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일자 최병효 대사님의 글과 사진을 보고 제가 오슬로에서 주재원으로 근무 하던 시절생각이 떠올라 몇 자 적어 봅니다.
1975년 여름 년부터 1978년 가을 까지 현대중공업 초대 북구라파 지사장으로 오슬로에 근거지를 두고 근무 했습니다. 당시 남철 대사님이 계셨고 한상국대사님이 후임으로 오셨던 같습니다.
노르웨이는 전통적으로 강력한 조선국이자 해운 국 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부임할 당시 조선은 쇠퇴 일로에 있었지만 해운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나고 있어 당시 신생 조선소(현대중공업)로서는 신 조선을 수주하는데 있어 북구라파 특히 노르웨이가 잠재력이 큰 시장이 였습니다.
모든 비즈니스가 다 그렇지 만 특히 대규모 선 투자를 요하는 선박 발주에 있어 Proven Performance Record(소위 말하는 실적)가 없으면 선주들이 지나가는 말로 묻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눈 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마치 취업을 원하는 사람이 Resume를 쓰면서 믿을 만한 Reference가 없으면 취업원서를 내지만 Short List 에서 제외 되여 탈락 되듯이.
당시만 해도 국영 노르웨이 방송국에 젊은 PD들이 많아 북한 대사관에서 제공하는 홍보물은 잘 보여 주는데 반해 한국 대사관에서 보내주는 자료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노르웨이 국영 방송국에서 상영한 금강산을 배경으로 찍은 북한영화 “금강산 처녀”를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한국에서 북구라파로 입양하는 고아 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북한 대사관에서 한국은 가난해서 고아들을 돈 받고 팔아먹는 다고 악선전을 하고 다닐 때입니다. 당시 교민 중 한 사람이 독일부인과 결혼하여 살았는데 남편이 한국가면 양복을 사오는데 값은 싸지만 바느질이 부실하여 수선을 해야 할 경우가 많다고 불평하면서 남편에게 제발 싸우려 양복을 사오지 말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도 지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비즈니스에 Reference도 부족하고 국가의 이미지도 별로 좋지 않을 때이라 주재원인 저로서는 고객을 만나 Presentation을 할 때 마다 선주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엄청난 노력을 해야만 했다. 우선 고객에게 중후한 느낌을 주기 위해 나는 신발끈이 달린 금강 제화의 검정색 Regal 구두를 신고 파리가 낙 상사를 당 할 정도로 신발을 미끈하게 닦고 다녔다. 양복은 정장으로 최대사님이 말씀하신 Dark Blue계통만 입고 다녔고 넥타이도 전통적인 색상의 안정감을 주는 것만 매고 다녔다. 당시 아름다운 구속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어 30년이 지난 지금도 Regal금강 구두를 좋아하며 Dark Blue 양복을 선호하고 있다.
배를 팔기 전에 고객에게 개인적으로 신임을 먼저 얻어야 했고 한국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야 만 했다. 지금은 오직 하느님의 신임을 얻기 위해 주일 미사 때만 정장을 하고 성당에 나간다. 배를 팔 때 Reference가 부족하여 판매원의 몸치장으로 제품의 이미지 보완을 노렸듯이 부족한 신심이나마 정장을 하고 나가는 저의 성의를 주님께서 높이 사 주시기를 바라면서.
우리가 문화를 이야기 할 때 전통음악과 예술도 있지만 그 나라의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도 한나라의 문화를 소개하는 좋은 계기가 아닌가 싶다. 당시 오슬로에 한국 음식점이 없어 그러한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는 권위도 내려놓고 무장을 해제 해야 제대로 즐길 수 있기 때문에 갑과 을의 사업적인 관계가 그때만은 수평적인 인간관계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국전통음식협회에서 해외 10 개국 공관에 한국전통음식을 만드는 자격을 획득한 전문 요리사를 파견하고 있다고 한다. 노르웨이 한국 대사관저에도 한국전통음식 요리사가 파견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라의 외교나 기업체의 시장개척도 사람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자주 만나 상대방과 음식을 함께 나누면서 우정의 가교를 차츰 쌓아 올리는 데서 시작점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나라와 기업을 위해 해외에서 열심히 일하는 분들에게 배정할 접대 예산은 깍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 고아의 해외입양은 아직도 숙제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제가 오슬로에 근무할 당시 우리보다 못사는 베트남에서도 자국의 입양아들을 위하여 베트남어 선생을 방학 때 파견하여 모국어를 가르치면서 베트남인으로서 긍지를 심어 주고 있다고 들었다. 사회적인 인식 때문에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위한 국내입양전환이 어려우면 우선 해외 입 양 될 아이들이 모국어를 구사하며 자신의 뿌리를 소중히 여길 수 있도록 당국의 배려가 필요 할 것 같다.
노르웨이는 Cross-Country Ski의 천국이다. 겨울이면 방한복을 입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국민 스포츠이다. 깊은 산속에는 부활절까지 즐길 수 있다. 국민 스포츠로 그만큼 좋은 운동도 없는 것 같다. 대중적인 음식으로서 Marinated Herring 그리고 Open Sandwich를 줄겼다. 지금은 공항이 이전 되였지만 당시 포네부(Fornebu) 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리면 공기가 하도 신선하여 마치 입안에 은단을 먹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살 던 오슬로 시내에 있는 아파트 Kirkeveien 103C 가 지금도 남아 있는지 궁금하다. 집사람을 설득하여 여행을 떠나자고 하고 싶지만 경제사정이 어려워 망설여 진다.
모처럼 30년 전 오슬로의 생활을 뒤돌아 보았다. 좋은 글과 사진을 올려 글방독자의 향수를 자극해 주신 최병효 대사님에게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