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발전되어 온 우리의 회화는 조선시대(1392~1910)에 접어들면서 더욱 활발히 전개 되었다. 특히 이 시대에는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에 따라 유교문화儒敎文化가 꽃을 피웠고 대표적 유교문화의 하나가 회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회화는 불교를 토대로 발전했었던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의 미술과는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유교의 형성과정에서 변화된 조선시대 사람들의 또 다른 미의식의 반영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유교에 입각한 정치적 이념의 실시와 도덕적 규범의 보급을 위해 회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국초國初부터 도화원圖畵院을 두고 화원을 양성하였으며, 이러한 일을 관장했던 부류는 그림을 잘 아는 사대부士大夫들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왕공귀족王公貴族들과 사대부 출신의 화가들이 화단畵壇을 주도하게 되었고, 그들의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받으며 화원들이 두드러지게 활약 할 수 있었다. 이에 힘입어 회화는 어느 시대보다도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1)
조선시대의 회화는 우선 화풍이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며 초기, 중기, 후기, 말기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변모를 나타내므로 그 특징의 규명이 어려운 실정이다. 조선시대의 미의식美意識과 관련하여 본다면 조선 초기의 안견파安堅派 화풍의 산수화와 후기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풍속화風俗畵, 후기와 말기에 유행한 민화民畵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겠다.
또 일찍부터 중국의 화론畵論에 바탕을 둔 시화일률詩畵一律의 사상의 영향과 화풍의 영향, 새로운 화풍의 수용 등은 조선회화의 발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의 회화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변화를 거듭하였고, 양식의 변천에 따라 대체로 초기( 1392~ 약 1550), 중기( 약 1550~ 1700), 후기( 약 1700~ 약1850), 말기( 약 1850~ 1910)의 4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장에서는 조선시대 회화의 시기별 구분과 특성을 알아보고 3장에서는 각 시기별 화단의 경향과 화풍을 알아보고 전개하여 보았으며, 결론으로 조선시대회화에서 보여주는 미의식을 통하여 우리 민족이 얼마나 밝고 긍정적이며 건강한 민족인가를 서술해 보았다.
2. 조선시대 회화의 시기별 구분과 특징
1) 조선왕조 초기의 회화
조선초기는 1392년에서 1550년경에 해당되며 이 시기는 중국 북송시대의 이곽파李郭派라고 하는 산수화법의 도입과 남송의 마하馬夏화파, 원체院體 절파浙派화풍이 고루 유입되었으며 북송의 미법산수米法山水화풍이 수용되기도 하였다.2)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왕조 시기에도 궁중은 물론 사대부士大夫들 사이에도 중국회화 및 우리 회화를 수집하고 애상愛賞하는 경향이 짙었다. 웬만한 사대부이면 몇 폭 정도의 그림은 지니고 있었으며, 자주 화찬畵贊을 썼음이 문집의 기록 등을 통하여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크고 중요한 소장가는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이다. 그의 소장품은 조선시대 회화의 발전과 관련하여 특히 중요시 되며, 안평대군의 소장품에 관하여는 신숙주가 1445년에 쓴 ⌜화기畵記⌟에 의해 그 내용이 알려져 있다. ⌜화기⌟에 적힌 안평대군의 소장품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몇가지 서화수집 경향을 띠고 있었음을 엿 볼 수 있다.
첫째, 안평대군은 주로 연대가 올라가는 송宋,원元의 작품들을 수집했고, 둘째, 안견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중국의 서화만을 모았으며, 셋째, 산수화는 주로 이곽파李郭派의 작품들만을 주로 모았다. 특히 이곽파 중에서도 곽희郭熙의 작품이 17점이나 들어 있었던 사실은 크게 주목을 끄는 부분이다.
