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한국뿌리문화연구소
 
 
 
카페 게시글
歷史이야기 스크랩 우리 역사의 인물들 119 -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
성헌 추천 0 조회 107 16.02.09 09: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 역사의 인물들 119 -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

 

 

아버지와 아들은 등잔불을 가운데 놓고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그들의 표정은 무거웠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오늘 낮 사람들은 수십 가지 세금으로 조금 거둔 낟알들을 모두 빼앗기고 저저마다 군수 놈을 죽여야 한다고 주먹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네의 나이 많은 어른들이 모여 이 일을 어이했으면 좋겠는가를 의논했습니다.

 

봉준아, 아버지가 내일 군수를 만나고 돌아오지 못하면 너는 어찌 하겠느냐?”

 

전봉준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아버님께서 군수를 만나시게 되었습니까?”

 

그렇다. 이건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다. 그러나 내 한목숨 바쳐 우리들의 요구조건이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내야 이젠 늙은 몸이 아니냐.”

 

아버님, 장하십니다. 저도 아버님의 뒤를 반드시 따르겠습니다. 내 언제이건 가난한 사람은 사람으로 쳐주지 않는 이 나라를 바로잡으려 하던 참입니다. 그리고 저 조병갑이 같은 악당들을 가만 두지 않으렵니다.”

 

전봉준은 의젓한 아버지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어찌하면 영영 못 볼 수도 있는 아버님이 아닌가?

 

아버지도 마지막길이 될 수 있는 이 일에 나서려니 재산 한 꼬치 남겨두지 못한 것이 가슴에 걸렸습니다.

 

, 세상은 어찌 이리도 불공평한 것인가?”

 

밤은 깊어 달은 저쪽으로 기울어졌건만 아버지는 아들을 생각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등잔불 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全彰爀)을 비롯한 몇 명의 대표들이 군수 조병갑(趙秉甲)찾아가 만날 것을 요청했으나 관청에서는 그들에게 뭇매를 안겨 쫓아냈습니다.

 

전봉준(全琫準)의 가슴 속에는 봉건 통치배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끓어올랐습니다. 전봉준은 1854년 전라도 고창군 덕정면 당촌에서 서당훈장으로 있던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전창혁은 아들과 동리 아이들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육하기에 힘썼습니다.

 

전봉준은 소년시절부터 재능이 비범했고 학구적인 열정으로 뛰어났습니다.

 

그가 13살에 지었다는 ?백구시?는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모래 벌을 고장 삼아 마음껏 노닐 적에

흰 나래 가는 다리로 맑은 가을날 홀로 섰네

부슬부슬 찬 비는 꿈속 같은데

때때로 찾는 어부 가고 나니 정막쿠나

 

물가에 섰는 바위 새 면목이 아니건만

풍상에 거친 모습 머리도 희였어라

온 종일 쪼아 먹어 알맞게 배 부르니

강호의 고기 떼들 걱정할 것 없다오

 

전봉준은 아버지와 함께 고향에서 동리의 청소년들을 교육했으며 자신의 학문 닦기에 전심했습니다. 그는 성격이 소탈했으며 더욱이는 고향산천에 대한 사랑으로 하여 마을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지휘 하에 고부(古阜)농민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갑오농민전쟁의 서막으로 되었습니다. 1894년 농민전쟁은 이렇게 고부농민들의 폭동을 계기로 하여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내려온 조병갑은 보기 드문 악랄한 수법으로 농민들의 피와 땀을 긁어냈습니다. 농민들에게 면세를 약속하고 묵은 땅을 등뼈가 휘도록 개간하게 하고는 가을에 가서 엄청난 전세를 받아냈고 현미 12말씩 내야 할 대동미를 16말 씩 그것도 돈으로 환산해서 폭리를 얻었으며 심지어 태인 현감을 지낸 제 애비의 비석을 보호하는 집을 세우기 위해 이 지방 인민들에게서 1,000여량의 돈을 강제로 빼앗아냈습니다. 이밖에도 저수지 밑에 없어도 될 새 보를 만들어 놓고는 논 한 마지기에 2말씩 물세를 받아내는가 하면 불효죄’, ‘불목죄등 가지각색의 죄목을 만들어 돈을 앗아냈습니다.

