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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칠언(架上七言)
인류역사상 최대의 전투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전투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 수백억 혹은 수천억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투였으며 결전은 사탄과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각자는 이기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으며,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승리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는 힘을 다하여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고 죽게하려 했으며 그는 그것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였으며 인류 세계에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나 영역을 남겨놓지 않게 되었다고 확신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는 3일후에 부활하셨으며 그것으로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던 날에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셨으며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사 죽으시던 날, 그 한 순간 순간들은 그분의 위대한 승리로 향하는 발걸음이요, 단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건은 인류 역사의 한 중심에 있으며 그 이전 세대는 그 시점을 바라보았고, 이후 세대들은 그 시점을 돌이켜 보게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성경상의 가장 중요한 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말씀들이요, 그 날의 위대한 사역은 인류역사를 바꾸어놓은 것이요, 수많은 인생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고, 무수한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놓은 대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주제를 충분히 다룬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과 그저 제가 좀 느끼고 믿고 있는 바를 함께 나눈다는 뜻에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정도에 해당될 수도 있겠으나, 성령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한 읽으시는 분들에게 유익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 매달리시사 극한의 고통을 당하시며 외치셨던 일곱 마디의 말씀들은 그분이 죄없으신 분이셨다는 것과,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셨던 점과, 평생 거짓말하시지 않고 이땅을 살았던 유일한 분이셨음과, 흠없으신 분이며, 오직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셨음을 생각할 때, 우리 모두는 그분의 진리를 다시 한번 가상칠언 (架上七言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을 통해 숙고해보고 싶을 것입니다.
존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참 선지자로서 흠없는 삶을 사시며, 우리에게 큰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이 세상에 부족함이 없이 살수 있는지와 자유를 누릴수 있는지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곳곳에서 증거하시고 전파하셨으며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후에 그분은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자신을 내려놓으심으로 자기 자신을 흠없는 희생예물로 인류를 대신하여 드리시고자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먼저 그분은 아론의 반차를 따랐던 대제사장에게 자신을 붙잡히게 하시고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끌려가 심문을 당하셨으며, 우리를 대신하여 사형판결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험한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그 날에 그분은 참 대제사장으로서 흠없는 희생양인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시고 죄없는 피를 십자가상에서 흘리심으로 인류 모두의 죄값을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는 희생제사를 그날에 이루셨습니다. 그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은 완성된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이 땅위의 진정한 왕으로서 통치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날까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며 현재에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며 우리를 위해 대언하여 주시고(요일 2:1) 우리의 삶을 돕고 계십니다. 그분은 머지 않은 장래에 만왕의 왕으로서 천년왕국의 국왕으로서 통치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외치셨던 일곱마디의 말씀들 곧 가상칠언은 그 의미가 중요하며 성경의 핵심이요 진수라 할 것입니다. 그 순서 또한 우리가 알면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 우선 십자가 사건들의 순서부터 살펴봅니다.
(1) 십자가 사건의 순서
1)예수께서 골고다에 도착하시다(마 27:33)
2)예수께서 진통음료 거절하시다(마 27:34, 마가 15:23)
3) 두 행악자들 사이에서 못박히시니라. (마 27:35-38, 마가 15:24-28, 루카 23:33-38, 요 19:18)
4)그분의 죄목 명패 부착(마 27:37 막 15:26 룩 23:38 요 19:19-22)
5) 군병들이 그분의 옷들을 나누다 (마 27:35, 마가 15:24, 루카 23:34, 요 19:23, 24)
6)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옵소서, 저희는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함이니이다 (루카 23:34)
7) 행인들, 수석제사장들, 유대인들이 예수를 조롱하다 (마 27:39-43, 막 15:29-32, 뤀 23:35)
8) 군병들도 예수를 비방하다 (룩 23:36)
9) 강도들이 예수를 비방하다,
(마 27:44, 막 15:32, 룩 23:39)
10) 나중에 한 강도는 회개하고 그분을 믿다(룩 23:40-42)
11)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룩 23:43)
12)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13) 큰 어두움이 온 땅을 덮다 (마 27:45, 마가 15:33, 룩 23:44)
14) 성전 휘장이 찢어지다(룩 23:45)
15)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47, 막 15:34-36)
16) 내가 목마르다(요 19:28)
17) 식초를 받으시다(마 27:48, 요 19:30)
18) 그것이 이루어졌도다(요 19:30)
19) 아버지여 당신 손에 나의 영을 맡기나이다. (룩 23:46)
20) 그분의 영을 놓으시니라(마 27:50, 막 15:37, 룩 23:46, 요 19:30)
21) 성전 휘장의 찢어짐(마 27:51, 막 15:38)
22) 지진, 성도들의 시신들의 부활(마 27:52, 53)
23) 백부장의 고백 (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도다) (마 27:54)
24) 군병들 행악자들의 다리 절단하고, 예수의 옆구리 창으로 찌르다(요 19:32-34)
25) 아리마다야 요셉의 장례(마 27:57-, 막 15:43-, 룩 23:50-, 요 19:38-)
이 순서는 좀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대의를 이해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으리라 믿어집니다.14)와 21) 에서 성전휘장이 찢어진 것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루카 복음은 흔히 순서와 상관없이 기록한 성경이라고 지적하므로 그것이 순서에 상관없이 마치 어두움이 온 땅에 내릴 때 일어났던 것처럼 먼저 기록되었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의 해석은 성전의 입구인 성소에 들어가기 전의 휘장이 어두움이 내렸을 때 먼저 찢어진 것이고, 예수님이 죽으신 다음에 찢어진 것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찢어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큰 어두움이 온 땅을 덮은 사건은 요한 계시록에서는 8장 1절에서 하늘이 반시쯤 고요하였던 사건으로 저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성도들의 기도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계 8:3-4)
(2) 가상칠언(架上七言)
먼저 가상칠언만의 순서를 다시 살펴봅니다.
