나왔다. 모자 앞에는 산호 장미와 폭 넓은 붉은 수술이 달리고 양쪽 옆에는 보석줄이 달려 있었다. 그녀의 신은 치마천과 같았다. 대화를 시작하면서 특별히 관심이 가면 아름다운 표정으로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비숍부인은 구 후 민비를 세 번이나 더 만났는데 매번 나약한 고종과는 달리 우아한 모습과 사려깊은 친절함과 유별난 지성과 힘 그리고 특출한 대화능력을 잊을 수 없었다. 43)
“매번 왕후의 우아함과 매력적인 매너와 사려깊은 친절과 그녀의 독특한 지성과 힘, 통역을 이용했지만 뛰어난 회화술에 나는 감동되었다. 나는 그녀의 유일한 정치적 영향 혹은 왕과 많은 사람을 끄는 힘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 중의 으뜸은 왕의 부친인 대원군이다.”
2) 명성황후 살해의 전말과 서구인들의 증언
이렇게 똑똑하고 잘난 명성황후를 그녀의 정적들은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1895년 10월 8일 일본 세력은 궁중에 침입하여 민비를 살해하고 말았다. 왕비를 실제로 만났던 많은 서구인들에게는 명성황후의 살해는 몸서리쳐지는 끔직한 비극의 사건이었다. 그들은 천인공노할 사건을 대서특필해 기록으로 후세에 남겼다. 반면 일본사람들이 쓴 명성황후 살해 기록들은 믿을 수 없이 은폐적이다. 한국 관계기록도 또한 1896년(광무 10)에 법부협변(法部協辨) 권재형(權在衡)이 쓴「개국오백사년 팔월 사변보고서」가 고작이다. 44) 서구인들이 쓴 자세한 명성황후 살해의 전말과 살해 장소 시체 소각에 대한 기록은 산발적으로 소개되었지만 서구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분노했는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가. 명성황후가 탈출 못한 이유
일본의 가장 뛰어난 전권대사인 이노우에의 말을 명성황후는 신뢰했고 사건이 발생하던 날 밤에 필요한 경계를 하지 않은 채 첫 위엄 신호때 명성황후가 탈출하지 못한데서 비극의 원인을 비숍부인은 찾았다. 이노우에가 서울을 떠나기 전 생명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왕실을 보호하겠다고 서약했기 때문에 명성황후는 그를 신뢰했다는 의견이다. 이노우에는 일본정부에 대해 안전에 의구심을 갖고 있는 왕비에게 일본이 보호하겠다고 안심을 시켰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설명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의심을 가라앉힌 후 나는 조선의 독립을 확고한 기반 위에 세우는 한편 조선의 왕실을 경호하는 것이 진실되고 진지한 일본 천왕과 정부의 욕구라고 나는 더 설명했다. 만일 왕실의 어느 성원이나 어느 조선인이 왕가에 대해 어떤 모반을 기도한다면 일본 정부는 무력으로라도 왕가를 보호하고 왕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시켰다. 나는 이런 언급이 왕과 왕비를 감동시키는 것 같이 보였고 그들의 미래에 대한 우려에 많이 안심하는 것 같이 보였다.” 45)
그러나 이러한 이노우에의 약속이 깨지고 나서 외교적 경험이 없는, 다음의 전권대사 미우라가 부임한 후 조선 정국의 상황이 급변해 미우라가 개입했다고 비숍 부인은 믿는다. 46)
일본인과 대원군이 명성황후 살해를 공무했다는 것은 역사에 잘 기록된 사실이지만 그날 밤 궁정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었던 미국인 다이 장군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그가 훈련시킨 궁정수비대와 좋은 무기는 모두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고 오합지졸과 낡은 무기로 속수무책 러시아인 사바틴과 함께 현장의 목격자가 되었다.
나. 명성황후 살해의 진상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비숍부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47)
“일본군대의 후원아래 조선인과 조선 경찰로 변복한 일본인 살인집단은 대원군을 가마에 태우고 10월 8일 새벽 3시에 용산을 출발해 궁궐로 향했다. 모든 것을 책임맡은 일본인 오가모도는 궁정에 들어가기 전에 “여우는 임의로 처분해” 하며 명성황후 살해를 부하들에게 암시했다.
