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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60년대 한국생사와 부일장학회 金智泰(김지태)회장
lan0560 추천 0 조회 644 15.07.29 10: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故 김지태회장 부산상고에 흉상

 

 

 

자료출처 ITN뉴스 국제섬유신문

http://itnk.co.kr/diary.htm?mode=body&number=1188&page=138

 

실크 재벌로 50~70년대 재계를 대표했던 故 김지태(金智泰,1908~1982)회장의 흉상이 22일 모교인 부산상고에 건립됐다.부산상고 총동창회는 학생의 날인 22일 오전 11시 30분 부산진구 당감동 부산상고에서 동창회장을 25년간 연임한 故 김지태 회장의 흉상 제막식을 가졌다 고 밝혔다.부산 출신으로 1927년 부산상고를 졸업한 김 회장은 일제시대 조선지기, 한국생사, 조선견직, ㈜삼화 등을 창업해 한생그룹을 운영했고 해방 이후에는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을 3차례 연임하는 등 부산 경제의 재건에 앞장서왔다. 1968년 한국생사 수출조합 이사장을 맡는 등 70년대까지 재계를 대표하는 기업인 가운데 한명이었던 그는 부산일보 발행인과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의 주인으로 국내의 상업방송을 개척한 인물로도 유명하다.부산상고 총동창회는 1957년부터 1982년까지 25년 동안 동창회장을 맡아 학교발전과 후배들의 장학에 쏟은 열정을 기려, 흉상 건립을 수년 전부터 논의해 왔고 유족들의 협조를 받아 그의 사후 11년 만에 모교 본관 입구에 흉상 제막식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흉상에는 부일장학회와 김지태장학회를 세워 향토와 모교의 가난한 영재들을 거두었고 그 선각의 뜻이 말없는 일꾼에서 대통령에 이르는 숱한 인재들의 밑거름이 되었다 는 내용의 김 회장을 칭송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제막식이 열린 22일은 1940년 11월 23일 일본군 병참기지 사령관으로 부산지역 중학교 배속장교를 겸하고 있었던 노다이의 횡포에 저항해 일어난 부산의 대표적인 항일 의거인 일명 노다이 사건을 기념하는 부상(釜商)학생의 날이기도 하다.부산상고 총동창회 관계자는 그때 주동역할을 했던 부산상고는 이날을 학생의 날로 정해 매년 동창회 주관으로 기념식을 갖고 있으며 올해는 제막식을 겸해서 열려 더욱 뜻깊은 행사가 됐다 고 말했다.

 

자료출처: 경제풍월 2005년11월호

[실크재벌 빛과 그림자] 60년대 한국생사와 김지태 회장

http://www.econotalking.kr/xe/index.php?document_srl=44236

 

 

60년대 한국생사와 金智泰(김지태)회장

실크재벌 빛과 그림자

일제 동양척식, 8· 15 후 적산 인수

관세법 위반 등 중형 받고 주식 헌납

 


2011-05-22_150453.jpg

 

정치권이 정수장학회를 새삼 도마 위에 올려 정치쟁점화 하면서 1962년도 한국의 실크재벌 김지태(金智泰) 회장의 행적이 관심을 모은다.

불교 집안의 부산 토박이인 김씨는 일제하의 수재들이 모여 출중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킨 부산상고를 나와 기업인, 정치인으로 큰 활약을 남겼다. 부산상고는 신상우, 이기택 씨 등 유명 정치인과 김용주, 김종대 씨 등 유명 경제인을 많이 배출시켰으며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참여정부 실력자들도 적지 않다.

 

외도 많이 했던 탓이오

 

김씨는 60년대 국내 실크산업의 70% 상당을 지배한 10대 재벌군에 속했다. 그러나 일제와 8·15 5·16 등 격변기를 거치면서 김씨의 사업 경력에는 수많은 얼룩이 지워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친일 기업인으로 반민특위에 불려가고 4·195·16 후 부정축재자 단죄 및 밀수와 국내재산 해외도피 등으로 7년의 중형을 구형 받기도 했다. 또 민선 국회의원을 두 차례 역임함으로써 기업인, 언론인, 사회사업가에 정치인으로 활약하는 등 넓은 보폭 때문에 숱한 사건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체로 김씨가 살아온 세월이 친일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해방 후 일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敵産)을 인수케 했으며 자유당 정부하의 부정축재 및 5·16 정부의 밀수단속과 국내재산 해외도피방지 시책 등에 연루되도록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김씨는 국내 최대 실크재벌로서 명성을 날리고 온갖 명예직과 문화 언론사업 등으로 공헌했지만 여러 차례 법의 심판을 받은 경력에 대해 스스로 외도를 많이 했던 탓이라고 자탄한 바 있다.

