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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
정효준의 뒤를 따라 아무 생각 없이 방으로 들어서려다 문전에서 우뚝 멈춰 선 김용수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굳어졌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방바닥에 펼쳐진 책들을 주섬주섬 한쪽으로 치우는 정효준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러다 다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머리를 들이밀어 방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두 평 남짓한 방안은 목재로 만든 앉은뱅이책상 위뿐만 아니라 한쪽 벽면을 첩첩이 매우다 못해 방바닥에서 천정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책의 기둥들로 누울 자리는커녕 앉을 자리조차 없을 정도였다. 김용수는 수많은 책의 제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탈무드,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몽테뉴, 러셀, 파스칼, 칸트 등 많은 사상가와 철학가의 서적과 성경연구 및 불경에 관한 책자, 심지어는 유교, 도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적이 즐비하게 쌓여 있었다. 그가 놀라운 표정으로 둘러보는 사이 정효준은 이리저리 책 뭉치를 밀어내고 쌓아올려 겨우 두 사람이 마주 앉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방이 참 형편없죠? 이쪽으로 앉으세요. 선생님.”
“어, 어, 그래.”
마주앉는 김용수는 마치 책에 포위된 듯한 착각에 빠져 물었다.
“이 책들은 다 뭐야?”
“고물을 정리하다 보면 예상외로 책이 많이 나와서요.”
정효준이 진정으로 부끄러워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자신도 모르 사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김용수는 불가사의한 청년의 정신세계가 경이롭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청년을 향해선 놀란 기색을 외려 과장된 몸짓으로 갈아 치우며 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많은 책을 죄다 읽어본 건 아니겠지?”
“몇 번이나 봤습니다만, 저 책들 속에는 도무지 제가 알고 싶었던 것이 없었어요.”
정작 정효준 본인은 그것을 그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용수로서는 정면에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정효준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린 김용수는 더는 자신의 황망함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취하면서 조금은 공격적으로 묻게 되었다.
“다 이해할 수는 있겠던가? 죄다 읽어봤다면 말이야.”
김용수는 절대 다 읽었을 리 없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분량도 방대하거니와 원어로만 쓰여 있는 서적들도 꽤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저 되는대로 쌓아 놓고 무게나 한 번 잡아보려는 수작쯤으로 단정 짓고 그렇게 물었던 것이었다. 반면 정효준은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감추려 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펼쳐내 보였다.
“이해해주고 싶지 않은 부분도 많던걸요. 모두가 지혜와 비법을 말하고는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어요. 그들의 주장은 공간과 공간, 사람과 환경, 동물적 한계와 사후세계에 대한 해법에 비추어볼 때 그저 자기도취에 빠진 주관적인 낭설에서 그쳤어요.”
(허, 뭐야 결국......? 이 많고 많은 책 중 어느 하나도 쓸모 있는 게 없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김용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미처 묻기도 전에 아니, 어쩜 물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자신이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다만, 정효준이 어느새 자신이 하고자 했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쓸모없단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그렇게 시도해선 아무것도 이루어질 게 없다고 생각돼서요.”
“이를테면?”
김용수는 옆에 놓인 책 중 아무 책이나 집어 들고 정효준에게 내보이며 시험 삼아 물어보았다. 그것은 다행히 자신이 흥미를 가졌던 ‘조로아스터교 연구론’이란 책자였다. 그가 기억하는 조로아스터교란 불을 숭배하는 종교로서 후일 많은 종교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정도였다. 한때는 그것에 심취하여 ‘삼 불’이란 소설을 써볼까 고심해본적도 있었다. 자신만만한 김용수의 표정을 바라보며 정효준이 예의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책 속에서 항상 깨어 있으라고 촉구하는 관념들이 깊은 잠재의식에서 발휘되는 기적의 변화를 오히려 방해하진 않을까요? 항상 맑은 정신은 언제까지나 다른 것을 받아들일 여유가 생성될 수 없게끔 방해물 역할을 하는 건 정말 아닐까요?”
