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여행 후기(7부).
일행은 안동의 하회마을에 예약을 해둔 민박집에서 즐길 만찬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조금 전 예천의 삼강주막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음식 때문에)는 모두 잊은 듯,
차창 밖에서 흘러드는 자연바람과 그 향기를 즐기며 이제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일행의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하여 본다.
“여행은 무엇인가를 얻고 그것에 만족하고 즐거워하기 위해서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구나!” 하고 말이다.
여행에서 얻고 만족하는 것도 있겠지만, 스스로 버리고 비우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자리에 새롭고 더 값진 아름다운 것을 채우고 담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는 예천의 삼강주막에서 얻은 분노를 버리고 용서하며 비웠기에 이렇게 산들바람과 함께 날아오는 자연의 향기를 가슴에 담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분까지 윤택하여지니 즐거운 마음에 콧노래까지 나오지 않는가(?)
지금은 안동의 하회마을에 예약을 해둔 민박집으로 가는 길이다.
안개비(?)도 되었다가 여우비(?)도 되었다가 하는 빗속의 해질녘,
안개 낀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 보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 기분을 모르리라!
철 이른 길옆 코스모스는 수줍은 듯 산들바람에 살며시 얼굴을 돌리고,
그에 질세라!
각종 나무들은 이름 모를 들꽃들과 풀들을 거느리고 산들바람에 손짓하며 우리들을 기다리며 반기는 듯하고, 마치 “대자연(大自然)의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들이 오직 모두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 보기도 한다.
예천(醴泉)의 삼강주막(三江酒幕)에서 안동 하회(河回)마을로 가는 중에
하회(河回)마을 입구의 주차장에 도착하니,
해가 저문 탓인지, 오는 듯 마는 듯하며 오락가락하는 안개비와 함께 흐리다 마는 날씨 탓인지,
주위는 벌써 어두워져 오는 느낌이다.
전편(6부)에서 기술한대로 승용차 한 대에 6명이 모두 함께 타고 가면서 두고 간 또 다른 한 대의 차는, 넓은 주차장에서 홀로 외로이, 어설프게 내린 빗방울들까지 잔뜩 이고는 “언제나 오시려나(?)”하고 지금까지 애타게도 주인을 기다린 모양이다.
우리일행은 다시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낮에 예약을 해 둔 민박집을 찾아 마을 안으로 차를 몰았다.
낮의 하회마을과는 달리, 통제하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입장권을 구매할 이유도 없고, 그냥 익숙한 현지주민처럼 마을안에 있는 민박집을 쉽게 찾아들어갔다.
물론 낮에 하회장터에서 만난 집주인에게 위치를 자세히 물어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예약한 민박집은 하회마을을 중심으로 외각으로 나 있는 뚝방길을 따라 들어가면, 마을 뒤쪽 가장 끝부분에 있었는데, 일행은 민박집에 들어서면서부터 약간 당혹스러워 하는 것 같은 눈치다.
어제까지는 시설이 좋고 모든 것이 편리한 곳에서 편안하게 묵었지만 오늘 우리가 묵을 집은 한마디로 시골집이다.
모든 것이 불편하고 심지어는 샤워시설도 변변치 않다.
이 모든 것이 낮에 앞뒤 생각 없이 집을 직접 보지도 않고 너무 성급하게 예약을 해두고 다른 여행지를 찾아 서둘러 떠난 결과이다.
몇 번이나 다른 민박집으로 옮길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낮에 맛있는 돼지수육도 얻어먹은 것도 있는데 그렇게 까지는 할 수 없다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국 눌러 앉기로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하회마을의 민박집들 중에는 현대식으로 개조된 집도 있고 양반집도 있고 가람집도 있었는데, 우리가 예약한 집은 아무래도 “가람집”이었던 모양이다.
가람집이란(?)
옛날 양반집에서 집안일이나 농사일을 하는 노비들 중에는 양반집에서 함께 거주하는 노비들도 있었지만, 부근에서 자기 집을 두고 생활하던 노비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살던 집을 가람집이라 한다.
마지막 만찬에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이번여행의 마지막 밤의 만찬을 위하여, 확실하게 준비는 해 왔으나, 지금까지는 다 갖추어진 곳에서 묵었기에 단 한 번도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모든 취사도구를 민박집의 여건상 총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박4일의 마지막 밤은 깊어만 가는데,
여행에 지처… 술(酒)에 지쳐 잠자리에 든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멤버들은 깊어가는 마지막 밤의 아쉬움에 자정이 넘도록 만찬을 즐기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필자도 마지막 날 밤이라 긴장이 풀린 탓에 일행들과 끝까지 어울리며, 여행기간 중 내내 자제(自制)하여오던 한 친구(酒)와 뜨거운 우정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결과는(?) 고통스럽고 참담한 아침을 맞이하여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여섯시다.