 

거기에다가 고부농민들은 자기들의 땀이 밴 농산물들을 체화상품(滯貨商品)을 싣고 기어든 일본인상인들에게 헐값으로 빼앗겼습니다. 그리하여 농민대표들이 관청에 상소하면 또 난인(亂人)’이라 하여 잡아가두고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인민들의 고통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자란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봉건 통치배들에 대한 증오심이 컸고 착취와 압박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원할 굳은 결심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부폭동의 선두에 나섰던 아버지는 관청에 잡혔으며 끝내 옥사하는 변을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낫과 창, 도끼, 괭이를 들고 싸움에 나선 고부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에게 요구조건을 들이댔지만 이놈은 세 명의 대표들을 잡아들이어 제 놈이 문초를 하더니 곤장을 안겨 그야말로 때려서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와서 시체를 찾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봉준의 가슴에서는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지게에다가 아버지의 시체를 지고 나와 뒷산에 묻은 그는 크나큰 복수를 다지고 다졌습니다.

 

아버님, 내 기어이 이 원수를 몇 천배로 갚고야 말겠소이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두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습니다.

 

전봉준은 다음날부터 오직 술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가장하고 폭동준비에 나섰습니다.

 

그는 고부지방 인민들의 분노가 고조에 이르고 전주, 익산 등지에서도 농민들의 폭동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마침내 이 싸움의 지도자로 나섰습니다. 그는 광범한 백성들을 묶어세우기 위해 정익서, 김도산 등을 폭동의 지도부에 인입하는 한편 당시 동학의 지방조직도 이에 이용했습니다.

 

전봉준은 다 같이 일어서 거사할 것을 비밀리에 공약했으며 110일 새벽에 만석보 남쪽 말목장터에 모일 것을 포치했습니다.

 

거사계획을 세운 전봉준은 아버지의 묘소를 찾았습니다.

 

아버님, 때가 온 듯싶습니다. 내 아버님의 뜻을 좇아 헐벗고 굶주리는 이 땅의 백성들을 기어이 구원해내고야 말겠습니다. 땅속에서도 우리를 굽어 살펴 주십시오.”

 

그는 처가에 들리어 이미 전에 보냈던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고 작별했습니다.

 

드디어 1894110일 전봉준이 지휘하는 1,000여명의 농민들은 싸움에 일떠섰습니다.

 

이른 새벽 고부군 마항리의 동진강 기슭에 모여든 농민들은 저저마다 참대 창을 들고 달려 가 순식간에 관청을 점거하고 토지문서, 노비문서 등 공문서들을 불살라버렸으며 무기고를 부시고 무기들을 탈취했습니다.

 

그 앞장에는 전봉준이 서 있었습니다.

 

여러분, 제 뒤를 따르십시오. 우리는 지금 옳은 일을 하고 있기에 누구도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손을 번쩍 들어 폭동군을 인도했습니다. 폭동군은 기세를 올려 악질관리들을 사정없이 처단하고 옥문을 열어 억울하게 갇혔던 사람들을 석방시켰으며 쌀 창고를 터뜨려 빈민들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한 세금징수의 구실로 되고 있던 만석보를 허물어버렸습니다. 조병갑은 혼비백산하여 전주로 도망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고부농민들의 폭동은 10일 남짓한 기간에 그들의 자랑찬 승리로 일단 막을 내렸으나 통치배들은 이들을 가만 두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대농민전쟁이 다시 개시되었습니다.

 

놈들은 폭동을 조사한다는 구실 밑에 안핵사로 이용태(李容泰)내려보냈는데 이놈은 조병갑이보다 더한 놈이었습니다. 그는 수백의 역졸들을 풀어 주모자를 찾는 한편 그 명단까지 만들면서 소동을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날마다 잔치로 풍악소리가 멎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인민들은 다시금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봉준도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놈들의 뿌리를 뽑아 버리리라!”

 

그는 큰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전봉준은 이미 전부터 폭동에 궐기했던 각 지방인민들을 묶어세워 그 대오를 확대했습니다.

 

1894321일 농민들과 동학군들은 백산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여기에는 고창, 무장, 흥덕, 정읍, 태인, 금구, 김제 등 각지에서 달려온 8,000여명의 농민들이 집결했습니다. 전봉준은 총대장의 명의로 농민들에게 자기들이 싸움에 나선 목적을 똑똑히 밝혔습니다.