일본인들이 궁전에 들어왔을 때 불행한 왕은 그들의 시선을 딴데로 끌어 왕비가 도피할 시간을 주기를 희망하면서 그가 확실하게 보이는 앞방에 나왔다. 일본인 살인자들은 그들의 칼을 휘두르고 전하를 잡아 당기며 그 앞에서 궁녀들을 때리고 머리채를 잡아 끌어갔다. 안방에 있던 대를 계승할 왕세자도 잡히고 그의 모자가 벗겨지고 찢어졌다. 그의 머리를 잡아 당기며 검들로 왕비가 있는 곳을 대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그는 왕이 계시는 곳으로 도망쳐 왔다. 그후에 그들은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짓은 채 한시간도 안 걸렸다. 왕자는 그의 어머니가 칼을 빼든 한 일본인에게 쫓겨 대청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고 있는 방들에 살인자들이 떼로 몰려오고 있었다. 윗층에는 여러 궁녀와 함께 왕자가 있었다. 왕비의 머리채가 검으로 잘리고 구타당하고 아래층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보았다. 궁정대신 이경직이 경호해 왕비는 옷을 입고 도망쳐 숨을 준비를 했다. 살인범들이 뛰쳐 왔을때 그는 그녀를 보호하려고 왕비 앞에서 두 손을 벌리고 그녀를 가로 막았다. 살인자들은 그들이 원하던 단서를 제공받았다. 그들은 그의 두 손을 잘랐다. 그는 손이 잘리고 다른 부상도 입었으나 베란다를 따라 기어가서 왕의 면전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다.
자객들을 피해 달아나던 여왕은 잡혀 칼에 찔려 죽은 것 같이 넘어졌다. 그러나 한 관찰자는 말하기를 그녀는 조금 정신이 들어있었고 그녀의 귀한 왕자가 안전하냐고 물었으나, 한 일본인이 그녀의 가슴 위에 뛰어올라 자기 검으로 그녀를 깊이 찌르고 또 찔러댔다. 이전부터 왕후를 섬기던 시녀가 왕후의 얼굴을 덮었지만 왕후가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이 들것에 그녀를 놓고 비단 이불로 덮고 옆에 있는 나뭇단으로 둘러싸인 사슴공원(녹원)의 소나무 숲에 들고 가 그녀 몸에 석유(케로신)를 퍼붓고 불태웠다.
이렇게 해서 한 우방국가 사신의 피비린내나는 수작에 편승하여 외국 자객들의 손에 의해서 마흔 네 살에 이 현명하고, 야심차고, 꾀가 많고, 매력적이고, 여러 면에서 사랑스런 코리아의 왕후가 죽어갔다.”
다. 언더우드 부인의 기록
10월 8일 아침에 궁정에서 명성황후는 총성을 듣고 놀랐지만 이 용감한 왕비는 그대로 궁전에 남기로 결심했다. 왕의 둘째 아들인 의화군도 소문을 통해서 피신하기를 바랐지만 섭정하는 노왕비(조대비)가 너무 늙으셔서 혼자 피신하는걸 거절하셨다. 이노우에의 약속도 있었고 그녀가 믿었던 신하 정병하 가 왕과 왕비에게는 아무일도 없으니 숨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48)
“왕비가 벼슬을 주고 많은 은전을 베풀고 크게 신뢰했던 이 남자는 천한 태생의 속물이었다. 그는 왕비한테 숨지 말라고 하고는 그녀의 모든 동정을 고자질했다. 제 호주머니보다 넓고 높은 명예의 원칙을 모르는 이 자는 벌써 살인자들의 끄나풀이 되어 있었다. 이 자가 음모의 한 도당이란 많은 증거가 있다. 대원군과 자객들의 왕비를 찾으며 달려왔을 때 그녀의 기도는 "슬프게도 숨기에는 너무 늦었다”
언더우드 부인도 미국 다이장군과 러시아 싸바틴이 실제로 일어난 것을 본 진술을 바탕으로 썼다.