김용수는 대번에 이어진 청년의 답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당시 조로아스터교에 대해 자신이 확신했던 판단들은 허한 마음과 소재거리에 치우친 나머지 그저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깊이가 고물상에 틀어박힌 하잘 것 없는 자의 정신세계에 조차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비록 짧은 순간이었을지라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논리를 앞세워 그를 정신적 충격으로 몰아넣는 알 수 없는 미지의 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더군다나 마치 혜성처럼 등장한 인간을 마주한 양, 김용수는 분명히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그런 그가 소스라치도록 놀란 자신을 가까스로 달래며 겨우 말을 이어나갔다.
“음, 그것은 그것대로의 가치가 있을 터, 그렇다면 어떤 책을 읽어야 자네의 마음이 흡족할 것 같나?”
김용수는 앞에 앉은 청년의 생각을 듣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정효준은 마치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사람처럼 열변을 토해냈다. 그것은 해소시키지 못한 갈증을 향해 끝없이 갈구하는 청년의 질긴 몸부림을 대변해 주는 듯 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발견하고 싶어 하는 것, 예를 들자면 이 세상이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우주를 넘어선 모든 법칙을 깨우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입문서 같은 것은 없을까요? 정히 그런 책을 찾을 수 없다면 공간 너머 저편의 신의 세계와 인간세상을 연결지을 수 있는 지침서 같은 건 없나요? 여러 차원의 세계로 가는 길목을 밝혀내고 그곳을 넘나들 수 있는 항법서 같은 것 말이에요.”
김용수는 갈수록 기가 찰 노릇이었다.
“허, 글쎄 무슨 공상만화영화도 아니고 아마도 그런 완전한 책은 이 세상에 없을 것 같군.”
“아뇨, 어딘가 있을 거예요. 저는 한때 누군가 나를 조정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것도 아주 치밀하게 분석하고 행동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 지배적이었죠. 뭔가가 음...,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유령 혹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입자형태의 생명체가 존재해서 생각의 길이 막힐 때마다 나타나 그 폭을 넓혀주는 거예요. 선생님도 아마 그런 적이 있었을 거예요. 전혀 경험한 적이 없거나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영감이 번뜩 떠올랐다거나 하는 그런 것 말이에요. 그러니 분명히 거기에 대해 영감을 얻은 사람 또한 어딘가 존재할 거예요.”
정효준의 동의를 구하는 눈빛에 김용수는 오히려 그의 재미있는 사상과 그에 따른 결론이 궁금해져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갈 것을 종용했다.
“부담 갖지 말고 계속 말해 봐.”
“그래서 저는 이곳을 포함한 모든 것이 완전하다고 생각돼요. 다만, 상황에 따라 자꾸 변화하는 것뿐이지 따지고 보면 변화라는 것도 완전을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역시 완전의 일부분일 거예요. 선생님은 지금 이 세상이 차원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나요? 다른 차원은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그것이 우리의 삶에 지력 한계를 그어놓는 짓궂은 신의 차원이라 해도 결국 인간은 반드시 그곳을 알아내고 말 거예요. 한 차원에서만 머물러 있을 인간이 아니므로 그래서 주제넘게.......”
“......”
그는 정효준이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문 채 그저 수줍은 미소만을 흘리고 있음을 잠시 동안 눈치 채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새롭고도 야릇한 청년의 진면목을 발견한 후에 느끼는 놀라움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에 정효준의 생각에 동조해 깊숙이 몰입해버린 자연스럽게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김용수는 퍼뜩 정신을 차려 정효준이 얼마나 더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려줄 것인가 하는 태도로 시간을 끌었다. 정효준은 마치 올가미에 걸린 짐승처럼 점점 조여드는 긴장감으로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것이 김용수가 입을 다물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또 다른 불길한 징조가 달려오고 있다는 신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김용수가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그래서 주제넘게 스스로 써보았다. 그건가?”
정효준은 그의 질문에 공연히 머리를 조아리며 송구스러워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앞에서......”
“오, 아냐, 아냐, 죄송할 게 따로 있지. 괜찮아.”
그러자 더욱 얼굴을 붉히며 간신히 말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글인지 이제 한 번 볼까?”
김용수가 가볍게 원고를 보여줄 것을 청하자 정효준은 낮은 목제책상 위에 놓여 있던 원고 뭉치를 스스럼없이 건네주었다.
표지에 선명하게 박힌 ‘현생에서의 구원자 되기’라는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원고를 받아든 김용수가 당장에라도 첫 장을 넘기려는 찰라 갑자기 닫혀 있던 방문이 발카닥 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은 일제히 문으로 쏠렸다. 그 순간 붉게 물들었던 정효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바뀌었다. 그의 유일한 두려움의 대상 박종태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효준이 그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불과 두어 달 전부터였다.