부산경제를 대표하는 김씨는 각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부산상고 인맥을 배경으로 정계에 투신한 것이 사업가로서는 외도였으며 이로 인해 실크재벌도 정치바람을 탈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근 정수장학회 문제가 정치쟁점화 된 시점에 1981년 한국일보가 출간한 재계 최고에 따르면 5·16 권력에 재산을 강탈 당했다는 대목은 전혀 없다. 박 대통령이 비명에 가고 없던 시기에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회고문에는 오히려 박 대통령에 대한 찬사만이 실려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박통 서거 후 민족사 빛날 것

 

한국생사 전성기에 강원도 춘천에는 대규모 뽕나무 밭과 연구기관이 있어 양잠 관련 집회나 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김지태 회장은 회고문에서 196647일 박 대통령이 춘천 동방제사 공장과 뽕나무 밭을 시찰하고 격려한 것을 잊을 수 없다고 기록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양찬우 내무, 한국진 농림부 차관, 박경원 강원도지사 등과 함께 공장을 방문하여 김기환 사장의 안내로 내부를 둘러보며 자상하게 묻고 격려했다고 한다.

1974년 봄 양잠시범대회가 이곳 한국생사 잠업 연구소에서 열렸을 때 육영수 여사가 정소영 농림부 장관 부처, 홍성철 내무부 장관 부인 등과 뽕잎을 따고 다과회를 가진 후 잠사수출 공적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고 기록했다.

이때 육 여사 연설문에는 전년도 잠사 수출액이 18천만 달러로 농가소득 호당 9만원, 350억 원을 올렸다고 치하했다.

이날 대회는 잠업부국’(蠶業富國) 이라는 구호 아래 제3회 전국새마을양잠대회로서 국회의원, 여성계 대표 등 600여명이 참가했으며 한국생사 김영우(金榮雨) 사장 부처가 행사를 주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 회장의 재계 회고“5·16의 군사정부가 한반도 역사에 새장을 열었다고 규정했다. 김 회장은 박 대통령의 통치력으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국가안보태세의 구축, 국제사회의 친선외교로 국기(國基)를 굳건히 함으로써 민족사에 길이 빛날 것이라고 찬양했다. 김 회장의 이 같은 회고문은 박 대통령이 서거한 뒤 198110월에 출판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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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수요로 큰 재력 쌓아

 

김지태 씨는 19086월 부산 토박이로 태어나 일제하의 부산상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학교 추천으로 동양척식(東洋拓殖) 부산지점에 입사했다. 5년간 근무 후 25세 때 폐결핵으로 울산에서 투병했다.

이때 동양척식 울산지사가 소유한 농지 2만평을 10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분양 받은 것이 특혜가 아니냐고 지적된다. 김씨는 울산농장에 인부 10여명을 두고 규칙적인 생활로 투병에 승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 27세 때 자립하기 위해 부산시 범일동의 부산진직물공장을 인수, 인견직물을 생산했지만 적자를 면치 못해 조선방직에 넘기고 말았다. 다시 범일동에 조선지기(紙器)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순풍에 돛 단 듯돈을 벌 수 있었다.

중일전쟁 직전 시장경기가 활기를 띄고 있을 때 바둑친구 사이인 식산은행 백석(白石) 지점장의 융자알선으로 시설을 확장하고 종이는 일본 왕자제지로 부터 직수입했다.

지기사업으로 재력이 쌓이자 부산부동산회사를 설립하여 땅을 샀다가 팔면 돈이 남았다. 다시 기계공업에 눈을 돌려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주철공업을 인수했지만 당시 조선총독부가 군수산업이란 이유로 대표자 변경을 허용치 않아 일본인 명의로 경영했다. 전쟁수요 때문에 주철제품이 불티나게 팔려 역시 돈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김씨는 재계회고에서 당시 부산에서 호별세(戶別稅) 납부 제1위를 기록했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인 기업가로는 화신의 박흥식(朴興植), 경방의 김연수(金秊洙), 광산왕 최창학(崔昌學), 여수의 천일고무 김영준(金英俊) 외에 부산에 김지태 씨 등이 꼽혔다고 스스로 회고했다.

