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내가 아는 노무현
- 은유시인 -
노무현 씨는 부산상고 출신으로 대학의 문턱에도 못 가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사법고시에 과감히 도전, 합격함으로써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거쳐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으며, 1988년에는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서 출마, 제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제 5공화국 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각광을 받기도 한 그야말로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그러나 1992년, 제14대 총선(민주당, 부산동구)은 물론, 1996년 제15대 총선(민주당, 서울 종로), 2000년 제16대 총선(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을)에서 연속으로 고배를 마셨고, 또한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도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었으나 역시 고배를 마셨다.
따라서 매스컴을 통해 청문회스타로 부각되었던 그도 한때는 정치인으로서 상당히 입지가 불안정하게 느껴졌었다.
내가 노무현 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3월경으로 부산지방법원 법정에서였다. 나는 당시 부산 ‘동국제강그룹’ 자회사 ‘부산주공주식회사’를 상대로 민사청구소송을 제기하였고, 소송대리인으로 김기한 변호사와 김대희 변호사를 선임하였으며, 부산주공 측은 노무현 씨를 고문변호사로 선임한 상태였었다.
당시 노무현 씨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으로 소위 ‘인권변호사’로 불렸었다. 자그마한 키에 보통 체격인 그는 선해 보이는 인상으로 내게는 마치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내왔던 형 같은 느낌을 주었었다.
나는 1985년 초 부산주공으로부터 홍보용 카탈로그의 제작을 의뢰받고 가계약과 동시에 기획과 디자인작업에 착수했었다. 당시 부산주공에서는 카탈로그를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도록 최고 수준으로 제작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견적금액도 천만 원을 웃돌았다.
타이틀용 입체글씨와 사진의 입체효과를 위해 특수모형도 제작하였고, 공장 전경을 비롯하여 생산 및 실험설비와 중요 시설들을 슬라이드로 촬영하고 카탈로그에 사용될 이미지 슬라이드들도 완성하였다.
사진과 문자, 이미지들을 편집하여 회사 사장은 물론, 임원들과의 몇 차례 대면, 파이널교정까지 마쳤으나 본 인쇄공정을 남겨놓고 웬일인지 부산주공 측은 딜레이를 시켜왔다.
그러다 그해 연말쯤, 오래전부터 꾸준하게 거래하여 오던 신일볼트공업(주)의 종합카탈로그 제작차 들른 사장실에서 낯이 많은 이미지의 카탈로그 한 권을 발견하였는데, 자세히 살펴본즉 바로 부산주공 카탈로그로써 내가 제작하여 제공한 모든 사진과 이미지들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었다.
부산주공은 당시 부산지역의 인쇄수준을 불신하여 회사임원 중의 한 사람이 잘 안다는 서울의 동주인쇄에서 인쇄공정을 진행했던 것이었고, 내게는 그 사실을 철저히 숨겨왔던 것이다. 당시 내가 제출한 견적서에 의거하면 기획과 디자인 관련 비용이 전체 제작비의 80%를 차지하였기에 동주인쇄 측에서는 부산주공 측에다 내가 바가지를 씌웠노라고 모략까지 한 것이고, 회사에서도 그리 판단하여 내게 최소의 제작비용만을 주려 시간을 끌어왔던 것이다.
참으로 황당한 것이었다. 상당한 시설과 많은 종업원들을 거느린 서울의 내로라하는 종합인쇄소에서 ‘그까짓 기획, 디자인에 무슨 비용을 그리 청구하더냐.’라는 주장에 내가 아무리 ‘똑 같은 디자인이라도 하는 사람의 실력에 따라 가격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항변한들 아무도 이에 납득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같으면 제작자를 기만한 무단복제로써 저작권침해에 해당되어 몇 천만 원이라도 청구가 가능하겠지만, 당시 한국사회는 저작권의 개념은 물론, 디자인의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청구소송에서도 ‘제작비 청구’로 할 것 같으면 모형제작에 소요된 재료비용이니, 사진촬영에 소모된 필름 비용이니 실제 원재료비와 인건비만 청구가 가능케 되어 아이디어 창출이나 작품성에 대한 가치 등은 전혀 인정받을 게재가 못되었다. 그래서 ‘저작권침해로 인한 손해배상’으로 청구소송을 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국내의 재판기록들도 전무할 뿐더러 판사든 변호사든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도 없었다.
재판은 자꾸 지리멸렬한 답보상태를 지속하였다. ‘저작권침해라니?’ 판사는 이 말을 이해하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저작권이라는 것은 유명화가들 그림의 무단사용을 놓고 거론하는 것이지, 디자인이나 사진에서 무슨 저작권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따라서 저작권을 인정받으려면 작품성부터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변이었다.
하긴 당시의 한국에서는 사진이든 그림이든 심지어 인기배우들의 사진조차도 버젓하게 무단 복제하여 공공연히 인쇄하던 판이었다. 따라서 같은 업종의 회사 카탈로그에서도 이 회사 저 회사 가릴 것 없이 똑같은 사진들을 게재하여 어느 회사 것이 진본이고 어느 회사 것이 복제한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었으며, ‘A보일러회사’ 카탈로그와 ‘B보일러회사’ 카탈로그의 보일러 제품사진들이 일본의 ‘C보일러회사’ 카탈로그 사진 그대로 옮겨다 놓은 웃지 못 할 해프닝도 비일비재하던 시절이었다.
그 재판은 디자인 및 인쇄계통의 비상한 관심 속에 1년여를 끌었었다. 부산지역 디자인 관련 교수들과 디자인 전문가들 상당수도 증인으로 나섰고 ‘디자인 역시 디자이너의 미적 감각과 예술적 행위에 의한 미의 창조물로써 마땅히 보호받아야 되는 고유의 작품’임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수집도 상당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노무현 씨와 상당한 의견을 나누었으며, 노무현 씨 역시 내가 부산주공으로부터 당하고 있는 부당함을 인식한 듯 부산주공 측을 오히려 설득시키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었다.
결국 판사의 중재 하에 우리 측 변호사를 배제하고 판사와 노무현 씨,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판사실에 독대하고 최종합의를 이끌어 낸 것이다. 노무현 씨는 내가 청구한 금액을 전액 인정하여 지불함은 물론, 내 측 변호사 비용도 일부 보전하여 주겠다는 내용으로 합의를 도출하게 해주었다.
재판을 진행해 오는 과정에서 노무현 씨 성격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었다면, 그의 사고의 폭이 일방적인 치우침이 없이 공명정대하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깔끔한 매너일 것이다.
지금 시각이 밤 12시를 넘고 있으니, 이번 대선 개표결과가 나왔으리라 짐작은 되지만, 이 글을 쓰면서 아직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 간의 개표상황을 지켜보지 않아 누가 유리할 것인지, 누가 대선의 깃발을 거머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노무현 씨라면 서민들을 위한 개혁정치를 펴지 않겠는가 생각되는 것이다.
그럼, 글은 이만쯤에서 끝을 맺고 ‘누가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가.’ 확인하러 티브이를 켜 봐야겠다.
- 끝 -
(200자 원고지 18매 분량)
2002/12/20/0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