-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옵소서, 저희는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루카 23:34)
-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룩 23:43)
-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이니라!”
- (요 19:26-27)
-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47, 막 15:34-36)
- 내가 목마르다!(요 19:28)
- 그것이 이루어졌도다!(요 19:30)
- 아버지여, 당신의 손에 나의 영을 맡기나이다.”(룩 23:46)
이 순서에 있어서도 실제와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의 대의를 파악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1)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옵소서, 저희는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루카 23:34)
율법에 의하면 모르고 짓는 죄는 그것이 사람을 죽게한 경우라도 사함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신 19:4-5) 그러나 미워하거나 원한으로 사람을 쳐죽이면 그는 용서받지 못하였습니다.(민35:20-21) 고의로 살인한자의 생명의 속전을 받아서는 안되고 반드시 그를 죽여야 했습니다(민 35:31)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은 그분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지도 못하였습니다( 마 26:60, 막 14:55, 룩 23: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분을 고의로 죽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인생들 모두는 철부지와 같았으며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비하셔서 그들 모두의 죄를 담당하시고 싶어하셨으며 따라서 그들 모두가 고의로 살인을 하고 있다면 그들이 죄값을 담당해야 했으므로, 예수님 스스로가 그들의 죄를 담당하시고자, 그들은 부지중에 죄를 범하는 것으로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들을 예수님 스스로가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의 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철부지들의 범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그 모든 죄들을 담당하게 하셨던 것이며 이제 우리는 그 사실과 진리를 인정하고 믿기만 하면 모든 죄에 대하여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하셨던 첫번째 말씀은 인간들의 고의적 살인행위를 부지중의 죄로 바꾸어놓고 그 죄를 사함받게 해달라는 아버지께 드리는 간구요, 인간들을 향한 위대한 복음의 선포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룩 23:43)
이 말씀은 십자가에 매달렸던 한 강도가 뉘우치고 주 예수님께“주여, 당신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하고 부탁한 말에 대하여 예수님이 응답으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불렀으며, 예수님은 그분의 나라를 갖고 있으며, 예수님의 나라에 이르신다는 것, 예수님이 그 나라의 주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끝이 아니며, 죽음 이후에 가게 되는 나라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담대하여 자신이 행악자요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께 간구하여 그분이 기억하여 주기만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뢰와 믿음에 대하여 예수님은 길게 설교하시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 거짓말하시지 않으시는 주 예수님은 다시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구를 살았던 사람들 중 유일하게 평생동안 한번도 거짓말을 하시지 않았던 분입니다. 그분이 여기서 다시 진실로, 진실로, 라는 말씀으로 강조하며 그 강도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강도가 낙원에 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강도가 무엇을 잘했기에 그토록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라는 말씀으로 강조하셨을까요?
제가 보기에 그는 벌거벗고 피흘리며 죽어가는 행악자에 불과하였으며, 그에게서 어떤 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십일조를 제대로 낸 적도 없을 것입니다. 그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였으리라는 상상을 해볼 수도 없습니다. 그는 제사장이나 장로나 서기관들이 흔히 내세울 수 있는 의의 행위들을 해본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낙원에 그분과 함께 있게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종교생활로는 흠잡을 데 없었던 당시의 서기관들, 제사장들, 대제사장, 장로들, 파리새인들 등은 그들이 바라고 바라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으며 그분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후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메시아를 죽이고 하나님께 반역한 죄로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그 강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카톨릭의 연옥설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카톨릭은 특별히 성인으로 선포되지 않는 한 모든 신자들은 연옥으로 간다고 가르치며 주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황이 매우 특별한 성인의 믿음을 가졌다고 시성해주지 않는 한 모든 카톨릭 신자들은 연옥으로 가서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연단을 받은 다음, 지상에 살아 남아있는 자들의 기도와 자선행위로 말미암아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으며, 특히 죽은 사람을 위하여 살아남아 있는 사람이 어떤 기도를 한다하여 그의 영적 신분이 달라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노아, 다니엘, 욥이 살아 있을 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고 하시며(에스겔 14:14)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리라고 (겔 14:20)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 모두가 연옥에 가는 것이며 거기서는 지상에 살아남아 있는 자가 기도하면 영적 신분이 달라진다고 가르치는 카톨릭 교리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롬 3:20-23).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 다른 사람의 기도나 자선행위나 헌금이나 기부행위로 연옥에서 빨리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교리는 더 더욱 엉터리입니다. 카톨릭은 마더 테레사 같은 유명한 사람들은 연옥에 가지 않고 천국으로 곧바로 갈수 있도록 교황이 시성해준다고 합니다. 돈없고 빽이 없거나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은 연옥에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시성된 사람은 아마 2천명 정도될 것입니다. 