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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과의 조우
천지연폭포는 서귀포를 상징하는 폭포라고 일컫는다.
동정방 서천지연(東正房西天地淵)이라 하며 선녀들이 몰래 내려와
목욕하고 노닐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 폭포다.
천지연을 벗어나'범죄없는마을' 안내판이 있는 남성리 어귀 우람한
담팔수(膽八樹) 아래에서 잠시 쉬다가 외돌개길 남성로를 택했다.

남성마을 입구의 담팔수
곧 올레길(7코스)과 최초로 조우했다.
제주 올레길을 시작한 이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을 걷다가 착상하게 되었단다.
이왕이면 돈 벌 궁리 대신 '알베르게(albergue: 여행자 대피소)'도
함께 도입할 것이지.
그녀는 과연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벤치마킹(bench-marking)
한 것 맞는가.
제주경제에 억척인 제주여인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내가 조우(遭遇)라는 부정적인 단어를 택한 이유다.
그리고, 앞으로 올레길과 자주 맞닥뜨리게 될 텐데, 그 때마다 적과
조우하는 찜찜한 형국이 될 수 밖에 없겠다.
그래도, 올레길에 대한 논평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프랑스 서남 국경지대인 생장 피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의
800여km를 걸어본 후로.
제주가 자랑할 것이라곤 걸출한 김만덕과 자연 말고 또 있는가.
그러나 여걸은 과거의 인물이고 남은 건 자연뿐인데 이리 절단내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악마의 하수인 같이만 보인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져야 할 자연을 수없이 동강내어 돈되게끔
얼토당토 않게 꾸미고 황당한 이름들을 붙여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뭍의 사람들은 마치 소풍가는 어린이 처럼 졸래졸래 따르며 터무니
없는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다.
영영 사라져버린 제주의 참모습 대신 추하게 성형하고 분칠한 가짜
모습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1970년대 초에 제주와 인연을 맺은 이래 매년 1월 셋째주말의
한라산 오르기를 벌써 28번째 했고(한라산이 나의 건강검진센터가
된 것) 1996년에는 자전거 일주도 했다.
그 때마다 제주 태생 외우(畏友) 김상욱 시인 등과의 뒤풀이 외에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아무 것도 사지 않는다.
바가지나 듬뿍 쓰는 이른바 봉이 되고 싶지 않아서다.
제주인과 관광객이 따로 노는 현상의 개선이 없는 한 그럴 것이다.
(건강검진센터 자체를 바꿔버릴 수도 있다)
정말로, 관광객들이 제주의 봉인가.
비록 저가항공사지만 제주항공은 이용하지 않는다.
제주도민에게만 할인혜택을 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외지인들을 더욱 배려하고 우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봉이 되어주러 가는 고마운 이들이니까.
만약, 뭍의 사람들이 제주도 대신 해외 관광 캠페인(campaign)을
벌이기라도 한다면 나는 한시적이나마 적극 참여할 것이다.
그들의 고약한 상혼을 개선하는 운동일 것이니까.
왜 관광인가?
30년도 훨씬 더 지나 다시 들른 외돌개다.
사람에게 한 세대는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지만 자연의 산식으로는
아주 작은 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약 150만년 전 화산폭발로 용암이 섬의 모습을 바꿔놓을 때 생성된
이후 외롭게 홀로 바다에 서있다 해서 외돌개란다.
고기잡이 영감을 기다리다 지친 할망이 바위가 되었다는'할망바위'
전설을 비롯해 갖가지 설화가 구전되고 있는 바위다.
마치 백시멘트로 아무렇게나 빚어놓은 듯한 아주 독특한 형상의 저
바위를 어느 졸부가 자기집 정원석으로 눈독드리고 있지는 않을가.
그래도, 외돌개는 물론 범섬까지도 외롭게 보이는 시각인데 때마침
일몰의 장관이 펼쳐져 의외의 한 건을 건진 셈이다.





