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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단군신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측면을 살펴 볼 수 있을 꺼 같습니다.
2. 단군신화 자체의 해석
단군신화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세상을 내려가고 싶어 함에 따라 환인께서 환웅에게 천부와 인 세개를 주어 보내시는데, 환웅께서 다시 우리 3천의 제세핵랑군을 이끌고 지금의 백두산 부근의 신시라는 곳에 내려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다시 곰과 호랑이가 환웅께 찾아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하자, 환웅께서 21일간 쑥과 마늘을 먹으며 동굴에서 빛을 피해 조신하면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자, 호랑이는 이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나가고, 곰은 이 기간을 채워 여자로 변하여, 아이를 갖기를 원하고, 환웅께서 이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 분이 바로 단군이셨고 이분이 나라를 세우니 단군이었다는 것이 단군신화의 전체 줄거리 입니다.
현재 인류사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현생의 인류는 바이칼 부근에서 시작되어 다시 전 세계로 퍼져 나간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인의 원류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한국인의 시조는 바이칼호 부근에서 이주해 왔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연구와 단군신화의 내용에 따르면 바이칼호 부근에 살던 환웅께서 무리 3천을 이끌고 동쪽으로 새로 이주해 왔었는데, 기존에 살던 토착 세력인 웅족과 호족이 있었고, 이들과 교류하고 동화되는 시기가 있었는데, 환웅족와 웅족은 잘 동화가 되었으나 호족은 동화되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나갔다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환웅족과 웅족의 융화로 생겨난 문화가 바로 단군 왕검의 조선이라는 것이 현재 신민족사관(과학적으로 민족사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살펴 보아야 한다는 학파)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3. 『 고기(古記) 』에 바탕을 둔 단군신화의 해석
일연 스님의 『 삼국유사 』에는 단군신화를 소개하면서 『 고기(古記) 』에 대해서도 함께 인용하고 있습니다. 『 고기(古記) 』의 인용부분은 "석유환인(昔有桓因)"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것이 원본 삼국유사에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환인과 환국의 차이는 무척 큰데요. 곧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인시대에 이미 나라가 존재했었는지 여부에 대한 차이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현재 인류고고학계의 추정으로 현대 문명이 나타나게 된 기원에 대해서 4대문명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4대 문명이 나타났을 무렵에 이미 동시대에 20여개 이상의 문명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 점차 밝혀 지고 있습니다. 그 요지는 20여개 이상의 문명중이 점차로 정복전쟁을 통해 4대 문명권으로 압축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도달한 연구자들은 이들 문명이 나타나게 된 시원문명에 대해서 찾고 있고, 그 연원을 추적한 결과 도달하게 된 것이 현재의 인류는 그 기원이 바이칼호 부근에서 시작되었으며, 시원문명 또한 바이칼호 부근에서 시작되었다는 추정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고대문명에 대한 실상을 밝혀줄 『 고기(古記) 』에 대한 기록을 우리민족이 고대로 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인류사적으로 또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 고기(古記) 』의 존재 여부는 인류의 뿌리를 찾는 작업으로 현재 인류의 가치관을 재정립하여야 하는 방대한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 삼국유사 』의 원본에 따르면 "석유환국(昔有桓國)" 곧 옛적에 환인의 나라 환국이 있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기록입니다. 석유환국이 석유환인이 된데에는 일본 총독부의 기록조작이 있었다는 것이 재야사학계에서는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4. 『 환단고기(桓檀古記) 』와 한민족의 뿌리역사
1980년에 한국 역사학계와 대학가를 뒤흔들어 놓는 책이 한권이 세상에 소개가 되었습니다. 그 책은 바로 『 환단고기(桓檀古記) 』입니다.
환단고기의 내용은 실로 놀라운데 이미 9203년전에 환인씨의 나라 환국이 존재했으며, 환국은 7명의 환인에 의해 3031년간 존속했으며, 환국 말기에 서자부라는 종족속에서 환웅의 지위에 이던 커발환이란 걸출한 인물이 나와 동쪽으로 무리 3천과 함께 동쪽으로 이주했으며 이와 함께 반고가한(지나족(한족)의 창세신)이라는 인물이 다시 일련의 무리를 이끌고 지금의 황허강 쪽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환국은 남북 2만리 동서 5만리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록대로라면, 유라시아 전체가 환국의 소속이었다는 것입니다. 환국은 12개 연방국가로 이뤄져 있었으며, 64개 민족이 연합한 국가였다고 하며, 이들 12개 연방국가의 이름이 전해 옵니다. 그중 주목할 만한 국가가 우르국과 수밀이국입니다. 특히 수밀이국은 그 위치가 현재 4대문명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열려진 수메르의 위치와 거의 같기 때문입니다.
