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을 오르다가 남한산성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벽암선사의 필적을 대하게 되었고
또 남한산성 소설속에서 벽암선사의 발자취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 화엄사에서 벽암선사의 탑비를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아 더 많이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남한산성 역사박물관에 다시 들린 다음 벽암선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봅니다.
호국정신의 산실 남한산성
인조 2년(1624) 벽암 각성선사가 조선8도도총섭으로 전국의 승군을 소집하여 남한산성 축성업무를 수행하였다.
남한산성에서는 원래 망월사와 옥정사 2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팔도에서 소집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하여
7개 사찰을 새로 지어 장경사, 국청사, 개원사, 한흥사, 천주사 동림사, 남산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성내의 사찰은 모두 9개가 되었다. 산성이 완공된 후에는 전국에서 상경한 승려 500-600명이
승군을 조직하여 산성수비를 책임지게 하는 산성승번제도를 실시하여 1894년 갑오경장이후 폐지될때까지
270년간 지속되었다. 한편 산성내 9개 사찰은 1905년 조선군대 해산령이후 1907년 일제에 의한 무기및
화약수거때 폭파되는 참화를 겪기도 했다. 현재는 개원사. 망월사, 장경사, 국청사 등 4곳의 사찰은
복원되었지만 5곳은 폐사지로 남아있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간직한 남한산성 내의 9개 사는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절의와 충절로써 국가를 수호한 호국승군의 정신적 도량이었다.
벽암 각성(碧巖 覺性)선사( 1575-1660)의 필적
선승, 승병장, 성은 김씨, 자는 정원, 호는 벽암, 각성은 법명이다.
1624년 남한산성을 축조할때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승군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향하던중 전쟁이 끝나 승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저술활동을 하였으며 화엄사에서 나이 83세, 법랍 73세에
" 도업에 힘써 국은에 보답할 것 " 과 " 사후에 비를 세우지 말것 " 을 유언하고 입적하였다.
남한산성 축성에 진력을 다해 완성시킨 공으로 국가가 튼튼하게 되어 각성선사의 은혜를 갚고
널리 교육을 알리며 해와 달이 비치듯이 나라에 한분 밖에 없는 분으로 특별히 의복과 증표를 내린다는
교지 내용이다.
남한산 국청사(南漢山國淸寺)
국청사는 이조 인조 3년(1625년) 각성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각성대사는 인조로부터 팔도도총섭총절제중군주장(八道總攝總節制中軍主將)으로
임명을 받은후 전국 팔도에서 승군을 모아 남한산에 성을 축성하시고 9개 사찰을 창건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한 수모를 또다시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승군을 훈련하고
군기며 화약 군량미를 비축하였으니 그 중 하나가 국청사이다.
개원사지 경기도 기념물 제119호)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198-1
개원사는 조선 인조 2년(1624) 임진왜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승도들을 총지휘하는 불영사찰로 건립되었다. 그후 고종31년(1894) 갑오경장으로
의승방번이 폐지될 때까지 270여년간 번창했으며 전국 사원들의 승풍을 규찰하는 규정소가 설치되어
명실상부한 조선불교의 총본산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현재 군기고터, 누각터, 등에는
초석, 돌계단, 박석 등이 남아 있어 옛 개원사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벽암국일도대선사비(壁巖國一都大禪師碑)
화엄사 중창의 주역인 벽암 각성의 탑비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크게 활약하였고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축성하는 등 조선 후기 사회에서 불교계의 위상을 높이는데 공헌하였다.
또한 전란 후에는 화엄사를 비롯하여 해인사, 법주사. 등의 여러 사찰의 중수를 주도하여
조선 후기 불교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화엄사 입구의 오른쪽에 벽암선사의 탑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개원사를 한비퀴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흰토끼를 보았는데
풀이랑 꽃잎을 맛있게 먹고 있어요.
때마침 개원사 산사에서는 저녁 예불을 알리는종소리가 울리고
토끼의 맑은 눈빛이 각성선사의 환생인양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첫댓글 역사박물관과 국청사, 개원사, 화엄사로 이어지는 각성선사의 높으신 뜻과 업적이 참으로 우러러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