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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길
주제: 사랑은 모든 은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다른 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본문 고전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가장 큰 계명입니다.
어느 날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하고 확실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이 예수님의 대답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명령은 주님의 가장 위대한 명령이라고 합니다.
한편 우리에게는 가장 위대한 사명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지상명령, 그리스도의 대사명입니다.
가장 위대한 명령과 가장 위대한 사명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가장 위대한 명령에 대한 순종이 없이는 가장 위대한 사명은 수행될 수 없습니다.
사랑의 명령에 대한 진정한 순종 없이는 이 사랑의 복음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말씀 중에 가장 위대한 사명은 자주 강조되지만
우리는 이 사랑의 명령을 잊기 쉽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이름은 ‘사랑장’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동서양의 많은 설교자들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13장을 본문으로 열 번 가까이 설교한 분도 있습니다.
어떤 설교자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 본문으로 설교하기를 주저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는 이 본문의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본문을 잘못 다루면 그 영광과 고상함을 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설교자 자신의 자격지심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사랑장’을 설교하기에는 내게 너무 사랑이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설교자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도 본문은 연구되고 선포되어야 합니다.
저도 말씀을 상고하면서 새롭게 배우고 깨닫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문맥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3장은 12장과 14장 사이에 있습니다.
고전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성경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언제나 문맥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주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영적 은사들의 목록이 있습니다.
14장은 이 영적 은사의 바른 사용법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13장이 끼어 있습니다.
13장은 한 마디로 “그 은사를 사랑으로 사용하라”고 가르칩니다.
13장은 영적인 은사를 바르게 사용하는 순전한 동기를 가르칩니다.
13장은 영적인 은사를 사용하는 성도의 마땅한 태도를 가르칩니다.
사랑의 태도, 사랑의 동기를 가질 때만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은사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에 속한 우리 모두는 이 사랑을 우리 삶의 가장 고상한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 열매, 근본적인 열매도 사랑입니다.
은사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 은사는 사랑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 전체가 사랑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성령의 은사들이 있었으나, 성령의 열매가 없었습니다.
문제투성이의 고린도교회를 향해 주님은 사랑를 가르치십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은사나 재능의 결핍이 아니라 사랑의 부족이었습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고전12:31 ...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제일 좋은 길은 바로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의 길이야말로 우리가 구해야 할 가장 좋은 길이요 중요한 길입니다.
선교사 리빙스톤이 죽은 지 삼년 후에 설교가 헨리 드럼몬드가 원주민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 리빙스톤의 평소의 인상을 물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성도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흠모하는 것입니다.
그 목표는 이웃사랑으로 표현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방언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상상 가능한 가장 인상적인 일을 열거하였습니다.
이 모든 경험과 행동은 그 자체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선언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없으면 이러한 경험과 행동이 아무 것도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모든 영적 은사가 무가치하다!
그래서 설교자 죠지 스위팅은 이 말씀을 요약하여 공식을 만들었습니다.
[인생-사랑=0]
바울은 본문 3절 이하에서 그 사랑의 특성을 소개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랑은 정의될 수 없습니다.
눈물을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어머니라는 말을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의 의미가 바로 그렇습니다.
사랑은 정의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분별하기는 어렵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Love may be difficult to define; it is not difficult to discern.)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행동을 소개합니다(love in action).
그것은 사랑의 스펙트럼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아가페의 사랑은 행동입니다.
이 사랑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이고 의지적인 행동입니다.
1.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부드럽고 달콤하고 짜릿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오래 참음은 무엇입니까?
인간관계에서 다른 사람에게 받는 상처를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악행과 손해를 견디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오래 참음은 관용하는 것입니다.
이 오래 참음은 잘못에 대한 응징을 더디한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릇된 대우를 받고 잘못 취급받아 상처를 받았을 때 복수할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과하는 능력이다.
세상은 승리가 강자의 미덕이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의 가르침의 다시의 풍조에도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
왜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오래 참아야 할까요?
성경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우리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범한 자를 즉시 응징하시지 않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바울도 참았습니다.
고린도의 신자들이 성도라 하는 영광스러운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지만
바울은 그들을 이렇게 부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8-10)
[쉬운 성경]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세상 끝날까지 굳세게 지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게 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모두 의견을 합하고 여러분 사이에 편을 나누지 마십시오.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가 되십시오.
고린도 교회는 책망을 많이 받아야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드러움과 권위를 적절히 섞어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그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오래 참으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마 오래 참았을 것입니다.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래 참음이란 고통의 원인인 죄나 악과 대결하면서도 고통과 함께 살아가며 마침내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는 창조적인 삶의 예술입니다. - 루이스 스미드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가페의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참으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될 때까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끝이 있는 오래 참음입니다.
참되 우리는 소망 가운데 참습니다. 소망이 있는 인내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참습니다.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사랑은 온유합니다.
오래 참음은 시간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이제 온유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온유(크레스토테스)는 바울의 서신에서 여러 번 나타납니다.
이 온유는 오래 참음보다 더 적극적이고 더 능동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친절’입니다. 부드러움입니다. 남에게 도움이 되도록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주님의 성품이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선언하셨습니다(마 11:29).
예수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유로 승리하셨습니다.
친절하기로 유명한 윌리암 펜에게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나는 지금이 내 인생에서 친절을 베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요.”