환국(桓國)은 "광명(환)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환인은 "광명의 사람" 또는 "신인(神人)"을 말합니다. 환웅(桓雄) 또한 마찬가지의 뜻이며, 환웅께서 백두산 부근의 신시(神市 :신의 도시)에 도읍을 정하시고 차츰 주변부를 통합하여 배달이라는 나라 이름을 정하시게 됩니다. 배달은 밝달(밝은 땅)이라는 말이 한자어로 표기되어 음이 바뀐 것입니다.
배달국은 18명의 환웅에 의해 1565년간 다스려졌으며, 이때 중원을 포함한 동북아시아는 배달국과 그 제후국으로 이뤄졌었습니다. 후에 14대 환웅이신 자오지 환웅때 제후국 중 하나인 헌원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다른 제후국들에게 반란을 부추겼으나 다른 제후국들은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헌원의 무리는 자오지환웅(치우천황)께서 보내신 군대와 탁록에서 만나 싸우게 되었는데, 81번의 싸움을 모두져 결국 사로 잡히게 되어 다시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고 풀려납니다만, 그 뒤에도 계속해서 싸움을 걸어 왔고, 이 때문에 배달국의 국력이 약해져 결국 18대 거불단 환웅때 환국때 이동해 왔던 9환족(우리민족의 본류)의 무리가 단군의 지위에 있던 왕검께서 이 구환족의 분열을 통일하시면서 조선(고요한 아침의 해뜨는 나라(광명의 나라))을 세우시게 됩니다.
그 뒤 조선은 47명의 단군에 의해서 2096년간 다스려 지게 됩니다. 뒤에 6692년(3031+1565+2096)간을 삼성조 시대라고 합니다. 뒤의 47대 고열가 단군 이후의 시대를 북부여 및 동부여 졸본부여(고구려) 남부여(백제)등의 5부여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때는 분열기입니다. 올해는 환기 9203년 웅기 5902년 단기 4337년 불기 3031년 서기 2004년 이므로 삼성조시대 이후의 2511년간 이 기간 중에서 고려(476년) 조선(512년) 식민지(36년) 미소군정(5년) 남북전쟁(3년) 남북분단시대(50년)을 거쳐 올해 서기 2004년이므로 이 기간(1082년)을 빼면, 1429년간이 분열기였는데 이중 절반에 해당하는 500년간이 사국의 정립시대였고, 200년간이 삼국의 정립시대였으며, 다시 약 250년간이 남북국의 시대였습니다. 1천년간을 빼면 구화족이 어지럽게 분열하던 시대는 약 500년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이때를 고열가 단군 이후 및 사국이 정립하기 까지의 분열기를 열국시대라고 합니다.
곧 삼성조 - 열국 - 사국 - 삼국 - 남북국 - 고려 - 조선 - 대한제국 - 식민지(일제, 미제, 소제) - 남북분단시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대에 대한 기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일제가 1910년 이후로 전국에서 고유사서를 모아 민족역사 말살정책을 펼치게 되었는데 이때 압수한 책이 20여만권에 달했으므로, 거의 대부분의 한민족의 역사는 이때 거의 일제에 의해 폐기 되었습니다. 현재 약 5천권정도가 일본황실의 궁내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 일본황실도서관에서 근무했던 재일동포의 폭로로 언론에 알려진바 있습니다.
4. 『 고기(古記) 』에 대한 사료적 가치의 재발견
현재 남아 있는 『 고기(古記) 』는 『 환단고기 』이외에 『 단기고사 』, 『 규원사화 』가 남아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과 논란이 분분합니다. 이에 대해서 사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이들 옛 기록들은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것이 주류 역사학계의 주장입니다.
둘째로 현대적인 용어들이 발견된다는 지적입니다.
셋째로 내우환란의 시기에 한민족의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서 쓰여진 위작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주류 사학계의 주장입니다.
