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말씀과 미사의 은총에 대해 평소 제가 가진 생각을 한번 공유하고자 합니다. 큰 틀에서 보면 미사의 형식은 전세계 어느 장소에서 시간과 상관없이 인종과도 상관없이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실제 언어가 다른 나라에 가 미사에 참례를 해도 언어는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도 지금 뭘 하고 있는지는 대충은 어림짐작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눈치껏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국어로 하는 미사는 큰 틀에서 보면 동일한 형식의 미사가 됩니다. 딱 하나만 다릅니다.
매일의 독서와 복음만 다를 뿐 거의 동일합니다. 제가 왜 이런 내용을 언급해드리는지 눈치 빠르신 분들은 벌써 감이 오실 겁니다. 독서와 복음마저도 만약 매일 동일하다면 그야말로 우리는 미사가 습관적인 미사가 되고 또 수동적인 미사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이게 장기화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당연히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아도 인간 본연의 심리 상태로 봤을 때 미사의 은총 속으로 깊이 심취할 수 없는 경우가 될 다반사가 될 것입니다.
미사 참례를 안 하면 모를까 하는 이상은 자신의 영적인 유익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미사를 준비하고 어떤 마음으로 임해야 할까요? 저는 전례에 관해 학자도 아니고 또 신학자도 아닌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범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렇게 하면 미사의 은총이 충만한 은혜로운 미사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환상적인 미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묵상입니다. 그날 미사의 은혜를 좌우하는 가장 큰 핵심적인 요인은 말씀의 전례에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도 두 가지로 양분한다면 독서와 복음 하나와 신부님의 강론 이렇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어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실제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이상적인 말씀선포가 이루어지게 되려면 독서자와 신부님의 복음 말씀을 대독하실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매일미사를 소지하고 있으면 매일미사를 보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케이스는 미사 전 독서와 복음을 충분히 여러 차례 읽고 묵상을 해 가령 매일미사를 보지 않고도 독서와 복음을 듣게 됐을 때 그 말씀이 또박또박 자기의 귀에 선명하게 인식이 될 정도가 되는 게 가장 이상적인 말씀선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잘 안 되는 경우는 두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독서자가 대독을 깔끔하게 대독하지 못했을 경우와 또 하나는 미사참례자가 말씀을 사저에 충분히 숙지를 하지 못하고 임했을 때입니다. 극단적인 경우에 설령 미사 참례자가 미처 말씀을 사전에 숙지를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해도 만약에 독서자가 아주 깔끔하게 말씀을 대독하게 된다면 가령 속도와 크기 발음 발성 이와 같은 조건이 잘 어우러졌을 때는 준비가 미흡해도 이 조합이 잘 이루어지게 되면 말씀을 듣는 신자가 분심을 갖거나 딴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는 잘 숙지할 수 있습니다. 발음도 정확해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속도의 조절이 제일 관건입니다.
한국말도 말하는 속도 페이스와 함께 약간의 영어로 말하면 인토네이션도 어떤 내용을 분명히 전달하고자 할 때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비근한 예를 하나 들면 제가 지금 교적을 옮긴 성당에서 주임신부님이 주례하시는 미사를 두 번 참례를 했습니다. 두 번의 미사가 거의 다 분심이 들지 않고 온전히 미사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연세가 있으신 신부님이신데 속도와 또 발음이 아주 또박또박 마치 초등학생이 한 자 한 자 정확하게 읽는 톤으로 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아주 명징했기 때문에 조금도 분심이 들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두 번의 미사 참례로 확신을 가진 게 있습니다. 아무리 이런 조건이 잘 충족이 된다고 해도 음향시설이 좋지 않으면 그 효과를 반감시킬 것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가진 소신이 있고 또 굿뉴스에서 언제 한번 명동성당 음향시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혹시 교회에서 뭔가 중추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음향시설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우리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개신교 교회에서도 있었지만 모든 대형교회가 다 그런 거는 아니지만 음향시설은 방송국 수준급으로 잘 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개신교는 그렇게 음향에 민감한 반응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곳은 말씀 빼면은 그냥 예배 자체가 시체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설교로 시작해 설교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일차적인 독서와 복음이 어떤 조건으로 잘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다음 남은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건 다 아실 것입니다. 바로 강론입니다. 이와 함께 강론이 훌륭하다면 그야말로 말씀의 전례가 환상적인 콤비를 이루게 돼 가슴에서 이미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복음의 기쁨에도 사제의 강론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은혜로운 강론은 교황님의 말씀을 제가 조금 확대 부연한다면 독서와 복음 말씀을 얼마나 유기적으로 성경으로 그 성경의 말씀을 잘 풀이해 주시는가가 그 강론이 훌륭한 강론이 되는지 아니면 부실한 강론이 되는지가 결정되게 되는 중요한 변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제 말씀이 아니고 교황님의 말씀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만약 이 조건도 두 조건이 잘 충족돼야 할 것입니다. 아까처럼 말입니다. 신자도 말씀을 잘 준비하고 신부님도 열심히 강론을 준비했을 때 말입니다. 만약 사목하시는 신부님도 부득이하게 바쁘신 사목이나 다른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 강론의 준비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신부님의 은혜로운 강론이 아쉽다고 해도 신자가 그 부족분을 미리 잘 준비했다면 어느 정도는 그 빈자리를 메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비유를 하고 싶습니다. 말씀으로 말씀의 전례 때 가슴에 불이 붙지 않으면 영성체 때 오시는 예수님의 몸이 밥으로 비유하면 '식은밥'이 될 것입니다.
성령이 가득한 말씀으로 가슴이 불타오르게 된 상태에서 성체를 영하게 되면 그때는 그 성체가 '갓 지은 밥'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건 성체를 받아들이는 본인 자신의 영혼이 어떠한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성체는 입속의 혀를 통해 식도를 통해 들어가지만 입속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미 식은밥과 갓지은 밥으로 운명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이 말씀의 힘으로 불이 붙어 있으면 그 성령의 불기운으로 마치 갓 지은 밥과도 같은 아주 영양이 많은 밥이 돼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해 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날 독서와 복음 강론 이 삼박자가 잘 맞추어져야 그런 은총을 느낄 수 있을 텐데 그런 것도 그렇다면 단순히 그날 우리 신자인 입장에서 독서와 복음을 단순히 깊이 읽는 수준에서 어떤 준비를 한다고 해서 그런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이또한 오산일 것입니다. 그런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평소에 말씀을 많이 공부하고 늘 군인이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군사훈련을 충분히 받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말씀공부를 평소 열심히 해놓아야 마침 그게 어느 시점에서 그 노력의 결과물이 빛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 말씀을 열심히 사모하고 공부를 하는 것도 단순히 어떤 성경지식을 얻기 위한 개념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몸이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처럼 내 몸이 거룩한 성전이 되고 그런 성전에서 성체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의 몸이 우리의 영혼을 더 풍성하게 해 주시는 몸으로 또 우리와 합일을 이루게 되기 위해서도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