온유는 친절과 부드러움을 보여주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
‘투기’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부요함, 명예, 행복을 보고 마음이 상해서 분노가 그 속에서 끓어 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잠언 기자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잠 14:30)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시기: 남이 잘되는 것을 샘하여 미워함. jeal·ou·sy[질투, 투기, 시샘]
질투: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내리려 함.
샘: 남의 처지나 물건을 탐내거나, 자기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나 적수를 미워함. 또는 그런 마음.(시새움: 자기보다 잘되거나 나은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고 싫어함. 또는 그런 마음. )
시기 질투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게서 그것을 봅니다.
요셉의 형제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한 사울에게서도 시기를 볼 수 있습니다.
탕자의 형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 마음을 이렇게 비유하여 설명했습니다.
어느 날 마귀의 졸개들이 리비아 사막을 지나가다가 성자가 되기 위해 길을 떠난 순례자를 만났습니다. 그를 유혹하여 넘어뜨리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마귀에게 보고하자 마귀는 “잠자코 나를 따라와”하더니
그 순례자의 귀에다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그러나 그 순례자는 표정이 달라지더니 발걸음을 돌이켰습니다.
“도대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마귀는 빙그레 웃으며 답합니다.
“간단하지. 네 동생이 방금 알렉산드리아에서 대주교가 되었다고 했지.”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들은 시기하게만 만들어 놓으면 손쉽게 우리 손에 들어올 수 있지.”
그래서 야고보도 야고보서에서 시기와 다툼이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마귀적이라고 했습니다.
[개역개정]약 3: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심을 극복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부정적 영성을 극복한 두 사람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은 요나단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요나단은 왕자입니다. 그런데 서민 출신 목동 다윗이 자기의 경쟁자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나단에게서 시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 답은 사무엘상 20:17에서 발견됩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세례 요한은 어떠했습니까?(요 3:28-30)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요나단과 세례 요한은 참된 사랑으로 시기심을 극복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질투하지 않습니다.
4.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모팻: 사랑은 자기과시를 하지 않습니다)
시기의 초점이 상대방에게 있다면 자랑의 초점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의 장점과 업적을 무로 돌리고
자랑은 자신의 업적과 영광을 극대화시킵니다.
원어의 의미는 ‘자기의 헛된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이 빈 바람주머니 같은 영광을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 성도들은 파쟁과 시기로 영적 황무함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교회의 문제가 참 사랑을 배우지 못한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참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자기 자랑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낮추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바울은 십자가의 주님과의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합니다.
[리빙 바이블 / 방태석 번역] 갈 6:14
“나로 말하자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로 인해서 세상의 어떠한 매혹적인 일에도 나의 관심은 없어진 지 오래이며
세상도 또한 나에 대해서는 그 관심을 버린 지 오래입니다.”
주님과의 사랑에 빠질 때 우리도 이와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5.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자기 자랑이 지나치면 교만이 됩니다.
교만은 고린도 교회의 심각한 문제였습니다.[바울의 교회는 고린도교회와 수준이 다르지만]
고린도교회는 지체들의 교만 때문에 평안과 질서가 흔들렸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지도자에 대한 교만이 있었습니다.(고전 1:11-13)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고린도전서 2장에는 지혜에 대한 교만이 있었습니다.
은사에 대한 교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에 대해 거듭 경고하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잠 16:18)
베르디를 추앙하는 오페라가 밀라노에서 계획되면서
누가 이 오페라를 지휘할 것이냐가 거론되었을 때,
명 지휘자 마스카그니와 토스카니니(1867-1957)가 함께 물망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둘 중에서 선택이 난감하게 되자
할 수 없이 두 사람 다 지휘하게 하도록 결정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스카그니는 자기에게 토스카니니 보다 높은 금액의 사례금을 주지 않으면
지휘할 수 없다고 고집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토스카니니 보다 더 높은 사례금을 받았습니다.
한편 토스카니니는 무료로 이 오페라를 지휘하였습니다.
그 이후의 평판은 짐작하지 않아도 분명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토니카니니는 그의 자기 겸허로 시민들의 더 높은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었습니다.
겸손한 토스카니니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마스카그니의 인기는 낙엽처럼 떨어져 나갔습니다.
C.S. 루이스는 “교만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죄”라고 말했습니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결론
우리가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초상)을 봅니다.
사랑에 관한 이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그 자체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사진으로 찍어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래 참고 친절하시며
예수님은 질투하지 않으시고 자랑하지 않으시며 잘난 체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무례히 행동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시고
성내지 아니하시며 악한 것을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주시며 언제나 믿어주시고
언제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바라시며 언제나 참고 견디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이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은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합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증명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은사는 어떠한 영적 은사보다 큰 것입니다.
모든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아무리 화려한 은사라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 지식을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성숙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을 소유한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닮은 영혼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가장 큰 힘입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 제목은 이것입니다.
주님, 제가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게 하소서.
[기도 초청]
믿음이 성전이라면 사랑은 그 거룩한 제단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확신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그 말씀 안에서 묵묵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제물이며
믿음은 그것을 바치는 제사장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영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성자를 만듭니다.
세상을 이기고 그 위에 올라서는 것은 믿음이지만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주님의 보좌로 인도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깨어있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설교 송광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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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자료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자료 감사드립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자료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