그 나머지 수십억은 카톨릭 스스로가 연옥으로 간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점에서는 카톨릭이 좀 정직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카톨릭 교도들은 연옥에서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기약없는 고통가운데 영원히 있을 것이며 이유는 어떤 행위로도 연옥의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연옥이 바로 지옥임을 나중에야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보듯이 십자가에 달려 있던 행악자는 자선행위도, 헌금도, 새벽기도나, 주일성수도 한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연옥으로 가지 아니하고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으로 갔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진정으로 물(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 모두는 저 강도처럼 아무런 공로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이 모든 죄를 대속하고 죄값을 지불해주셨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값없이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 강도처럼 주님으로부터 확실한 죄사함의 응답, 구원의 응답을 받으셨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시다면 당신은 버리운 자입니다(고후 13:5) 그러므로 그분앞에 회개하며 죄사함의 확신을 갖게 해달라고 간구하셔야 합니다. 그분은 자비하셔서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에 의한 거듭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낙원이라는 장소를 보게 됩니다. 어떤이들은 이 낙원은 예수님 십자가 때까지만 설치되었다가 그 이후에는 모두 예수님이 데리고 천국으로 가셨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낙원으로 신자들이 가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죽으면 곧바로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 구절로 에베소서 4장 8절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라는 말씀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그 구절은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았다는 말씀이지, 그들 모두를 천국으로 데려가고 낙원을 폐지했다는 말씀으로 보기에는 무리입니다. 계시록 2장 7절에는 하나님의 낙원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낙원을 천국의 일부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어떤 경우에도 신자가 죽은 후에는 낙원이라는 대기 장소에 머물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이 천국에 곧바로 간다면 구태여 부활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그 경우 부활이란 단순히 새로운 육체를 입는 과정밖에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째부활이 있고(계 20:5) 그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카톨릭의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내용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천주교 사도신경은 “ 저승에 내려가사” 라고 하기도 하고, 고성소에 가셨다, 하기도 합니다. 이 고성소란 카톨릭의 림보를 말하는 곳으로 성경에서 근거를 찾아볼수 없는 곳입니다.
영국 성공회의 공동 기도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He descended into hell (그분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
예수님은 낙원에 가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낙원과 지옥이 같지 않고서야 성공회의 기도문은 틀린 것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사도신경들 중에 예수님이 죽으신 다음 낙원에 가셨다가, 라고 기술된 신경은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다음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주장들은 대개 베드로 전서 3장 19절을 근거로 주장합니다만, 그 구절은 영으로 십자가의 사실을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뜻이지 그분이 육체로 내려가셨다는 말씀도 아니며 그들이 그로 인해 구원받았다는 뜻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강도는 같은 날 낙원으로 들어갔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낙원에서부터 부활하셨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극한의 고통중에서도 그 강도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며 극진한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강도는 아무런 공로나 선한 행위 없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낙원에 들어가는 축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그 강도는 연옥에도 가지 않고 곧바로 낙원으로 갔습니다. 카톨릭의 연옥설은 성경 사실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대제사장으로서 피흘리시며 속죄의 사역을 감당하시면서도 선지자로서의 전도의 사역을 마지막 순간에도 행하셨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존귀하신 예수를 우리의 구주요 생명의 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을 자랑할 것입니다.
3)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카톨릭 성경은 이 대목을 바꾸어서 “ 어머니,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라고 합니다.
다음은 공동 번역입니다.
26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27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그러나 성경 원문은 “귀나이 이데” 여자여 보소서라고 쓰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 하였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요즈음에는 카톨릭도 이러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다시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을 개정한 것을 보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http://info.catholic.or.kr/bible/bbl_read_sori.asp
우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통 중에서도 인간으로서 육신의 모친(사실은 대리모)이었던 마리아를 그분의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심을 보게됩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불신자들이었습니다. 나중에 이들은 모두 야고보와 유다가 그러했듯이 그리스도인들로 바뀌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그러나 요한 7장 3-6절에서 보듯이 그분의 형제들 곧 마리아의 다른 아들들은 당시에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불신자들인 형제들에게 모친 마리아를 맡기기 보다는 그분의 제자 요한에게 맡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마 12:46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마리아는 그녀의 아들들에 이끌려 예수께 와서 무슨 말을 하려 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아마도 예수님에게 동네 소문이 좋지 않으니, 살살 전도하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고 하셨던 것입니다.
카톨릭은 이 요한 19장 구절을 아주 좋아하며 중요시합니다. 그리하여 이 구절을 근거로 요한이 대표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셨으므로 인류 모두는 요한을 본받아 만인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로 모시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너희 어머니라 하지 않으시고 네 어머니라, 하시어 요한에게만 봉양 의무를 국한 하셨음을 알게 해줍니다.