 

해방 후 국내 상공인 대표 부상

 

김씨가 한창적인 38세 때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부산인구 30만명이던 것이 갑자기 80만명으로 불어났다. 일인들은 돌아갔지만 각지에 나가있던 해외동포들이 물밀듯이 귀국하여 부두와 기차역 광장 등 곳곳에 인산인해를 이뤘다.

해방 직후 항구도시는 매점매석과 폭리와 각종 이권운동, 사기와 갈취 등으로 감옥이 넘쳐났다.

김 회장 회고록에 따르면 삼화고무사장 일인 미창삼청(米倉三淸)은 혼란기를 틈타 재고품 광목과 신발류를 방매하여 일화 100엔권 수십 가마니를 챙겨 귀국했다. 또 부산주둔군과 귀국하는 만주군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온갖 군수물자와 군화, 담요 등이 유출되어 온통 극성 장사꾼들로 붐볐다.

이때 부산상공인들은 일인들의 투매를 막아라”, “매점매석은 반민족 행위다라고 설득하며 기존의 일본인 중심 경남상공경제회 대신에 자치기구로 상공경제위원회를 구성, 일인소유 공장들의 시설보존운동을 벌였다.

미군정이 실시되자 일제하에 경남상공경제회 감사역을 맡고 있던 김지태 씨가 회장을 맡아 부산상공회의소로 개칭했다. 상공인 대변지로 산업신문을 발간한 것도 이때였다. 김씨는 대한상의와 한국무역협회 부회장도 겸직했다.

당시 무역협회장은 뒤에 재무부 장관을 맡은 김도연(金度淵) , 대한상의 회장은 유일한(柳一韓) 박사였다. 유한양행 유 박사는 회장에 추대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장기체류하는 바람에 김지태 씨가 회장 직무를 대행했다.

그러니까 일제하의 재력으로 부산경제를 대표하던 김지태 씨는 해방 후 국내 상공업계 대표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적산관리하다 조선견직 인수

 

해방 직후 좌우익 대립이 격화되면서 노동계의 정치파업이 경제계를 뒤흔들었다. 김지태 사장은 초기 여운형 씨의 건국준비위원회 부산지부 재정부장을 맡았다가 좌우익이 극렬하게 마찰하자 민족진영 편으로 돌아섰다. 곧 건준을 따라 반탁(反託) 진영으로 진로를 선택했다.

이 무렵 노동계는 전국노동조합연합회 (전평)라는 공산계열이 파업으로 미군정에 도전했다. 대한노총이 결성되어 전평과 대결함으로써 노동계도 좌우익으로 갈라섰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경제 대부인 김지태 씨가 우익계열로 진로를 잡은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김씨는 일본인들이 두고 간 적산관리에 참여했다. 미국인 처장 고문이라는 직함으로 적산 관련 관리권 분쟁조정에 나섰다.

당시 광복동 상가, 동광동 중앙동의 일인회사 건물, 충무동 어시장, 대신동 보수동의 일인들 주택 등의 소유, 관리권을 두고 분쟁이 잦았다. 김씨는 분쟁 조정과 질서 확립에 앞장서면서 자신이 적산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1946년 동래에 있던 조선견직 인수가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재계회고에서 기존 재력을 이유로 주변에서2011-05-22_150510.jpg 자꾸만 떠맡기려 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인수했다고 해명했다.

조선견직 인수로부터 김씨가 실크재벌로 성장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조선견직 경영을 맡은 후 종업원 400명을 1800명으로 늘려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조선견직 비단을 내놓아 상류사회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김씨 회고록에 따르면 기생조합인 동래권번(東來券番)을 통해 국산 실크를 선전할 수 있었다. 동래권번 젊은 기생이던 옥엽, 송화, 금선 등 8선녀에게 조선견직 비단옷을 입혀 고급 사교모임을 황홀하게 장식했던 것이다. 뒷날 정계진출과 관련된 조병옥(趙炳玉), 신익희(申翼熙) 선생과의 동래온천 회식에도 이들 8선녀가 배석했음은 물론이다.

