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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맛집 그리고 추억 스크랩 [이 사람] 강릉을 커피의 도시로 만든 남자 - 박이추
ginasa 추천 0 조회 275 15.02.05 01: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 사람]

별다방도 콩다방도 없던 80년대, 커피 볶던 남자

박이추

강릉을 커피의 도시로 만들어



▲ 박이추 대표가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추출하고 있다. 손목이 아파 보호대를 하고도 손님에게 줄 커피를 직접 만든다. 사진=김경록 기자

유토피아를 꿈꾸는 청년이 있었다. 돈 걱정 없이 일만 열심히 하면 똑같이 잘먹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즐겁게 목초를 재배하고 젖소를 키우는 협동목장. 청년은 이 꿈을 위해 가출도 불사했다. 그런데 36세 늦은 나이에 별안간 커피에 빠져들었다. 이후 29년 동안 한 길을 걸어오고 보니 사람들은 그를 ‘유일하게 남은 한국 바리스타 1세대’라 불렀다. 커피 매니어라면 꼭 한 번 들린다는 강릉 커피전문점 ‘보헤미안’의 박이추(65)대표다.

깊고 푸른 동해의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보헤미안 카페에서 박이추 대표와 마주 앉았다. 사람이 너무 많이 찾아온다는 이유로 서울을 떠나 한적한 강릉에 자리를 잡은 바리스타 1세대. 지금도 가게를 찾는 손님에겐 직접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는 고집스러움. 꼬장꼬장한 성격일 거라 생각했다. 희끗한 머리에 까칠해 보이는 수염, 돋보기 너머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는 그런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하지만 강한 쓴맛 뒤에 깊은 향미가 뿜어져 나오는 커피처럼, 박이추 사장의 강렬한 첫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가득한 얼굴로 바뀌었다.
 
?아버지는 파칭코 사업 잇길 바라셨죠?

▲ 70년대 후반 경기도 광주 목장에서 아내와 함께. 이때만해도 목장운영이 그의 전부였다.
“원래 농장에 관심이 많았어요. 하루에 버스가 세 번밖에 안 다니는 아주 작은 산골에서 태어나 개울가에서 물고기 잡고 남의 밭 열매도 서리하는 개구장이 어린 시절을 보냈죠. 그래서인지 시골·자연·농장 이런 게 참 좋았어요.” 박 대표는 1950년 일본 규슈(九州) 오이타(大分)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어린 시절 각자 부모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왔다.

“왜 일본으로 왔는지까지는 몰라요. 확실한 건 친가와 외가 모두 아들·딸을 한국인과 결혼시키고 싶으셨대요. 그래서 한국인끼리 맞선을 주선해 결혼을 시킨거죠. 덕분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누나와 달리 어릴 적부터 농장 생활을 꿈꿨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도쿄(東京) 근처 나가노(長野)의 해발1200m 목장에서 일했다. 박 대표는 부러울 게 없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속이 탔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니 커서는 도시에서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거죠. 제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파칭코 사업을 했는데, 그걸 제가 이었으면 하셨어요.”

결국 6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가 사업을 도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가출해 농장 생활을 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됐다. 당시 그의 머릿속에는 유토피아 같은 농장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협동농장, 말하자면 하나의 작은 사회예요. 월급을 주는 게 아니라 한 농장에서 사람들이 같이 살면서 일 하고, 교육도 받으며 자식을 기르는 형태. 약간 현실과 거리가 먼 그런 농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래도 젊은 시절 실제로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에 있는 야마기시라는 집단농장에서 일했던 적도 있어요.”

그러다 이런 농장을 한국에 만들어 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늘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던 그였다. 서울대 공과대에 재학 중이던 형이 집으로 오는 방학 때마다 한국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언젠가는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74년, 24세 되던 해에 한국으로 건너왔다. 어떻게든 아들을 ‘도시인’으로 만들려던 그의 아버지도 아들의 고집에 두손을 들었다. 사업도 정리하고 귀화까지하며 경기도 포천에 8만2644㎡(2만5000평)땅을 사 아들을 지원했다.