마리아를 예수님이 어머니라 부르시지 않은 것은 이번만이 아닙니다. 요한 2장 4절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에도 예수님은 “ 여자여, 그것이 당신에게와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피조물이요, 죄많은 인생인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양이라면 마리아는 하나의 촛불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난자와 성령의 정자가 결합하여 생겨난 피조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유전자는 마리아의 유전자 50%와 하나님의 유전자 50%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의 육체를 갖고 계셨으며 그 육체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의 상태와 같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본 따, 그 형상을 본 따 인생들을 하나님은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으며 (창 18:1-)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만든 음식을 잡수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육체가 없었다면 어떻게 뻐터와 우유와 송아지 요리를 드실 수 있었습니까? (창 18:6-8)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의 날들을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았고 기뻐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8:56-58). 마리아는 그러한 창조주 하나님의 육체가 태어나는 통로로 사용되었을 뿐이며 그것은 인간들이 시험관 아기를 태어나게 하는 대리모의 역할과 같았습니다. 마리아는 그것으로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머니는 가졌어도 아버지는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친아버지가 아닌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친 어머니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는 가졌어도 어머니는 없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 이시며, 어머니 없이 창세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아버지 품속에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알려진 마리아는 그분의 창조물에 불과하였으며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도, 그분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도, 다윗이 여호와께서 그의 주께 말씀하신다고 할 때(시편 110:1) 에도 마리아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태 1장 20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직 태어나시지도 않았는데 성령에 의해 마리아 안에 태어나셨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계셨으며 단지 성령님에 의해 마리아의 몸안에 안착하는 과정을 거치셨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구주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었으며 자신의 비천함을 알았습니다(룩 1:47-48)
마리아는 원죄없이 태어났다는 카톨릭의 무염시태 주장은 성경에 의해 반박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인인 마리아를 향하여 자비의 눈빛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불쌍한 인생들 중의 하나였으며 예수님의 자비는 그녀에게도 나타났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곧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을 몰랐으며 단지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더라면 안식 후 첫날 향품을 갖고 무덤으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룩 24:1 막 16:1).
4)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47, 막 15:34-3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성경에서 소리내어 읽기가 가장 어려운 구절의 말씀을 대라 하면 저는 이 말씀을 들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외침은 그날의 가장 참혹했던 순간에 그분이 외치셨던 부르짖음이었으며 우리가 그 외침이 어떠했는지도 알 수 없고, 그분 만큼의 심정을 다 반영하여 외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람어 원본주의자들에 의하면 이 구절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남겨두셨나이까?” 또는 “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아껴두셨나이까?” “ My God, My God, why hast Thou spared me?”
즉 빨리 숨을 거두게하여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아람어에 있어서 사박다니의 뜻은 두가지로 해석됩니다. 나를 버리셨나이까? 혹은 나를 남겨두셨나이까? 나를 아껴두시나이까? 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번역은 문맥을 보아가며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시편 22편 1절을 반복한 것이며 그 예언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어집니다.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
אלי אלי לםה עזבתני
그런데 이 구절에서 아자브타니, 도 또한 나를 버리셨나이까? 로도 해석될 수 있고 남겨두셨나이까? 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만 나를 버리셨나이까? 로 해석함이 훨씬 더 일반적인 해석이고 보편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나를 남겨두셨나이까? 혹은 나를 아껴두셨나이까? 로 해석한다면 “ 하나님이여 속히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남겨두지 마시고 저를 속히 데려가소서” 하는 말로 풀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흔히 아는 바로는 “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들의 죄들을 담당하시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계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자신의 얼굴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흉악한 죄인들의 괴수요 대변자로서 형벌받는 순간에 하나님께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셨음을 보여주는 구절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도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받으시며 철저히 외면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구절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아람어 원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끝까지 버리시지 않으셨음을 강조합니다.
요한 16장
32 보라, 너희 각자가 제 곳으로 흩어지게되고 나 혼자만 남겨질 때가 이르나니 지금 왔도다. 그러나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시편 37편
25 내가 젊었었고 지금은 늙었노라. 그러나 의인이 버림을 받거나 그의 자손이 빵을 구걸하는 것을 내가 본적이 없노라.
이에 대하여 저의 판단은 시편 22편 1절의 히브리어 문장이 열쇠라고 믿어집니다. 그 히브리어 문장에서 “아자브타니”에서 나를 아껴두셨나이까? 로 해석될 의미는 매우 약하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나를 버리셨나이까? 로 번역, 해석하고, 나를 아껴두셨나이까? 로 해석될 수 있다는 주장은 단지 참고로 알아두시면 되리라 믿어집니다.
이제 다시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외치심, 부르짖음을 다시 묵상해봅니다.
