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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주삼일교회나눔회 원문보기 글쓴이: 청 송(곽무홍)
세계 선교의 문을 연 윌리엄 케리 구두 수선공이 위대한 Vision의 선교사로
1761년 햇볕이 따사로운 8월의 어느날 영국의 노스햄프턴셔의 작은 마을에서 우렁찬 음성이 캐리는 어려서 꽃과 나무와 새 그리고 곤충을 벗하며 자라난 전형적인 촌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문맹률이 매우 높던 시절, 그는 끈질긴 도전으로 글을 깨우쳤습니다.
고교를 졸업한후 캐리는 아버지의 압력으로 구두수선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의 팔자를 고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는 이 한 말씀을 통해 그동안의 세상과 타협하여 살던 미지근한 신앙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과 능욕을 받고자하는 분명한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생애를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 그는 다른 어떤 학문보다 성경공부에 전념하였습니다. 그 당시 영국은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가 이끄는 영적 부흥운동이 전 영국을 휩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캐리가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 라는 책을 읽고있을 때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그 인생을 바꾸어 놓는 문명의혜택을 못받아 옷도 없이 코난과 포비처럼 살아가는 부족, 사람을 맛있게 먹는 풍습을 지닌 부족등... '아무도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해 주려고 하지않습니다. 거기에는 명예도 유익도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책을 읽고 있던 청년 캐리의 가슴은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케도냐인의 끈질긴 외침을 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캐리는 세계지도에 이미 알려진 나라의 인구,종교등을 표시하며 선교지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 영국교회는 캘빈주의의 영향으로 선교운동에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선교는 예수님이 사도들에게만 세계선교에 눈을 뜨게 된 캐리는 교회안의 무감각한 그리스도인들을 일깨워야겠다고 방향잡았습니다. 그러자 한 원로목사가 일어나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선교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습니다.
캐리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성령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이 믿음으로 1792년 봄 그는 '이교도 개종에 대한 크리스챤의 의무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책은 루터의 95조항과 함께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세계선교열풍을 전 유럽으로 확산되게 하는 결정적인 그 후 캐리는 침례교회연합회 모임에서 이사야서 54:2,3 '네 장막터를 넓히라.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그는 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이 나와 당신을 통해 위대한 그의 비젼이 넘치는 메시지에 감동을 받은 목사들이 당장에 그 다음날로 유명한 침례교 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위대한 시도 1793년 캐리가 32세 되던 해, 그는 인도영혼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 안고 인도 선교사로 가고자 결단했습니다. 첫째는 그의 아버지 였습니다. 둘째는 그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캐리에게 '여보, 인도는 절대로 안돼요, 제발 우리 아기들도 좀 생각해 주세요...엉엉엉'. 그러나 캐리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셋째는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간절히 기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사랑하는 가족 모두와 처제, 그리고 토마스라는 선교 동역자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힌두과부들은 사티(Sati)라는 제도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함께 불에 타야했고, 갠지스 강가에선 'Gunga mai kai jai 또, 당시 인도는 동인도 회사의 점령아래 있었고, 선교를 절대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열대기후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도 고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캐리는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캐리는 자비량 선교의 본을 보였습니다. 1년후부터 그의 위대한 시도가 구체화 되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800년, 19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동인도 회사의 추방령으로 캐리는 선교기지를 덴마크 영내인 세람포르로 옮기게 이곳에서 캐리가 인도에서 흘린 모든 눈물과 땀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회개와 변화의 역사가 줄기차게 일어나 그 후 18년간 600명이 세례를 받고 수천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캐리와 워드와 마쉬만, 그들은 세람포르의 삼총사라 불리웠는데 23년간 팀을 이루어 서로간의 긴밀한 사랑의 대형화재로 인해 수년간 작업하여 완역한 성경원고와 두권의 문법책,다국어 사전들이 소실되었습니다. 캐리는 편지에 '잃어버린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두번 가는 것이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낙망치 않고 도전하여 결국 수 많은 인도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윌리암 캐리는 이처럼 그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함으로 캐리는 1834년 73세의 일기로 그토록 사랑했던 인도 세람포에 묻혔습니다. 그가 인도에 끼친 영향은 언어학적 업적, 교육적인 공로, 목회사역뿐 아니라 과부의 화형이나 유아살해 같은 인도의 그러나 그의 업적은 인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도 국외적으로도 런던선교회,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 선교회,
그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세계선교의 불을 댕긴 위대한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인도의 한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
출처 :인도선교 가루나어린이집 원문보기▶ 글쓴이 : 지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