무거운 눈꺼풀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비몽사몽(非夢似夢)………
우리는 이곳 하회마을에 도착은 어제 하였으나 이제야 겨우 하회(河回)마을을 관광하며 돌아보기 위하여 억지로 잠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모자라는 잠과 들깬 숙취 때문에 오는 참담한 고통을 참아가며…………
이른 아침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고택(古宅)에 앉아서
하회(河回)마을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민속마을로서, 예로부터 유림의 고장이었던 이곳은(?) 동쪽으로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321m)이 감싸고 있으며, 낙동강이 서쪽과 남쪽, 그리고 북쪽의 경계를 따라 마을 전체를 태극형으로 휘감아 흐르고 있다.
하회(河回)마을은 풍산류씨(豊山柳氏)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集姓村)으로서 임진왜란 때의 명재상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과 그의 형인 류운룡(柳雲龍, 1539~1601), 그리고 병산서원(屛山書院)에서 배양(培養)된 셋째 아들 류진(柳袗) 등이 배출 된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현재 탤런트 겸 배우, 그리고 가수이기도 한 류시원(1972년)이 류성룡(柳成龍)의 후손으로 이곳 출신이기도 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마을을 감싸며 S자 모형으로 휘감아 내려가고 있는데서 유래되어 “하회(물돌이)마을”이라는 지명을 얻었다고 하며, 현재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적인 마을이다.
하회(河回)마을은(?) 무엇보다도 조선전기 이래의 옛 건축물들과 “하회별신굿탈놀이”, “선유줄불꽃놀이” 등의 유형무형의 민속 문화들이 고스란히 잘 보존 되어있어 안동의 전통문화를 이해하려면 이곳이 제일이라고 한다.
하회마을은 대중들에게 너무 잘 알려져 있는 곳이라 역사적(歷史的)인 보편적 내용은 여기까지만 하자!
화경당(和敬堂)이란 당호가 붙은 북촌댁(北村宅)의 전경
필자가 본 하회마을은(?) 중앙을 가로지르는 제법 큰 골목길을 중심으로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고택(古宅)들은 여기서 소개하여 보면,
풍산류씨(豊山柳氏)의 종가(宗家)이면서 류운룡(柳雲龍)의 집이였다고 하는데, 기단(基壇)을 높게 쌓아 그 위에 집을 올려 마치 누각을 보는 듯 한 느낌을 가진 “양진당(養眞堂, 보물 제306호)”이 있었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종택(宗宅)이면서도 실제로는 서애가 거주하지 못했다고 하는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도 인상 깊게 보았고,
정식 당호가 화경당(和敬堂)이라고 하며, 하회마을에서도 가장 품격이 높다고 자랑하는 고택인 “북촌댁(北村宅, 중요민속자료 제84호)”도 인상 깊게 보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충효당과 함께 하회마을의 남촌(南村)을 대표하는 고택으로서 남촌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남촌댁(南村宅, 중요민속자료 제90호)”도 상당히 기억에 남는다.
전체적인 마을의 모습은 가운데 삼신당(三神堂)이란 신목(神木)을 중심으로 풍산류씨(豊山柳氏)들이 살았다는 큰 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초가집인 가람집(노비들 집)들이 큰 기와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북촌과 남촌으로 갈라지는 골목길에서~ 한 아주머니를 만나고,
마을을 둘러보는 도중, 부인들 중 한분이 급한 볼일이 발생하게 되어 마침 집에서 나오시는 주민으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에게 부탁을 드렸더니,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바로 거절하신다.
옛날과는 달리 방문객들이 워낙 많으니까 감정이 민감하여진 탓에 인심까지 야박하여지신 것 같다.
서로 여자들끼린데 이해를 할만도 하다만,
이른 아침부터 남의 집 뒷간을 내어 달라니까 황당하여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이른 아침 하회마을의 조용한 골목길을 산책하며
이른 아침 하회마을에서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골목길을 따라 걸어보며, 지금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상쾌한 아침공기를 온몸으로 느껴본다.
고풍 있는 돌담길과 정겨운 흙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기와집인 품격 높은 고택들과 초가집들의 역사적인 흔적들이 고스란히 전해오기도 한다.