그분은 그 극한의 고통에서 아버지께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계셨습니다. (히 5:7) 그 외침은 우리 모두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분의 어깨 위에 우리 모두의 이름을 걸머지시고(출 28:9-11) 하나님 앞에 서셨으며 그분은 흠없고 죄없는 피를 하나님앞에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외치심은 지평선 끝까지 이르렀으며 그 기도는 경외하심을 인하여 아버지께로부터 들으신바 되었습니다(히 5:7)
아버지 하나님이 어찌 그분을 버리셨겠습니까? 그분의 응답하심은 그 십자가의 날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지진으로, 깊은 어두움으로 나타났으며 사흘 뒤에는 그분을 다시 부활케 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날에 주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서셨으며 대신 심판받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모두의 죄들에 대한 형벌의 대가가 치루어졌던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대신 형벌 받으며 이러한 외침을 외쳤다는 다른 종교의 교주나 학자나 종교 지도자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극한의 고통가운데서 아버지께 부르짖고 우리의 죄값을 치루셨습니다. 그 순간은 아버지 하나님도 자신의 독생자를 외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죄가 너무나도 흉악했고 가증스럽고 징그러웠기 때문에 그 죄들을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은 그날에 예수님께서 부르짖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부르짖음이 어떻게 외쳐졌을지를 상상하시며 한번 그대로 부르짖도록 시도해보십시오. 누구도 그날의 부르짖음을 그대로 흉내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외침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부르짖을 수 있었던 한 마디였을 것입니다. 그 날에 그 외침은 지평선을 갈랐고 아버지께 들리신 바 되었습니다.
그날의 온갖 고통을 참고 십자가에서의 사역을 이루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립니다.
5) 내가 목마르다!(요 19:28)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날에도 여러 사람들이 오해하였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께 음료를 갖다 드렸습니다.
요한 19장
29 그때 신포도주가 가득한 그릇이 놓여있더니, 저희가 스폰지를 신포도주로 채워, 우슬초에 꿰어, 그분의 입에 갖다대니라.
사람들은 예수님이 목말라서 무슨 음료가 필요한 줄로 오해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이 말씀은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인생들을 바라보실 때에 참으로 목마름을 느껴야 할 사람들이며 그들에게 생수가 필요함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대목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 이전의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요한 19장 28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을 아시고, 성경이 온전케되도록, 말씀하시기를
성경이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의한 성취가 필요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극한 고통중에서도 하나 하나의 성경 예언들이 성취되어지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온전한 희생제사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아셨으며, 그분은 안도의 숨을 쉬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을 아시고
여기까지 모든 일이 차질 없이 이루어졌음에 그분은 아버지께 감사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성경 예언이 온전케 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인류세계의 갈증에 대한 예수님의 판단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변에 매우 목마른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으면 우리 스스로가 목마름을 느낍니다. 아마 동병상린이라는 속담이 적용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인생들을 보았을 때 인생들 모두는 참으로 생수에 목말라 하는 영혼들로 가득하였다고 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 4장에서 말씀하신 바로도 나타났습니다.
요한 4장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녀에게 이르시기를 “이 물에서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그에게 줄 물에서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히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고 내가 그에게 줄 그 물이 그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나는 물의 샘이되리라.
예수님은 인류 모두에게 바로 이 물,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나는 물의 샘이 될 물을 주시고자 그날에 십자가에 매달리셨던 것입니다.
사실 인류 모두에게 공급할 물을 마련하시고자 그분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으며 이제 그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올 찰나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한 7장
37 이에 명절의 큰 날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게 하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의 뱃속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리라.” 39 (그러나 그분은 그분을 믿는 자들이 장차 받을 성령에 관하여 이것을 말씀하셨으니, 이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입지 아니하셨는 까닭에 성령께서 아직 계시지 아니하셨음이었더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마침 영광을 입는 과정 중에 있었으며 그 십자가의 영광을 완성하신 이후에는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생수의 강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흘러나게 되는 변화가 있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십자가 위에서도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목마르다, 는 외치심은 우리 인생들이 목말라야 할 사람들이며 그들을 대신하여 우리 인생들의 목마름을 고백하신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수 강이십니다.
계시록 22장
1 그가 나에게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 강을 보여주니,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오더라.
이 생수의 강에서는 누구든지 값없이 은혜로 거저 마실 수 있습니다.
계시록 22장
그리고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오라!”하시도다. 듣는 자는“오시옵소서!”라고 말하게 하라. 목마른 자도 오게 하라. 원하는 자는 생명수를 거저(값없이) 받게 하라.
그날에 우리를 대신하여 많은 갈증을 겪으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립니다!
6) 그것이 이루어졌도다!(요 19:30)
많은 한글 번역들이 이 구절을 잘못 번역하고 있습니다. 원어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Τετελεσται ! 테텔레스타이!
킹제임스 성경은 It is finished 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글 개역, 개역개정, 흠정역, 한글 킹제임스 등 수많은 번역들은 이 번역과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제가 조사한 한글 번역들 7가지 모두는 다 이루었다로 번역하였고 공동번역은 이제 다 이루었다로 이제라는 말이 성경 원문에 없는데도 추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문법적 내용과 의미를 다시 살펴봅니다.
이 테텔레스타이는 텔레오 동사의 3인칭 중성 단수 수동태 완료 시제입니다.