“왕이 있는 궁정을 일본장교들이 지휘하는 일본국들이 둘러 싸고 직업적인 목베는 놈들 ‘쇼시’들이 저지르는 만행을 다이 장군과 싸바틴은 직접 지켜 보고 있었다. 약 삼십명되는(멕켄지는 26명이라고 숫자를 댔다.) 이들 살인자들이 왕의 거실에 들어와 “왕비, 왕비, 왕비가 어디있어?” 라고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라. 휘발류(케로신)를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살인자들
선교사 메켄지에 의하면,
“궁녀들이 머리를 잡혀 끌려가거나 얻어맞으면서까지도 모른다고 했다. 오가모도가 한쪽 구석에 숨어 있는 작은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의 머리를 잡고 왕비냐고 물었다. 아니라하고 빠져나와 휙 돌아서 현관쪽으로 달려가면서 소리쳤다. 그녀의 아들은 그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것을 들었으나 그녀가 더 부르기 전에 그 일본인이 그녀를 잡아채 검으로 쳐서 떨어뜨렸다.
이내 그들은 불쌍한 왕비를 쫓아가서 그들의 검으로 그녀를 살해했다. 그런 후 그녀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는 여러 궁녀를 데리고 시체를 보였다. 여인들은 시체를 보자 공포에 질려 “왕비. 왕비”하고 소리 질렀다. 이런 속임수로 살인자들은 제대로 왕비를 죽였다는 것을 확신했다.” 49)
휘발유를 붓고 왕비를 불태워 죽여 뼈 몇 개만 남았다고 언더우드 부인도 기록했지만 멕켄지 선교사는 일본 사람들이 휘발류(keroshine)를 미리 준비해 가지고 와서 불태웠던 전말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아마 아직 죽지 않은 왕비를 침대보(bedwrap)로 싸가지고 사슴공원의 나무 있는 숲속에 가서 휘발유를 붓고 주위에 나무단을 싸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오르자 석유를 더 많이 부어 약간의 뼈만 남을 때까지 모든 것을 다 태웠다.” 50)
알렌 선교사는 범죄를 숨기기 위해서 불태웠고 다만 조그만 뼈 하나만 발견되었다고 기록했다. 51) 비숍 부인은 한 손가락의 뼈 몇 개만 남은 것을 장례를 치르기 전에 사당에 옮겼다고 좀더 구체적으로 알렸다 (To the security of this tablet-house the remains of the Queen, supposed to consist only of the bones of one finger, were removed on a lucky day chosen by the astrologer with much pomp.) 52)
법무대신 이범진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훈련대의 윤석우는 그 다음날 그의 상관인 궁 수비대 대장 참령인 우범선이 남은 뼈가 있으면 인공으로 판 경회루 뒤에 호수에 내버려라 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상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약간의 뼈를 정성스럽게 주워모아 궁에서 먼 곳에 묻었다. 이로 인해 그는 무고하게 사형을 당했다.
라. 명성황후가 살았다는 헛 소문
왕비는 죽은 것이 아니라 탈출해서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그녀를 서민 신분으로 낮추겠다고 비난하는 친일내각의 칙령이 명성황후가 살해된 이틀 후 10월 10일에 발표되었다. 맥켄지는 이것이 조작된 칙령이라고 믿었다. 우범선이 협박하여 국방장관이 싸인했고, Korean Repository 의 편집자도 의심했다. 그 다음날 11일에는 왕세자의 효도를 고려해 명성황후를 일급 첩으로 다시 고친다고 발표가 나왔다. 10월 18일에는 15세에서 20세사이의 새 왕비 선택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발표되었다. 53)
많은 궁녀와 서양인들까지 직접 명성황후 시해를 목격했는데도 명성황후가 살해 당했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는 없었다. 시중에는 온갖 풍문, 유언 비어가 떠돌고 명성황후의 운명에 대한 많은 의문점이 풀리지 않았다. “1884년 11월 4일이 명성황후의 45세가 되는 생일이었는데 살아 있다면 그때 나타나 생일축하를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역설적으로 살해당했기 때문에 명성황후는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Korean Repository 편집자는 힐난했다. 일본신문 서울 특파원들은 민비의 시체는 어깨에서 앞 가슴으로 찔린 채 한 우물에서 발견되어 죽었으리라고 보도했다. 서울에서 발간되는 계간지 The Korea Repository의 사설은 “명성황후의 시체를 발견한 당사자가 누구고 시체를 어떻게 했는가를 알고 싶다.” 고 기사를 냈다. 54)
마. 명성황후는 살해자는 누구인가?