자정이 넘은 시각 정효준이 한참 독서에 빠져 있을 때 복도에선 남녀의 싸우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년이 어디 내 앞에서 딴 놈이랑 눈을 맞춰, 엉? 일루 와. 일루 못 와?”
박종태는 두려움에 떠는 형자의 긴 머리채를 거머쥐고 복도를 질질 끌고 다녔다. 그러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벽에다 머리를 마구 짓찧어댔다.
“쿵, 쿵!”
“그런 궁리나 하는 네년의 대가리를 요절을 내던지. 내돌리는 구멍을 도려내 버리던지 해야 할까 보다. 썅!”
“쾅, 쾅!”
“악, 악! 사람 살려! 총각, 나 좀 살려 줘! 으아악!”
“흥, 이년이 지금 누굴 불러내. 어느새 저놈 이랑도 배 맞춘 거 아냐?”
“퍽, 퍽! 우당탕!”
“어쭈? 일어나, 못 일어나?”
박종태가 쓰러진 형자의 머리채를 강제로 끌어올리며 따귀를 후려치려는 찰나였다. 어느새 방을 뛰쳐나온 정효준이 그의 팔목을 단단히 움켜쥐고 말했다.
“아저씨 그러다간 사람 죽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적 상황에 박종태의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가 온순한 사람임을 간파하고는 임자를 만났다는 듯 눈알을 휘 번뜩였다. 그리고 마치 전광석화와 같은 몸놀림으로 형자의 머리채를 놓음과 동시에 품속에서 꺼낸 날카로운 흉기를 다짜고짜 정효준의 턱밑으로 들이댔다.
“오, 그래 네놈 오늘 잘 만났다. 이 손 못 놔? 이걸로 배창세기를 발라 널어놓기 전에 얼른 놔라. 응, 놓지 못해 이 씨발새꺄!”
박종태가 싸늘하고 위협적인 표정으로 정효준의 상체에 칼날을 쓱쓱 문지르며 협박했다.
“내가 겁나는 게 있는 줄 알아? 니들 연놈 죽여 버리고 들어가 살면 그만이야. 씨발!”
정효준의 상의는 칼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어김없이 입을 벌렸다. 형자가 그 기세에 질려 무릎을 꿇고 박종태에게 빌기 시작했다.
“자기, 내가 잘못 했어. 다신 안 그럴게.”
형자의 몰골은 엽기 중에도 가히 일품이라 할 수 있었다. 코피는 줄줄 흘러 입 언저리와 목에 엉겨있었고 머리카락이 한 줌이나 뽑혀나간 정수리 부분은 횅하니 비어있었다. 게다가 짧은 스커트에 민소매의 현란했던 몸뚱어리는 구렁이가 휘감은 듯 퍼렇거나 붉은 멍이 수두룩하게 자리를 차지했다.
“그건 그런다 치고, 너 이 새끼 앞으로 또 한 번만 우리 일에 끼어들어 초 치면 콱 죽여 버리겠어. 각오해, 어떤 놈이건 기필코. 칵, 퉤!”
위협적으로 가래침을 뱉어낸 박종태는 음흉한 속을 드러내며 형자를 끌고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충격에 휩싸인 정효준은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방에서 한참을 끙끙대는 동안에도 굳은 듯 복도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날은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들어왔는지조차 기억나질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박종태만 보면 공포에 휩싸여 슬금슬금 피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박종태는 그런 그가 눈에 띄기만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엄포를 놓는 둥 시종일관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렇게 별안간에 예고도 없이 문을 열어 재낀 박종태가 다짜고짜 상체를 방안으로 들이밀며 정효준에게 깡다구를 부리기 시작했다.
“어이, 바보! 네 사장 놈 어디 갔어?”
그는 완전히 술에 절어 핏발 선 눈알로 날카로운 독기를 펑펑 뿜어내고 있었다. 하도 거칠게 방문을 열어젖힌 통에 중심을 잃은 책 기둥 하나가 와르르 방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정효준은 마치 천적을 만난 짐승처럼 몸을 바싹 웅크린 채 옴짝달싹 못하고 떨기만 했다.