텔레오 동사는 완성하다, 이루다, 끝마치다, 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 단어는 내가 혹은 당신이 혹은 너희가 이루었다는 뜻으로 번역될 수 없습니다. 그 동사는 중성명사 혹은 중성 대명사에 대해서만 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수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주어는 그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능동태 문장이 아니라 수동태 문장입니다. 이루었다가 아니라 이루어졌다 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완료시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를 번역할 수 있는 문장은 바로 «그것이 이루어 졌다» 가 문법적으로 맞는 해석인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당시에 엘리자벳단 잉글리쉬가 사용되었으며 현재 수동태로서도 완료의 뜻을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It is finished 로 옳게 번역한 것입니다.
이 문장을 중 3 과정에서 영어를 올바르게 배운 학생에게 번역하라 하면 다 이루었다로 번역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끝났다 로 번역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하면 마치 예수님이 혼자서 다 이룬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원어에 «다» 라는 단어나 뜻이 포함된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역은 성부와 성령과 성자 세분이서 함께 이루신 사역이며 예수님은 그것이 이루어졌음을 인생들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 문장은 분명 수동태 문장이며 세계 각국의 번역본들은 제가 아는 한 모두 수동태로 번역하고 있으나, 유독 한글번역들만 능동태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글이 그토록 무능한가요?
물론 그것이 이루어졌다에서 그것이 특정의 사안을 가리키는 대명사라기 보다는 형식 주어라고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반대로 의미상의 주어는 세계 구속의 대역사, 인류 구원의 대 사역을 의미하며 그것이 완성되었다고 외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대로 그것이 이루어졌다, 로 해석하고 그것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인류 구속의 대역사, 십자가의 사역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테텔레스타이 라는 말은 고대에 있어서 채무의 변제가 완성되었을 때, 지급완료, 변상완료, 배상완료, 지불완료의 표시나 도장으로 채무증서에 찍어줄때 사용되는 표현이었습니다.
인류 모두는 죄인들이었으며 예수님은 그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죄값을 피흘리심으로, 죽으심으로 갚으셨으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 내가 정녕 너의 피, 흠없는 피를 보았고 그것으로 족하다» 하셨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그러한 응답을 받으시고 그 사실을 인생들에게 전달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은 어떤 동물 희생으로도 영원한 속죄를 이룰 수 없었던 반면에 단번에 이루신 영워한 속죄였습니다. (히 10:12) 그분은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신 것입니다(히 10:10) 그분은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 9:12)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인정하며 받아들이기만 하면 죄사함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영원한 속죄의 사실과 죄인된 우리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체는 바로 우리의 믿음이며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7 저희 죄들과 무법들을 더 이상 내가 결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8 이에 이것들의 사함이 있는 곳에는, 더 이상 죄들을 위하여 희생드림이 필요 없느니라.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희생제사가 필요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들은 예수님 십자가에서 죄값을 지불받았으며 예수님이 우리 대신 형벌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참혹한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각이요 판단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우리가 피흘리고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의 모진 고통 당하셨으며 우리 대신 형벌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믿어달라고 부탁하십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외면한다면 얼마나 배은 망덕한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죄, 미래의 죄 마저도 십자가에서 형벌받았고 이로 말미암아 사함을 입은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과거의 죄는 사함을 받았고 미래의 죄는 사함을 안받았다면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피흘리시고 죽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번에, 단번에 영원한 효력을 이루는 구속의 대역사를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6 그렇지 않으면 그분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자주 고난 당하셨어야 했던 까닭이나, 이제는 시대들의 마감 때에 그분께서 단번에 자기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들의 없앰을 위하여 나타나셨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은 매주일 혹은 매일 미사를 드립니다. 이 미사라는 말은 라틴어의 미싸(MIssa)라는 단어를 한글화 한것으로 그 뜻은 희생제사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과거의 사실이며 이제는 매일 일어나는 죄들을 위하여 자기들의 사제들(제사장들)이 매일 혹은 매주일 희생을 드려야 한다고 하여 희생을 드리면서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모든 죄가 사해졌고 단번에 영원한 효력을 이루는 희생제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셨음을 믿지 않고 불신하는데서 오는 모조품 희생제사 행위이며 하나님께 대한 반역행위입니다!
그들 스스로의 성경에도 이렇게 쓰여 있어서 더 이상의 희생제사가 필요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카톨릭 성경) http://info.catholic.or.kr/bible/bbl_read_sori.asp
17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의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18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더 이상 희생예물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천주교에서는 매일, 매주일 미사를 드립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흉내내며,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모든 죄들이 십자가에서 이미 용서되었다는 사실은 가져오거나 증거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들이 십자가에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면 다음주에는 죄를 다시 용서해달라는 희생제사를 드릴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미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과 그분이 외치셨던 “ 그것이 이루어졌다! “ 는 함성은 증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미사는 자꾸만 예수님을 다시 보내 주셔서 또다시 자기네가 못박아 죽일 터이니 또 십자가에서 희생시켜 달라는 요구로 들립니다.
그들이 흔히 가져오는 구절로는 요한 일서 1장 9절로서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 1서 1장
9 만일 우리가 우리 속의 죄들을 고백하면, 그분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죄들을 사해주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10 만일 우리가 죄짓지 않았다고 우리가 말하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아니하니라.