일본의 히로시마 법정은 궁정에 난입한 살인자들을 물적 증거가 확실치 않다는 이유로 전원 사면했다. 조선 정부에서는 혐의가 확실하지 않은 세 사람을 처형하는 선에서 그쳤다. 고종은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진상을 법무대신 이범진에게 재조사를 시켰다. 이 문제에 대단한 관심을 가진 서울에 사는 서구인들은 이범진의 보고서를 명성황후 살해의 상황에 관한 신빙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수사문서로 간주해, 전문을 영어로 번역해 기재하고 실제 재판에 참관인을 파견시켜 고문이나 허위자백을 방지하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Korean Repository’의 편집자들이 명성황후의 야만적인 처참한 살상이 일어났던 집과 방을 직접 방문해 현장조사까지 했다. 55)
“궁전 마당과 살인자들이 들어온 여러개의 대문들과 왕과 왕비가 살던 방들을 세밀히 조사한후, 그녀가 있었던 빌딩에 달려들어 포위한 살인자들한테서 이 불쌍한 왕비가 도대체 도망칠수 있다고 보기란 어렵다. 살인자들은 길이 16피트, 너비 8피트, 높이 7피트의 이 작은 방에 왕비를 끌고 들어가서 보고서에서 언급한대로 거기서 그녀를 살해했다.”(도안 지도 참조) 56)
이 보고서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장교들의 지휘 하에 고종이 머물고 있던 건물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작은 궁정 마당은 포위하고 문들을 지켜 왕비를 찾아 죽이려고 온 무서운 살인자 “쇼시들”과 그들을 따라온 일본인들을 엄호했다. 아무리 재주가 많은 명성황후도 이런 상황에서는 피신을 못하였을 거라면서 이들 편집자는 민비가 살해된 건청궁의 약도를 만들어 첨부했다. 57)
광무 4년에 외무부 고문관 사무서리로 임명된 미국인 샌드스(한국명 山島命)는 살인자들의 이름을 그의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58)
“서울의 일본인 거주자들에게는 구니도도 시게아키(國友重章)라는 자가 왕비의 살해자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매제 사세 구마데쓰와 스스기 주넨(조선사람들에게는 조그만 녀석 혹은 땀보로 알려짐.)와 함께 살인을 자랑하고 그의 동료들에게서 축하의 말을 터 놓고 받았다.”
3) 명성황후의 장례의식과 절차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서 행동이 자유스러워진 후에 명성황후의 대대적인 추모행사가 있었다. 장례예식은 1896년 11월 21과 22일에 거행했는데, 많은 외국인들이 초청되어 명성황후의 추모행사 성격과 더불어 이국의 낯선 예식은 어떤가 호기심을 가지고 보았다. 신기할 정도로 서양과 다른 이 상장예식은 서구인의 많은 관심과 추억의 대상이었다. 알렌 선교사, 비숍 부인, 언더우드부인의 기록 외에도 많은 서구인들이 서울 체류의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기록하고 있다.
명성황후의 장례행차에서 고종은 성 밖까지만 가서 작별하고 왕궁으로 돌아오는 관례를 깨고 청량리 묘지까지 갔다. 아침 여덟시에 나간 상여를 동행하지 않고 왕은 오후 한시반에 출발했다. 명성황후의 상여는 수백자의 만사와 특별히 만든 6매의 장례식 깃발과 꽃무늬로 장식한 여러 개의 의자와 수레에 실린 흰색과 갈색 리벤다색의 목마들이 차에 실려 뒤따랐다. 이 마차에는 귀신을 쫓기 위해 가면을 쓴 네 남자들도 보였다. 5,000명의 무장한 군대와 650명의 검정 유니폼을 입은 경찰관들과 4,000개의 등불을 든 잔정뒤에는 고관백작들이 그들의 말을 타고 행열에 참가했다. 노변의 의식은 서구인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랜디스란 의사가 1897년 5월호 “The Korean Repository”지에 왕궁의 임진왜란 전부터 행한 장례식 절차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59)
장례가 있기 몇달 전부터 민비는 명성 황후로 추서되고 그녀의 사당은 경효라고 부르고 묘소는 홍능으로 선포되었다. 경운궁에서는 매일 추도제가 거행되었다. 매월 첫째날과 십오일에 특별 제사를 올렸다. 17일에 있은 장례 준비 연습에는 많은 시민들이 참관했다. 마침내 21일 일요일 아침 8시에 왕비의 남은 시신이 큰‘catalfaque’에 안치되고 장례 행렬이 시작되었다. 두개의 상여를 사람들이 등에 메고 앞뒤에서 수백명이 줄을 잡고 갔다. 60)
상여는 하나가 아니라 두개의 상여를 장례식에서 볼수 있었다. 알렌씨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두개의 상여가 있는 이유는 악귀가 어느 상여에 관심을 쏟을까하고 혼란시켜, 두 상여 다 귀신을 피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귀신에 대한 실제 신앙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미개인 족속 마냥, 코리안들도 귀신을 피하려고 단순한 꾀를 쓰는 것으로 보아서 코리안들은 그들의 귀신을 별로 똑똑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61)
아침에 출발한 장례행렬은 천천히 진행되었다. 왕은 오후 한시 삼십분에 출발했다. 외국 사신들은 개인 자격으로 장례식에 초대되어 외무부에 모여 같이 가거나 개인적으로 산소에 직접 갔다.
