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는 왜?
곽 흥 렬
그것은 행운이었다. 동화 속의 파랑새처럼 얼마나 찾고 싶었던 소리의 정체인가. 그 소리의 주인공을 비로소 만난 것이다.
화원동산 전망대 아래를 거닐며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가 유월 초순, 느닷없이 어디선가 ‘뻐꾹~’, ‘뻐꾹~’ 하는 울음소리가 나른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며 구성지게 들려왔다.
소리의 행방을 좇아 귀를 모았다. 분명 머리 위에서 나는 소리임에 틀림없다 싶었다. 고개를 젖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놀랍게도 뻐꾸기 한 마리가 바로 코앞의 은행나무 꼭대기에 앉아 그 특유의 음색으로 연신 목청을 뽑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뻐꾸기가 어디 아무 데서나 만날 수 있는 흔한 새이던가. 심지어 요사이 들어선 그 소리조차 듣기가 힘들어져 버렸다. 그러니, 더군다나 이런 대도시 주변에서 뻐꾸기를 목격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다.
하지만 의심은 금세 확신으로 바뀌었다. 울음소리로 보아 영락없는 뻐꾸기였다. 오래 헤어져 있던 지기知己를 만났어도 반가움이 이러할까. 설레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한다.
은밀한 장면을 엿보듯 숨을 죽이고서 녀석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놈은 한 번 뻐꾹 하고는 구십 도로 돌아앉더니 또 한 번 뻐꾹 하고는 다시 구십 도로 돌아앉는다. 그러면서 시곗바늘처럼 계속 방향을 바꾸어 가며 소리를 토해내었다.
수십 년 세월을 여태껏 뻐꾸기들이 이 산 저 산에서 메아리처럼 서로 화답하며 우는 줄로만 알았다. 그 생각이 참 어이없는 판단이었음을 비로소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오래 간직해 온 의문이 마침내 풀리는 순간이다.
그것은 희한한 발견이었다. 뻐꾸기는 왜 자꾸 같은 자리에서 뱅뱅 맴을 돌며 우는 것일까. 어떤 이는 짝을 찾는 구애의 노래라고 했고, 어떤 이는 위험을 알리는 경계의 신호라고 했다. 어쨌든 한 놈이 내는 소리가 여러 마리의 소리로 들린 것은 다름 아닌 뻐꾸기의 그런 습성 때문이었던가 보다.
어찌 뻐꾸기 소리에 대한 생각뿐이겠는가. 일상에서 마음의 눈이 멀어 있음으로 하여 판단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잘못된 판단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부르고 관계맺음을 성글게 만든다.
이제껏 나는 늘 세상일들에 내 생각이 옳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것은 일종의 착시며 착각이었다. 아니, 착시나 착각이 아니라 강한 에고 때문일 것도 같다.
사람의 판단력이란 항용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이냐. 끊임없이 따라붙어 괴롭히는 ‘나’로 인해 둘러쳐진 아집의 울타리가 세상의 소리를 듣는 귀를 막아 버렸던 게다.
그날 뻐꾸기 소리는 내게 ‘너를 벗어던져라’, ‘너를 벗어던져라’ 하며 쉴 새 없이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영남일보 '문화산책' 2010년 6월 3일>
첫댓글 나를 벗어던지고 에고에서 벗어나 진리의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