“야, 이 새꺄! 내 말 안 듣겨? 고사장 어딨냐고 인마! 아, 답답해, 이 육씨랄 놈이 본드를 주어 처먹었나?”
“말 안 해? 확 그냥!”
정효준은 여전히 좀 전의 자세를 고수하며 불안정하게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그러자 더욱 독이 오른 박종태가 그들의 알리바이까지 거론하며 추궁해댔다.
“어쭈? 빨리 말 안 해? 아, 요것들이 수상쩍단 말이야. 형자 년이 사라지자마자 고사장도 없어졌다? 뭔가 냄새가 나지 않아? 어이, 작가 선생은 어떻게 생각해?”
김용수는 자기 앞에서까지 건방을 떠는 박종태가 당장에 눈꼴시어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술에 취해 한껏 독이 오른 자와 시비가 붙어 봤자 시끄러워질 것이 당연하였으므로 조근조근 타이르듯 말했다.
“그렇게 아무나 사람을 의심해서야 어디 되겠소? 술 깨거든 맑은 정신으로 차분하게 찾아보시죠.”
김용수의 타이름에도 박종태는 안하무인격으로 떠들어 댔다.
“니기미, 씨팔! 심증은 가는데 증거가 없단 말이야! 예전부터 형자를 쳐다보던 고사장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어. 음흉한 놈! 동네 과부란 과부는 모두 해 처먹더니 이젠 남의 마누라까지! 에이, 오살할 놈.”
박종태는 제 흥분에 못 이겨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며 계속해서 지껄였다.
“내 손에 잡히면 두 연놈 다 죽었어. 야, 바보 새꺄, 너 진짜 말 안 해? 솔직히 말해봐. 너도 한 통속이지? 그 치?”
박종태의 횡포가 그 즘 이르자, 하얗게 질린 정효준은 끙끙대는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이를 딱딱 부딪치며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고사장 그 씹새끼, 출장 갔냐? 엉? 또 출장 갔다고 할 테냐? 씨발! 출장은 무슨 얼어 죽을 출장! 지금쯤 두 잡것이 한참 쑤셔대고 돌려대고 할 테지. 잡히기만 해봐라. 아작을 내버릴 테니까.”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이 떠들어대던 박종태는 흘러내린 바지 허리춤을 한번 추켜올리더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격류가 한바탕 휩쓸고 간 듯 한동안 두 사람은 가만히 마주 앉아있었다. 그러다 정효준이 두서없이 자신이 느꼈던 공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저자를 대할 때마다 틀림없이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요.”
김용수는 아직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하는 정효준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세상의 계급은 두뇌가 아니라 부딪힘에서 저울질되는 본능의 무게다. 설사 이 청년의 말처럼 생각이 막힐 때마다 알려주는 미생물체가 존재해 미리 감지하고 거기에 맞춰 작동된다 할지라도 불가항력은 있다는 말이지.)
김용수는 이내 산란한 머릿속을 정리해 그을 다독이고 있었다.
“이봐, 자넨 겁이 많군, 그깟 술 취한 놈은 하나도 무서울 게 없어. 인제 그만 긴장을 좀 풀라고.”
김용수의 말에 정효준이 다시금 몸서리를 치면서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자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치우고도 남을 인간이에요.”
“소심하긴, 사내가 오죽 못났으면 자기 여편네 단속도 제대로 못 할까? 하긴, 어쩌면 그 친구도 욕망에 목을 매는 불쌍한 족속 중 하나일 테지.”
“하지만, 그자만 보면 왠지......”
무슨 말인가 하려던 정효준이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는지 고개를 휘휘 내둘렀다. 그의 행동에 김용수는 더욱 궁금해져 묻게 되는 것이었다.
“왠지, 뭐?”
“죽음의 냄새가 코를 찔러 그 사람 앞에선 어떤 말도 못 꺼내겠어요.”
말을 마친 정효준은 진정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몸서리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김용수가 원고를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아무튼, 맥이 빠진 이런 상황에서는 원고를 읽어볼 수 없게 돼버렸군. 나중에 내방에서 조용히 보도록 하지. 그리고 그런 불길한 생각은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아. 불길한 생각이 불행을 부른다고들 하잖아. 나약하게 굴지 말고 속히 떨쳐버리도록 해.”
