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포구이야기 - 18.
얼마 전이다. 광주MBC ‘왕종근의 아름다운 초대’에 나가 갯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왕 선생님! 전라도 음식의 특징이 뭔 지 아요?”
“뭐다요?”
최고의 예능 MC답게 금방 전라도 사투리까지 흉내를 냈다.
“게미라고 아요? 게미”
“게미가 뭐다요?”전혀 모르는 눈치다.
“곰삭은 맛이요. 그야말로 슬로푸드제라.”
“아하, 폭 삭은 맛.”
이 말은 부산에서도 쓰는 말이란다. 그날 그와 젓갈과 병어회를 놓고 게미가 있는 전라도 점심을 먹었다.
설도항 전경.
그 게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어머니의 손맛이 부산에 없을 리 없고, 장독에 넣고 삭힌 맛이 경기도라고 없겠는가. 나는 그 답을 전라도의 자연에서 찾는다. 갯벌에서 찾고 바다에서 찾는다.
소금이 그냥 오는가. 어떤 사람은 갯벌도 쉽게 만들어진다지만 전라도의 갯벌은 수천 년 세월이 빗어낸 예술이며 생명의 보고다. 그곳으로부터 오는 자연이 만들어 주는 맛, 그것이 게미다.
짭짤해야 밥이 넘어간다. 싱거워서 어디 밥이 넘어가겄냐. 간을 맞춰야지. 젓갈 없는 밥상은 전라도 밥상이 아니다. 간단한 새우젓부터 게장, 창젓, 곤쟁이젓, 추젓, 오젓, 육젓, 동백하젓, 멸치젓, 깡치젓, 갈치젓, 갈치속젓 등등. 입으로 주워 삼키기도 벅차다. 서해에서 나는 것은 고래 말고는 전부 젓갈을 담는 듯 하다.
젓새우에 싱싱한 수산물까지
내가 설도를 처음 찾았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깊은 갯골과 수문이었다. 아릿함이랄까. 그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저림이었다. 그곳에는 젓갈집 몇 집과 횟집이 한두 집 있었다. 벌판 한 가운데 봉긋 솟아있는 언덕 위에는 교회가 자리를 잡았고 주변으로는 민가 수십 호가 똬리를 틀었다.
일제시대까지는 갯벌이었고 바다였다. 그 가운데 봉긋한 섬이 있다. 그걸 ‘누운 섬’이라 불렀다. 소금의 고장이라 이름도 염산에 속했다. 마치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촌로들이 알려줬다. 바다에 있는 섬 치고 누워있지 않고 서 있는 섬이 어디 있던가.
‘누운 섬’이 이사람 저사람 입을 통해 불려지다 ‘눈섬’이 되었다. 여기에 한자지명이 만들어지면서 설도(雪島)로 둔갑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광의 젓갈포구 설도의 탄생 비화다.
설도에서 염산면을 거쳐 법성포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이미 전국에 알려진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다. 노을이 아름다워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곳이다. 젓갈에서 조기까지 서해안 최고의 먹을거리 산실이다. 게다가 염산과 백수에서는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소금이 생산된다.
우리나라에서 천일염 집단 생산지 명승 두 곳을 꼽으라면 영광과 신안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운이 좋으면 칠산바다에서 잡아온 젓새우를 직접 소금에 버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때를 잘 맞춰 가면 갯것들을 싼 값에 구할 수도 있다. 설도 어민들이 직접 잡고 포구에서 판매하는 싱싱한 수산물, 특히 회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포구 맞은편은 갯바람에 아삭거리는 갈대밭이 장관이다. 순천만의 명성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갯사람과 뱃사람들의 질펀함과 먹을거리가 함께 어우러진 멋진 포구다. 매년 젓갈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갯골만큼이나 깊은 상처 간직
이곳에도 분단의 아픔이 갯골만큼이나 깊은 상처를 냈다. 민간인 학살이다. 교인들을 중심으로 모두 수십 명의 민간인이 죽임을 당했다. 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설도포구 수문 앞 갯골에서 변을 당했다. 돌에 묶여 수장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날의 아픔을 치유하고 후세들에게 불행했던 기억을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 기념탑을 세웠다.
일 년이면 몇 차례 이곳을 찾는다. 섬과 바다를 좋아해서였지만 장모님의 설도사랑도 한 몫을 했다. 생선장수를 했던 장모님은 낙월도에서 들어오는 싱싱한 갯것들을 받아다 팔아서 자식들을 가르쳤다. 그런 인연으로 광주로 이사하고 나서도 김장철이나 특별한 날이 있으면 꼭 이곳에서 젓갈과 생선을 사셨다.
이제는 먼 곳으로 가신 장모님을 대신해 나와 아내가 설도를 찾는다. 설도에 오면 아늑하다. 지금은 포구를 매립하여 많이 변했지만 작고 아담한 포구가 맘에 든다.
나만의 포구, 기억을 만드는 일도 괜찮을 것 같다. 동해의 파란 바다와 포구도 좋지만 물이 빠지면 갯골을 드러내고 그 위에 몸져 누워버리는 배들과 갈매기가 한가로이 노니는 포구도 괜찮다. 싱싱한 젓갈과 짭짤한 젓갈이 그립거든 올 가을준비는 설도에서 하기를 권한다.
전남발전연구원 연구위원
녹색의 땅 전남새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