넷째로 현재 중국 사서의 기록들과 내용면에서 차이가 나타난 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이들 기록을 뒷받침해 줄 유물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최근에 이들 주류 사학계의 주장을 일거에 해소해 줄 고기록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시해 준 분이 계신데요. 그분은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님이신 박창범 교수님이십니다. 이분은 천문학의 과학적 접근을 토대로 고대 기록에 남아 있는 천체현상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하여 이들 기록의 실현 여부 및 현재 삼국사기 및 고려, 조선의 2천년간 꾸준히 기록되어 있는 별자리에 대한 기록의 타문헌과의 비교를 위해 중국과 일본의 기록들과 비교하는 작업도 함께 병행하셨습니다.
이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해 내셨고 이것이 『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박창범 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국의 천문현상 실현율(75%)이 중국측 문헌(65%)과 일본측 문헌(21%)에 등장하는 기록들 보다 실현 율이 휠씬 높았으며 고기에 등장하는 오성취루(오행성이 결집하는 현상)도 1년의 시차로 실현되었음을 확인하였으며, 『 삼국사기 』의 기록을 바탕으로 할때 천문관측이 한반도가 아닌 중원에서 관찰되었음이 발견되어 삼국의 위치에 대한 천체관측상의 범위를 토대로 초기 삼국의 위치를 추정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 삼국사기 』의 기록이 지나족측의 기록과 다른 것은 지나족측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월식과 일식에 대한 기록과 천문현상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나족 측의 기록은 월식과 일식등 천문현상에 대한 관측위치가 일관되어 있지 않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천문현상에 대한 관측의 위치가 일관될 뿐만 아니라 각기 위도와 경도를 달리하여 중원에서 기록된 것이 확인되어 지나족측의 문헌과 비교할때도 『 삼국사기 』에 등장하는 천문현상을 통한 과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할때 양자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천문현상은 오랜 시공을 두고 일정한 법칙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시공에 대한 현재의 상황을 재현하여 이를 과거로 되돌리면, 정확한 시간의 토대가 나타나기 때문에, 이는 연대기적 기록에 의존하지 않아도, 당시 별자리 및 천문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관측기록이 나타났을때, 그 연대에 대한 직접 산출 및 실현 가능 여부의 조사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박창범 교수님의 『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에 따르면 『 환단고기 』『 단기고사 』『 규원사화 』에 등장하는 천문현상을 분석한 결과 이들 기록에 등장하는 고 천문 현상에 대한 평가로 확인될 수 없는 천문현상을 제외하고 오성취루 현상(5천년전의 기록) 을 비롯하여 일식와 월식에 대한 기록이 상당부문 실현되고 있고, 이 기록들은 지나족측 기록에서는 일천년 이후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전 세계 거석문화의 50%를 차지하는 한반도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군(거의 대부분이 서기 2천년 이전에 세워짐)에서 하늘의 별자리를 새긴 거석을 발견하였고, 삼국시대 무덤에서 무덤에 안치된 별자리를 새긴 석판이 발견되는 등 고대사에 대한 현대의 견해를 완전히 뒤짚히는 발굴들이 이뤄졌습니다.
한 마디로 오늘날 주류 사학계가 연구를 게을리 했고, 말도안된다며 부정해 왔던 기록들의 진위여부 및 이들 유물에 대한 새로운 차원에서의 연구의 장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면 주류 사학계는 왜 그간 이들 고대기록에 대한 기존의 발굴물들과 청동기(기원전 2천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청동기유물등)에 대해서 부인해 왔는지에 대해서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5. 한국 주류 사학계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분석
현재 한국의 주류 사학계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재작년이던가요 작고한 이기백씨를 비롯하여 현재 강단에서 또는 은퇴한 해방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를 주름잡았던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공통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거의 해방후 고 이승만 전 대통령에 의해서 문교부 장관에 오른바 있던 해외유학출신 철학박사 안호승씨에 의해서 서울대 역사학과 주임교수 자리에 오른바 있었던 이병도의 1대 제자이거나 1대 제자들의 제자(곧 2대 제자)이거나 2대 제자들의 제자라는 계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1945년이후로 초, 중, 고등학교 국사를 배웠던 교사 및 역사교사들은 이들로 부터 대학에서 또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배웠습니다.
그럼 이병도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분석해 보겠습니다.
이병도는 대한제국 시대 일본의 한국풍습전문 연구가였던 金西龍(이마니시 류)이 세운 「 조선사편수회 」에서 이마니시 류의 조선인 제자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이마니시 류와 이병도등이 협작한 「 조선사편수회 」에서 한 일은 한민족의 역사를 『 조선사 』 35권에 담는 것이었으며 그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한민족의 역사는 반도에 국한된다.
