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성민은 스크린에 비친 상희를 향해 살짝 웃어 주었다. 성민이 통제실로 들어 오자 안에 있던 H-39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맞았다.
“자, 임시 사령관님. 작전을 설명해 보실까요?”
모두 자리에 앉자 하인더가 말했다. 스크린 속에는 윤성을 비롯 그들 일행이 모두 모여 앉아 있었다.
“우선 브레이닝의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겠어요. 다들 아시다시피 그는 지금 자기가 신의 위치에 올랐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허황된 꿈을 꾸고 있어.”
진수가 말했다. 성민은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게 아닌 것 같아요. 그는 진짜 신이 되려 하고 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성민의 뒤에 앉아 있던 신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웨더링 하이츠 지하 4층. 그러니까 중앙 전산실 바로 옆방에는 아주 특별한 장치가 있어요. 그건…”
성민은 차분한 음성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윤성이 자리에서 일어 났다.
“뭐라구요? 그럼 나머지 시민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마 한 곳으로 몰아 놓고 장치를 가동 시킬 생각인 모양이에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 더욱 높은 단계로 진화 한다? 이거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발상인걸?”
하인더가 어깨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성민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주위가 조용해 지길 기다렸다.
“조윤성 장군께서는 시민들이 모일 법한 곳을 찾아 그들의 탈출을 도와 주세요. 말씀 드렸 듯이 지구는 방사능 오염으로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우리도 우주로 나갈 수 밖에 없어요.”
윤성은 거수 경례로 답을 대신했다. 어깨에 박힌 세개의 별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더욱 반짝거렸다.
“난 지하 4층으로 가서 그 장치를 파괴할 거에요.”
성민의 말에 하인더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그냥 사람들만 탈출 시켜서 우리도 우주로 가는 게 더 나은 방법 같은데?”
“그 장치는 한 사람만 들어 가도 이론적으로 작동이 가능해요.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브레이닝이 혼자서 자신을 신격화 시키지 말란 보장이 없죠.”
신이 성민의 말을 받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브레이닝은 새로운 인류를 만들려 할거야. 지하 3층의 양성 시설은 엄연히 그래로라구.”
성민은 하인더를 가만히 쳐다 보았다.
“당신, 나에게 분명히 생각 없이 당신들을 만들어 놓고 무책임하게 나온다고 했었지? 만약 브레이닝에 의해 새로운 인류가 탄생된다면…”
“알았어. 그런 비극은 반드시 막아야지. 그럼 웨더링 하이츠 전체를 폭파 시키는 건가?”
성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성은 일행들을 모았다.
“그럼, 정성민 박사. 우리는 당신이 보내 준 계획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겠어요.”
“네, 수고 하세요. 18만명의 탈출 작전은 결코 쉽지 않을 거에요.”
윤성이 스크린에서 사라지자 성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자, 우리도 움직입시다.”
“아빠…”
성민은 사진을 잠깐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품속에 넣었다.
“너도 꼭 가야 하는 거야?”
신이 장비를 챙기며 성민의 어깨를 잡았다. 하인더는 일부러 이들의 행동을 모른 체 했다.
“이번엔 말리지 마. 이건 모두 내가 초래한 일이야. 내가 책임 지고 끝내야 해. 근데 너도 가려구?”
“그럼, 당연하지 난 너의 보디 가드인데…”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하인더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성민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하인더, 당신도 가는 거야?”
“이것봐, 신은 당신 것만이 아니야. 나한텐 친구란 말이지. 원래부터가 사랑과 우정은 양자 택일이라…”
“뭐야?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성민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하인더를 보았다. 하인더는 싱글거리며 부하들에게 소리 쳤다.
“우리는 여기서 소형 비행선으로 갈아 타고 웨더링 하이츠로 들어 간다. 나머지는 우주선들의 경호와 웨더링 하이츠의 대공 방어 시스템을 무력화 시킨다. 알겠나?”
비행선 안에 있던 사람들은 손을 번쩍 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녀석들 성민양을 협상 카드로 들고 나오다니…”
브레이닝은 술잔을 집어 던졌다. 그는 잠시 후 윌리엄을 불렀다.
“어째 조용한 걸? 브레이닝 정도라면 황영식이 거창할 줄 알았는데..”
하인더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신은 총을 장전하며 성민에게 물었다.
“이거 가지고 있어. 연막탄과 권총이야. 쓸모가 있을 지도 모르지.”
성민이 신이 건낸 것을 받아 쥐려 할 때 격납고의 문이 열렸다.
“하인더, 결국은 원하는 걸 얻어 낸 것 같구만..”
브레이닝이 천천히 걸어 나오며 성민에게 말했다.
“성민양, 이 쪽으로 오시죠. 제가 보호 해 드리겠습니다.”
“네, 박사님..”