끝내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는 정효준의 입에선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김용수는 방으로 돌아와 우선 몇 장 남지 않은 원고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아내와 헬스 트레이너의 불륜 행각이 떠올랐다. 죽도록 잊고 싶었던 아내와 젊은 사내의 정사장면이었다. 자신과는 판이하게 근육이 단단히 잡힌 사내의 알몸은 조각을 빚어 놓은 듯 반듯했다. 사내는 알몸인 최유리를 뒤에서 부드럽게 끌어안고 서서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최유리 또한 기꺼이 사내에게 살을 비비며 이어지는 쾌감에 몸을 떨었다. 김용수는 역겨운 상상을 뿌리치려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또다시 아내의 화난 얼굴이 연거푸 떠올라 그를 다그쳤다.
“당신의 무능력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세요! 그게 당신 능력의 전부일지도 모르잖아요?”
김용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게 다 박종태, 그 자식 때문이야. 그래, 승리자는 모든 전리품을 소유할 것이다. 하지만, 패배자는 오직 죽음과도 같은 고독으로 몸부림쳐야만 한다. 그 엄연한 사실을 뼈저리도록 알고 있기에 패배의식의 깊고 깊은 수렁을 기어 나와 기어코 복수의 칼날을 가는 지금, 나는 자비의 손길과 측은지심을 뿌리치고 부활의 날갯짓을 펼칠 그날을 향해 가고 있지 않는가. 불타는 육체의 욕망 따위는 잠시 뒷전으로 미룰 것이다. 곧 출판의 도시와 부정한 여인이 나의 찬란하고 영예로운 권좌 앞에 무릎 꿇고 자비심을 바라는 그날까지 ......”
김용수는 부활의 날개를 펼치기라도 하듯 두 팔을 활짝 벌려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기운을 되찾으려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을 때 옆에 놓인 정효준의 원고 제목이 강렬하게 시야로 빨려 들어왔다.
‘현생에서의 구원자 되기’ 원고를 집어 가볍게 첫 장을 넘겼다.
“현생에서의 구원자 되기라. 쳇, 제목 한번 유치하군. 제1장 환상의 수레바퀴를 조종하는 확고한 방법?”
김용수는 진정 가벼운 마음으로 비웃으며 원고를 펼쳐들었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길수록 글 속으로 빨려들면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그것의 효과는 곧 손끝이 떨리며 가슴으로 복받쳐 올랐다. 정효준의 원고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것이 김용수로 하여금 주체할 수 없는 커다란 심경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던 것이었다. 그가 책에 몰입돼 있는 동안 어느새 글자 하나하나가 소리로 환원되어 귓전을 때려왔다.
그저 소유하고 정복하고 분해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모든 우주의 법칙은 허위일 수밖에 없다. 순리를 거스르지 말고 무언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 당신의 혼을 그의 손아귀에 쥐여 주어라. 그리고 그가 약속했던 최후의 증명이 도래하는 날까지 그 동안 진행된 모든 과오는 말끔히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정화되는 그 순간에 자신에게 배당된 육신의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여 영혼을 단단히 다지는 계기로 삼아야만 한다.
어느덧 밤이 깊어갔지만, 김용수는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눈알은 벌겋게 충혈 된데다 가끔 섬뜩한 광기의 빛마저 번쩍이고 있었다.
“흐흐흐..”
돌연 김용수가 실소를 흘렸다. 책 속에서 내린 명령이 귓전에 생생하게 맴돌며 가슴깊이 파고들었다.
욕구, 인간이 품은 무의식 속에서 솟아나는 절대존재에 이르려는 본능적 욕망과 그것을 이루려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에 대해 해부해보라.
(누구나 자기 존재에 대해 포기하기보단 다른 이을 밟고 일어서려는 마음이 더 크게 작용한다. 그리하여 한창 왕성한 시기의 수컷들은 든든한 무리를 이루고자 번식행위를 하며 좀 더 좋은 유전자를 탄생시키고자 다른 암컷의 엉덩이를 끊임없이 노리는 것이다.)
“푸하하, 하핫핫......”
자신의 생각을 책에 대입시켜 보던 그가 웃음보를 터트렸다.
환상 속에 그대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다부진 몸매로 화한 김용수가 아내 최유리를 극도의 흥분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순간순간 여자들의 모습이 바뀐다.)
