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30-1 20040726 314P-1.zip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설간이 이르기를 "제자가 경성에 올라가면 주상께서 반드시 물으실 것이오니, 원컨대 대사께서는 자비로 불법의 요긴함(心要)을 가리켜 보여 주시어 두 궁전(측천, 중종)과 경성에서 도를 배우는 이들에게 전하고 아뢰어서, 비유하면 한 등이 백천 등에 불을 켜는 것과 같이 하여서 어두움이 모두 밝아져 밝고 밝음이 다함이 없게 하소서"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도는 밝고 어두움이 없으니 밝음과 어두움은 바로 번갈아 바뀐다는 뜻이라, 밝고 밝음이 다함 없음도 또한 다함이 있는 것이니 상대로 이름을 세운 연고니, 정명(維摩)경에 이르시기를 '법은 비교할 것이 있음이없으니 상대가 없는 연고니라' 하시었느니라"
강설:
설간이 다시 청법하기를 "마치 하나의 등불이 백천 등에 불을 붙여 그 빛이 모든 어두움(無明)을 밝혀서 그 밝음이 끝남이 없게 하여 주시도록 법문을 일러 달라" 하였다.
六조께서 이 말이 끝나자 이 질문이 속제의 차별문임을 다잡아 설파하시되 "도는 본래 밝고 어두움이 없으니 밝음과 어두움은 곧 바뀐다(變化)는 뜻이니 이 밝음과 어두움을 세움은 방편으로 이름한 가설이나 이 말에 국집하면 분별심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이라 相見이 되며, 밝음이 다함 없음도 또한 다함 있음이라는 것 역시 본래 그러한 것이 없는데 밝음이 다함이 없게라는 생각이 밝음은 어두움을 전제로 세워 있음이 되는 때문에 相見에 떨어지는 잘못된 소견임을 깨뜨려 주시고자 지시(指示)하신 것이다.
따라서 법이란 일체상이 없이있는 진공묘유임을 밝혀서 스스로 相見을 짓는 것을 깨뜨려(破) 주신 것이다.
설간이 이르기를 "밝음은 지혜에 비유하고 어두움은 번뇌에 비유한 것이니 도를 닦는 사람이 만일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깨뜨리지 않는다면 비롯함(始作) 없는 생사를 무엇을 의거하여 벗어나겠나이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번뇌가 곧 이 보리라 둘이 없고 다름이 없으니, 만약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깨뜨린다고 하면 이것은 二승의 견해라 양과 사슴의 (작은)근기이며 높은 지혜의 대근기는 모두 이와 같지 않느니라"
강설:
다시 설간이 밝음(지혜)으로써 어두움(번뇌)을 비춰서 그 어두움(無明, 煩惱)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시작 없는 무명, 번뇌를 어떻게 하고 생사를 뛰어 넘을 수 있는가 그것을 의지할 방편을 청법했다.
六조대사께서 번뇌가 곧 보리이니 둘이 없고 다름이 없는데 지혜로써 번뇌를 비춰 깨뜨린다는 소견은 二승의 견해라 성문, 연각의 작은 소견이며 최상승근기는 이와같은 소견을 짓지 않는다 하셨다.
이 말씀은 "본성이 진공임에 일체가 있음이 없이 있는 가운데 번뇌니 보리니 하는 것도 거짓 이름을 세워 방편의 차별문으로 설하는 것일 뿐 空中無色이라 실상이 공한 가운데는 상대적인 둘이 없어 번뇌와 보리가 다름이 없는데 깨뜨릴 것과 깨뜨림이 있음은 二승의 견해이니 즉 무엇을 근거(相對를 세워서)하여 그것의 실상을 깨달아 들어 가는 것으로 성문은 四성제를 관하여 해탈을 얻어 머물고자 하고, 연각은 十二연기법을 관하여 해탈을 얻어 머물고자 하는 소승의 견해이나, 최상승근기라면 일체가 평등하여 같은 바탕(同體)인 곧 진공의 淸淨不動, 不增不減을 직시(直視)해 들되 그런 상대적인 소견을 짓지 않는다"라고 설파하신 것이다.
설간이 이르기를 "어떤 것이 대승의 견해이나이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밝은 것과 더불어 밝지 못함(無明)을 범부는 둘로 보나, 지혜로운 이는 그 성품이 둘이 없음을 밝게 통달(了達)하나니, 둘 없는 자성이 곧 실다운 성품이라 이 실다운 자성은 범부의 어리석음에 있어도 없어지지 않고 현인과 성인에 있어도 늘지 않으며, 번뇌에 머물러도 어지럽지 않으며 선정에 있어도 고요하지 않는 것이니, 끊어지지도 않고 항상하지도 않고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중간과 그 안팎에도 있지 않아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서 자성의 모습이 여여하여 항상 머물러 옮기지 않음을 이름하여 도라 이름하느니라"
강설:
다시 설간이 "어떤 것이 대승의 견해인가?" 물으니
六조대사께서 "밝은 것과 더불어 어두운 것을 범부는 둘로 보나 지혜로운 이는 그 성품이 공함을 알아 둘이 없음을 밝게 꿰뚫어 통달하는 것이니,
둘 없는 자성이 곧 실상의 자성성품이라 실다운 성품인 본성은 둘이 아니라서(不二: 空) 성인 범부가 다르지 않아 더불어 하나며,
우주법계의 성품(법성)도 또한 일체평등한 진공묘유이기 때문에 이 비어 없이있는 불성은 어지럽거나 고요하다는 것도 없으며 끊어짐도 항상함이라는 것도 없으며, 가없는 온 우주에 상즉하여 머무니,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며 갈 곳도 올 곳도 달리 처소가 없어 중간도 안팎도 있지 않아서 남(生)도 멸함도 없는 어떠한 相도 이름도 없이 如如(공하고 공하다는 것도 공함)하여 항상 때와 처소를 가림 없이 두루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이것을 이름하여 道(실상의 진리)라 하는 것이라 하셨으니,
비유하면 유리 없는 크고 큰 유리병 속에 빈틈없이 꽉 채워진 맑아 깨끗한 물이 둘이 없으며 흔들어도 어지럽지도 않고 움직임도 없는 것과 같아 없이 있는(묘유)것이 곧 나와 우주법계 일체의 진여 자성(스스로의 성품)인 것이다.