명성황후의 묘사가 홍능으로 정해지기전에 다른 장소를 정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해서 청량리밖으로 최종 확정했다. 천 에이커나 되는 묘역에 사는 주민들을 이전시키고 수천그루의 새 나무를 심고 미래의 아름다운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서 많은 돈을 사용했다. 인공으로 50피트되는 산 언덕을 조성했다.
묘지 홍능에서의 장례는 밤에 거행되었다. 언더우드 부인이 도착하면 밤 여덟시에는 묘지로 가는 3마일 길 양편에는 붉고 누런 등불이 양편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건조된 묘앞에 세운 사당에서는 밤새 기원과 통곡이 계속되었다. 밤을 새우는 장례이기 때문에 외국사신도 밤새 뜬 눈으로 지샜다. 외국사신들을 위해서는 주위에 많은 천막을 쳤는데, 천막마다 조그마한 스토브와 침대, 담요, 의자, 책상등이 편하게 마련되었다. 잘 차린 음식이 외교관들에게 제공되었다. 밤 세시에 고종 황제와 왕세자가 가마를 타고 러시아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전통을 깨고 장례식 장소에 친히 나타나셨다. 관례에 따르면 왕은 성문 밖에서 작별하고 일단궁중에 돌아갔다 돌아오는 왕비의 신주만을 나중에 나가서 모셔오면 되었다. 62)
“날이 새기 전 어두운 시간에, 밝고 믿음직한 별이 지켜보고 무제한된 공간의 끝이 없는 심연아래서 언덕을 돌고 있는 이 행렬보다도 인상적이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었으리라. 상여 뒤에는 왕과 왕세자가 따라왔다. 왕세자는 귀중한 유해를 무덤에 하관하는 것을 감독하고 무덤을 덮고 있는 큰 대리석 밑관이 잘 맞어 들어갔는가를 보려고 묘까지 내려갔다. 제사로 축원을 다시 드린 후 거창한 목마들을 태웠다. 그리고 애도하는 사람들이 퇴장했다. 작별과 애도를 표한데 대해서 왕은 외교관과 초대된 개개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장례식은 아침 여덟시에 끝마쳤다.”(다른 기록에 보면 명성황후가 저 세상에서 탈 상징적인 말과 함께 들고 갔던 앉을 의자들도 태워 저승에 보냈다”. 63)
왕이나 왕비가 돌아가면 삼년동안 흰 상복을 입는 풍속이 서구인들 눈에 이상하게 비쳤음에 틀림없다.
“심지어 신도 흰색이어야 하고 담배대도 희게 싸야 하며, 흰 활을 가져야 한다. 저 특이하게 생긴 검정 갓도 색이 바래지 않는 대나무 모자로 바꿔야 한다. 음악과 춤은 당연하고 슬픔이 지나갈 때까지 결혼조차 연기하면서 상복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요약한다면 이 나라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더 정성스러운 배려를 받고 죽은 사람이 가장 보기 좋은 묘자리와 주위를 차지하는 나라다.” 64)
4. 고종의 인품
1) 고종의 생김새와 성품
서구인들이 본 고종은 평범하고 개성이 강한 명성황후와는 대조적 모습으로 친절하나 의지가 부족한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왕은 작고, 혈색이 좋지 않은 분명히 평범한 남자로 약간의 코밑 수염과 턱 수염을 갖고 있었다. 그는 초조하고 양손이 실룩거렸으나 그의 자세와 매너는 위엄이 없지도 않았다. 그의 얼굴은 명랑하고 본성의 친절함은 잘 알려져있다. 대화할 때 왕자가 그를 부추겼다.” 65)
“왕은 마음이 상냥하고 친절함에도 불구하고 성품이 약해서 왕비의 주장이 꺾이게 되면 모사꾼들의 간언에 매달린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그가 나름대로 애국적인 군주라고 믿는다. 개혁에 굳게 서 있지 못하고 그에게 주어진 제안의 대부분을 수용했다. 더욱이 불행하게도 칙령이 법이 되는 나라에서 그의 귀에 속삭이는 마지막 사람에게 설복당해, 목적을 이루는 줏대의 끈질김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개혁의 많은 부분이 그의 의지의 연약함때문에 실천되지 못했다. 절대주권을 견제하는 헌법을 대체할 수 있으면 사정이 나아지겠지만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외국의 경우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 66)
왕의 표현력은 상냥했다. 그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졌고 역사도 잘 알았다. 외국인에게도 친절했다. “그는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지극히 부지런하고 자상하시다. 그의 결점이라면 정사를 장악하는 보편적 능력이 부족하다”고 비숍부인은 지적했다.