“캬오... 야후!...”
(김용수는 흥분에 사로잡혀 쾌재를 부르짖었다. 그는 또한 개선장군처럼 출판의 도시를 가로질러가다 무작정 한 출판사로 들어간다. 그의 등장에 사무용의자에 기대 졸고 있던 사장이 벌떡 일어나 이것저것 살필 경황도 없이 맨발로 튀어나와 깍듯하게 인사를 한다. 옆에 있는 최유리는 몸을 비비며 보란 듯이 안겨오고 밖으로 나오니 많은 군중이 무리지어 그를 따른다.)
“크히힉... 키흐흑...”
생각의 강을 거닐던 그의 입에선 웃음 반 울음 반의 야릇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글은 계속 이어지며 그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고 가고 있었다. 최고조의 흥분 상태로 치솟던 기분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다시금 집중은 계속되었다.
지금까지의 과정은 지극히 짧은 극도의 고통이며 지극히 짧은 극도의 쾌락일 뿐이다. 그러한 감각이 지나가면 인간의 몸이 죽을 숙명에 놓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 현생에서의 구원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이여! 그 순간이 찾아오면 분노, 환락의 극치, 종족 번식과 영역확장의 욕심이야말로 너무도 하찮았던 이유임을 진정 알게 될 것이다.
어느덧 김용수의 얼굴은 외경심에 가득 찬 경건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우리 속의 고통을 참지 못해서 발버둥치는 야수의 표정으로 변하기도 했다. 헤어날 줄 모르던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입술을 깨물며 초조한 눈빛으로 방안을 서성거리다 불현듯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면서 이불 위로 픽 쓰러졌다. 그리고 잠잠하던 그의 어깨가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며 들썩거렸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에 빠진 이리 한 마리, 아무리 궁리하고 버둥거려도 구덩이만 깊어질 뿐 빠져나올 수 없었지.
앙상한 뼈대에 영혼의 끝자락만 겨우 남아 나풀거릴 쯤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자가 나타나 약간의 물과 부드러운 양식을 넣어주었어.
그는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항상 같은 시간에 찾아와 조금씩 음식의 양을 늘리며 이리의 영혼을 잠식해 나갔지.
차츰 기력을 회복한 이리는 목청을 다해 구혼의 노래를 불렀다네.
“구원자의 손길이 뻗친 이곳 굳이 영역싸움에 휘말리지 않아도 될 넉넉한 보금자리, 이제 목숨 건 사냥은 존재하지 않으리.”
암컷이 주위를 서성이며 망설이자 수컷은 윤기가 자르르한 튼실한 몸을 내세우며 사타구니를 핥아댔어.
탁월한 유전자를 찾아 헤매던 암컷은 그만 구덩이에 발을 들이게 된 거야.
식구를 늘렸어도 구원자는 다행히 발길을 끊지 않았지. 가정을 이룬 이리의 수는 안락한 요람에서 점점 늘어갔어.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리들이 혼란에 빠져 웅성거릴 때 구원자가 나타나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지.
“식구도 늘어났으니 좀 더 넓은 집으로 옮기자!”
이리들은 그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어. 그래서 안락한 보금자리를 꿈꾸며 제 발로 철창으로 기어들었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리의 생각일 뿐 트럭은 도살장을 향해 가고 있었어.
“아흐흐흑!”
생각의 강을 건너려던 그가 이내 울음보를 터트렸다. 어느 샌가 김용수는 자신을 조절할 수 없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내부에서 불쑥 솟아오른 또 하나의 자신을 발견하고서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과 끊임없는 집중의 눈동자로 그동안 진실로 이룰 수 없었던 정신적 비약을, 원고의 무대 속에서 뛰어다니는 또 하나의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새 모든 글자는 각기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되어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책 속을 둥둥 떠다녔다. 김용수는 가슴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으므로 홱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곧 숨통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고요히 움직이던 생명체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터지는 섬광을 발했다. 고뇌하듯 포효하며 책 밖으로 한꺼번에 뛰쳐나오려 마구 발버둥을 쳐댔다. 독특한 문체와 심오한 사상들로 무장한 생명체들이 서서히 오색찬란한 불빛으로 화하고 어우러져 또 다른 자신의 머릿속으로 줄줄이 베어 들어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는 책 속을 응시하는 자신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투명한 망막 안에선 또 하나의 자신이 분명 최고조의 해방감을 맛보기 직전인 경직상태로 겨우 가쁜 숨만을 할딱거리고 있음을 목도하고야 말았다.
