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鍾夏 牧師에 對하여
林鍾夏 목사는 1885년 4월 4일 경상북도 인동군 읍내면 구제동(현-구미시 진평동 517번지)에서 父親 林孔瞻(1860년-1937년) 장로1)와 母親 金煩伊의 2남 중 次男으로 태어났다. 소년시절 7년간 서당에서 한문을 사숙하였고, 1906년 8월 12일 이미 장가를 든 몸으로 啓聖中學校에 입학하여 1911년 6월 13일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2)
啓聖中學校를 졸업 후 어디서 몇 년간 助師 생활을 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나 확실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는 1920년 6월 10일 平壤神學校를 제13회로 졸업했다.3) 동기생들 중에는 廉鳳南, 朴德逸, 朴汶燦, 裵恩希, 金鎭鎬 등이 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 후 善山郡 6처교회에서 청빙을 받았다. 1920년 6월 14일 安東邑禮拜堂에서 열린 제8회 慶北老會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善山郡 6처교회에서 邦惠法 선교사(Rev. H. E. Blair)와 同事牧師로 임명을 받았다. 이리하여 林鍾夏 목사는 계성중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목사가 된 것이다. 그는 이어서 1921년 1월부터 達城郡 3처교회-租岩敎會(현-월배교회)와 舌化敎會 玄風邑敎會-를 겸임하는 목사로 시무하였다. 이 당시 대부분의 목사들은 성경학교 출신들이었던 사실에 비하면 林鍾夏 목사는 장로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 중학교를 졸업하고 정규 신학교를 졸업했으므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목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邦惠法 선교사에게 신임을 받은 듯 하다. 邦惠法 선교사가 慶北老會長일 때(1923년-1924년) 李萬集 목사 후임으로 南城町敎會 목사로 임명을 받았고, 남성정교회를 사임한 후에는 啓聖中學校 성경교사로 6년간(1923-1929년) 근무했다.4) 또한 그는 1929년부터 1938년까지 10년간 신명학교 성경교사로 근무했다. 1931년 남성정교회에서 東雲町敎會(현 대구중부교회-기장측)가 분립할 때 초대목사로 시무하였다. 그는 이 교회를 1935년 후임 姜信昌 목사가 부임할 때까지 4년 4개월을 시무하였다.5)
1935년 10월 興海敎會(현-흥해중앙교회)에 부임하여 1940년 1월 李春仲 목사가 부임하기까지 4년 3개월을 시무하였다. 1936년 11월 23일 慶東老會 창립시 창립 노회원으로 참석하였으며, 1938년 4월 5일 제3회 2차 慶東老會 臨時老會에서는 노회장 李泰鶴 목사가 경북노회로 이명하여 가게 됨으로 임원을 보궐선거할 때 權永海 목사가 회장으로, 林鍾夏 목사는 부노회장으로 당선되었다.
1940년 1월 佛國寺敎會(현-구정교회)에 부임하여 시무하는 동안에 겨우 죽으로 끼니를 이을 정도의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교인들과 함께 호흡했고, 무섭고 엄격한 목회를 한 剛斷있는 목회자였다. 그에 관한 일화는 많다. 그는 교회에 오는 교인 가운데 化粧을 한다거나 奢侈스러운 복장을 한 교인들이 있으면 예배 중에라도 호통을 칠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목회자였다. 그는 독신으로 지내다가 불국사교회(현-구정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처가가 부유한 편이어서 그에게 진수성찬을 대접하자 나라 전체가 어려운 때에 이러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정도로 강직하고 양심적인 목회자였다. 그는 그 교회에서 시무하는 조건으로 자기에게 거저 먹을 양식만 주면 감사하다는 주문을 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그에게 넉넉한 양식은커녕 겨우 죽으로 끼니를 잇게 해주었을 뿐이었다. 교회의 안과 밖, 교인과 목회자가 함께 어렵고 가난한 생활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1943년 1월 10일(주일) 낮 예배를 마치고 나서 교인 가정을 심방하고 돌아온 후 5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후손으로는 2남4녀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장남 林慶澤은 의사로서 대구 적십자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다.
林鍾夏 목사와 金達伊의 자녀=林慶澤(1907년), 林慶玉(1912년), 林慶岳(1916년), 林慶愛(1918년), 林慶喜(1923년)
林鍾夏 목사와 李三山의 자녀=林潤澤(林義錫 1929년)으로 2男4女를 두었다.
가난하고 궁핍한 그의 생활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를 안락하고 풍요로운 저 에덴의 동산으로 인도하셨던 것이다. 불국사교회(현-구정교회)를 위해 충성된 일을 하다가 순직한 최초의 목회자였다. 일제의 거센 탄압에 교회의 뿌리가 흔들릴 정도의 어려운 시절에 그의 엄격한 목회가 아니었더라면 교회는 내외의 어지러움 속에 쉽게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자신의 어려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어려움에 더욱 마음 아파하며 불국사교회(현-구정교회)를 굳게 붙잡았던 목회자였다.6)
林孔瞻 長老와 金煩伊의 子女=林炳夏(1882년), 林鍾夏(1885년).
林孔瞻 長老와 尹昇順의 子女=林鳳善(1897년), 林龍燮(1899년), 林舜夏(1903년), 林順南(1905년), 林月蘭(1908년)으로 4남3녀를 두었다.
1) 임공첨 : 1917년 칠곡군 진평교회(현-구미 강동교회)에서 장로로 장립하였다. 그의 딸 임봉선(林鳳善)은 신명학교 제6회 졸업생(1918년)이며, 졸업 후 모교에서 성경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1919년 대구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2) 계성중학교 학적부 참고
3) 김요나 : 총신90년사 p.906(제13회 졸업생 명부) 참고
4) 김태동 : 계성90년사 p.559(구직원 일람표) 참고
5) 李在元 : 大邱第一敎會百十年史, p.202-203 참고(紛紜 中의 세분 목사-임종하 박문찬 박정찬 중에서)
6) 구정교회 : 九政敎會 六十年史, 1984년, p.92-94(어려운 시대의 목회자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