외돌개(1. 2)에서 맞은 일몰(3. 4)과 월출(5)
'올레길'과 방송극'대장금 촬영지'라는 표지판들이 나붙어 있다.
잘 정비된 널따란 공간은 탐방객의 휴식공간 효과는 있겠으나 정작
외돌개와는 조화되지 않음을 지적하게 되어 유감이다.
관광지에는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자유롭게 탐방하는데 도움이 될
충실한 안내판과 위험지역의 확실한 경계시설만이 선이다.
그러므로, 인위적인 유도로(誘導路)와 고장난 레코드판 처럼 판에
박은 해설 따위는 전근대적 방식이다.
관광객을 유치원생 정도로 취급하는 인격모독이라 할 수 있다.
'관광'에 대해 사전은"타지방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그곳의 풍물과
풍속 등을 구경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단지 눈요기와 기념사진이 전부라면 '견광(見光)'이라고
표현해도 족할텐데 왜 '관광(觀光)'이라는 어려운 자(字)를 쓸까.
견광과 관광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자가 가서, 보는 행위까지라면 후자는 통찰과 사유(思惟)행위가
이어짐을 의미한다 하겠다.
즉, 가서 보고 생각함으로써 받은 어떤 메시지를 지니고 돌아온 후
자기 삶에 반영되게 함으로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관광이다.
그러면, 우리의 관광 수준은 어떠한가.
유감스럽게도 아직껏 요람기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외돌개주차장에서 법환동을 목표로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고산자가 말하는(大東地志) 서귀진발 20리 법한촌(法漢村)이 바로
여기라 판단되어서다.
어둑거리는 시각인데 마침 한 트럭이 멈춰서더니 타기를 권했다.
조금 전에 반대편으로 달리다가 걷고 있는 나를 봤다는 젊은이다.
이런 경우는 으례 노부모를 모시는 이들의 속깊은 뜻에서 나온다.
일주도로 합류지점까지 태워준 이 사람도 그중 하나다.
내 연배인 부친이 병고중이라 안타깝다는 청년의 갸륵한 효심 덕에
이 하루를 행복하게 마감할 수 있었다.
법환동 제주월드컵경기장 내에 있는 찜질방 '워터월드'에서.

제주월드컵경기장
고산자의 착각?
2002년 한. 일 월드컵축구경기때 건립된 축구장이다.
이 경기장에서는 브라질과 중국, 슬로베니아와 파라과이 등의 조별
리그와 독일과 파라과이의 16강전 경기가 있었단다.
겨우 3번의 경기를 위해 건립한 시설이라면 낭비임에 틀림 없다.
어찌 제주만의 문제인가.
경기장 내의 찜질방은 그래서 운영하는 궁여지책이 아닐까.
이즈음에는 프로축구의 활성화로 한 시름 놓게 되었겠지만.
서귀포라 해서 웰빙 바람이 잠잠할 리 있는가.
제법 많은 새벽 운동 나온 이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천제연(天帝淵)
폭포 가는 길에 들어섰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중간지점을 넘어선 까닭인지 걸음이 경쾌했다.
제주3대폭포가 모두 세귀포에 있다.
다만, 정방과 천지연이 서귀포진의 동서로 인접하고 있는데 반해서
천제연은 국내 최고의 관광지로 업그레이드된 중문단지에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고산자는 왜 헷갈렸을까.
법한촌에서 20리 천지연(天池淵)이라 했으니 말이다.
천지연은 서귀진에서 5리에 불과하고 법한촌에서 20리 어간이라면
중문의 천제연(天帝淵)을 가리킨 것이 분명한데.
전해오는 고산자의 형편으로 보아서는 본인이 제주를 직접 답사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제공된 자료의 부실 또는 정리(편집)중 실수일 것이다.
이즘과 달리 필사본 시대에는 원본이 정확해도 필사중 오류 사고가
발생하거나 원본의 오류를 필사과정에서 바로잡는 경우가 있었다.
내게 있는 대동지지는 원본의 영인본이라 하나 확신이 없다.
다만, 대로에서 이 책에 있는 지명의 오기를 무수히 발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류의 원인은 규명할 수 없으나 부실한 것만은 분명하다.
얼마쯤 가다가 약천사에 들르기 위해 도로를 이탈했다.
실은, 아침에(출발하기 전에) 잠시 고심하게 한 것이 약천사다.
법환동에서 해안길을 따라 강정동을 거치면 약천사다.
그러나 올레길과의 조우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한 것이다.
약수가 흐르는 샘이 있다 해서 '藥泉寺'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 절은
30년도 채안되는 짧은 기간(1981년)에 대규모로 급성장한 사찰이다.
제주를 대표하는 관광사찰, 제주 최대의 사찰, 동양 최대규모의 대웅
전 등 세(勢)와 규모에 비해 내력이 빈약하다고 느끼는가.
그래서 찬연한 역사를 만들려고 애를 쓰는가.
고려 이전으로 끌어올리려고 하나 여이치 않은가 보다.
웅장하나 건조한 느낌이다.
산사의 운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해변에 자리한 사찰들의 숙명이기도 하고.