그런 비슷비슷한 골목길들을 따라 마을의 중심부쯤으로 보이는 곳에 도착하니, 위에서 고택을 소개할 때 언급 하였던 삼신당(三神堂)이라는 커다란 신목(神木)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신당(三神堂)은 옛날 여느 마을의 서낭당처럼 주민들이 마을과 자신들의 안녕을 위하여 소망을 비는 곳이다.
삼신당(三神堂)을 소개하는 안내 게시판
위 사진의 게시판 내용을 보니,
삼신당(三神堂)이 있는 이곳이 하회마을의 가장 중앙에 위치하면서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한다.
1392년 공조전서 류종혜(柳從惠)공이 풍산에서 이곳으로 처음 입향(入鄕)할 때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수령이 600년을 훌쩍 넘어 정확히 620년이 된 신목(神木)은 마을사람들이 상당히 성스럽게 여기는 곳으로 하당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그리고 화산 중턱의 상당(上堂), 중당국사당과 함께 하회마을 주민들이 소망을 비는 삼당(三堂)으로 불리고 있다.
정월대보름 밤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를 지낼 때면 상당(上堂)과 중당에서 먼저 제를 지내고 다음날 아침에 여기 하당에 와서 제를 올린다고 한다.
그리고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이곳에서부터 시작 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이른 아침 깨끗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삼신당(三神堂)의 신목(神木) 앞에 섰다.
각자의 마음에 따라 삼신(三神)에게 열심히 기도도 하고 감추어진 소망도 빌어 본다.
무엇을 소망하고 빌었는지는 모르지만,
모두들 비치되어 있는 한지에 각자의 소원들을 정성스럽게 적어 그것을 삼신당 새끼줄에 끼워 넣고 머리를 숙이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한다.
필자는 우리 일행들이 각자가 어떤 소원들을 빌었는지 궁금하여 새끼줄에 끼워진 한지를 살짝 펼쳐보고 싶은 마음을 참기도 한다.
600년 이상의 수령인 삼신당(三神堂) 신목은 우람하고 장엄하기만 하다.
이렇게 우리는 하회마을을 두루 돌아보고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 왔다.
아침식사를 간단하고도 빠르게 때운 우리는, 주인에게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서 짐을 챙겨 민박집을 나섰다.
하회마을 맞은편에 있는 부용대(芙蓉臺)로 가려고 낙동강의 지류인 화천을 건너는 나룻배를 타기 위해서다.
어제 들어갔던 뚝방길을 따라 나루터 방향으로 되돌아 나오다 보면 오른쪽은 하회(河回)마을이요 왼쪽은 낙동강의 지류인 화천이다.
그리고 강(화천) 건너에 부용대(芙蓉臺)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기 전에 유심히 보고 넘어가야 할 곳이 한곳이 있다.
그것은 하회마을과 강을 경계로 하는 뚝방 옆의 바로 만송정(萬松亭)이라는 숲이다.
이곳은 이번 여행 두 번째 날 보았던 관동팔경인 울진(蔚珍)의 망양정(望洋亭)이나 평해(平海)의 월송정(越松亭) 하고는 그 성격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른 곳이다.
지난날 필자도 다녀가면서 무심(無心)히 보고 지나친 곳이지만, 오늘은 여기서 이곳에 관한 얘기들을 약간 하고 넘어 가야 될 것 같다.
1983년에 세웠다고 하는 만송정비(萬松亭碑)에는 솔숲 내력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만송정(萬松亭) 숲은 천연기념물473호로서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휘돌아 흐르며 만들어진 퇴적층인 넓은(47만 6,430㎡) 모래밭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 서애(西厓) 유성룡의 형인 겸암(謙菴) 유운용이 강 건너편의 바위절벽인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부르고 있다한다.
1983년에 제작하여 세웠다고 하는 만송정비(萬松亭碑)의 내용을 보면, 이 솔숲의 내력과 함께 현재의 숲은 76년 전(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소나무들의 크기는 나무높이 16~18m·가슴높이 줄기지름 30~70㎝ 정도이고 수령은 90~150년 정도다.
이 숲은 여름에는 홍수 때 수해를 막아주고 겨울에는 세찬 북서풍을 막아주며, 마을사람들의 휴식공간은 물론, 문화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매년 음력 7월 16일 밤에 펼쳐지는 선유(船游)줄불놀이가 바로 이 만송정 숲에서 강 건너편 부용대(芙蓉臺) 꼭대기까지 밧줄로 이어 불꽃을 피우며 시작된다.
부용대에서 부터 밧줄을 타고 내려오며 참나무 숯의 불꽃이 하늘에서 터지고, 그 빛이 강물에 비치는 모습은 장관이라고 하는데 한번도 보지는 못했다.