김용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것은 바로 죽음의 문턱을 넘기 위한 극도의 고통과 곧 다가올 찬란한 환생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하며 기꺼이 맛보기 직전의 상태로구나! 아, 이것은, 이것은......”
김용수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원고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작은 창문 사이로 환하게 날이 밝아왔다. 창밖을 응시하던 그가 또다시 분한 듯 중얼거렸다.
“겨우 고물 따위를 실어 나르는 보잘것없는 청년에게선 절대 이런 글이 나올 수 없다. 도대체 그것이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아, 이 억누를 수 없는 경외심과 존경심 그리고 공연한 미움과 질투심,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신은 공평하지 않단 말인가?”
김용수는 시선을 옮겨 책상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정효준의 원고와 자신의 원고를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다시금 분노의 회오리가 방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 악! 분하다. 너무나 보잘 것 없어!”
김용수는 자신의 원고를 발기발기 찢어놓았다. 분통을 터트리는 일그러진 뺨 위로 눈물이 쉼 없이 쏟아져 내렸다.
“크흐흐......, 저주하노라, 저주하노라, 저주하노라, 부활의 날개가 아닌 이카로스의 날개를 달아준 거짓의 신을 저주하노라, 저주하노라, 저주하노라, 저주하노라! 으......”
김용수는 미친 듯이 발을 동동 구르며 온몸으로 절규했다. 그는 그런 식으로 혐오와 저주의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고 나서도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시 한 번 정효준의 원고에 시선을 주던 그가 벌떡 일어나 그것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렇게 큰길까지 쉬지 않고 뛰어가 달려오던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가 마을을 벗어나자 심각하던 얼굴에 미소가 어리는가 싶더니 통쾌하게 웃어재꼈다. 기사가 별사람 다 보겠다는 식으로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힐끔거렸다. 그를 태운 택시는 어느새 출판의 도시를 가르고 있었다.
출판사로 들어서자 복도에서 마주친 여직원이 오랜만에 나타난 김용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어머, 김 작가님 안녕하세요.”
그러나 그는 그녀의 인사를 무시하고 곧장 사장실로 들어갔다. 샘 출판사 김태섭 사장은 등받이가 긴 의자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문을 열고 쳐들어온 이 사람이 누군가? 하여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보다가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 이 사람 용수,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일 년이 넘도록 어디서 어떻게 지낸 거야? 그동안 소식 한번 주지 않더니.”
김용수가 두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서 직접 이렇게 왔잖소.”
(이 기름기만 질질 흘리는 비곗덩어리야, 먹어라!)
속으로나마 통쾌하게 비꼬아준 김용수는 테이블 위에 원고 뭉치를 탕-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리고 김태섭이 자리를 권할 틈도 주지 않고 다그치며 말했다.
“지금 당장 검토해보시죠.”
“오호, 역시 예상대로 그동안 작품을 썼군. 내 짬을 내서 한번 살펴보도록 하지.”
자신감에 도취된 김용수가 한껏 큰소리를 쳤다.
“우선 살펴보시는 게 좋을걸요. 계약조건은 그때 가서 말하기로 합시다.”
김태섭은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김용수의 태도에 이 인간이 웬일인가 싶어 선뜻 일어나 자리를 권했다.
“힘이 넘치는 걸 보니 정말 대어를 건져온 모양이네. 우선 좀 앉지.”
원고를 보고 놀라자빠질 김태섭의 모습을 상상하며 김용수가 다시 한 번 다그쳤다.
“빨리 검토해주시죠. 시간을 끄시는 거라면 바로 딴 곳으로 가보겠습니다.”
김태섭을 맘껏 몰아붙이다 출판사를 빠져나온 김용수의 터진 웃음보는 쉬 가라앉을 줄 몰랐다.
“으흐흐, 하하하, 내가 매달릴 줄 알았나 보지. 비열한 인간 같으니라고.”
늦은 시각 고물상에 도착한 김용수가 이 층으로 가는 도중 박종태의 방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형자는 돌아오지 않은 모양으로 불빛이 새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미친개처럼 쏘다니고 있는 모양이로군.”