“당시 먹고 사는 게 중요했던 한국 사정상 협동 농장을 만들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개인 농장을 하며 젖소를 20마리쯤 키웠어요. 직접 목초를 재배해 소를 먹이고요. 근데 소가 먹는 목초의 양이 어마어마해요. 5년 정도 지나니까 그 넓은 땅도 감당이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경기도 광주 옥포면에 19만8347㎡(6만평) 임야를 구입했어요.”

그런데 땅 소유권 등기이전에 문제가 생겨 재판을 하게 됐다. 재판은 쉽게 끝나지 않아 4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83년 문제가 해결돼 소유권을 받았지만 이미 동네는 시끄러워질 대로 시끄러워진 상황. 결국 강원도 원주시 문막으로 옮겨갔다. 재판이다 뭐다 시달려서일까. 시골밖에 모르던 30대 청년은 갑자기 도시가 그리워졌다.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가배 보헤미안

▲ 2002년 경포대 보헤미안 시절.
농장일밖에 할 줄 모르던 그가 당장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77년 결혼해서 아내도 있던 때였으니 먹고 살려면 뭐든 해야했어요. 근데 아무거나 시작하진 말아야겠다, 일단 기술을 배워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궁리 끝에 요리 몇 가지와 커피 파는 카페를 하자고 마음 먹었어요. 당시 커피는 한국보단 일본이 좀 더 발달해 있던 터라 일본으로 갔죠. 마침 누이도 도쿄에 살고 있었거든요.”

86년 36세. 박이추 대표의 커피 인생이 시작됐다. 초창기엔 커피에 대해 별 감흥이 없었다. 딱히 좋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그저 목장을 접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만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고지식하게 매달렸다. 박 대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낮에는 공사장을 오가는 트럭 운전을 하고 오후 7~10시 중앙커피주식회사와 깃싸덴학원에서 1년 반 정도를 공부했다. 운 좋게 일본커피연구소의 가라사와 소장을 만나 한 달에 두어 번 개인지도까지 받았다. 87년 기본적인 커피교육이 끝나자 가라사와 소장은 커피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던 한국에 가게를 열라고 권했다. 그해 겨울 박 대표는 한국의 시골이 아니라 한국의 도시에 터를 잡았다. 그리곤 88년 혜화동에 ‘가배 보헤미안’이란 커피숍을 냈다.

“사실 동대문 근처 국립중앙의료원 맞은편 2층에 자리를 봐두고 공사까지 했어요. 근데 그 바로 옆에 있던 다방 주인이 재일교포가 여기서 커피를 팔면 다방이 망한다고 반대한 거죠. 건물 주인이 공사비를 다 물어줄테니 나가달라고 하더라고요.”

▲ 그동안 사용해 온 드리퍼들.
두 번째 후보지가 혜화동이었다. 당시 한국엔 다방이 많았는데, ‘가배( )’라는 한자를 간판에 내걸고 원두를 직접 볶아 핸드드립으로 내리는 커피를 파는 보헤미안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가배는 커피를 뜻하는 일본식 한자다. 게다가 메뉴가 150가지나 되니 찾아오는 사람마다 신기해 하며 질문을 퍼부었다.

“가배가 무슨 뜻이냐, 메뉴에 있는 원두는 어떤 맛이 나냐, 어디서 재배되느냐 등 손님들이 질문을 참 많이 했어요. 사실 그때 실력은 별로였어요. 냉장고 옆에 메뉴별 숫자와 만드는 법을 적어놓고 손님이 주문하면 그걸 보면서 했죠.”

원두향을 좋아하는 사람은 계속 늘었다. 심지어 인천에서 박 대표의 커피를 마시겠다고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나이가 많은 노신사였는데, 불치병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의사도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했다더군요. 근데도 커피 맛을 잊지 못해서 한 달에 한 번씩 꼭 찾아왔었죠.”