만송정(萬松亭)은 중요민속마을로 지정된 하회마을과, 그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강줄기, 그리고 맞은편의 부용대와 어우러져 경관이 뛰어난 마을 숲으로서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더욱 높히고 있다.
저쪽 강건너 부용대(芙蓉臺)에 올라 하회마을을 내려다보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이쪽 만송정(萬松亭) 숲에서 부용대를 바라보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오늘같이 이렇게 안개비(霧雨)까지 내리는 날엔………………
하회마을에서 바라본 화천 건너의 부용대(芙蓉臺) 모습
만송정(萬松亭) 숲을 뒤로하고 나루터에 도착하니 너무 이른 탓에 사공은 없고 빈 배만 고적하니 나루터를 지키고 있다.
그 옆에 보니 사공연락처라고 적힌 전화번호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전화를 하니 이내 사공으로 보이는 분이 나타나고, 우리 일행만 태운 나룻배는 부용대(芙蓉臺)로 향한다.
1명단 3,000원, 2~3분이면 강 건너 부용대절벽 아래다.
이 나루터의 나룻배는 하회마을과 부용대 만을 오고가는 배로서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오다가 한때는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 그 운항을 중단(1985년)하기도 하였으나, 20년 후인 2004년 3월 7일에 역사적인 판단과 그 필요성을 인식한 관계자들이 다시 복원하여 운항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낙동강 1300리 중 나룻배가 남아 운행되고 있는 곳은 현재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현재 하회마을보존회에서 관리운영을 맡아하고 있다는 이 나룻배는 과거에는 사공이 직접 삿대를 저어서 운항을 하였다고 하나, 우리가 본 지금의 나룻배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화천의 강신(江神)에게 한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에게 한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부용대(芙蓉臺)는 하회(河回)마을 맞은 편 강 건너에 있는 높이 64m의 병풍 같이 펼쳐진 모습으로 깎아지듯이 서있는 절벽을 말한다.
화천이라 부르는 낙동강의 지류가 마을을 휘감고 돌아 흘러가며 부딪쳐 오랜세월 깎아내려져 지금의 부용대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 같다.
부용대란 이름은(?) 중국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하고, 부용이란(?) 뜻은 연꽃을 말하며 처음에는 “북쪽에 있는 언덕”이라 하여 북애(北厓)라 불렀다 한다.
우리 일행이 나룻배에서 내려 처음 오른 곳은 부용대의 오른(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류성룡이 노후에 낙향하여 스님들의 도움으로 집을 지어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을 저술한 곳으로 유서 깊은 고건물 옥연정사(玉淵精舍)이다.
여기 옥연정사에서 부용대의 왼(서)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류성룡의 형인 류운용이 제자를 양성하던 곳인 겸암정사(謙庵精舍)까지 절벽의 틈새를 아슬아슬하게 가로 질러 연결하는 일명 “서애 오솔길”이란 이름이 붙은 300m의 오솔길이 하나 있는데, 시간관계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날씨(우천) 탓으로 아찔하고도 아름다운 이 길을 걸어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던 것이 지금도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안개비 속에 나룻배에서 바라본 겸암정사(謙庵精舍) 전경
우리 일행은 내리다 말다 하는 여우비랄까(?), 아님 안개비랄까(?)
고르지 못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부용대(芙蓉臺) 정상에 올랐다.
이곳은 하회마을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하늘과 산이 하나가 되고 그리고 강이 있으니,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된 하회마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고스란히 즐기고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낙동강의 지류(支流)인 화천이 하회마을을 감싸고 있는 모양이 꼭 강위에 연꽃 송이가 떠 있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날씨 탓인지, 부용대에 올라 하회마을과 주변경관을 내려다보니 그 운치도 한층 더하고, 가슴까지 뻥~ 뚤리는 느낌이다.
태극 모양으로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 지류인 화천과 백사장으로 하얀 목도리를 맨 것 같은 모습으로, 류성룡이 하회마을의 기를 보호하고 북서풍을 타고 날아오는 모래를 막기 위하여 만 그루의 소나무로 만든 만송정(萬松亭) 솔밭 풍경과 함께 하회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안개비 속에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전경
갑자기 굵어지는 빗줄기에 아름다운 풍광들을 더 이상 즐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도 아랑곳없이 장대같은 비를 맞으며 류성룡선생을 비롯한 옛 선인들의 명복을 빌며 빈 술잔에 다시 막걸리를 채우고 있는 한 친구를 바라본다.
하지만, 채운 술잔은 자신의 입으로 향한다.
