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신안주씨(新安朱氏)
【시조】주희(朱熹),【동국시조】주잠(朱潛)
【인구수】151,227명 (2000년 현재).
【주요 파】▲능성파 ▲웅천파 ▲전주파.
?
시조 청계공 주잠은 중국 남송 사람으로 유명한 유학자인 주자의 증손이다.
신안은 중국 하남성의 지명이다. 한림원태학사였던 그는 남송이 몽고에 망하자
아들 주여경과 문하생 섭공제 등 7명의 학사를 데리고 고려로 망명했다.
중원의 주인이 된 원은 고려에 주잠의 압송을 요구했다.
주잠은 이때 이름을 적덕(積德)이라 고치고 용담(현 전북 진안군 용담면)에 숨었다.
본관인 신안도 쓰지 못하고 능성을 사용, ▲능성주씨(綾城朱氏)가 됐다. (후에 신안주씨로 통일함)
세월이 흐른 뒤 아들 여경은 고종 때 은사과에 올랐고, 여경의 아들 문절공 열(悅)도 문과에 올랐다.
주열은 천성이 활달하고 검소한데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나 원종의 신임을 받았다.
원종 때 병부랑중으로써 충청. 경상. 전라 안무사로 나가 크게 치적을 올렸으며 능성군에 봉해졌다.
그는 또 충열왕 때 정조사로 원에 파견돼 공녀 2천명을 요구하는 원세조 쿠빌라이를 설득, 무마시켰다.
주열에게는 인장, 인원, 인환 등 3형제가 있었다.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3형제의 후손이 능성파,? 웅천파,? 전주파로 갈린다.
주인장(고려 예부상서)과 주인원(병부상서)의 후손들은 이성계가 개국하자 새 왕조에 충성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박해를 받고 주씨들은 벼슬에서 멀어졌다.
주인장(능성파)의 후손은 전남지방에, 주인원(웅천파)의 후손은 경상도 지방에,
주인환(전주파)의 후손은 함경도 지방에 흩어져 농사짓고 학문하는 전통을 이었다.
한편 막내 주인환은 일찍이 이태조의 고조부 목조와 함께 전주에서 함경도로 옮겨가 산 인연을 맺어
그 아들 주단이 태조의 왕고모부가 된다.
주단의 증손자인 주인은 이태조와 죽마고우로 형제같이 자란데다 혈연관계도 있어
위화도 회군 등에 행동을 같이해 조선의 개국공신이 됐다.
?
조선조 때 주씨 문중의 급제자는 모두 31명. 이중 22명이 주인환의 후손 즉 전주파다.
주몽룡은 웅천파로 빛을 못 본 종파였으나 무과에 급제했다.
금산군수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강덕룡, 정기룡 등과 함께 거창 우지현 싸움에서
왜적을 격파, 3룡(龍)으로 불리었다.
?
유명한 의기 논개도 신안주씨 인물이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의 사랑을 받았으나
진주성이 함락되자 촉석루에서 왜장을 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
구한말과 일제 때 주씨 문중에서는 주진수, 주기철, 주용규, 주석환, 주종기 등 숱한 독립투사가 나왔다.
주기철은 웅천에서 남학회를 조직,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3.1운동 때 시위를 주동한 뒤 목사가 되었다.
예수장로회 목사로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신앙구국에 헌신하였다. 일제 말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순교했다.
○ 주몽룡(朱夢龍) : 자는 운중(雲中)이요, 호는 용암(龍巖)이며 본관이 신안(新安)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성장하며 용맹했다. 열두서너 살에 능히 앉아서 열 발이나 뛰었고
또 여러 책에 널리 통달했다. 일찍이 무과에 올랐으나 영예로운 벼슬을 일삼지 않고
오로지 어버이 봉양에만 뜻을 두었다.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금산군수(金山郡守)가 되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왜적을 쳐서 여러 번 기이한 공적을 세웠다.
영산(靈山)의 전투에서는 곽공을 포위에서 벗어나게 하니
군중에서 무서운 호랑이라고 불렸다.
강덕룡(姜德龍)과 정기룡(鄭起龍)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여 당시
‘영남우도(嶺南右道)의 세 마리 용’이라고 일컬었다.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절도사(節度使)에 이르렀고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추증하고
시호를 무열공(武烈公)이라 했다.
첫댓글 나는 신안주씨 31세손 이며,...위로 무열공파(주몽룡) - 웅천파(주인원) 후손임..
위 문장 간결하면 ..주 희- 주 잠(증손)- 주여경 - 주 열- 주인장(능성파)/주인원(웅천파)/주인환(전주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