“그는 세밀한 점에서는 다른 사람보다도 훨씬 많은 일을 수행한다고들 자주 언급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동시에 일에 대한 보편적 파악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는 마음이 대단히 좋고 진보적인 생각에 대단한 동정심을 갖고 있으며 지적인 힘을 보다 많이 갖고 있다. 그러나 가치없는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면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으나 그의 인품의 약함은 치명적이었다." 67)
1884년의 갑신정변 때에도 보였던 고종의 우유부단한 모습은 서구인들에게도 알려져 있다. 왕비가 살해되던 날 1895년 10월 8일 궁정으로 달려간 게일 선교사는 우는 왕을 보았다.
“그날 늦게 왕비가 살해되었다는 풍문을 들었다. 지오 허벌 존스와 나는 다이와 레겐더 장군과 함께 왕의 거처 가까이에 남아 이 비극적 미스테리를 해명하는데 도와달라고 초청되었다. 왕이 당한 참상은 보기에도 민망했다. 그는 왕비를 생각하며 울었다. 일본사람들이 그녀를 살해했다고 말했다. 이런 때에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다니! 그러나 궁정은 일본인들에게 가까이에서 감시당하고 있었다. 일본 군인들이 문에 주둔하고 있다. 조선의 배신자들이 왕을 포로로 사로잡고 있다. 강한 군대와 선전포고 외에는 아무것도 그를 구제할 수 없다.” 68)
서양사람의 눈에는 고종은 나약한 왕으로서 생명의 위협에 안절부절하는 소심한 왕으로 보였다.
2) 고종, 러시아 공관으로의 탈출(아관파천)
민비 살해 후 고종은 국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사개월동안이나 정적들에게 실질적으로 연금되고 있었다. 심지어 독살의 위협을 느껴 그는 몇 주일동안은 선교사나 외국공관에서 가져오는 음식밖에 먹지 않았다. 언더우드 부인에 의하면 상자에 미제 Yale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는 직접 왕의 손에 건네주곤 했다고 한다. 왕은 또 언더우드 선교사나 알렌공사가 권총을 차고 왕을 보호해야하는 극단적인 심신의 약화현상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1월 28일 천여명의 시민이 왕궁에 돌입해 왕의 자유를 찾으려고 계획했으나 궁전수비대의 한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궁문을 여는데 실패해 그의 구출노력은 허사로 끝났다. 69)
그러나 다음해, 1896년(건양1) 2월7일 궁정에서 일반 궁녀의 가마를 타고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겼다.
탈출 경위를 왕의 측근으로 있는 사람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언더우드부인의 말이 어느 서구인들의 기록보다도 자세하다. 70)
“피로하고 정사에 마음이 아파, 전하는 여자들의 거처에 가셨다. 거기서 시간을 다 내면서 밤에 돌아가면 그를 감시하는 임무를 띤 대원군의 부인과 불쾌한 감시망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포로의 탈출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두 궁정의 여자들과 함께 탈출계획이 짜졌다.
