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현동 패총 지난해 10월 10일에 경남 김 해시 회현동에서는 패총단면전시관이 개 관되었다. 9미터 깊이의 조개더미를 수직으로 잘 라 넓은 정면과 짧은 좌우 단면의 3개 면을 노출시 켜 가야인의‘쓰레기장’을 박력 있고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1907년에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龍) 가 발견한 지 꼭 100년 만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어 초기 철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 적으로 국사 교과서의 거의 처음 부분에 등장하는 바로 그 유적이다. 수로왕릉 남쪽의 봉황대에서 동 쪽으로 뻗어내린 낮고 길쭉한 언덕으로, 가야인들 이 먹고 버린 조가비들이 생활 쓰레기와 함께 쌓여 생긴 유적이다. 현대의 쓰레기장이라면 환경 문제 의 하나로 골칫거리가 되지만, 회현동 패총은 가야 사를 되살릴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다.
발굴 조사 1920년에는 우매하라(梅原末治)와 하마다(濱田耕作), 1934년에는 카야모토(榧本杜人)와 같 은 일본인들이 발굴하였고, 1992년부터 2005년까 지 간헐적으로 부산대박물관과 경남고고학연구소 등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수많은 조개껍질과 가야 토기의 파편들, 생활 도구들이 출토되었고, 화천·세형동검·탄화미처럼 가락국(金官加耶)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릴 수 있는 것들도 확인되었다. 탄화미는 2000년 전 건국기의 가락국에서 쌀농사 가 번창했음을 보여주며, 세형동검은 한민족 청동 기 문화의 대표 유물로서, 가야를 고대 일본이 지 배하거나 간섭했다고 주장하던 일본 학계의 잘못 된 주장을 일축할 수 있는 증거 자료다.
동전 한 닢
화천(貨泉)은 서기 9년에 신(新) 왕조 (8~24)를 세운 왕망(王莽: BC 45 ~AD 23)이 찍은 돈으로 엽전처럼 생겼다. 가운데에 네모난 구멍 있 고, 오른쪽에 화(貨), 왼쪽에 천(泉)이라 새겼다. 왕 망전으로도 불리는 화천은 한 닢의 동전에 불과하 지만, 매우 새롭고 중요한 가야왕국 발전의 비밀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화천은 평양과 황해도, 바다 건너 일본 규슈(九州)에서 오사카(大阪)에 걸쳐 점 점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찍은 화폐 가 한반도 남단 김해에서 출토되는 것도 신기한데, 서북한 지역과 일본 열도에서까지 함께 출토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중요하다.
해상 왕국
화천이 주조된 약 200년 뒤의 기록이 지만, 『삼국지』「왜인전」은 황해도의 대방군에서 일본 열도의 왜국들에 이르는 바닷길을 전하고 있 다. 황해도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다 남해에 들어서서 동으로 방향을 바꿔 김해에 도착하고, 천 리의 바다를 건너 쓰시마(對馬), 다시 천 리를 건너 이키(壹岐), 다시 천 리를 건너 규슈 북부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바닷길은 기원전후에서 3세 기 후반까지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무역로였다. 김해의 가락국은 중국과 일본 열 도를 연결하는 중개무역항의 위치에 있었다. 현대 동아시아에는 싱가포르, 홍콩, 카오슝(高雄), 상하 이, 나가사키, 부산 등이 중개무역항으로서 유명 하지만, 고대에는 가락국이 거의 유일무이한 중개 무역항이었다. 서북한 지역과 일본 열도 그리고 회현동 패총에서 출토되었던 화천은 이 해로를 통 해 인간과 물자가 왕래되었음을 증명해주는 증거 가 된다.『삼국지』에 따르면 당시 황해도에서 일본 열도까지의 왕래는 2년 내지 2년 반이 걸렸던 것 으로 파악되는데 반해 화천은 불과 10년밖에 통용 되지 않았다. 불과 10년밖에 사용되지 못했던 화폐가 2년 내지 2년 반이나 걸렸던 바닷길에 점점 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은 이 바닷길을 통한 왕래 와 무역이 얼마나 빈번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주 고 있다.
