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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장 사랑 강해> 독후감
이름 : 곽은서
제출일 : 22년 8월 9일 (화)
Ⅰ. 요약
1부 사랑의 본질
1장 왜 사랑이어야 하는가(고전 13:1~3)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님을 말씀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하느냐가 아닙니다. ‘사랑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영적 관계는 하나님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며, 그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끼리도 얼마든지 기계적이고 기능적인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2장 사랑이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3장 4절 이하에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랑의 열매 혹은 사랑의 특성입니다. 사랑의 특성들은 사랑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오래 참음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사랑의 방법 혹은 사랑의 특성에 불과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입니다(요일 4:7~8). 하나님은 사랑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이신 하나님을 우리 안에 받아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로 난 자가 됩니다. 주님과 하나 됨의 과정에서 언제나 옳으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완전하고 선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고 주님이 살아야 합니다. 나는 없고 주님만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과 합일하는 것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귀속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는 상태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의 연합에서 가장 좋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는 것입니다.
3장 사랑을 위하여
우리는 실제 가운데 주님이 내 안에 계심을, 또한 내가 주님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를 알기 위해선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 위해선 주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나타내 보이셔야 합니다. 오직 주께서 감동과 감화를 주셔야만 우리가 그에 대하여 반응하여 그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그를 사랑하여 그의 말을 지킬 때 당신을 나타내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또 그를 사랑하여 그의 말을 지키면 우리에게 와 거처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고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시기 위해선, 우리가 주의 계명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계명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사랑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 때문에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합니다. 모든 율법과 계명의 뿌리는 사랑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1. 자기 부인과 자기 부정
사랑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합니다. 주님께 가는 길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2. 하나님으로 사랑함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는 사랑의 어떠함은 사랑 자체가 아닙니다. 사랑의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또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인지 아닌지에 대해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어떠함을 배우고 묵상해야 하며 삶 가운데 실천을 통해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함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영과 혼과 몸,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사랑의 의지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의지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의 의지를 드린다 하더라도 만일 그 사랑의 목적이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이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찬송과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뜻의 성취와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위해 사랑해야 합니다. 나를 위하지 않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하나님을 위함’이라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이 연합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나를 사랑하는 사랑의 더 깊은 자리까지도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내가 있기에, 하나님을 위하여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2부 사랑의 특성
1장 사랑은 오래 참고
바울은 가장 먼저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사랑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되어야 할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래 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 내 안의 악한 감정에 대하여 오래 참음
오래 참음은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대해 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일어나는 감정에 대해 참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로 억울하게 하고 분하게 하는 그 문제를 참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우리 안에 일어나는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참는 것입니다. 내 안에 치밀어 오르는 악한 감정을 먼저 거절해야만 비로소 사랑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기 위해선 먼저 오래 참아야 합니다. 나를 거절하고 나를 부인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 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약 1:19~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감정이 거절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에베소서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27)고 말씀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먼저인 것입니다.
1)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생명의 원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됩니다(히 12:1~3, 딤전 1:12~16).
2) 변화시키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나는 다만 오래 참을 뿐입니다.
그에 대해 분을 내고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직은 그가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알고, 그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관용할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있는 그도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언젠가 변화될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이니 우리는 다만 그 하나님을 믿고 오늘도 참을 수 있습니다.
2. 온전한 오래 참음: 십자가 앞에 악한 감정을 처리 받음
지금 악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며 지금 분을 내더라도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감정이 시작되면 주께서 나의 악함에 대해 어떻게 참아주셨는지를 기억해내고 그 감정을 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참고 또 한번 참으면 ‘오래’라는 시간이 생겨납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지금 한번 참는 것입니다. 다음에 또 참아줄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한번 참는 것입니다.
육체는 십자가에서 못 박음으로 처리됩니다. 우리의 악한 감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악한 감정은 반드시 그날 십자가에 가지고 가서 처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적용해야 합니다(갈 2:20, 갈 5:24).