밤낮으로 번갈아가며 감시하고 있는 두 노파를 누군가의 생일 축하연에 초대하여 왕과 함께 축하하고 풍족한 술과 여흥시간을 갖도록 초청하였다. 왕의 두 감시자들은 먹고 마시며 파티를 즐겨 새벽 전에 깊은 잠에 떨어졌다... 그중의 한 여인은 아마 왕의 친 어머니로서 자기의 불행한 아들에게 정이 가서 일부러 감시를 등한시했다고 나는 생각하고 싶다. 여하튼 궁정에 있는 모든 감시원들이 왕과 세자가 자고 있을거라고 방심하고 있을 때 그들은 기다리고 있던 두 여인의 가마에 들어갔다. 가마메는 사람들은 특별히 선택해서 돈을 지불했기때문에 이렇게 궁정의 여인들이 자기 집에 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가 들여다보면 그들을 가릴수 있도록 가마마다 안에도 여자들이 타고 있었다. 궁문의 보초는 뜨거운 마실것과 강한 술을 여유있게 지급받아 먹고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가마와 그들의 값진 짐은 시선을 끌지 않고 방해도 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백 육십명의 해병대가 지키고 있는 러시아 공관에서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1896년 2월 11일 아침 일곱 여덟시에 거기에 신속하게 도착했다.”
3) 고종과 엄비
왕의 탈출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엄비였다. 이 때문에 식모에서 일급 후비가 되었고 고종의 셋째 아들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산드스는 언급했다. 71)
엄비를 만난 해밀톤도 엄비의 본래 신분은 높지 않았다고 소상하게 쓰고 있다. 72)
“이용익을 제외하고 왕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왕의 부인인 엄비다. 동양의 온갖 비도덕적인 양심에 내던져진 궁정에 있어서 그 나라의 왕비가 그녀의 지위를 알리는 용모와 매력을 이제는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걸 발견하는 건 조금 실망된다. 엄비가 현명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는 고종 황제를 다루는데 있어 아주 영리하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왕의 애착은 호기심에 찬 파라독스다. 엄비는 성숙하고, 비만하고, 자연스럽게 쾌락적이다. 그녀의 얼굴은 왼통 곰보에다 이빨은 뼈드렁이고, 피부는 누런 색조다. 그녀의 검은 눈은 약간 사팔뜨기를 암시하고 있는데, 모든 한국사람이 치루는 홍역의 여파인 것 같다. 분은 안바르고 마늘을 씹는다. 그녀의 황제에 대한 통제는 놀랍다. 엄비의 허락을 받고 가끔 새로운 미인을 방문하는 것 외에는 황제는 다른 여자들에게 시선을 보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비는 항상 궁전의 미인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어느 때도 왕실궁녀들 중에 뛰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의 행각은 한국 역사를 만들었다. 다섯 자녀중 둘만 황제에게 속한다. 그럼에도 이 둘 중 하나가 언젠가는 자기 아버지의 왕위를 미래에 계승할 것이다.”
해밀톤은 엄비가 처녀시설에는 중국인의 첩이었다는 근원이 확실치 않은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다. 그 중국남자한테서 아들을 하나 낳은 후 다시 한 조선대신의 은혜와 총애를 받던 중 그 대신이 명성황후의 시녀로 소개했다는 이야기다. 엄비는 시녀들 중 자기 능력이 특출나 완벽하게 노래하고 춤도 상당히 멋있게 출 줄 알았고 그림도 섬세하고 독창성있게 그렸다고 한다. 그녀는 또한 한문과 한글을 썩 잘 읽을 줄도 알았다. 중국말도 했다. 왕의 총애를 받고 왕자를 잉태하자 명성황후의 분노와 질투가 두려워 왕실에서 도망쳤다가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불행한 고종 황제에게 다시 돌아와 그녀는 일급후궁으로 고종과 결혼했다고 해밀톤은 기록하고 있다. 73)
해밀톤의 엄비에 대한 평은 호감보다는 상당히 악의에 찬 서술로서 얼마쯤 신빙성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Ⅲ.결론
서울의 문화와 시가지의 외적인 변화에도 서구인들은 민감한 흥미를 보였지만 그들의 깊은 관심을 끌었던 것은 조선의 자유와 독립의 문제였다. 일본은 외교적으로 서울에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일본은 개화란 미명 하에 조선인의 옷소매를 줄여라, 흰옷을 입지 마라, 상투를 자르라며 조선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급기야는 일국의 왕비를 살해하는 큰 과오를 범했다.
조선에서 상전 노릇하던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고 그들의 약점을 노출했을 때 일본의 손아귀에서 기울어져가는 조선왕조와 남편을 구하려다가 명성황후는 생명마저 잃어버린 불행한 세기말의 한 여걸이었다.