중국의 선진 문물과 일본 열도의 원자재가 김해 의 가락국에서 교환되었고, 가락국에 모인 가야 여 러 나라들의 물품이 중국과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하였다. 가락국과 함께 남해안에 위치한 전기 가야 의 나라들이 일찌감치 고대 왕국으로 발전할 수 있 었던 경제적 바탕이 바로 여기에 있었고, 따라서 우리는 기원전후에서 3세기 후반에 이르는 가락국 과 남해안의 가야 각국을 해상 왕국이라 부르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해상 왕국의 항구
근년에 들어 바로 이러한 해상 왕국의 항구가 김해 지역에서 연이어 발견되고 있 다. 2003년에 발견된 회현동 패총 서편의 봉황대 유적과, 2005년에 발견된 김해시 장유면 율하신도 시조성지의 관동리 유적이 그것이다.
최근 김해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는 해반천(海畔川)과 남쪽 봉황대 사이의 습지에 위치한 봉황대 유적에서 가야 시대 항구의 흔적이 확인되 었다. 김해시가 가야민속촌 조성을 위해 2002년 과 2003년 2회에 걸쳐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 센터에 의뢰한 발굴 조사에서는, 경사면에 자갈을 깔아 배를 끌어올릴 수 있게 한 시설, 해반천 쪽 바 닷물이 봉황대 쪽으로 범람하지 못하도록 목재와 석재를 점토에 섞어 다지고 군데군데 나무못까지 박아가며 쌓아올린 기다란 둑 모양의 호안 시설, 그 안쪽에 늘어서 있던 높은 마루의 창고형 건물 들, 항구를 관망하고 통제할 수 있는 망루 등이 발 견되었다. 특이하게도 건물의 기초는 돌이 아닌 나 무가 사용되었다. 창고 건물이 습지에 가라앉지 않 도록 궁리했던 가야 건축의 지혜였다.
결국 최초로 확인된 해상 왕국의 항구 때문에 민 속촌 조성 계획은 철회되었고, 물을 채우고 작은 배까지 띄운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발굴 조 사로 엄청난 비용과 시간도 들었지만, 근거도 없이 어디에나 있을 법하게 급조했을 가야민속촌에 비 해, 확실한 역사 고고학적 사실에 기초한 가야 항 구로서의 복원과 정비는 그만큼 독창적이자 문화 관광 자원으로서의 가치도 보장될 것이다.
관동리 유적
김해시 장유면 율하신도시조성사업 지 동북단에 남해고속도로와 율하천이 만나는 곳 에서 발견된 관동리 유적은 더 확실하게 갖추어진 가야 항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05년에 경 남고고학연구소의 발굴 조사를 통해 항구의 호안 시설, 호안 시설 앞에 목제 다리처럼 돌출되어 배 를 댈 수 있게 했던 선착장 잔교 시설, 여러 채의 창고형 건물지, 우물이 있는 마을과 고분군, 항구 의 배후 도로까지 발견되었다. 폭 6미터 규모의 배 후 도로는 돌을 깔고 진흙을 다져 노면을 만들고, 도로 양측에는 배수를 위한 도랑이 설치되었다. 마 침 근처에서 한창 공사중인 부산 신항의 배후 도로 와 똑같은 입지와 기능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지 금은 김해평야로 변했지만 옛 김해만의 포구에 실 재했던 가야 항구의 하나가 발견된 것이다.
김해평야는 바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저 넓은 김해평야의 농업 생산력으로 가야 왕국이 발전했 을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야 시대의 김해평야는 바다였기 때문이다. 회현동 패총과 같 은 김해 지역의 패총 유적에서 확인되는 조개는 40종 정도로, 37˜38종이 해수 조개며, 담수 조개 는 2˜3종에 불과하다. 따라서 남해고속도로와 평 행하는 라인으로 형성되어 있는 김해 지역 패총 유 적은 가야 시대의 해안선을 짐작하게 한다. 패총 유적에서 출토되는 조개 가운데에는 굴이 가장 많 아 4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고, 대합이나 꼬막 등 이 그 뒤를 잇는데, 모두 갯벌에서 잡히는 조개들 이다. 따라서 김해 시가지 남쪽에 인접하고 있는 김해평야는 갯벌이 발달하고 밀물과 썰물이 드나 들던 내해였고, 봉황대와 관동리 유적 일대는 가락 국 (금관가야)의 항구였다.