또한 우리 안의 악한 감정을 처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오래 참음이란 분을 내지 않는 것뿐 아니라 주의 십자가 앞에 모든 악한 감정을 내려놓고 처리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께서 먼저 우리에 대해 오래 참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까지 함께 죽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우리의 모든 악한 감정에 대해 처리 받아야 합니다(마 18장 탕감의 비유).
2장 사랑은 온유하며
오래 참음과 온유는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주제로, 이 둘은 닮은 듯 보이나 서로 다른 주제입니다. 오래 참지 않는 자는 절대 온유할 수 없습니다. 오래 참아야 비로소 온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는 생명의 결과입니다.
온유는 부드러움이며 따뜻함이며 온화함입니다(눅 9:51~56, 눅 23:34). 온유란 마치 푹신한 침대와 같은 것입니다. 누운 이의 몸을 조금도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받아주는 침대와 같습니다. 온유함은 마치 큰 나무가 그늘을 많이 드리워 나그네로 앉아 쉬어가게 하거나 또는 큰 나무가 많은 가지를 드리워 새들로 앉게 하듯, 그 넓이가 넓음을 의미합니다. 그에게 기대어 쉴 곳이 많음을 의미합니다.
1. 하나님과 화평함으로 말미암음: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아멘 함 (마 11:25~30)
하나님과 화평하다는 것은 갈대가 바람과 화목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갈대는 바람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자신의 몸을 누입니다.
2. 온유란 하나님과 화목함에서 나오며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는 것은 ‘아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유함이란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건 하지 않으시건 하나님과 반목하지 않는 것입니다(민 12:1~3). 모세의 온유함은 하나님을 대하여 사는 자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3. 온유, 현재성의 문제
온유함은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또한 온유함은 언제든지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조차 가데스 사건에서 온유함을 잃어버렸습니다(민 20장, 민 27:14).
4. 타협이나 체념에서 오는 평안은 온유가 아닙니다
육신에서 나온 평안은 타협과 체념에서 나온 평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평함으로 얻은 평안엔 감사가 있습니다. 아멘이 있고 기쁨과 찬송이 있습니다. 체념이나 무책임에서 비롯된 그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타협하는 것을 온유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무책임하거나 게으른 것을 온유라고 여깁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될 대로 되라는 체념과 타협의 태도를 온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코 온유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과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서는 분을 낼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5. 온유한 자의 축복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즉 그의 지경이 넓혀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다는 것은 곧 우리 인생이 세상을 향해 넓혀짐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엡 4:13~14). 우리가 받을 기업의 크기는 결과적으로 그릇의 문제입니다. 지경을 넓힌 자만이 그 기업도 함께 넓어질 것입니다.
3장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1. 하나님의 질투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을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출 20:4~6). 사람의 질투가 시기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질투는 사랑입니다. 사람의 질투는 그를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를 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에게 당신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게 하시려고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것은 우리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음에 대한 질투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만을 하나님도 사랑하실 수 있기에 질투하시는 것입니다(호 2:14~20).
투기가 있는 까닭은 서로를 투기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랑은 감정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지를 사용하여 내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투기가 일어날 때마다 스스로 의지를 깨워 그를 사랑하고자 해야 합니다.
2. 하나님과 나 사이의 절대적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째의 길은 그를 투기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둘째, 투기하지 않기 위해선 절대적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곧 나를 사랑하는 주님께 또한 내가 사랑하는 주님께 모든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그 긴밀한 사랑 안에 들어가 보면 주께 가장 사랑 받고 있는 자가 곧 나 자신임을 알게 됩니다.