조선왕조시대 중에서도 국초부터 약 1550년경까지의 초기회화는 여러면에서 조선시대 회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초기의 회화는 문화의 꽃을 피운 世宗大王(1470~1494) 때에 안견, 강희안 등 혜성같은 대가들이 배출되어 가장 큰 발전을 이룩했으며, 그 여파가 성종대成宗代(1546~1567)를 거쳐 중(1506~1544) 말년과 명종(1546~1567) 초년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초기에는 고려시대에 축적된 중국회화가 다수 전승되었으며, 연경嚥京을 중심으로 명과의 회화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3) 그 결과 조선초기의 화단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한국적 화풍의 형성에 도움을 준 몇가지 화풍들이 있다.
(1) 북송의 이성李成과 곽희郭熙,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이,곽파 또는 곽희파郭熙派 화풍畵風
(2) 남송의 화원이었던 마원馬遠과 하규夏珪가 형성한 마,하파를 위시한 元體화풍
(3) 명대의 원체화풍
(4) 절강성浙江省 출신인 대진戴唇을 중심으로 하여 명초에 이룩된 절파화풍
(5) 북송의 미불米芾, 미우인米友人 부자에 의해 창시되고 원대의 고극공高克恭 등에 의해 발전된 미법산수화풍米法山水畵風4)
이 밖에도 조선 초기에는 동물화와 묵죽墨竹 등에서도 한국적 취향이 뚜렷한 화풍이 발전되어 주목을 끈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여러 가지 화풍들을 토대로 한국적인 발전을 이루어 낸 조선 초기의 회화는 일본의 무로마찌시대의 수묵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2) 조선왕조 중기의 회화
조선왕조 중기(약1550~약1700)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 병자호란丙子胡亂 등의 지극히 파괴적인 대란이 속발하고 당쟁이 계속된 불안한 시기였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회화는 더욱 건전하게 발전하여 한국적 화풍을 뚜렷하게 형성하였다.
이 시대 회화에서 몇가지의 중요한 사실들을 간추리면 첫째, 안견파 화풍을 비롯한 조선초기의 화풍들이 한편으로 계속되었고, 둘째, 조선초기에 강희안 등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한 절파계浙派系화풍이 크게 유행하였으며, 셋째, 조선초기의 이암李巖에 이어 김식金埴, 조속趙涑 등에 의해 영모나 화조화花鳥畵 부문에 애틋한 서정적 세계의 한국화가 발전하게 되었고, 묵죽 묵매, 묵포도 등에도 이정, 어몽룡, 황집중, 허목 등의 훌륭한 화가들이 배출되었다.
이 밖에 중국으로부터 남종문인화가 전래되었고, 소극적으로나마 수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초기의 화풍들 중에서도 특히 안견파 화풍은 조선중기에도 지속 되었으며, 이정근, 이흥효, 이징 등의 작품들에 안견파 화풍의 영향이 특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절파화풍은 15세기 중엽부터 강희안 등의 진취적인 화가들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중기에 이르러서는 김제, 이경윤 등의 선비화가들에 의해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되었고, 후에는 김명국 같은 뛰어난 화원들이 이를 바탕으로 강한 필치의 화풍을 이루어냈다. 그러면서도 조선중기의 화가들은 절파화풍과 함께 안견파의 그림도 그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영모화나 화조화의 부분에서는 천진스런 동물의 모습을 그린 이암에 이어 산수를 배경으로 음영陰影을 구사하여 독특한 경지의 우도牛圖를 그린 김식, 수묵사의 화조화에서 일가를 이룬 조속과 조지운 부자 등이 한국회화의 색다른 경지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조선중기의 전통은 조선후기로 이어져 변상벽의 고양이 그림들에서도 완연히 나타난다.
