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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성교수가 주장한 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1)임금을 평균노동생산성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2)임금은 한계노동생산성과 비교해야 하며, “1988-97년을 제외하고 임금은 한계노동생산성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1960-70년대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장상환교수가 주장하듯이 “초과착취 당한 것”이 아니라 “생산에 기여한 만큼” “임금”을 “지급”받았다.
이러한 박교수의 분석은 그가 지지하는 이영훈교수의 주장의 논거가 된 것인데, 이들은 모두 ‘박정희 시대’라고 불리는 1960-70년대가 수출주도 국가주도 초과착취 독재정치에 기초한 고도축적의 시기라는 통설을 뒤집으려 한다. 이교수와 박교수는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이 “초과착취”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1960-70년대 임금은 한계노동생산성과 거의 일치했다는 계량분석 결과를 제시한다. 박교수는 이에 근거하여 ‘박정희 시대’에 “노동시장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에 따라 작동하였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러한 이들의 역사 다시 쓰기 시도가 성공했는가? 형편없이 실패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박정희 시대’는 이교수를 비롯한 ‘뉴라이트’들이 근래 다시 써온 조선후기나 식민지시대와 달라서 방대한 사료들, 아직도 살아있는 자료들 자신이 ‘역사 다시 쓰기’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실증사가로 알려진 이교수는 ‘박정희 시대’ 다시 쓰기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료가 아니라, 박교수의 계량분석 결과 ‘발견’된 사실에 의존하려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발견’된 사실, 혹은 확인되었다는 가설은, 실존하고 있는 방대한 자료들을 피해 갔다는 점에서, 또 박교수의 계량분석이 근거하고 있는 한계노동생산성 가설 자체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라기보다 자본주의 체제 옹호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또 박교수가 가설 증명을 위해 적용한 계량모델의 경우, 모델을 조금만 다르게 특정화해도 가설이 기각된다는 점에서, ‘박정희 시대’에 관한 통설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다. ‘박정희 시대’를 지배한 핵심적인 체제 이데올로기였으며, 21세기 들어서도 박근혜와 노무현이 리바이벌하고 있는 ‘선성장 후분배의 논리’ 자체가 박교수와 이교수가 뒤집으려 하는 통설, 즉 ‘초과착취에 기초한 고도축적’이 다름 아닌 ‘박정희 시대’의 진실이었음을 웅변한다.
박교수와 이교수가 주장하는 한계노동생산성 개념은 보통 한계자본생산성 개념과 한 세트로 주장되는데, 이 중 한계자본생산성은 그 개념의 정의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1970년대 케임브리지 자본논쟁에서 입증된 바 있다. 또 한계노동생산성 개념도 이것이 정의되기 위해서는 생산함수에서 자본 불변을 가정해야 하는데, 이와 같은 자본 불변의 가정 자체가 자본주의의 역동적 발전을 무시한 비현실적 가정이며, 또 이런 가정을 하기위해서도 자본이 먼저 정의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또 다시 이윤율, 따라서 임금율이 앞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순환논법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으로부터만 생성되는 노동력 상품의 가격인 임금의 결정은 다른 재화나 서비스의 경우와는 달리, 한계노동생산성과 같은 시장 요인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사회복지제도 등 제도적 요인,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계급적 역학관계 등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임금=한계노동생산성 가설은 이를 무시함으로써 임금격차의 확대, 분배의 불평등 심화, 생산성 상승에도 불구한 실질임금 상승의 정체, 혹은 ‘효율성임금’ 가설에서 보듯이, 생산성이 임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임금이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 등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일상적인 현상들을 설명할 수 없다. 임금=한계노동생산성 가설의 본질은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이다.