3. 우리의 가치관은 영적 가치관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4장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한다면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자랑하는 자가 참 할례당이기 때문입니다(빌 3:3). 간증은 크게 4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주님을 만나기 전의 내 모습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둘째는 주께서 내게 하신 일에 대해, 셋째는 주님으로 인해 변화된 내 모습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혜 입은 자로서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결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간증에서 초점이 되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사람에 대해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모습, 곧 약함과 무능함, 천한 것들과 궁핍한 것들, 미련하고 가련한 것들뿐입니다. 약함 외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약한 내게 주님이 새로운 일을 행하셨고, 그로 인해 내가 변화되었음을 말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1. 배설물이요 허무한 것에 불과한 육체로 자랑하지 않음 (빌 3:3)
2. 사랑하는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기 위하여 나를 자랑하지 않음 (갈 6:14)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그를 위해 하나님만 자랑합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얻고 하나님을 흠모하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사람에게 자랑하는 일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망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한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예수로 자랑해야 합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내 자녀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자녀가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여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습니다.
5장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사랑을 알게 되면 교만할 수 없다’ 입니다. 사람이 교만한 까닭은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그 누구라도 교만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한 자는 다른 사람 앞에서 교만할 수 없습니다. 마치 자신은 의인인 것처럼 다른 이들을 비방하고 판단하고 수군거릴 수 없는 것입니다(요 8:7, 엡 3:8, 고전 15:9, 딤전 1:15, 빌 2:5~8, 갈 6:1~2).
참된 겸손은 주께서 우리 자신을 알게 하실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열매입니다. 자신을 향한 사도 바울의 정직한 평가가 결국 그를 교만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었으며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결코 높은 자리에 앉아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며 어떤 환난과 핍박도 마다하지 않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던 지도자였습니다.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며 기도하는 자였으며, 모든 섬김으로 봉사하던 자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자는 바로 이와 같습니다.
6장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않음은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있는 관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겐 어떠어떠한 이름에 맞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 관계는 그 관계에 맞는 사랑법을 요구합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사랑에 실패한 것입니다. 바로 이처럼 관계에 합당한 사랑 예법을 지키는 것이 곧 무례히 행치 않는 것입니다.
기둥과 기둥은 서로 너무 가까워도 안 되며 너무 멀어도 안 됩니다. 저마다 건물의 규모에 맞는 적절한 크기와 간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랑도 각 관계에 맞는 적절한 사랑법을 갖춰야 합니다. 관계에 있어서 적절한 간격이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바르게 사랑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이 간격을 배워야만 합니다.
사랑은 결코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사랑은 소통하는 것입니다. 연락하고 상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 은사대로 섬기며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 관계에 맞는 사랑법에 대해 부지런히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7장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상대의 부족함이나 모자람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섬겨야 할 대상이요, 그를 도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부정한 자만이 이기심을 버리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롬 12:1, 14:5~9).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또 힘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기 위해선 철저한 자기 부정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즉 자기 유익을 구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의 일을 구합니다(빌 2:21~22). 자기의 일을 구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예수의 일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1. 사랑은 그로 말미암은 유익이 아닌 그를 목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목적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원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처럼 주님과 소통하기 위하여 주님 발 앞에 앉습니다. 사랑하기 위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자가 되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2. 사랑은 그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하여 나를 내어주는 것이니 그의 유익만 계수되어야 합니다.
3.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자기 연민
사도 바울은 스스로의 약함에 대해 기뻐하고 자랑하였습니다. 그 약함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의뢰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인해 크게 절망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으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는 이는 이것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신을 위하기 때문에 실패하고 무능하고 약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불신과 불평, 또 낙심과 절망의 배후엔 이처럼 자기 사랑이 감춰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적은 자기를 위하는 마음입니다. 자기 사랑은 실패했을 때 우리로 하여금 낙심하게 하며 자신의 무능함과 약함을 발견할 때 낙담하게 합니다.
8장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이라 함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감정적으로 분이 나선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내지 않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성 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감정적인 분노 자체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격동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그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정이란 언제나 우리가 조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정이 나를 조종하게 둘 순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면 언제나 격동하지 않는 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기 위해선 이 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1. 성내지 아니함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엡 4:26~27)
격동한다는 것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약 1:19~20)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기 위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거룩한 분노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에 의해 격동되어선 안 됩니다. 분이 나면 먼저 그 감정을 제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분 내는 일에 급해선 안 됩니다.