약천사
이가도시락 추억
도처에 옛길 파편들이 어지럽게 남아 있으나 일주로를 잠시 버리고
중문로를 타고 천제교 앞까지 나아갔다.
천제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다.
천제연폭포 일대도 중문단지의 변화에 어울리게 엄청 변했다.
옥황상제의 선녀들이 밤마다 내려와 목욕했다 해서 천제연(天帝淵)
이라 했다 하나 요즈음에는 그게 어려울 것 같다.
1, 2, 3폭포로 나뉘어 잘 다듬어졌지만 봄 가뭄 탓인지 물 부족으로
폭포의 기능이 정지된 상태라.




중문단지(1) 천제연폭포(2)와 세연교(3. 4)
눈요기에 실망하여 불만 토로가 이만저만 아닌, 안쓰러운 견광객(見
光客)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며 안덕길을 재촉했다.
다시 일주도로로 진출하여 안덕길 분기점까지 나아갔다.
1996년 초여름의 자전거일주때 에피소드가 만들어진 길이다.
지금 걷고 있는 것처럼 제주시에서 시계방향으로 해안로, 일주로를
번갈아 달리다가 안덕 분기점앞 갓길(路肩)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내 일정은 여기에서 대로를 이탈, 안덕길을 따라가 산방산 아랫동네
사계리의 '이가도시락'집에서 김상욱 시인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세찬 빗길을 달려서 여기까지 왔는데 마침 비가 그쳤으므로 마지막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이 때, 내 바로 앞에서 안덕길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던 한 승합차의
젊은 운전자가 손을 흔들면서 내게 연방 인사하며 갔다.
얼마후 그 길 따라서 내가 찾아간 이가도시락의 여주인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다가 구면인 것처럼 반겼다.
곧 그 청년이 나와서 내게 공손히, 어쩔 줄 모르게 반가히 인사했다.
그가 이 집의 아들이며 그 사이에 내 이미지를 다 보고(?)했던 것.
로덴스톡 선글라스에 진남색(곤색) 레인코트를 입은 내가 지금까지
자기가 본 남자중 가장 멋쟁이라는 것.
그런데, 내가 바로 자기 집 손님이라는 사실에 놀랍고 반갑다는 것.
그 날 밤, 김상욱 시인의 열렬한 팬이라는 여주인과 내게 반한 아들
모자는 갖은 정성을 다해 우리를 대접했다.




산방산(1)과 용머리해안(2/하멜상선전시관과 형제섬이 보임)
형제섬(3)사계리어촌과 송악산(4)
그 때 패달을 밟았던 그 길을 따라 안덕면 화순삼거리, 화순사거리
등 중심가를 거쳐 산방산(山房) 삼거리까지 나아갔다.
이즈음의 13년이면 격세지감의 세월이다.
그런데도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용머리해안, 하멜상선전시관, 사계
항, 일명 쥐섬인 형제섬 등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고양이가 고군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쥐들에게 먹혔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쥐가 많았다는 섬이다.
작은 분화구들이 어지럽게 방치돼 있던 송악산은 전혀 딴 모습으로
훤칠하게 변해 있다.
그 뒤로 거의 한 줄로 앉아 있는 아스라한 가파도와 마라도도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들이고.
빚지고 달아나서 가파도에 머물고 있으면 갚을 의향이 있고, 마라도
까지 멀리 갔으면 떼먹겠다는 각기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 섬이라나.
1970년대초 관광중에 들은 이야기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