 

결코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재물을 다치지 말라. 우리의 목적은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 효도를 하여 인민들을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며 외래침략자들을 구축소멸하며 정의와 인도를 밝히며 군대를 몰아 서울로 들어가서 권세 있는 양반들을 멸살하며 기강을 세우고 명분을 정하여 성인의 가르침에 따르려 한다.”

 

전봉준은 호남창의대장소의 명의로 광범한 인민들을 싸움에로 호소하는 격문을 내었습니다.

 

 

우리가 정의를 위하여 여기에 이른 것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않고 백성들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려고 하는 것이다.

 

안으로는 악질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려고 한다. 양반과 부자들 앞에서 고통 받는 민중들과 고을원 밑에서 굴욕을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들이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에 일떠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갑오년 321

 

호남참의대장소 백산에서

 

또한 전봉준은 4개조로 된 농민군의 행동강령도 발표했습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며 세상을 구원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서양오랑캐들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을 것이며 서울에 쳐들어가 특권양반들을 없애치우는 것 등입니다.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수천의 농민군이 백산의 산과 들을 하얗게 덮었으며 곳곳에서 노랫소리,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구슬픈 민요의 선율을 타고 모닥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노랫소리를 싣고 먼 하늘가로 멀리멀리 날아갔습니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간다

 

넓적한 청돌 숫돌에 썩썩 칼과 창을 갈아대는 젊은이들, 화승대 총구멍을 쑤시면서 노래하는 사람으로 온 골 안이 끓었습니다.

 

어쨌든 올해 안으로 결판을 보아야 우리 농군들이 살게 되네.”

 

하나같은 이들의 심정이었습니다.

 

또한 이런 동요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방에서 부르고 있엇습니다.

 

 

새야 새야 녹두새야

웃녘 새야 아랫녁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함박 쪽박 열 나무 딱딱후여

 

새야 새야 녹두새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네 무엇하러 나왔느냐

솔잎 댓잎이 푸릇푸릇

하절인가 하였더니

 

백설이 펄펄 흩날리니

저 강 건너 청송녹죽이

날 속인다

 

이 노래는 전주고을 전녹두(전봉준의 어릴 때 이름)가 봉기를 일으켰다가 외국의 청나라 군대에 의하여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때 사람들은 그 뜻을 모르면서 불렀는데 갑오농민전쟁이 끝난 후에야 이 노래의 뜻이 맞아떨어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농민전쟁을 동정하며 새 세상을 바라마지 않는 백성들의 소박한 염원의 대변인 것입니다.

 

44일 드디어 관군과의 첫 싸움이 백산에서 벌어졌습니다.

 

이날 농민군은 1,300여명의 병력으로 백산을 포위 공격해오는 관군을 격파했습니다.

 

농민군은 기세 드높이 승승장구 진격해나갔습니다.

 

각 계층 인민들은 앞을 다투어 폭동군에 참군했습니다.

 

전 장군을 따라 나섭시다. 우리도 동학군에 듭시다.”

 

폭동군은 철저히 자기들이 일떠선 목적을 인식했으며 착취자들과 침략자들을 격멸하려는 적개심으로 불타올랐습니다.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천 백성의 피요            (金樽美酒千人血)

옥소반의 맛 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玉盤佳肴萬姓膏)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燭淚落時民淚落)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더라                (歌聲高處怨聲高)

 

 

농민군이 부르는 노랫소리는 호남의 산발을 울렸습니다. 봉기는 날을 따라 더 넓은 지대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전봉준은 전주를 점령할 목적 밑에 부안으로 진출하여 악질관리들을 처단하고 무기와 곡식을 탈취했고 근 800명의 감영군을 살상하고 소총 600여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농민군은 계속하여 정읍현을 장악하고 고창, 무장을 들이쳤으며 412일에는 영광으로 진격해나갔습니다.

 

이에 대하여 당시 기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난민이 곳곳에서 봉기하여 전라 땅이 호응 궐기하니 달포 안에 온 삼남지방이 들끓는다. 고을 원들은 혹은 도주하고 혹은 잡히어 욕을 당하게 되어 한사람도 자기의 관할지역을 지키는 자가 없었다.”

 

농민군은 가는 곳마다에서 인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이러한 실화가 있습니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례원에서 농민군과 관군이 싸울 때의 일입니다.

 

많은 물자들을 인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과 한밤을 웃음으로 넘기던 농민군은 마을 앞 동구 밖에서 아낙네들에게 에워싸였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점차 신기한 대포에 대한 것으로 번져 갔습니다.