2. 본질적 해결: 자아 파쇄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이라 하신 말씀은 화가 날 때마다 임시방편으로 그 화를 마음속에 눌러 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악을 궁극적으로 없애라는 것입니다. 맑은 물은 아무리 흔들어도 여전히 맑은 물이듯, 우리가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 근원을 깨끗케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이며 또한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내지 않음과 악한 것을 생각지 않음, 이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9장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1. 그가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기억함
우리 안에 악한 것들이 생각날 때마다 나와 어떤 형태로 관계되어 있든 상관없이 나와 인연하고 있는 그는 내가 반드시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기억하면 됩니다.
우리는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어 우리 안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날마다, 일마다 하나님의 선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2. 마음에 선을 쌓음 (눅 6:43~45)
우리 안에 있는 악을 발견했다면 속히 그것을 십자가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선을 쌓는 일입니다. 사람은 쌓은 선에서 선을 내며, 쌓은 악에서 악을 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날마다 선을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하신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시 1편). 경건한 독서를 해야 하며, 하나님 말씀을 더 많이 듣고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권능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을 따라 살게 합니다. 즉 말씀이 우리 안에서 주의 법을 이루고 주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학습하여 우리 안에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모든 연단을 통해 우리 안에 선을 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10장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사랑한다는 것은 무조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공의와 짝을 이룹니다. 또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순결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엔 어떤 불의도 없습니다.
바울은 사랑 때문에 갈라디아 성도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였던 것입니다(갈 4:19). 이 사랑 때문에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을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빌 2:17). 바울이 낸 분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한 데서 나오는 분이지 죄인을 향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의와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다툼은 언제나 불의 자체를 향한 것이어야지 불의를 저지른 그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11장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진리 자체를 기뻐함을 의미합니다. 시편 119편 말씀은 시편 1편 말씀보다 더 진보된 말씀입니다(시 119:10~16, 56, 59~60, 71~72). 시편 119편의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 가운데서 경험하고 소유하고 있습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진리 자체를 기뻐하고 좋아하며 사모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삶 가운데서 진리를 행함으로써 그 진리를 소유함을 의미합니다. 진리가 이렇게 삶 가운데 나타나고 보일 때 기뻐하는 것이 곧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짐으로 얻어지는 결과에 대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한 것 자체가 그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를 기뻐합니다. 이는 진리에 대한 탐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그 진리를 삶 가운데 실천하고 그 말씀의 이루어짐을 기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진리를 행함으로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행함으로 충분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진리를 행함으로 얻은 결과로 인해 기쁜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행한 것 자체로 인해 기뻐하는 자만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시 1편, 골 3:16). 더 나아가 그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 모든 열매로 나타날 수 있도록 실천해야 합니다(요 15:7, 요삼 1:2~4).
12장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여기서 참음은 오래 참는 것과 조금 다른 의미로, 그저 자신에 대해 부인하고 거절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허물과 부족함을 덮어주고 채워주는 것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때가 오더라도 결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를 내려놓지 않는 것, 오히려 그를 돕고자 하는 것, 그를 향한 사랑을 지키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것을 참음입니다.
1.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이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고갈되거나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은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샘솟듯이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뿌리는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마르지 않는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 바로 모든 것을 참을 수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어떤 사랑스러운 면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에게 사랑받을만한 자격과 조건이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7~8).