성민은 신과 하인더를 한 번 씩 보며 앞으로 다가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브레이닝은 성민의 팔목을 잡으며 손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어디선가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잠깐, 당신 지금..”
성민이 뒤를 돌아보려 할 찰나 출입문은 닫혀 버렸다.
“자, 갑시다. 새로운 세계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민은 심호흡을 하며 브레이닝을 따라갔다.
“이봐, 무사한가?”
“그래, 예상 했던 일 아냐?”
총성이 멎고 격납고 안을 가득 채웠던 연기가 빠지가 하인더가 신에게 조심스럽게 기어 왔다. 신은 하인더를 향해 총을 쏘았다.
“후…이런…”
하인더는 뒤에서 쓰러지고 있는 경비병을 돌아 보며 신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자, 가자구…”
“어때? 찾았나?”
윤성이 베클라이에게 물었다. 연우와 진희가 컴퓨터와 씨름하는 것을 보며 진수가 대신 대답했다.
“18만명이 모두 들어 갈 정도라면 종합 체육관과 예술 강당 밖에 없는 거 아닌가요?”
윤성은 지도를 끄집에 냈다.
“가만.. 지상부의 평면도와 정성민 박사가 그려준 지하 4층의 평면도를 비교해 보면…”
진수가 볼펜을 집어 던지며 박수를 쳤다. 모두들 미소를 떠올렸다.
“자, 빨리 빨리 들어 오세요!!”
무장한 군인들이 사람들을 다그쳤다.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서 체육관으로 들어 가고 있었다.
“대위님, 저길…”
병사 중 한 명이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대위라고 불린 병사는 부하들에게 외쳤다.
“전원 전투 준비!! 당신들은 빨리 안으로 들어가!!”
그는 남은 사람들을 안으로 몰아 넣으며 소리를 높였다.
“장군님! 체육관에 도착 했습니다…”
윤성은 자리에서 일어 났다. 상희는 그의 옆에 앉아서 초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 보고 있었다.
“함대 포격 준비. 각 우주선은 기체를 쳬육관의 세 부분에 착륙 시킨다.”
“안됩니다. 저들의 포격이 심해서 더 이상 접근은..”
윤성은 이빨로 주먹을 깨물었다.
“자, 어떠냐? 이놈들아. 호락 호락 보낼 수는 없다.”
지상에서 우주선을 공격 하던 군인들이 하늘에 대고 외쳤다.
“콰—앙!!”
“뭐야?”
그들은 갑작스런 폭음에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대..대위님…”
검정을 뒤집어 쓴 병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 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H-39의 군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우주선들이 점점 아래로 내려 오고 있었다.
“뭐라구? 그들을 막아!!”
브레이닝이 통신기에 대고 외쳤다.
“그럴 필요 없어, 박사..”
브레이닝은 천천히 통신기를 내려 놓으며 성민을 보았다. 그는 성민의 손에 들린 권총을 보며 말했다.
“이런, 미처 알아 봤어야 했는데. 그걸로 어쩌실려구?”
브레이닝은 성민에게 다가섰다. 성민은 한 걸음 물러 났다.
“자, 그거 내려 놓아요. 날 따라 가는 거에요. 우리는 신이 될 수 있어. 그래서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구. 자, 당신은 날 쏠 수 없어.”
성민은 표정이 약간 흔들리더니 손에 주었던 힘을 빼기 시작했다. 브레이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성민의 총을 집으려 했다.
“바보..”
브레이닝은 복부를 움켜쥐며 앞으로 쓰러 졌다. 성민은 슬픈 눈으로 브레이닝을 내려다 보았다.
“어리석은 사람. 어쩌다 이러..”
성민은 급히 뒤로 물러 섰다. 브레이닝은 손을 날려 성민의 군총을 쳐 버렸다.
“말로 해서는 안되는 아가씨로군..”
“악..”
순간 복도가 흔들리면서 성민과 브레이닝은 중심을 잃었다. 브레이닝이 고개를 드니 동그란 물체를 쥐고 있는 성민이 보였다.
“너..너는..”
브레이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민은 그 물체를 바닥에 떨어 뜨렸다. 펑하는 소리가 나더니 연기가 자욱하게 올랐다.
“이런, 나쁜 계집애 같으니…”
브레이닝은 방아쇠를 마구 당겼다. 잠시 후 연기가 사라지자 성민은 사라지고 없었다.
“좋아. 나도 생각이 있다구. 당장 저 우주선을 날려 버리겠어.”
“얼마나 탑승했지?”
진수가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상희가 손가락 다섯개를 펴 보였다.
“이제 반쯤 탄 것 같아요.”
“이 상태로는 늦어. 더 빨리 하도록 해.”
윤성은 시계를 들여다 보며 대답했다.
“후.. 성민양 일행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시각, 성민은 중앙 전산실에 도착했다. 그녀는 출입문에 기대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그녀는 윗도리를 벗어 소매 부분을 찢었다.