 

그럼, 그 대포알이 터지면 벼락 치는 것 같다니 사람인들 얼마나 상하겠어요.”

 

아낙네들은 자기들의 남편이나 오라버니들이 농민군에 참군했기에 그것이 더욱 근심스러웠습니다.

 

그렇게 남정들이 근심스러우면 그놈의 쇠대포 아가리를 치마폭으로 막으시구려.”

 

일시에 폭소가 터졌습니다.

 

그 대포알을 어떻게 무명치마 한 겹으로 막겠는가고 아낙네들이 대들자 농민군은 더 큰 소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낙네 스물이면 스무 겹이니 벼락이라두 막겠는데 그깐놈의 대포, 대포 아구리를 못 막아요. 임진왜란 때 행주치마 이야길 못 들었나 보군.”

 

그날 밤 아낙네들은 눈썹 같은 초생달이 사라진 후 소리 안 나게 짚신을 물에 적셔 신고 관군이 진을 친 무한성 근처로 다가갔습니다. 탁주냄새에 보초병이 코 고는 소리가 앞산을 울릴 지경이었습니다.

 

여인들은 소곤소곤 논판에 들어가 가지고 간 동이에 물을 퍼담았습니다.

 

개구리 알, 그것도 퍼 넣어라. 올챙이가 까나오게.”

 

여인들은 관군의 대포에 한 동이 씩의 흙물을 먹이고 유유히 빠져 돌아왔습니다.

 

며칠 후 농민군과 관군간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관군의 대포에서는 포알이 아니라 샘이 터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초관이 영문을 알려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흙물에 개구리 알까지 섞여있어 올챙이들이 파들파들 떨고 있는 게 아닌가?

 

관군은 저도 모르게 에크하고 비명을 지르며 귀신의 조화라고, 동학당이 하늘을 움직여 조화를 부렸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이날 싸움에서 관군은 끝내 대포 한방 쏘아보지 못하고 완전 패배했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전봉준이 지휘관들에게 이르기를 어느 달, 어느 날, 어느 곳으로 어떠한 차림을 한 사람이 나타날 터이니 두말 말고 잡아 오라고 과업을 주었습니다. 그날 대장이 한 대로 그곳에 가니 과연 신기하게도 꼭 같은 차림의 사람이 나타나기에 당장 잡아 들였습니다.

 

문초를 하니 갈 데 없는 관군의 앞잡이였습니다.

 

이것은 전봉준이 적을 꿰뚫어보는 그 어떤 신의 조화를 부린 것인 아니었습니다.

 

폭동군의 귀와 눈이 되어 준 것은 당시 그들을 지지하고 성원해 나섰던 각 계층 인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농민군을 도와 나섰으며 자기들의 힘을 합심하여 적을 쳤습니다.

 

봉건관료배들은 농민군의 충천하는 기세에 위압되어 때로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멸살 당했으며 때로는 지휘관의 명령에 어쩌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는 죽어 자빠졌습니다.

 

전봉준은 관군이 토벌에 나가고 전주성이 비었다는 사실을 통보받자 일거에 성을 들이쳐 또다시 대승리를 이룩했습니다.

 

전주점령은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던 농민전쟁의 절정을 의미하는 사변이었습니다.

 

전봉준은 진지를 공고히 하면서 정부군을 물리치는 치열한 격전을 벌렸습니다. 정부군이 성안에 총포 사격을 퍼부어 집과 생명을 없애려 하자 격분한 농민군은 두 차례에 걸쳐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 소탕전을 벌려 대타격을 안겼습니다.

 

이때 봉건청국 군대는 1,500명의 병력으로 충청도 아산에 상륙했으며 일본군은 또한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선발부대를 인천항에 기어들게까지 했습니다. 농민군의 앞길에는 또다시 새로운 난관이 제기되었습니다. 봉건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어렵게 되자 무기를 놓으면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죄를 묻지 않겠다는 등 회유기만술책을 쓰면서 그들과의 화의를 집요하게 요구했습니다.

 

전봉준은 봉건통치배들의 이 책동에 결코 농락당하지는 않았지만 나라와 인민 앞에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전주성을 주동적으로 내주어야 한다고 인정하고 정부군 측의 제의에 동의함으로써 58?전주화의?가 성립되었습니다.