2. 사랑의 빚진 자로서 (마 18장 탕감의 비유, 롬 8:13, 요일 4:11)
우리는 모두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이 빚을 갚아야 합니다.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어떤 사랑받을만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값없이 거저 사랑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바로 그 사랑에 빚진 자로서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주의 계명으로 받아 (요일 4:18~21, 마 22:37~40)
4. 주님을 사모함으로 (요일 4:12~16, 요 14:21~23, 요 15:10~12)
우리가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할 때 생명이신 하나님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고 또한 사랑하기로 뜻을 정하였다면, 모든 것을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새는 구멍을 잘 덮고 잘 막아야 합니다. 이 일을 잘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그 사람 때문에 사랑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함’ 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는 내 안에 생명으로 계시는 하나님이 곧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정말 주님을 사모한다면 주님과의 연합을 얻기 위해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3장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1.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롬 8:28, 약 1:2~4).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 전형적인 예시가 요셉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아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하기 위해선 반드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만이 인내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신뢰, 이것이 믿음의 선진들로 하여금 인내하게 만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사랑 안에 있는 믿음과 신뢰와 확신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자의 믿음과 신뢰입니다(롬 8:31~39).
2. 그를 아는 지식 안에서 신뢰함
욥이 실족할 뻔했던 것은 그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온전히 믿는다는 것은 바로 지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참 믿음은 오직 온전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에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하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며 우리로 모든 것을 믿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면 다시금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풍성해집니다. 그 사랑 안에서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게 됩니다. 때로 환경 가운데서 낙심되고 절망될 때 하나님의 크신 사역과 역사를 가만히 생각하노라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깨달아져 다시금 믿음이 회복됩니다(시 77편).
3. 사랑 안에서 믿어줌
모든 것을 믿음의 또 다른 의미는 그를 믿어 주는 것입니다. 그를 믿기 위해 먼저 그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기 위해선 그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요 그를 아는 지식에 근거하여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믿어주는 것은 속아주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선 여기까지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는 속아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라도 속아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선 그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믿어주는 것은 언제나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이어야 합니다. 믿어주고 속아주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 승화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속아 주고 계십니다. 또 모든 것을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그 되게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도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실 수 있도록 힘을 다하여 수고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그에게 일하실 것입니다.
4. 하나님이 하심을 믿는 믿음 (빌 1:6)
모든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믿는 것은 바로 하나님 때문입니다.
5. 온전한 신뢰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
하나님만이 신뢰의 대상이신 이유는 첫째,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시며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사랑이실 뿐 아니라 오늘 나를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는 본질적인 사랑이며 일방적인 사랑이며 보편적인 사랑입니다(요 3:16). 그리고 주님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상대적인 사랑이며 상호간의 사랑이며 개별적 사랑(특별한 사랑, 혹은 탁월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하셨습니다(행 13:22). 이는 탁월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인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특별한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전적인 신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어드릴 수 있습니다.
6. 믿어줌에 있어서 필요한 지혜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믿어주는 일엔 특별히 지혜가 필요합니다.
14장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가 그를 믿어줄 수 있고 사랑하는 나이기에 그를 또 바라는 것입니다. 이는 맹목적으로 믿고 바라는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바람에 대해 잘못 이해하면 우리는 사람을 향해 맹목적인 기대를 갖게 됩니다. 이런 그릇된 기대를 사랑이라고 착각해선 안 됩니다. 다만 사랑하기에 믿고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과 연결됩니다. 그를 믿고 기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바람입니다. 그를 의심하거나 불신하지 않고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그를 믿는 것은 그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먼저 내 안에서 그를 믿었으니 이제 그 믿음대로 될 것을, 그가 그 믿음대로 행할 것을 바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면 그를 믿어주고 그를 바라야 합니다. 그 믿음에 근거하여 희망과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바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애 3:19~26).
1. 건전한 의심, 합당한 의심
우리의 지각 안에서 그 말이 거짓임에 틀림없는데 그냥 믿을 순 없습니다. 건전한 의심, 합당한 의심을 가져야 합니다. 건전한 의심이란 그를 섬기기 위해 혹은 그를 돕기 위해 그를 위하여 의심하는 의심을 말합니다. 세상에서의 의심과는 조금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의심합니다. 그에게서 해를 입지 않기 위해, 그를 받지 않기 위해 의심합니다. 그러나 건전한 의심은 오히려 그를 잘 돕고 섬기기 위하여, 또 그를 사랑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을 거짓으로 속여 재물을 취했을 때 엘리사가 집에 앉아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것이 건전한 의심이요, 합당한 의심입니다.