설간이 이르기를 "조사님께서 말씀하신 不生不滅이 외도와 어떻게 다르옵니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외도가 말하는 불생불멸은 멸하는 것을 가져 나는 것을 그치고 나는 것으로써 멸함을 드러 내는지라 멸도 멸하지 않음과 같고 나는 것도 나지 않는 것이라 말하거니와,
내가 말하는 불생불멸은 본래부터 스스로 남이 없는 것이라 이제 또한 멸할 것이 없는(진공묘유) 까닭으로 외도와 같지 않느니라.
네가 만약 그 가운데의 요긴함(心要)을 알고자 하면 다만 일체의 선과 악을 모두 사량(분별하는 생각)하지 않으면 자연히 청정한 마음 바탕에 들게 되어서 맑아 깨끗하며 항상 고요하여 묘한 쓰임(반야작용)이 항하사(한량없음)이리라"
강설:
설간이 다시 여쭙되 "조사님께서 설하신 不生不滅이란 뜻은 외도(삿된 소견)와 어떻게 다른가?" 한데 대하여
六조께서 설하시기를
"외도가 말하는 불생불멸은 멸하는 것으로 나는 것을 그치고(단멸공) 나는 것으로 멸함을 드러내는(생멸을 상대적으로 설정해 놓고 끝내 아예 없음)지라 멸도 멸하지 않음과 같고 나는 것도 나지 않는 것(끊어져 없어지는 단멸)이라" 하셨으니
곧 멸하는 것으로 나는 것을 그친다는 뜻은 멸하므로써 斷滅하게 되는 것이라, 나는 것으로써 멸함을 드러 낸다는 뜻이 난 것은 곧 멸하여 아예 없어진다는 소견이니 이것은 단멸공에 떨어지는 소견을 짓게 되는 것이요,
또한 멸도 멸하지 않음과 같고 나는 것도 나지 않는 것이라는 소견을 말한다는 것은 멸이란 생함이 있을 때 멸이요 나는 것이 없으면 멸할 것도 없으니 나는것도 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불생(나지도 않고) 불멸(멸하지도 않는다)이라는 법성의 실상을 뜻한 것을 글자 그대로 일체가 다시 남도 없고 멸도 없다는 단멸空으로 귀착된 소견인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바의 가르침인 불생불멸은 법성인 본성 그 자체의 성품이 如如하여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인 것을 교설하신 것이니,
지금 외도의 불생불멸은 법계 자체의 나툼과 작용을 부정하는 소견이라 크게 그르친 것이다.
六조대사께서는 본래부터 스스로 법성은 남이 없는 것이라 다시 멸할 것이 없는 까닭으로 외도와 같지않다 하셨으며 그 실상을 알고자 하면 일체의 선과 악등 모든 사량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淸淨한 마음바탕(근본體)에 들게되어 맑아 깨끗하며 항상 고요하여 묘한 쓰임(般若作用)이 한량없으리라 하셨으니,
다시 뜻을 말하면 生滅의 상대적인 분별심등 일체의 사량을 하지 않고 맑아 깨끗한 온 우주 법계의 바탕인 근원(法性)이요 자기 마음인 본성(自性)에 계합 합일하여 일체의 본성을 깨달아 들어 보면 참으로 비어 空하여 생멸할 것이 본래부터 없음을 알 것이요, 본성이 공하여 그러하나 그 성품 가운데 (相이)없이있는 것이 소소영령하게 있어(般若: 묘유) 아예 없는 공이 아니라 그 반야가 한량없이 나투고 작용(쓰임)함을 명철하게 깨달을 것이라, 외도의 불생불멸이라는 소견과 불조가 설하는 본성의 불생불멸의 지견이 다름을 들어 밝히셨으니 평등문(진제: 理)으로써 불생불멸과 속제(事: 用)의 무궁한 반야작용을 쌍으로 드러 보여 외도의 삿된 불생불멸의 소견을 파하신 것이다.
차별심을 일으키지 않음이 곧 定이요 坐이며, 밝게 비쳐 봄(慧)이 禪이니 이 맑아 깨끗한 본래의 성품대로 일체를 밝게 살펴 진공묘유로써 묘용함을 직시하는 것이 자성의 성품이요 선정이며 일상 일행삼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