하지만 혜화동에서 오래있진 못했다. 자동차 매연과 최루탄 가스를 늘 마시며 살아야 하는 게 곤욕이었다. 가게 근처에 있는 고가도로에선 쌩쌩 달리는 차들이 매연을 뿜었고, 토·일 차 없는 거리가 되는 혜화동 거리는 늘 데모하는 대학생들로 가득 찼다. 3년 만에 보헤미안은 고려대 근처 한 지하로 옮겨갔다. 그의 커피맛은 시간이 갈수록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그 명성이 서울을 떠나는 원인이 됐다. 커피향과 맛을 나누며 손님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게 좋았던 그의 앞에 커피를 배우고 싶다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찾아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커피를 좋아해서 알려달라는 게 아니었어요. 그저 장사하기 위해 기술만 습득하려는 사람들이었죠.”

▲ 1990년부터 2001년까지 커피 볶는 데 사용했던 통돌이 배전기.
그도 90년대 중반까지는 원두를 볶고, 추출을 하는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커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있었다. 그 즈음 커피숍에서 커피 묘목을 키웠다. 날씨에 따라 지하에서 옥상까지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아꼈다. 그런데 그만 그 나무가 죽었다. 충격이었다.

“그때 커피나무를 기르고, 로스팅을 하는 등의 기술보다 커피를 대하는 사람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기다리는 사람이 계속 늘자 스트레스가 한계치에 달해다. 사람이 없는 곳에 가고 싶었다. 한적한 동해 바다가 생각났다. 연어 때문이었다. 일본에 있을 때부터 그는 연어를 좋아했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모습을 보는 게 그렇게 좋았다. 한국에 살면서도 강원도 양양에서 열리는 연어축제에 자주 참가했었다.

“연어가 귀향 본능이 있잖아요. 마음 깊은 곳에서 제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도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살던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커피를 하면서 살고 있잖아요.”

무작정 동해 바다를 생각한 그는 2000년 소금강 근처 진고개와 경포대를 거쳐 2004년 강릉 연곡면에 정착했다.(※고려대 근처 보헤미안은 현재 박 대표의 제자가 운영 중이다.)

‘1서3박’ 80년대 커피 레전드

▲ 커피콩을 볶는 공간인 배전실. 박 대표는 손님이 없으면 하루의 대부분을 이 공간에서 책을 보며 보낸다.
보헤미안 말고도 당시 서울엔 원두를 다루는 유명한 커피숍들이 몇 군데 있었다. 그 중 한 곳이 신촌 기차역 바로 앞 횡단보도 건너 2층에 있던 ‘콜롬비아’다. 그 곳에 서정달씨가 있었다. 흔히 한국의 1세대 바리스타를 꼽을 때 ‘1서3박’이라고 한다. 고 서정달, 고 박원준, 박상홍, 박이추다.

“당시 콜롬비아가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이 좀 독특했거든요. 예를 들면 분쇄기를 돌리면서 배합을 하거나, 깔때기 같은 천을 이용해 드립을 하는 융드립을 선보이기도 했어요. 다른 데서 흔히 볼 수 없는 모습들이 있었어요.”

또 한 곳은 고 박원준씨가 운영하던 이화여대 앞 ‘다도원’이었다. “박원준 선생님은 제 인생의 스승이에요. 커피에 있어 존경하는 선배인 건 물론이고요. 일본에서 커피 공부를 할 때 커피 관련 잡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다도원 기사가 나왔죠. 바로 이대 앞을 찾아갔어요. 처음엔 말을 걸 용기가 안 나 커피만 마시고 돌아갔죠. 그러곤 다시 가서 커피를 배우고 있다고 대화를 한 게 인연이 됐어요. 가게를 할 때도 직접 볶은 커피를 대접하며 많은 가르침을 받았어요. 서울을 떠날 때 많이 섭섭해 하셨죠.”

박원준씨는 2008년 작고했다. 그는 지금도 스승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커피는 가르쳐주면 거짓말이 된다.’ 커피를 남에게 가르쳐줬는데 그걸 배운 사람이 제대로 된 맛을 못내면 가르쳐준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커피에 대해 좀 안다고 함부로 남에게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박상홍씨는 지금도 유일하게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현재 미국 시카고에 살고 있는 박상홍씨는 매년 서울에 올 때마다 강릉을 찾는다고 한다.