때로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믿음을 보류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그에 대한 기대를 보류하고 여전히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랑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 우선될 순 없습니다. 가장 먼저 되어야 될 것은 하나님 사랑이요 그 안에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아가페입니다. 좋은 지도자는 항상 사랑하기에 의심하고 경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때로 주의 몸 된 교회가 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맡겨진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믿음과 바람은 절대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해치는 악한 일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단 우리가 사랑하여 의심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하지 않고 거절하기 위해 의심하는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언제나 마음의 흐름을 살펴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적이고 상호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음과 바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 혼자가 아닌 그와 함께 신뢰를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 혼자가 아닌 나와 함께 쌓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야겠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선 함께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또 나를 향한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나를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믿고 바라고자 하는 한편 나를 다른 사람이 믿고 바랄 수 있도록 신뢰를 주어야 합니다. 서로 신뢰를 쌓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15장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먼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하였고, 또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내 안의 미움이나 혈기 같은 악한 감정들에 대해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그를 관용해주는 것, 그의 약함을 담당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음은 나에 대한 참음이요, 모든 것을 참는 것은 그에 대한 참음입니다. 사랑에 있어서 마지막 주제는 ‘모든 것을 견딤’입니다. 이는 사랑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견딜 때 사랑은 비로소 완성됩니다.
주께서 모든 수치와 모욕과 조롱을 참아내신 것처럼, 십자가를 앞두고 마음이 민망하여 죽게 된 것을 참아내신 것처럼 우리도 참아야 합니다. 또 그를 사랑하기 위해선 그에게 있는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참아내야 합니다. 그에게 있는 이런 저런 사랑할 수 없는 이유들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견딘다는 주제는 사랑에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냥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기에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부정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가능합니다.
모든 것을 견딘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치열한 일입니다. 사랑엔 자기 부인과 자기 부정의 고통이 따릅니다. 해산의 수고를 갖게 합니다. 바울도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 몸에 채우며 사는 자였기에 이처럼 철저하게 모든 것을 견뎠습니다(골 1:24). 그러므로 모든 것을 견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완성입니다.
견딤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놓는 일이며, 철저하게 십자가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 부인과 자기 부정의 과정 속에서 견딜 뿐, 감당케 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며 십자가에 참여되었으나 그로 하여금 견딜 수 있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가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불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부인과 자기 부정이라는 대가뿐입니다. 그 너머는 결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 너머의 영역은 오직 하나님께서 감당케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책임지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모든 것을 견디라고 하십니다. 책임은 하나님이 지십니다. 그러나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는 한 우리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너머의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역할이라는 사실입니다. 교만하게 그 너머까지 책임지려고 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다만 자기 부인과 자기 부정의 대가를 치를 뿐 책임은 언제나 하나님이 지십니다.
3부 사랑의 영원성 (고전 13:1~3, 8~13, 고전 14:1)
1장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없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이라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2장 사랑의 영원함
예언도 그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그치나 사랑은 영원합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이 그치는 것은, 그것들이 아직 온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것이 오면 온전하지 못한 것은 다 버려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올 때 지금의 온전하지 못한 사랑은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랑은 온전한 것이 오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린아이의 사랑인가 장성한 자의 사랑인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 사랑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할 때 온전해져 갈 수 있습니다(엡 3:18~19).