“아아…”
성민은 복부에 대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때었다. 피가 쏟아져 나오며 상의를 붉게 물들였다.
“젠장…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성민은 이를 꽉 물었다.
브레이닝은 지하 2층으로 향했다. 통제실에 도착한 그는 출입문을 열어 제꼈다.
“무얼 하려고 하나..”
브레이닝은 뒤로 천천히 물러 섰다. 앞에 선 사람은 붉은 장식이 달린 단검을 들고 있었다.
“이..이봐 잠깐..허헉..”
준성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브레이닝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준성은 그를 잠시 내려다 보더니 아래층으로 향했다.
“잠깐 서봐.”
하인더가 신의 앞을 막았다. 그는 저쪽에서 걸어오는 준성을 노려보았다.
“먼저 가. 저 놈은 내가 막겠어.”
신은 하인더의 손을 잡았다.
“어서 가. 가서 성민씨를 지켜 줘.”
신이 아래층으로 향하는 것을 본 하인더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가 버튼을 누르자 단검의 길이가 늘어났다. 준성도 같은 행동을 취했다.
“정말 끈질기군. 뭐 때문인지 물어도 되겠나?”
“난 나의 사명을 다 할 뿐. 다른 이유는 없다.”
하인더는 손에 힘을 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준성은 팔을 높이 들었다.
“나 역시 나의 할 일을 할 뿐이다. 신념 앞에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
“나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검이 불꽃을 내며 부딛혔다.
“성민아…!”
전산실에 뛰어 든 신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의자에 기대 있는 성민을 안아 일으켰다. 성민이 창백해진 얼굴을 들어 신을 보았다.
“저기…이걸 작동시켜 여기의 요격 시스템을 무력화 시켜. 그리고 저 방으로 가서 신격화 장치를 폭파 시켜줘.”
신은 성민을 조심스럽게 내려 놓으며 컴퓨터 앞으로 갔다.
“장군님! 요격 시스템이 풀렸습니다.”
“좋아, 모두 이륙한다!!”
세대의 우주선은 굉음을 내며 하늘로 솟았다.
“성민아, 이제 되었지?”
신은 뒤를 돌아 보았다.
“미안.. 그 동안 고맙다는 말을 못했던 것 같아. 나 때문에 슬픈 인생을 살아야 했다는 거 알아. 그런데도..”
“이 바보야. 널 만났다는 것, 그리고 널 지키는 사명을 타고 났다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괜찮은 인생을 살았어.”
성민은 손을 들어 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우리가 평범한 남자와 여자로 만났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바보야…”
신은 성민을 끌어 안았다. 잠시 후 신이 성민을 내려 놓았을 때 성민은 이미 정신을 잃고 난 후였다.
“난 신념대로 살았는데, 그게 틀렸나봐.. 이봐 하인더, 날 미워하지 않나?”
준성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의 손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당신을 왜 미워 합니까? 내가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해준 장본인인데….친구 녀석이 그러더군요. 가치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찾아 나서야 하는 거라고.”
“하인더…인류는 살아 날 수 있을까?”
하인더의 무릎에 기댄 준성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하인더는 평온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새로운 시대가 올 거요. 이념과 대립의 시대가 아닌 화합과 공존의 세상이..그들이라면 틀림없이 잘 해낼 겁니다.”
준성은 눈을 감으며 칼을 내 던졌다.
“이제 이런 건 필요 없겠지. 나 같은 인간도 마찬가지야. 새로운 시대라.”
준성의 호흡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하인더는 그런 준성의 곁에 앉아 계속 그를 지켜 보고 있었다.
“성민이는 비상용 탈출 캡슐에 실어 보냈습니다. 전 일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스크린 속의 신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진수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상희는 소매를 들어 눈가를 찍어 내었다.
“전 인류가 당신에게 감사할 것이오. 정말 고맙소.”
윤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이마에 올렸다. 뒤에 선 모든 사람이 그와 함께 신을 지켜 보았다. 스크린이 꺼지자 신은 몸을 돌렸다. 그는 전산실을 한 번 둘러 보았다. 신은 천천히 신격화 장치에 다가섰다.
“성민아… 난 약속을 지킨 거지?”
상희는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밝은 빛이 티벳 고원을 감쌌다. 상희의 뒤에 선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이제 이걸로 비극은 끝나는 걸까요?”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고정한 체 창밖을 응시했다. 상희의 뺨에 맑은 물이 흘러 내렸다.
“아, 저기…언니에요.”
상희가 반짝이는 작은 물체를 가리켰다. 하늘에 멈춰 선 듯 떠 있는 그 물체 뒤로 태양이 찬란히 그 모습을 드러 내었다. 상희가 탄 우주선이 천천히 그 반짝이는 물체에로 접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