아무래도 자기가 더 마시고 싶은 것은 아닌지?
비를 피할 곳이 전혀 없는 부용대(芙蓉臺) 정상의 우리가 굵어진 빗줄기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내려오려고 돌아 서는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내리던 장대비가 갑자기 딱 멈추어 버린다.
아마도 서애(西厓)선생을 비롯한 옛 선인들께서 우리가 올리는 한 잔의 술에 감사의 눈물이라도 흘리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여 본다.
건너 나루터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사공은 부용대를 내려오는 일행을 발견하자 채 3분도 안 되는 시간에 우리가 있는 부용대의 강기슭으로 온다.
다시 일행을 태운 사공은 우리가 오늘 첫손님이라고 하면서, 나룻배를 강의 아래쪽 어귀 깨 멀리까지 운항을 하여 내려가며 우리의 여행에 흥을 더하신다.
상쾌한 강바람과 함께 즐긴 뱃놀이~~~
우리는 뜻하지 않았던 시원하고 상쾌한 강바람을 즐기며 처녀뱃사공의 유행가까지 흥얼거린다.
예정에도 없던 사공의 고마운 마음에 필자는 일행 몰래 세종대왕 한 장을 살짝 쥐어준다.
정확히 10초 정도 되었을까(?) 건너편 나루터에서 인기척이 있다.
관광객 두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나룻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쏜살같이 나루터로 돌아간다.
나룻배에서 내린 우리는(?) 일단 차량을 한번 점검하고 어제 들어가던 길을 되돌아 나오다가 잠시 간식타임과 함께 입구에 있는 하회마을전시관을 관람하였다.
입구의 전시관에는 국보 제121호이기도 한 별신굿 탈놀이에 쓰이는 각종 탈들과 함께, 1999년 4월 19일부터 22일까지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과 부군 필립공이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하면서 가장 한국다운 곳을 보고 싶다고 해서 추천되어 4월 21일 날 하회마을을 방문하면서 남긴 흔적들이 사진으로 잘 기록되어 있었다.
하회마을에서 엘리자베스여왕이 받은 전통 생일상
사진은 하회마을 입구전시관의 전시된 사진을 촬영한 것이다.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하회마을을 방문한 1999년 4월 21일은 여왕의 73회 생일이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우리 전통에는 생명의 탄생을 온 가족은 물론 주위 사람들과 함께 축하하고 기쁨을 나누는 관습이 있다.
여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안동소주 기능보유자인 조옥화 여사가 47가지의 궁중음식을 특별히 장만하여 생일상(큰상 ‣ 잔치 때에 갖가지 음식을 많이 차려서 주인공을 대접하는 상)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엘리자베스여왕께서 우리나라의 전통을 존중하여 여느 집을 방문하면서 처음으로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올라가는 것을 언론이 보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여왕의 방문에 이어 2009년 8월 3일에는 부시 전 미국대통령께서도 하회마을을 방문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부시 전 미국대통령의 하회마을 방문
하회마을은 우리의 소중한 유산이기 전에 세계적인 유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하룻밤을 유한 하회마을에서 나오면서 느낀 것인데,
하회마을이 아무리 세계적인 유산으로서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우리가 잘 보존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고는 하지만, 입구의 주차장이나 매표소에서 너무 멀여(2km 이상), 접근성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이런 여러 가지 주변여건을 보면서 하회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이 우리와 전혀 다른 세상 사람들같이 이질갑까지 느껴짐은 왜(?) 일까?.
여하튼, 하회마을의 여정(旅情)을 뒤로하고 떠나는 마음은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 다른 여행지와 함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일이다.
필자의 생각은 이젠 귀가하여 일상으로 돌아 가기위한 마지막 여정으로서 이번여행을 뜻있게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그동안 다닌 곳보다는 좀 더 의미가 있고 기억에 남을 학습의 장소를 둘러보면서 이번 여행길을 마무리하고 싶다.
하회마을 관광 안내도
여행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행은 자신들을 기다리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며 아쉬움들이 많은 여정(旅情)을 뒤로 한 채 하회마을을 떠나 국도를 달려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이번에 여행 후기를 작성하면서 확실하게 느낀 것은(?)
필력은 체력과 나이에 확실하게 반비례한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필력은 줄어 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역시 또 한계가 온 것 같다.
이번 여행의 후기를 이번 7부에서 종결하려고 하였던 욕심은 여기서 접고 이번 글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아무래도 한부 더 연장을 하여 다음 8부를 종결편으로 마무리 하여야 할 것 같다.
그럼, 다음 8부인 종결편에서 다시 이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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