지금 내 안에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으로 하고 있지 않다면 그 모든 일은 하나님과 조금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비록 방언을 말하고 있고, 비록 예언이 나오고 지식이나 지혜의 말씀이 나를 통해 풍성히 나타나고 있다 해도, 주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나오는 그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3장 사랑의 탁월함
믿음과 소망과 사랑 외의 다른 은사들은 이 땅에서 우리가 조금 맛보고 있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며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믿음도 소망도 완전한 것 앞에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처럼 점차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이 조금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그러나 날마다 믿음이 더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에 우리의 믿음은 온전해질 것입니다.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의 소망은 참으로 보잘 것 없습니다. 그 소망이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지 못합니다. 그 소망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날에 우리의 소망은 영원 속에서 만개하게 될 것입니다.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날에는 날마다 소망이 새로울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이처럼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이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우선순위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모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사랑은 하나님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을 주십니다. 이 믿음과 소망은 날마다 온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제일입니다.
또 사랑이 제일인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은 그 능력에 있어서 제일입니다. 믿음과 소망 또한 힘이 있어 우리에게 능력으로 나타나는데, 사랑이 가진 힘이 우리에게 가장 큰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1. 믿음의 능력(롬 8:1~4, 요일 5:4)과 소망의 능력
우리는 죄에 질 수 없고 죄와 타협할 수 없습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수 없습니다(롬 8:12).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죄를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그 믿음을 사용하여 육신대로 살지 아니하고 영으로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겐 소망이 있기에 우리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살 수 있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된 소망을 가진 자라면 장차 나타날 영광 속에서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고난을 넉넉히 인내할 수 있습니다. 참음으로 소망 가운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이라는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활하게 되면 우리는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몸이 아닌 신령한 몸으로 다시 입게 될 것입니다. 죽을 몸이 아닌 영생의 몸으로 다시 입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망의 근거입니다(롬 8:19~25).
2. 사랑의 능력 (롬 8:31~39)
사랑의 힘은 우리와 하나님을 단단히 결속시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로 나 자신을 내어주게 합니다. 믿음으로 이기고 소망 중에 견디는 것을 넘어서 모든 환난과 고난과 핍박과 죽음 앞에 나를 내어줄 수 있는 자가 되게 합니다. 그 사랑이 나를 단단히 붙들면서 나에게 그러한 힘을 공급합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과 소망이 우리를 붙드는 힘과 비교되지 않는 큰 능력으로 우리를 붙잡아 줍니다.
사랑은 우리로 주를 위하여 어떤 핍박과 환난까지도 감당하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어드릴 수 있게 합니다. 사랑의 위대함입니다.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힘이 이처럼 위대한 것입니다. 그 사랑이 나를 든든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Ⅱ. 독후감
1. 왜 사랑이어야 하는가(고전 13:1~3)
이 주제를 통해 동기와 목적이 항상 사랑이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하고(1절), 내가 아무것도 아니며(2절), 내게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3절). 그리고 인격적인 관계와 기능적인 관계를 묵상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인격적인 관계(생명, 사랑)를 통해 서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세워주고 세움 받는 영성인이 되도록 더욱 힘쓰겠습니다.
2. 사랑을 위하여
주님께서 주신 하루의 기회를 허비하지 아니하고 허투루 살지 아니하며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살기 위해서는 분별과 점검의 삶이 매우 소중함을 묵상했습니다. 일상 속에서 깨어있지 아니하고 무심코 살다보면 사랑과 생명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냥 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흐름을 잘 분별하여 사랑이 동기와 목적이 되고, 사랑의 속성을 바르게 배우며 주 안에서 사랑하는 복된 영성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구속사를 에베소서 4장 11절~16절 말씀과 함께 묵상했습니다.
3. 사랑은 오래 참고
주님 안에서 사랑하기로 뜻을 정했기 때문에 사랑의 특성인 오래 참음을 바르게 배워야함을 묵상했습니다. 십자가에서 감정을 바르게 처리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으며(약 1:19~20), 주님의 좋은 동역자가 될 수 없기에(행 20:19~20) 이 공과를 날마다 바르게 배우길 원합니다. 때때로 육체가 준동하거나 반발할 때, 그리고 육체가 개입될 때마다 이 공과를 적용하도록 힘쓰겠습니다. 그리고 오래 참음은 지금 하는 것이고, 이번에 또 한번 참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또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27)는 말씀을 적용하도록 힘쓰겠습니다.