“그 누구도 코리아의 이 작은 왕비의 간교함과 여성다움을 칭찬하지 않겠는가. 나라의 최상의 이익을 위해 일어나 일본대신과 그의 참모들을 이긴 코리아의 이 작은 왕비를 그 누가 칭찬하지 않을 것인가. 누가 페어플레이의 시대에 그와 같은 악한 짓을 감히 했다고 믿을 수 있을까? 개명했다고 자청하는 사백명의 사나이들이 별들과 금테줄과 견장을 단 서양 유니폼을 입고 동양의 가장 우아한 언어를 말하면서도 그들의 사명이 결국, 연약한 일개 여인인 코리아의 왕비를 살해하기 위해서 궁중의 담을 넘었다는 사실을”. 74)
결국 일제의 조선침략은 고립된 한 형상이 아니라 가난하고 비좁은 일본의 제국적 계책이었다고 맥켄지는 비난했다. 75)
“일본은 코리아에 대한 엄연한 약속을 깨고 동등한 기회를 유지하겠다고 서약한 채무를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피했다. 일본은 세금부담과 일본국민들의 빈곤을 위해 새로운 시장을 마련하고 정착할 새로운 땅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한 고비에 이웃의 열강이 조선을 점령할 구실을 주지 않았고 난관을 피할 수 있도록 충고할 수 있었던 왕비를 잃은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믿었다. 그러나 그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무모한 짓이었다. 알렌은 조선은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했다. 76)
“고종은 1897년(광무 1) 황제의 명칭을 자기에게 부여하고 1902년(광무 6)에는 자기의 40년 통치를 기념하는 대잔치에 외국대사를 초청했다. 그건 민망해 보였다. 그러나 이 친절하게 생긴 남자는 인간적인 약점을 가졌고 그는 간신들의 꾀에 넘어갔다. 그래서 그의 정부는 나쁜데서 더 나쁘게 되어 마침내 충분히 강한 자가 들어가 일을 바로 잡게 되는 쉬운 희생물이 되었다.”
고종을 러시아 공관에서 잘 보살펴 주고 정말 한국을 사랑했던 웨버 공사같은 사람이 계속 있었더라면 상황은 달랐졌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조선이 필요할 때 미국을 조선에서 철수시킨 실수도 안정한다. 보호하겠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의 이 현란한 노일전쟁의 승리때문에 간섭할 처지가 못되었다고 이해를 구한다.
언더우드 부인도 일본 사람뿐만 아니라 보호하겠다 약속해 놓고 보호하지 못한 미국의 실책도 준엄하게 비판했다. 77)
그러나 나라를 잃은 것은 조선인의 책임이었다. 비숍은 조선사람의 결점도 예리하게 끄집어내 비판하였다. 78)
“조선은 필연적으로 가난한 나라는 아니었다. 자원은 개발되지 않았을 뿐 고갈되지는 않았다. 농업도 성공적으로 개발을 못했다. 기후는 좋고 1,740마일의 해안선은 부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이 나라에는 건실하고 친절한 백성이 살고 있고 거지층이 없다.”
또 다른 조선내에서의 결점은 몇천 명이나 되는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친척이나 친구에게 매달려 살고 있다고 사실이었다. 이 매달려 사는 사람들때문에 관료직을 택하는 것이고, 관료는 국고를 훔쳐다가 친인척을 먹여 살린다. 이러한 상황은 빈번한 음모와 작은 혁명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79)
“코리아를 수치스럽게 한 여러해의 분열된 정치적 소란은 어떤 원리원칙에서가 아니고 돈을 제멋대로 쓸 수 있는 정부의 자리를 위한 싸움들이었다.… 자리가 생기면 월급이나 받고 착취할 수 있는 데까지 쥐여 짜고 일을 적게 하거나 거의 아무 것도 안한다.” 요즈음의 국가의 공금과 세금을 훔치는 현실을 백년 전에 보는 것 같다.
요약해서 말하면, 우리는 백년 전의 조선의 실패에서 배워야한다. 문화의 가치와 손실을 올바르게 알고 파괴된 궁전과 복원하며 정직한 세계인으로 다시 거듭나야겠다.
재정의 개혁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왕의 친척과 관리들의 부패가 먼저 척결되어야 한다고 비숍은 말한다. 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