▲ 서울을 떠나 강원도에서 처음 정착했던 진고개. 보헤미안 옆에 커피학교를 만들어 강의도 했다.
“박상홍 선생님도 오사카(大阪) 커피학원 선배에요. 우리나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6년 동안 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커피맛을 봤다고 해요. ‘마도로스박’으로 유명할 정도로 안 가본 곳이 없었다는 군요. 그러다 86년부터 오사카에서 본격적으로 커피공부를 했고요.”

한 시대를 주름잡던 커피 1세대는 이제 작고 하거나 현업을 떠났다. 박 대표만 여전히 원두를 볶고 드립 주전자를 돌리며 커피를 추출하고 있다. 그가 강릉으로 오면서 조용하던 바닷가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강릉에 가면 커피 1세대가 직접 대접하는 커피를 먹을 수 있다고 소문이 나면서다. 실제로 그는 손님과 이야기를 하던 중이라도 주문이 들어오면 벌떡 일어나 커피를 만들고 돌아온다. 종업원을 시킬 수도 있지만 모든 손님의 커피에 진심을 담아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그는 하루 평균 100~150잔을 만든다. 주말에는 최대 300잔까지도 만든다. 덕분에 보헤미안은 쉬는 날이 점차 늘어 수~일요일만 문을 열게 됐다.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서다.

“2009년부터 몸에 신호가 오더라고요. 손목과 팔꿈치가 저려요. 일정한 각도와 힘으로 물줄기를 내리고 손목을 돌려야하기 때문에 보기보다 힘이 많이 들어가요. 지금은 손목과 팔꿈치에 보호대를 항상 하고 있죠. 더 나빠지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그는 최근 더 바빠졌다. 지난해 11월 보헤미안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또 다른 커피숍 ‘보헤미안 로스터즈 박이추 커피농장’을 열었다. 단순히 커피를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커피나무 재배라는 장기 프로젝트를 위해 만든 공간이다. 그는 현재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직접 커피나무를 재배·수확하는 걸 계획 중이다. ‘박이추 커피농장’은 이 원두를 로스팅하고 일반인 교육을 담당하는 장소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박 대표는 월~수는 오후에, 목~일은 저녁에 ‘박이추 커피농장’으로 출근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로스팅이나 추출엔 관심이 많지만 재배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거든요. 제가 원래 농장에 관심이 있었으니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한번 가보려고요.”

▲ 위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적은 비용으로 행복을 채우는 커피

현대인들에게 커피는 가장 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는 기호식품 중 하나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2013년 보고서에 따르면 주당소비 빈도가 가장 높은 음식으로 커피가 1위로 뽑혔다. 커피는 1주일에 12.2회를 기록해 11.9회의 배추김치, 9.6회의 잡곡밥보다 높다. 김치보다도 커피를 더 자주 마신다는 얘기다. 우리는 왜 이렇게 커피너머 눈이 잠시 바다를 보는가 싶더니 이내 대답이 돌아왔다.

“행복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물질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이 있잖아요. 물질적인 부분은 한계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적은 비용을 들여 순간적인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 커피를 찾는 것 같아요.”

보헤미안을 찾는 손님 중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 마시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커피 안 마시는 사람이 왜 여기까지 오겠어요. 뭔가를 채우고 싶은 갈망이 있는 거예요. 그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니까 3~4잔씩 마시는거죠. 어찌보면 각박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슬프기도 하지만 또 반대로 생각하면 커피 한잔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다행 아닐까요.”

이런 이유로 그는 핸드 드립, 기계로 커피를 추출하는 에스프레소, 봉지에 들어있는 값 싼 인스턴트 커피 모두 행복을 주는 같은 커피라고 말한다. 그 중 어떤 방식이 좋고 나쁘다는 걸 구분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저도 인스턴트 커피를 마셔요. 여행을 가거나 간편하게 커피를 먹고 싶을 때요. 꼭 스페셜티(미국 스페셜티커피협회(SCAA) 기준으로 85점 이상의 최상급 커피)만 좋은 커피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커피를 주는 사람, 마시는 사람이 공감하고 즐거우면 그게 최상급 커피 아닌가요.


● 심영주 기자
(강남통신·열려라공부)
yj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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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김경록 기자
(강남통신·열려라공부 사진담당)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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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중앙일보 2015.02.04 / http://gangnam.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17088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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