김용수가 중얼거리며 자신의 방 쪽으로 걸음을 내딛으려다 어둠의 정적과 함께 우두커니 서 있는 정효준과 마주쳤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똑바로 바라보자 정효준이 오히려 약간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자네, 날 기다렸어?”
“예, 선생님.”
잠시 머뭇거리던 김용수가 넌지시 물었다.
“비평이 듣고 싶어서? 그렇다면, 어쩌지? 아직 읽지도 못했는데.”
“아뇨, 그게 아니라......”
김용수가 그게 아니면 또 무슨 볼일이냐는 식으로 정효준을 바라보았다.
“저...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우물쭈물하던 정효준이 검은 비닐봉지를 불쑥 내밀자 김용수는 얼결에 냉큼 받아들었다.
“이게 뭔데 그래? 꽤 묵직하군.”
“권총입니다.”
“뭐?!”
김용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들었던 물건을 바닥으로 떨어트릴 뻔했다. 서둘러 비닐을 벗기고 확인한 결과 그것은 진짜 러시아제 38구경 리볼버였다.
“이거 어디서 났어?”
“오늘 고물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는데 봉지에 들어있던 그대로예요.”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지 그랬어?”
잠시 망설이던 정효준이 물었다.
“그냥 가지고 있으면 안 될까요? 당분간만이라도.”
어둠이 짙게 깔린 늦은 밤 복도에 드리워진 그늘이 정효준의 표정을 더욱 어둡게 비추고 있었다.
“그러고 싶은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글쎄, 이것이, 이 강력히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제가 간절히 원하던 바였거든요.”
“왜지? 어째서 원하게 됐지?”
정효준은 혈색까지 바뀌며 말했다.
“박 씨가 칼을 갖고 다녀요. 언젠간 저를 죽이고 말 거예요.”
“그래서? 그것보다 더 강력한 무기로 그를 제압하고 싶었는데 하늘이 너를 위해 고물상에 휙 던져주었다? 이렇게 친절하게 검정 비닐봉지에 싸서?”
김용수의 말에 정효준은 절절매고 있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박 씨가 뿜어내는 불길한 기운을 막으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요.”
“바보 같은 소리! 이런 무기류는 신고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고물상으로 총을 던져줄 만큼 하늘이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우리나라 경찰이나 군 장교들은 러시아제 리볼버를 사용하지 않아. 그렇다면, 필시 폭력집단에서 부주의로 유실한 불법총기임이 틀림없어.”
정효준이 이내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렇군요.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좀 신고해줘요.”
김용수는 그의 요구를 당연한 듯 받아드렸다.
“그러지. 뭐.”
돌아서는 청년의 축 늘어진 뒷모습을 지켜보던 김용수는 그의 바보스러움에 혀를 끌끌 차며 다시금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저리도 겁 많은 얼간이가 그토록 위대한 작품을 썼다니! 차라리 죽은 나무에서 열매 났다는 말이 더 신빙성을 주는군. 저 녀석이 진정 신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었던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어. 쯧쯧.”
김용수는 방으로 들자마자 벌렁 드러누워 천정을 응시했다.
(이래도 내가 비겁한 짓을 했는가? 나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중요한 것일까? 신이 분별심이 있다면 당연히 그 원고는 내 것이 돼야 마땅하고 또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그래야만 허위의 신이 아닌 진짜 신이다. 나는 작품에 대해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물론 나의 지력으로선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다만 경탄을 금치 못하는 그들 앞에서 가만히 웃음 짓기만 할 것이다. 신의 통찰력이 나를 선택했던 만큼 나는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김용수의 기분은 점점 좋아졌다. 쾌재를 부를 만큼 통쾌하기도 했다. 실로 오랜만에 고요한 잠을 자는 그의 얼굴엔 달콤한 미소마저 머물러 있었다. 그날 밤 어둠과 인간이 손을 잡은 고물상 주위에는 그가 이리인지 구원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검은 그림자가 유유히 맴돌았다.
첫댓글 단숨에 써 내려갔나요?
저 천재 아닙니다. 수십 번의 퇴고를 거쳤지요. 가끔 이거 내가 쓴거 맞나 믿어지지 않을 때도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