 

전봉준은 개혁강령과 함께 화의조항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개혁강령에서 환곡, 전세를 규정대로 받으며 악질관리 놈들을 추방시키며 지방관의 비법행위를 제한하는 등 인민들의 생활에서 절박하게 해결을 기다리는 내용들을 포함시습니다. 그리고 화의조항에는 농민군과 정부사이의 반감을 해소하고 정치를 협력하며 탐관오리들의 죄상을 엄격히 징벌하고 노비문서를 태우며 관리채용에서 인재본위문제, 토지는 평균으로 나누어 부칠 데 대한 문제들을 제기했습니다.

 

화의를 맺은 후 농민군은 전주를 내주고 각지로 떠나갔습니다. 전봉준은 지방관청과는 별도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안을 실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전주에 가서 김학진(金鶴鎭)이라는 관찰사를 만나 직접 담판을 진행했습니다.

 

이 담판을 목격한 양반들은 관군이 좌우로 총을 잡고 삼엄하게 늘어선 가운데 전봉준이 기세 당당히 들어와 조금도 거리낌 없이 화의책을 토론하는데 모두가 질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봉준은 또다시 그해 9, 나라 안에 기어든 일본침략자들을 구축하고 유린된 국권을 회복하려는 애국의 일념으로 농민군을 다시금 일으켰습니다.

 

농민군이 화의한 후 일본 놈들은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더욱 횡포하게 나왔습니다.

 

놈들은 출병구실이 없어지자 내정개혁을 들고 나왔고 마침내 무력을 동원하여 강도적 만행을 감행했습니다.

 

전봉준은 이에 농민군을 이끌어 반침략, 반봉건투쟁을 전개해 나섰습니다.

 

그것은 일본 놈들을 구축하고 나라를 구원하려는 애국적인 반일구국에 있었으며 매국 배족만을 일삼는 이조봉건정부의 통치배들을 소멸하자는 데 있었습니다. 이때 삼례에 집결된 농민군의 수는 4,000을 넘었습니다. 이와 함께 각 지방들에서도 전봉준의 호소에 따라 농민군들이 일떠섰습니다.

 

이 시기 논산에 모인 호남과 호서의 농민군의 수는 27,000에 달했다고 합니다.

 

전봉준은 침략자들이 둥지를 틀고 있고 통치배들의 중심인 서울로 진격하려고 김개남, 손화종과 함께 대군을 이끌어 출전했습니다. 그는 논산을 거쳐 곧바로 공주로 쳐들어갔습니다. 공주격전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당시 관군의 선봉장이었던 이규태(李圭泰)의 보고에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 수만이나 되는 비도(농민군)들이 연련 40~50리에 걸쳐 길이 있으면 길을 싸워서 빼앗고 봉우리가 있으면 그를 싸워서 차지하려고 성동격서하고 섬좌홀우(?左惚右=왼쪽에서 나타났다, 바른쪽에서 사라지다.)하면서 깃발을 휘날리고 북을 울리며 생사를 돌보지 않고 앞을 다투어 기어오르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농민군의 희생적인 2차의 공주공격작전은 아쉽게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농민군이 기세 드높이 전주를 함락하고 논산계선까지 왔을 때 그 지도층 내부의 일부 인물들은 전봉준의 공로를 시기하면서 서울진격을 한사코 반대해 나섰습니다. 이렇게 내부가 복잡한 가운데 공주진격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전봉준은 싸움의 실패에서 정면충돌의 방법으로는 농민군을 계속 유지할 수 도 대오를 확대해 나갈 수도 없다는 것을 타산하고 전략을 달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핵심을 보존하면서 폭동군을 일시 해산시킨 후 자신은 적은 인원을 데리고 순창으로 옮겨갔습니다.

 

가는 도중 전봉준은 길가에서 자기 부하로 데리고 있었던 전주 사람인 김경천(金敬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 대장님, 이런 기막힌 행색을 하시고 어디로 가시오니까?”

 

경천은 허리를 갑죽대며 금시 살이라도 베어줄 듯 은근한 동정을 보냅니다.

 

전봉준은 이에 아무런 생각 없이 불쑥 대답을 한 것입니다.

 

순창 피로리에 일시 몸을 담을 만한 집이 있다니 거기로 가오. 거기서 새로 일을 꾸며 볼 테니 임자도 한 몸을 잘 보존했다가 후일 대사를 도모할 때에 한몫을 맡아주기 바라네.”