로마 카톨릭은 이 구절로 죄에 대하여 희생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하여 그 희생제사가 바로 미사이며 그 미사에서 제사장(사제)이 쿠키를 들었다 내렸다 하고 포도주에 절하고 죄를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드리는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이며 쿠키가 예수님의 살이라고 변명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그대로 흉내냅니다. 이 미사는 기독교의 예배와 비슷한 것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만 기독교의 성경적 예배는 예수님이 이루신 영원한 속죄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그분께 감사드리는 반면에 카톨릭의 미사는 예수님의 영원한 속죄를 부인하고 그것은 과거로 끝난 일이며, 이제는 새로운 속죄를 매일 매일 드려야 하고 그것을 본받아 카톨릭 사제들이 희생드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는 십자가의 영원한 효력을 부인하는 반역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요한 일서 1장 9절에서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우리의 모든 죄들을 사해주신다고 하신 말씀은 이제야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에 예수님이 다시 피흘리시고 사함받게 해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십자가의 사실에 근거하여, 그 십자가의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해주심으로 이미 사함받은 사실을 믿어지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요한일서 1장 9-10절은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의 사실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구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날에 인류 구원의 대역사를 이루시고, “ 그것이 이루어졌다!” 함성을 외치셨습니다. 이 것은 사탄에 대하여 위대한 승리를 거두셨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만 사흘 뒤에 그분께서 부활하시고, 나중에 차츰 그분의 죽으심이 바로 대속죄 사역이었음을 알았을 때 자신의 패배를 깨달았을 것이며, 이제는 그 사실이 인생들에게 바로 알려지는 것을 방해하고 막는 것으로 전술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최대의 전투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하셨습니다. 그분은 천억 이상의 인류 모두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투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분의 피흘리심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값없이 천국에 갈수 있도록 천국문을 여시는 대 역사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의 피를 인하여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승리선언은 이렇게 선포되었습니다.
Τετελεσται ! 테텔레스타이! 그것이 이루어졌도다!
7) 아버지여, 당신의 손에 나의 영을 맡기나이다.”(룩 23:46)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아무런 수고를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셨으며 인류 세계 모든 왕들의 왕이셨습니다. 그분은 마땅히 경배를 받으셔야 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이 만드신 피창조물들에 의해서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며 그들에게 채찍에 맞으시고, 침뱉음을 당하시며, 조롱을 당하시며 잠못자고,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에 가셨습니다. 그때에 아무도 그분의 심정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못박혀야 할 자리에 대신 못박히셨습니다. 대못이 그분의 손과 발들에 내리쳐질 때 그분의 몸에서는 죄없는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분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쓰였으며 그것은 혈관을 뚫었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피로 덮였을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세워지고 땅에 박힐 때 그분의 몸은 다시 찢겨졌으며 그분은 많은 고통중에서도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는 자기들이 무엇을 행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이다” 라고 변호하셨습니다.
그러한 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은 특별히 새로운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분을 우리의 구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요 특권일 것입니다.
그분은 지나가는 행인들의 비방과 제사장들, 장로들, 파리새인들의비방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의 진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 극심한 고통의 하루를 보내고 이제 막 숨을 거두시며 아버지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그분의 몸을 지탱한것은 세 개의 못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인류를 향한 사랑,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순종, 그리고 다시 아버지께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그분의 몸을 십자가에 지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십자가에서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나타났으며 아버지의 사랑은 그분을 다시 일으키심으로 증거되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한번도 신경질을 내거나 고통을 불평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며 그분을 신뢰하였습니다.
무슬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비웃으며, 예수님이 죽은 동안에 세계는 어떻게 운행되었겠는가?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삼위일체를 모르기에 그런 비아냥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동안에 아버지와 성령님에 의하여 우주는 운행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전서 2장
21 왜냐하면 이것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음이니, 이는 그리스도께서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받으시사, 너희가 그분의 발자취들을 따라오도록 너희에게 모범을 남기셨음이니, 22 그분은 <죄를 범치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아무런 궤사가 발견되지 아니하였느니라.> 23 그분은 욕을 받으셨으나 반박하여 욕하지 아니하셨으며, 고난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아니하셨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맡기셨으니; 24 그분은 친히 나무 위에서 우리의 죄들을 자기 몸 안에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들에 대해 죽고, 의를 위하여 살도록 하셨음이며; <그분의 매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느니라>
우리는 이 십자가의 날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잘 모릅니다. 아마 주님 오신 후에나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 24-26절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이 내려지는 때로부터 메시아가 끊어질 때까지 69이레가 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중건되리라는 명령은 아닥사스다 왕 20년으로서 니산월이었습니다(느헤미야 2:1-). 주전 445년 3월 14일부터 아닥사스다 20년의 니산월이 시작된 것으로 나옵니다 이로부터 69이레 483년이란 173,880일을 의미했으며 그 마침은 32AD 4월 6일이 된다고 로버트 앤더슨 경은 계산하였습니다. 그는 그 날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고 호산나 찬송을 받으신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 해 니산월 15일은 4월 12일 혹은 14일 이었습니다. 아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던 날은 아마도 4월 10-20일 사이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금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한번으로 영원한 효력을 갖는 희생제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만왕의 왕으로서, 천년왕국의 국왕으로서 통치하시기 위하여 다시 이 세상에 오실 것이며 그때에는 피흘리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대신 불순종하는 자들을 입에서 나오는 칼로 징벌하실 것입니다(계 19:15). 그분은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계 19:15)
히브리서 9장
28 그와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들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려지셨다가, 자기를 앙망하는 자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죄들과 상관없이 두번째 눈에 보이게 나타나시리라.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그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진리를 의지하여 우리 또한 그 사실과 진리를 믿고 주 하나님께 순종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큰 구원을 등한시 하거나 외면한다면 엄위하신 하나님의 형벌이나 징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역과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기억하고 그분께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십자가의 날에 많은 고통 당하시며 수고하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영광가운데 계십니다. 그분의 영광은 지금 하늘에 빛나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시고 계십니다. 그날에는 그분께서 경멸을 당하셨으며 지금도 세상에서 그분은 배척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은 머지 않은 장래에 그분과 함께 할 것이며 그들 중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감사와 경배를 받으실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리며 그분의 다시 오심을 앙망합니다! 마라나타!