4. 사랑은 온유하며
이 주제를 통해 항상 겸손을 유지하고 하나님 앞에 온유해야 함을 묵상했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해야함을 묵상했습니다. 상황에 따라 쉽게 온유함을 잃어버릴 수 있는 모습이 제 모습이며, 쉼을 잃어버리는 모습이 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늘이 있어야 나그네가 쉬어갑니다. 빈 의자여야 사람들이 앉을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은 요란함과 시끄러움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선 그 누구도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요한 웨슬러는 “나는 분주하지만 내 영혼의 평정을 잃어버릴 만큼 분주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했습니다.>
5.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바르게 성장하여 하나님을 얻을 수 있도록 주님만을 자랑하는 자가 되도록 더욱 힘쓰겠습니다. 빌립보서 3장 3절 말씀처럼 참할례당으로 세워지길 소원합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을 자랑함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얻고 소유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사도 바울의 제자들이 그를 통해 주님을 얻었듯이 더욱더 주님의 통로와 동역자로 참여되는 생명의 전달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6.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관계설정과 사랑법을 묵상했습니다. 관계설정에서 무심코 행하거나 교만한 마음이 들어오거나 너무 과하거나 모자랄 때 관계설정에 실패하여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관계의 간격이 과연 적절했는지,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지 않았는지 점검하며 사랑법을 적용하고자 합니다.
7.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건 이웃을 향한 사랑이건, 우리가 사랑하려고 하는 한 우리는 자신을 상관치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향하던 시선을 떼어내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관심에서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철저히 자신을 상관하지 않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기꺼이 우리에게 맡기실 것입니다(다윗과 그일라 사람들, 삼상 23장).>
저는 영성훈련을 하기 전에 쉽게 자기사랑과 자기연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원망과 불평과 시비, 그리고 낙심과 절망이 많았습니다. 때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고, 늘 부족한 것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 변명과 탓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선을 행할 용기를 잃어버렸고, 내 코가 석자라는 생각을 많이 했으며,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 자체가 사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은혜로 영성훈련을 받게 되었고, 자기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예수의 일을 구하라는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빌 2:19~21). 그리고 주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먼저 받는 자가 되어야함도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 말씀과 고린도후서 12장 15절 말씀과 삼상 23장 말씀과 빌립보서 2장 1절~5절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하셨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이 말씀들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복된 주님의 종으로 세워지길 소망합니다.
8.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이 주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묵상했습니다.
(1)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2)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십니다.
(3) 하나님이 나를 통해 그를 사랑하십니다.
(4) 사랑의 목적은 영적 성장이며 주님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5) 궁극적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주 안에서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6)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비움과 채움의 훈련을 더욱더 열심히 해야 함을 묵상했습니다. 특히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더욱 풍성하게 채워야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야만 마음에 선을 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눅 6:43~45).
9.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진리를 기뻐하는 것과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에 대해 학습했습니다. 날마다 삶 속에서 이 두 가지 삶이 늘 함께하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복된 삶이 되길 소원합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나의 참된 소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 되도록(시 119:10~16, 56, 59~60, 71~72) 더욱 힘쓰고, 진리를 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고백하는 복된 주의 종이 되도록 더욱 추구하겠습니다.
10. 사랑의 탁월함
믿음의 능력과 소망의 능력과 사랑의 능력에 대해 학습했습니다. 더하기와 온전함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성장과 변화와 참여에 힘쓰는 영성인이 되길 소원합니다. 영적 실제 속에서 사랑을 묵상할 때 부적절한 모습을 늘 대면합니다. 더욱 학습하고 훈련하고 연단 받고 실제 되는 영성인이 되도록 더욱 추구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했던 말씀처럼 날마다 주님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하도록 힘쓰겠습니다(딤전 4:7~8, 13, 딤전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