 

, . 명심하겠습니다.”

 

그들은 헤어졌습니다.

 

순창 피로리에? 새로 일을 꾸민다구?”

 

삵의 웃음이 김경천의 입술과 눈가에 슬며시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러던 122일 전봉준은 피로리에서 동료들과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데 돌연 수백의 군졸들이 불시에 달려들더니, “역적 전봉준은 빨리나와 오라를 지라.”라고 고아대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전봉준은 함께 있던 동료들에게 급히 피할 것을 명령한 후 화로를 번쩍 쳐들어 달려드는 첫 놈을 까 눕히고 뒷산으로 몸을 빼려 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군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습니다.

 

붉은 피가 볏짚이엉으로 줄줄이 흘러내리고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된 전봉준은 오라에 묶이게 되었습니다.

 

전봉준의 눈에서는 변절자에 대한 증오로 불이 일었습니다.

 

이놈 경천이, 네놈이

 

전봉준은 이렇게 변절자의 밀고로 최후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관군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애국의 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변절자 김경천은 전봉준을 밀고한 대가로 그 후 군수자리까지 얻었다고 합니다.)

 

전봉준은 놈들이 악형을 가할 때마다 이를 꿋꿋이 이겨냈으며 법관의 심문에 대해서는 도리어 질책해 나섰습니다.

 

너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다.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랏일을 바로 잡으려다가 도리어 너희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 말라. 내 적의 손에 죽을지언정 적의 법을 받지는 아니하리라.”

 

전봉준은 놈들이 그에게 죄인이라고 판결을 내리자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탐악한 관리 놈들을 없애고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 행악을 하여 고혈을 빨아먹는 자를 없애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는 것과 국토를 농락하여 사복을 채우는 자를 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너희는 외적을 이용하여 자기 나라를 해하는 무리이다. 그 죄 가장 중대하거늘 도리어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

 

1895329(양력으로 423) 사형언도를 받은 전봉준은 손화중, 최경선 등 충실한 동료들과 함께 서울감옥에서 놈들의 손에 학살당했습니다.

 

여기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189411월 하순 전봉준이 가장 신임하는 대원인 안병찬(안병찬)이라는 청년은 대장의 명령을 받고 전주시내로 떠나다가 순창이라는 고을에 들려 자기의 사랑하는 약혼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영미라는 처녀는 한선달의 집에서 머슴을 살고 있었는데 이날도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면서 동학군과 애인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총각이 불쑥 마당에 들어서자 영미는 총각을 부르고 병찬은 영미를 부르면서 반갑게 두 손을 마주잡았습니다. 총각은 영미에게 싸움이야기를 하면서 동학군이 반드시 이긴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병찬은 임무수행 중이어서 그렇게도 고운 영미를 떼어놓고 한밤에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니 대장은 이미 변절자에 의하여 격투 끝에 잡혀가고 없었습니다. 병찬은 대장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주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을 지켰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역시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농민군이 해산되고 병찬이 그렇게도 자랑하던 전봉준이 서울에서 사형 당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과 함께 애인마저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는 전갈을 받자 영미는 해종일 울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밤 변절자 김경천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벼슬이 올라가고 상까지 내렸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그들은 붓고 마시고 흥청거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이야!” 하는 다급한 외침과 함께 사방에서 삼단 같은 불길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그 불길은 어찌도 거세찬지 누구도 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날 밤 김경천과 공모자들은 모두가 불에 타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영미라는 의로운 처녀도 어디로인가 밤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불을 영미가 놓은 것으로 짐작했으며 처녀를 잊지 못해 그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며 그를 그리었고 폭동군들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 노래는 점차 우리나라 민요의 하나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근대역사에서 커다란 자리를 차지한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인 전봉준은 41살을 일기로 아까운 생애를 마쳤습니다.

 

?갑오농민전쟁?은 분산성과 전략상의 부족 점, 중세기적인 농민폭동이 가지고 있던 제한성으로 하여 또한 일제를 비롯한 외래침략자들과 봉건통치배들의 탄압에 의해 비록 실패했으나 반제 반봉건적 성격을 띤 대중적인 무장봉기로서 일제침략자들과 봉건통치배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우리 인민의 열렬한 애국적 기개와 용감성, 단결력을 크게 시위했습니다.

 

호남창의대장 전봉준

 

보존된 전봉준의 고택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