지금은 부산처럼 수심이 깊고 조수간만의 차가 적은 곳이 좋은 항구이지만, 이것은 스크루를 돌려 추진력을 얻는 철선이 고안된 산업혁명 이후의 조건이다. 18세기 산업혁명 이전까지 수만 년 동안 인류가 사용해왔던 최적의 항구는 정반대의 입지 라야 했다. 갯벌이 발달하고 조수간만 차가 큰 곳 이 좋은 항구였다. 밀물 때 내륙 깊이 들어와 배를 얹혀두고 짐을 내리고 물과 식량을 보충한 뒤, 다 시 밀물이 되면 배를 띄워 먼 바다로 나가 항해하 는 그런 방법이었다.
고대 일본 가요를 담고 있는 8세기의『만엽집 (萬葉集)』은 지금 메트로폴리스로 변한 오사카에서 ‘밀물이 들어왔으니 배 띄워 먼 바다로 나가자’는 노래를 전하고 있다. 바로 이 같은 고대 항구가 김 해 시내의 봉황대와 장유면 율하의 관동리에 있었 던 것이다. 봉황대 유적 바로 옆 해반천은‘바다를 끼고 있는 내’라는 뜻의 지명이다.
고려 말에는‘왜구(倭寇)가 김해읍성 바로 앞 갈대 숲 속에서 튀어나와 미처 방비할 틈이 없었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술도 있고, 조선 후기 이중 환의『택리지(擇里志)』는 남해안 해운에서 얻어지 는 이익의 전부를 김해가 차지한다고 기록하고 있 다. 사실 김해평야가 지금과 같이 안정된 농토로 변했던 것은 1930년대에 낙동강 쪽에 제방을 쌓아 범람을 막고 녹산 수문을 만들어 바닷물의 역류를 막은 뒤부터였다. 따라서 가야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 시대와 조선 후기까지도 김해평야는 넓 은 갯벌의 바다였고, 김해는 남해안 최대의 항구였 다. 김해(金海)의 바다‘해(海)’는 그런 역사적 전통 과 의미를 담고 있다. 옛 김해만이었던 김해평야에 서 가야의 무역선이 인양될 날을 기대하고 있다.
관문 사회의 고대 왕국
「왜인전」이 전하는 바닷 길, 곧 황해도 대방군에서 남해안을 거쳐 일본 열 도에 이르던 바닷길은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 었던 한(漢)의 선진 문물이 이동하던 루트이기도 했다. 김해를 비롯하여 남해에 인접해 있던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이러한 선진 문물 이동로에 대해 문 호를 열고 있는 관문(Gateway)과 같은 위치를 차지 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받아들였던 중국 선진 문 물을 바탕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김해 시내의 대 성동 고분군과 주촌면의 양동 고분군, 창원 주남저 수지 옆 다호리 유적, 고성읍내의 동외동 패총 등 에서 출토되고 있는 중국제 청동거울과 청동솥, 칠 기 같은 중국 계통의 문물들은 이러한 루트로 수입 되었던 선진 문물들이었다.
이렇게 김해의 가락국을 비롯한 남부 가야의 여 러 나라들의 발전에는 중국과의 외교와 해상 교역 이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중국 계통 선진 문물의 확보 여부는 국가로 발전해가는 데 절대적 으로 필요한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남해에 인접 한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해상 교역권 쟁탈전을 벌 이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는 이러 한 전쟁 가운데 하나를‘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 으로 전하고 있다. 201˜212년에 사천·고성·칠 원·마산 등 여덟 개의 가야 소국들이 김해 가락국 을 공격하였고, 혼자 감당하지 못했던 가락국은 신 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전쟁 결과는 신라의 원병 을 받은 가락국이 포상팔국의 침입을 물리친 것으 로 되어 있지만, 포상팔국의 군대는 부산 앞바다를 지나 울산까지 진출하였고, 전쟁은 해전(海戰) 양상 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전이라 해도 좋을 만한 이 전쟁은 기원전후에서 3세기 전반까 지 김해 가락국이 장악하고 있던 해상 교역권에 대 한 도전이나 쟁탈전이었다. 이와 같이 남해안 가야 제국의 발전에서 해상 교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 대적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김해를 비롯한 남부 가 야의 여러 나라들을‘해상 왕국’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