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아틀리에] 1호 작가(김준권)를 보충하여 다시 싣습니다."
80 * 140cm / 수묵목판
수인(水印)판화 - 일명 물도장 판화라 하며, 판화기법의 정수로 치부한다. 유성잉크를 쓰는 서양판화는 프레스기로 위에서 내려찍는 방식뿐으로, 수인은 색판을 밑에 놓고 그 물감이 한지 위로 부착하는 방식인데 몇 번이고 반복하여 색감의 농도를 자연스럽게 일반 색채화의 그것과 일치시키는 기술이다.
" 김준권은 북종과 남종의 경계를 오고 가고 한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수인-수묵판화까지 개발하고 통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준권 판화세계에 대한 가치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그가 우리 전통판화에 부실하였던 다색판화를 소생시키었고, 나아가 우리에게 부재하였던 수묵판화를 부상시킨 장인적 노력에 대하여, 우리 판화사의 전환기를 만든 그 이정표를 세운 공로에 대하여 편견 없는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김준권의 판화와 민중감성 원동석(미술평론)
1994. 10. 제 5회 개인전 팜플릿
아름답고 사랑스런 목판화를 위하여 - 김준권의 다색 목판화전에 부쳐 1994, 5회 개인전 / 유홍준(현 문화재청장)
김준권의 작품세계를 생각할 때 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그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이 조형적 성실성이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모든 작품들에서도 여실히 살필 수도 있지만 나는 지난 10여년간 그의 작업을 지켜보면서 단 한번도 조형적 불성실성이나 형식적 긴장의 이완같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엉겅퀴2
미술운동가로서 김준권이 내게 화가로서ㅡ 아니면 판화가로서 김준권을 생각하게끔 한 것은 1991년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건강한 삶, 씩씩한 그림>전에 출품한 그의 <엉겅퀴-2>라는 작품을 본 다음이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터
버드나무 아래
나의 기억에 의하건대 그가 이 작품처럼 대담하게 공간을 경영한 작품을 본 적이 없으며 이 작품처럼 자신있게 그린 작품도 본 적이 없었다. 당시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이 작품을 감상하였고, 마치 새로운 작가를 만난 듯한 기쁨으로 그를 대했던 것을 나도 그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고남 가는 길
황토 마을
김준권 자신 또한 이 작품 이후 오늘날 그가 추구하고 있는 다색목판화의 세계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엉겅퀴-2>는 그의 예술형성과정에서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작품에서 차용한 예술적 방법들은 지금까지 줄곧 김준권 판화세계의 핵심적 내용이 되고 있다.
태백 - 겨울
산
사복에서
첫째로 그의 작품 소재는 농촌으로 바뀌었다. 교육현장, 변혁운동의 현장에서 삶의 터전으로서 농촌 또는 시골로 변한 것이다.
둘째는 소재의 해석에서 상반된 시각의 교차로 이미지를 증폭시키는 방식이다. <엉겅퀴-2>, <소나무> 같은 작품들을 보면 앞쪽에 나무나 풀을 강하게 돌출시키고 후경으로 풍경을 낮게 깔아가는 공간구성법을 구사하고 있다. 바로 이 점으로 인하여 그는 많은 조형적 변주를 구사할 수 있었고, 작가가 찾고자 하는 하나의 영상을 효과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었다.
노고단에서
봉천동에서 3
셋째는 다색판의 능숙한 구사이다. 그는 이제 다색목판에서 달인이라고 할 정도로 다색판을 다루는 솜씨가 빼어나다. 어쩌면 목판이라는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어 목판이라는 장르의 강점을 한껏 구사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같다.
.
설곡
갈대
그는 아마도 자신을 전업작가라고 부르는 것이 쑥스럽고, 이런 선택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를 모르는 얘기라고 서운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충북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에서 오직 작업에만 전념하며 산다는 뜻에서 분명 전업작가의 길을 걷고 있고, 그는 여기에서 프로다운 기법을 구사하면서 프로다운 생산력까지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길로서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 영위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미술운동가 시절에는 가질 수 없었던 창작의 희열 같은 것도 느끼면서.
참교육의 함성으로
그리고 나에겐 아주 사적이라면 사적인 얘기거리가 하나 남아 있었다...