둘째 한민족의 역사는 자치를 누렸던 적이 거의 없으며 삼국시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시기가 중국과 일본에 의해서 식민체제였다.
셋째 한민족의 삼국이전의 역사는 단군신화 곧 부정확한 역사이므로 삼국 시대 이전의 역사는 인정할 수 없으며 『 삼국사기 』 초기에 등장하는 신화들 역시 부정확한 역사로 이들 또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로 인하여 한민족의 역사는 율령이 반포된 때 곧 서시 200여년 부터 시작하게 되어 총 한민족의 역사는 1800여년 정도가 되게 됩니다. 한편 일본은 이때 일본의 역사를 2600년(본래 일본의 역사는 삼국시대 백제계 한국인들이 건너가 일본의 역사를 써주면서 일본이라는 국명을 지어주었음. 따라사 일본 역사는 1300년임.)으로 늘이게 됩니다.
넷째 한민족의 역사는 당쟁과 정쟁의 역사로, 한민족은 분열과 반목 질시를 추구하였던 민족이므로 서로 화합할 수 없는 민족이다.
다섯째 고대 삼국시대때 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를 두어 다스렸으며, 원제국이 일본을 침공하려 하였던 고려시대 때 고려는 원을 도와 일본을 치려 하였으며 이를 보아서도 한국인들은 식민지의 역사를 누렸다.
이들의 한국인들의 역사에 대한 정책은 총독 사이토에 말에 의해서도 드러납니다만, "한국인들에게 한국의 역사를 모르게 하라." 그리고 한국인들 스스로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 부끄럼을 갖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자괴감에 빠지게 하면 젊은이들이 한국 자신의 역사에 대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정신이 상실되어 있을때 일본의 역사를 제시하면 일본과 조선이 동화되기 쉬울 것이라는 것이 일본의 조선에 대해 취한 역사정책입니다.
물론 그 후유증은 지금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일본은 1900년대를 전후한 조선의 식민정책을 성공하였음은 물론 일본의 선조들이 취한 조선에 대한 정책으로 지금의 일본인들은 대한민국에게 많은 이득을 취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에 대한 증오나 반복 질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잘못해 왔고, 앞으로 어떤 것을 고쳐나가야 할지 정확히 아는 것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역사의 잘못을 재검토 하는 일이 필요한데요. 현재 이러한 일들은 이미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역사에 대한 재검토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신민족사학(과학적 객관적으로 한국인들의 역사에 대해 접근하려는 태도)으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곧 일제시대 이뤄졌던 식민사학과 민족사학의 평가를 재검토 하여 이 시대에 다시 과거한국인들의 역사를 재평가 하는 작업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조선을 일본에 팔아 넘긴 사람들의 계보를 확보해 두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는 감정적으로 이들의 처단하거나 처벌하는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저지른 잘못이 대한민국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현재 심각한 폐해(윤리도덕에 대한 심각한 회의)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민족의식의 재정립이나 역사바로 세우기 그리고 현재 상황에 대한 재검토 재점검 차원에서 확인해서 사실여부에 대한 인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하여야 이들이 침투하여 왜곡되고 편향된 시각으로 남긴 잘못들을 고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의 잔재는 법과 정치 경제 농업 하다못해 당구장에서의 용어까지도(예를 들면 후까시, 겐세이 및 한국식 영어발음 등등)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에 대한 계보를 알아야 이들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이 현재 어떤 방식으로 들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추적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6. 친일파 계보
[고려대학교창립] - 김성수(金性洙) 동아일보 사장
위 자료에 대한 출처는 민족반역자처단협회에서 나온 자료를 근거로 하며 출처는 아래와 같으니 클릭해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민족반역자처단협회에서 밝히는 소개글 -> 민족반역자처단협회에 방문하시면 이들의 현존하는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수 있습니다. )
7. 나오며
간단히 정리해 보았습니다만, 많은 부분을 생략했습니다.
대강 줄거리는 위와 같습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도기 134년 12월 2일 목요일 늦은 12시 42분 피리 부는 사람, psuk0304@hanmail.net |
첫댓글 단군만 그려져 있으면 국가의 단군표준이며,지정문화재가 되는가
단군만 그려져 있으면 국조가 되며,한민족의 시조가 되는가
트로이의 목마로 위장한 홍익인간,단군,국조사기꾼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국조에게 천도제 지내라고 협박하는 단군영업사원들 무엇이 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