2011.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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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이 글을 오래전부터 쓰고 싶었는데 이제야 쓰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글을 통해 영광과 감사를 받으시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에게 자주 하신말씀이 기억하라...였지요..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등등...기억하라..
다시 되새기며 기억해볼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친밀한 관계로 살아갈수 있음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삶....그분이 내안에 거처를 정하셨음은 비밀스런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개인적인생각^^)
위에서 가톨릭 교리를 잘 언급하셨습니다..요즘 제가 더욱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의 장로교회와 순복음교회가 점점 더 가톨릭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일부교회의 단기 선교여행(동남아 등) 일정을 보면 오래된 성당건물 방문도 있고, 실제 선교후기를 보니 가톨릭 성인들의 고행과 업적에 눈물 흘렸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특히 장로교에서는 천주교를 큰집이나 친정집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교인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목사들도 은연 중에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실제 에큐메니칼은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너 나 할 것 없이 <우리가 남이가>하는 생각이 팽배하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교회가 서서히 변질 되어가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별로 없습니다..실은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제가 보기에는 이름 난 교회의 교인 수가 대충 만 명을 넘어서면서 이런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교회가 커지면 사쿠라 교인들이 많이 모이고 이렇게 커진 교회는 교회 정책(목사의 입김, 전횡, 가부장적 분위기)에 교인들이 무조건 따라가다 보니 세월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목적지와는 다른 길로 걷고 있게 되는 것이지요..아무도 나침반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다들 한 통속이 되어 그냥 앞만 보고 가는 것이지요..심각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의 교회는 교인들(종교 수요자)의 종교심을 만족시켜 주는 곳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서로 적절히 이런 니즈(needs, 목회자는 놀랍게도 하나의 직업으로 접근)를 만족시켜 준다는 것이지요..그런 만족감에서 십일조를 아무 저항 없이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종교생활에서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느꼈으니(때로는 울고 불고 함) 사례한다는 것이지요..종교활동을 위해 건물도 쓸 데 없이 치장을 하게 되고 그 종교 단체(가급적이면 큰 모임)에 속해있다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다는 것이지요..교회내에서는 구원과 거듭남을 이야기하면 이단으로 찍힙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모두인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말씀을 많이 다루는 교회가 신령하다고 보여집니다..그리스도의 피묻은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지않고 자기들의 의만 내세우기 바쁘며 한 영혼이라도 땅에 떨어뜨리지아니하도록 기도와 간구로 교인들을 관리하기보다는 세력다툼,주일날 스포츠등등..친목을 내세워 여러가지의 형태로서 덕스럽지못한 인본주의 신앙으로 키워져가고있는 세태로 보여집니다.그리하다보니 자연적인 현상으로..말세에는 배도로 나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살,후2:3).."인자가 올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하신 말씀에서 보더라도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이미 아시고 계시다는것을 알수있습니다..
천국을 침노하든,택함의예정을 받았든지간에(알미니안주의,칼빈주의)..주님께서 보시기에 구원의확신과 그에 상응하는 성령충만함의 역사와, 합당한 의의열매 성령의열매로 "영원히 별과같이 비췸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혼구원의역사로..청지기사명을 감당하며,천국백성이 되어지는 놀라운 주님의 자녀들로서 열매가 맺혀지기를 열망합니다.
롬1:21-23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그분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오히려 자기들의 상상 속에서 허망해지고 또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선언하나 어리석은 자가 되어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 발 달린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것들과 같은 형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요즘교회들에게 하신 주 하나님의 말씀인것 같습니다.
하토브님, 이 글을 제가 모셔갑니다.
제가 읽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글들 중 백미!!!입니다.
어제 일하면서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그려보는데 하신 말씀들이 떠올라
주님의 성품을 그려보면서 감탄을 하는데 다섯가지밖에 생각이 안났습니다.
오늘 궁금증이 잘 정리되었을 뿐 아니라 더 세밀한 부분까지 그 의미를
깊은 샘에서 신선한 물을 길어올리는 듯이 퍼올릴 수 있어 감격입니다~
선하신 성삼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Τετελεσται ! 테텔레스타이! 그것이 이루어졌도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