대동세상
민족교육 만세
주위 사람들은 그가 전교조의 미복직 교사라고 한편으로는 동정의 시각을 보내고 있지만, 나는 그가 이런 다색목판화의 달인이 될 수 있었던 작가적 행복으로 그런 아픔은 보상받을 수 있다는 생각, 하나의 조형적 과제를 끌어안고 산다는 것은 이 시대 작가의 한 사명이기도 하다는 뜻에서 꼭 복직만이 그를 행복케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민들레 산천
이것은 나 또한 그런 어려웠던, 전업작가라는 실업자 시절을 경험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고 말하든 김준권은 지금 우리 시대의 가장 주목받고 사랑받는 목판화가로 부상하였고, 스스로 익힌 기법으로 퇴색해 가는 옛 장르에 새 생명을 불러 일으켜 주었고, 작가 자신은 신명에 겨워 작업에 전념하고 있는 행복한 작가라는 나의 인상만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변함없는 그런 작가상으로 성장하고 남아주기를 비는 마음이다.
김준권
1956년 전남 영암 생 홍익대 미술대
한국현대미술 모색전, 봄철 판화제, 한국미술 20대의 힘전, 을축년 미술대동잔치, 80년대 민족미술 대표작품전, 통일전, 풍자와 해학전, 80년대 민중판화 대표작품선전, 조국의 산하전, 농민미술전, 교육현장전, 충북판화가 협회전...
epilogue
꽹과리를 기막히게 뚜드리던 교사화가 김준권. 당대의 강심장 교사들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친구가 이 사람 말고도 하나 더 있다. 그는 이름도 가물가물해졌는데... 데코레이션 케익판의 바닥에 붉은 강을 내보내고 그 강가에 목이 댕겅 부러진 채 바이올린을 켜고 앉은 미니어쳐 소녀를 통해 분단과 억압의 알레고리를 묘파한 친구. 아, 박 건이다. 이들은 당대의 신학철, 홍선웅, 이종구 등과 함께 80년대 초반부 민중미술을 잘 앞나간다. 모두 교사이면서 고초를 겪은 이들인데, 신학철은 그의 <한국근대사 - 모내기>에서 뒷 배경의 초가집이 김일성 생가로 보인다 하여 '국보법'으로 잡아갔고, 홍선웅은 교육민주화사건과 암투병으로, 이종구는 민중미술의 유명세를 타고도 '비 해직'으로, 박건은 유명세도 못 타고 비 해직으로 아팠던 사람들이다. 김준권은 '전교조를 탈퇴하라는 식 복직은 거부한다'로 징 꽹 과리를 때리고는 마음의 풍을 얻어 중국으로 떠났다. 그러던 어느 해 그가 내 서울 수묵전을 보고는 괜한 시샘?을 하다 이상하게 사이가 조금 나빠졌다. 그럼에도 그는 나와 꽤 가차운 사이였다. 고향이 이쪽이라는 점 말고도 활발한 성격 이며, 교사며, 운동의 동지며, 서울이며, 또래며 등이 우릴 비교적 자주 만나게 했다. 다만 그는 술을 전혀 못하여 소줏잔에 콜라만 따라마셔도 취하고 내가 딱 한잔 마시게 하여 그날 그를 들쳐메고 방배동인가 어딘가를 헤매 어 집을 찾아주었으니!.. 김준권은 민중미술권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활동가였다. 그의 존재는 전국의 민족 미술인들을 결집하고 편성 하는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며 전국을 누볐다. 재조도 좋지만 장인적 근성은 또 누구도 따라잡기 힘들만치 타고난 바 있다. 교사 아닌 유명세 '오윤'과 '이철수'야 논외라 하더라도 이인철이라고 판화를 잘하는 친구가 또 하나 있구나. 그 친구도 얼마나 섬세한지 목판화가 꼭 드라이포인트 동판 같았다. 판화는 이렇게 80년대를 아로새기며 스스로 강렬하고도 아픈 칼 맛을 보여주었다. 오늘 직장에서 살아남은 내나 박건이나 이기정이나 최상호나 박철우 는 그미 보다 조금 소심했나보다. 하지만 당시 복직을 거부하고 신문사 밥이나 읃어 먹고 있는 내게 "살아보니 알겄습디다. 복직 하쑈이~" 하던 광주일보 당시 문화 부장 조규현님의 말이 새삼스레 쓸만하다. 2008. 5. 4. 김진수
|
첫댓글 문외한의 눈에도 참 유장하여 마음이 화안해 옵니다. 좋은 작품 많이 올려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