즉 자본가에게는 한계자본생산성만큼 이윤이 귀속되며, 노동자에게는 한계노동생산성만큼 임금이 지급되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착취는 없다는 주장,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에서 계급적 착취적 소득분배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주장이다. 박교수가 한계노동생산성 가설에 근거하여, 자본주의에서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이 작동한다면, 착취는 없다고 주장한다면, 필자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부가가치의 생산은 오로지 살아있는 노동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산된 부가가치 중 임금을 초과하는 부분이 이윤 등의 형태로 자본가 등에게 수취된다면, 임금이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에 따라 결정되더라도, 착취가 발생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또 이교수나 박교수의 주장과는 반대로, 문제가 된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디딤돌)의 실질임금과 평균노동생산성의 추이 비교 자료(p.181)는 필자 나름의 추계와 비교한 결과, ‘박정희 시대’의 진실을 그런대로 반영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그 교과서는 박교수와 이교수가 주장하듯이 “평균노동생산성을 임금과 그대로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지수 (즉 변화율)를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 또 실질임금과 평균노동생산성의 추이를 비교하는 것은 잘못되었기는커녕 아래 식들에서 보듯이 어떤 경제체제에서 생산된 국민소득의 분배의 추이를 확인하는 데서 필수적이다.
(1)식은 GDP(Y)에서 임금(W)이 차지하는 비중인 노동소득분배분, 즉 임금몫(W/Y)이 실질임금(이는 시간당 명목임금(이는 W를 총노동시간(H)으로 나눈 값임)을 GDP 디플레이터(Py)로 나눈 값임)을 평균노동생산성(이는 명목 GDP를 Py로 나눈 다음 다시 총노동시간으로 나눈 값임)으로 나눈 값임을 보여준다. (1)식을 성장회계식으로 전환하면 아래 (2)식이 얻어진다.
(2)식은 실질임금의 증가율이 평균노동생산성의 증가율보다 큰지 혹은 작은지에 따라서 시간에 걸쳐 임금몫이 증가하는지 혹은 감소하는지가 결정됨을 보여준다. 아래 그림은 (1)식과 (2)식에서 제시된 임금몫과 실질임금의 증가율 및 평균노동생산성의 증가율을 1970-2002년 우리나라 비농림민간부문 (한국은행이 공간하는 <국민계정>과 <산업연관표>의 ‘고용표’를 이용하여 전 국민경제에서 농림수산업 부문과 정부부문을 제외한 다음, 각 산업부문 자영업주 소득 중 ‘임금등가’(wage equivalent)를 계산하여 임금에 가산하여 계산)에 대해 계산한 것이다. 임금몫은 1970-2002년 전 기간 약간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문제가 된 ‘박정희 시대’ 특히 1971-79년 동안 (진정한 의미에서 ‘박정희 시대’는 자유민주주의의 틀이 유지된 1960년대가 아니라, 1972년 ‘10월 유신’의 전주곡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 탄압을 핵심으로 하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공포된 1971년에서 시작되어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까지 이르는 시기이다) 임금몫은 1970년 76.4%에서 1979년 68.6%로 무려 7.8% 포인트 감소했다.
1970-79년 동안 두 해 (1971, 1979년)를 제외한 나머지 7개 연도에서 실질임금 상승률은 노동생산성 상승률을 하회했다. 그리고 1971-2002년 32개 연도 중 실질임금 상승률이 노동생산성 상승률을 상회한 기간은 그 절반이 안 되는 15개 연도였다. ‘박정희 시대’ 임금몫의 저하는 그림에서 보듯이 다름 아닌 박기성교수가 근거한 데이터인 김동석외(2002)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김동석외(2002)는 ‘임금등가’ 조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가 산출한 임금몫의 추이와 비교하여 절대수치에서는 하방 편의, 추세에서는 상방 편의를 보이고 있다.
문제가 된 교과서 자료도 1970-80년 동안 노동생산성 상승률이 실질임금 상승률을 앞질렀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공통적으로 ‘임금 억압’ (장 교수가 “초과착취”라고 표현한 것)이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의 기초를 제공했다는 통설을 재확인한다. 1987년 이후 임금 상승이 가속화되었지만, 이것은 ‘박정희 시대’ 억압된 임금의 회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울러 주목되는 점은 1987년 이후 임금 회복 따라서 임금몫의 상승이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중단되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 시대’와 마찬가지로 1997년 이후 경제회복과 자본의 수익성 회복은 임금몫의 저하 즉, ‘임금억압’을 기초로 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이교수와 박교수가 지지하는 임금=한계노동생산성 가설과 같은 오로지 지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시민의식과 역사사회 인식을 함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고등학교 사회교과서에 포함되는 것에 반대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현행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의 진정한 문제는 이교수와 박교수가 강변하듯이 반시장적 편향이 아니라, 정반대로 극단적으로 주류경제학 일변도의 시장주의이며, 이는 시급히 개혁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