조선견직이 위치한 동래의 기생촌에는 금정산 풍치림 속에 58도의 뜨거운 온천수가 콸콸 솟아 일본인들이 전차노선을 깔고 벚꽃을 심어 별장, 요정, 여관 등이 즐비했었다. 일본식 남녀혼탕이 선보이고 일제의 고위층이나 실업인들의 2호 부인들을 숨겨 놓은 향락촌이기도 했다.

 

정계 은퇴 후 언론, 문화사업

 

조선견직을 인수한 김지태씨는 경남 일대 밀양, 진해, 진주, 산청 등 제사공장들을 몽땅 사들였다. 곧이어 대구, 영주, 상주, 안동, 거창 등 경상도 일대, 강원도 춘천, 원주, 홍성, 횡성, 충청도 청주 등 전국 제사공장들을 연이어 매입했다.

춘천에는 대규모 상전(桑田)과 연구소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양잠산업의 정책 중심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일본의 편창(片倉) 다음 가는 세계 2위의 제사기업군을 형성했다.

이보다 앞서 미군정하에 부산상의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언론, 문화, 정계로 발판을 넓힐 수 있었다. 해방 후 부산에는 11개의 신문사가 난립하고 있었고 좌익계 신문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김씨는 19477월 상공계 대변지로 산업신문을 창간했지만 뒤에 국제신문으로 바뀌었다. 그 대신 일제시 정부기관지 역할을 하던 부산일보를 19483월 인수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행부수 5만부를 돌파 시키는 수완을 발휘했다.

이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5·30 총선에 참여하여 2대와 3대 민의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정계를 은퇴한 후 신문, 방송 등 공익사업에 관심을 가져 1958년에는 부산시 서면 토지 10평을 기본재산으로 부일장학회를 설립했다.

이 장학회는 591665, 604925, 615291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한 후 19625·16 장학회로 넘겼다. 5·16 장학회가 뒤에 정수장학회로 바꿔 오늘에 이르며 박근혜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다 정치권이 문제를 제기하자 이를 사임하고 지금은 아무런 관계가 없어졌다.

오늘의 정수장학회는 장면정부의 청와대 비서관 출신인 최필립 이사장과 변호사, 회계사, 교수 등 7명의 이사진으로 운영된다. 그동안 정수장학회는 감독 당국에 의해 가장 모범적인 장학회로 평가되어 왔으며 수만명의 인재를 배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0년 세대교체기의 불운

 

사건이 발생한 1960년대 말 김지태 씨의 한국생사 그룹은 전국에 17개 공장을 거느리는 명실 겸전한 국내 최대의 실크재벌로 10대 그룹에 속했다. 그러나 창업주가 1982년 작고하기 이전 1970년대 세대교체기를 맞아 그룹은 22011-05-22_150520.jpg 세에게 분할 승계한 후 기울기 시작했다.

조선견직은 장남 김영구(金榮球), 한국생사는 차남 김영우(金榮雨), 삼화고무는 3남 김영주(金榮柱) 씨에게 각각 물려줬지만 그 뒤의 격변기를 슬기롭게 넘기지 못했다.

한국생사는 호경기 시절 수익금을 바탕으로 1973년 대한판지설립으로 부터 동방증권, 동림기계, 한국오디오전자, 다나무역, 한삼교역, 한국전자정밀, 한국폭스보로 등 5년간 8개사를 인수 또는 설립하여 20여개사의 그룹을 구축했었다. 그러나 무리한 확장의 후유증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1982년 창업주 김지태 회장의 별세와 더불어 한국생사그룹도 잊혀 지고 말았다. 최근 김지태 씨와 실크재벌에 관한 옛 이야기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열린우리당이 정수장학회 진상조사라는 명분으로 이를 정치쟁점화하면서 불필요하게 잊혀진 과거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참고자료:

1. [부산 경제 야사] <23> 인물편 김지태 ① 광복이전 기업활동 (부산일보)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sectionId=1010010100&subSectionId=1010010100&newsId=20040510000118

2.[부산 경제 야사] <24> 인물편 김지태 ② 광복 이후 기업활동 (부산일보)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sectionId=1010010100&subSectionId=1010010100&newsId=2004051200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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