3) 조선왕조 후기의 회화
조선왕조 후기(약1700~약1850)는 우리나라의 회화사상 가장 특기할만한 새로운 경향의 미술을 탄생시켰던 시기이다. 가장 한국적이고 민족적이라 할 수 있는 화풍들이 이 시대를 풍미하였으며, 이와 같은 후기의 미술은 15세기 중엽 세종대왕의 재위연간(1419~1450)을 전후하여 꽃피웠던 초기의 미술에 비교되는 훌륭한 것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의 회화가 형성되게 된 배경은 조선후기를 지배한 시대적 특성에 기인했던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조선후기에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 실학實學이 영조英祖(1725~1776)와 정조正祖(1777~1800)를 거쳐 순조조純祖朝에 이르는 동안 활발하게 기세를 펼쳤는데 이러한 실학의 대두는 조선후기 문화의 전반에 걸쳐 매우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이 시대에는 청조淸朝의 강희康熙(1662~1722), 옹정擁正(1723~1735), 건륭조乾隆朝(1736~1795)의 회화와 그곳에 전례 되어있던 서양화풍이 전해졌으며, 이들은 우리의 회화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조선후기의 새로운 경향들이 구체적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숙종조 후반에 해당하는 1700년경을 전후로 볼 수 있겠다.
새로운 화법과 새로운 회화관의 탄생에 기반을 둔 조선후기 회화의 조류로는, 첫째, 중기 이래 유행하였던 절파의 화풍이 쇠락하고 그 자리에 문인화 또는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점이며 둘째는, 우리나라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천을 독특한 화법으로 표현한 진경산수眞景山水가 대두 되었으며 셋째로, 풍속화가 풍미하게 되었고 서양화법이 부분적으로 수용된 점 등이다.
새로운 화풍이 대두되어지면서도 조선초기와 중기의 전통적인 화풍들이 계승되었는데 이러한 추세는 초상화를 비롯한 인물화, 산수화, 동물화, 대나무, 매화, 포도의 그림 등에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새로운 화풍에의 창조는 그 이전의 전통이 밑거름이 되고 있음을 조선후기의 회화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4) 조선왕조 말기의 회화
조선왕조 말기(약1850~1910)는 조선시대의 맨 마지막시기로서 근대近代라고도 불리워지는 시기이며, 현대를 사는 우리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시대는 대내외적으로 매우 불안한 정세를 보였던 시기였다. 대내적으로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을 향하여 있었으며 동학東學운동이 일어났고 대외적으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운양호사건을 비롯하여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병합되기까지 열강列强들의 각축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조선왕조 말기의 초엽인 19세기 중엽에는 청조淸朝의 학술과 문화의 자극을 받 아 김정희(1786~1856)를 중심으로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이 발달되었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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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광의 지봉유설을 위시한 백과사전류의 업적들이 배출되었다.
조선말기에는 또 개화사상이 싹트고 성장하였으며, 사회적 신분의 격차가 완화되고 평민문학이 융성하게 되었다. 중인계층의 문화적, 학술적 활동은 이러한 배경이 활기를 띠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으며 조선후기에 한역관漢譯官으로 난초를 잘 그렸던 수월헌水月軒과 임희지는 그 대표적 예가 될 수 있다.
조선말기의 회화는 이 시대 특유의 성격과 양상을 띠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남종화풍의 영향을 받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를 중심으로한 문기文氣 서권기書卷氣를 숭상하는 남종화풍이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된다. 김정희와 그를 추종한
우봉, 조희룡(1789~1866), 소치, 허유(1809~1892), 고람 전기(1825~1854) 등을 위시한 남종화가들은 사의寫意를 존중하고 형사形似를 경시하는 남종문인화를 크게 발전시켰으며, 동시에 토속적인 진경산수와 풍속도에는 쐐기를 박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5)
이 시대에는 서양화법이 광범위하게 수용되었으며 이의 영향은 궁궐도宮闕圖나 기명절지도器皿折指圖, 민화 등에 종종 나타나게 되었다. 이 밖에 나비를 그린 일호一毫 남계우(1811~1888), 난초를 잘 그린 흥선 대원군 이하응(1820~1898), 괴석을 잘 그린 향수香壽 정학교(1832~1914), 노안蘆鴈을 많이 그린 석연石然 양기훈(1843~1897) 등이 활동하였다.
조선말기의 대표적 화가를 손꼽으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오원五圓(1843~1897) 장승업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치는 근대화단에서는 난초를 잘 그린 소호小湖 김응원(1855~1921)과 운미云瑂 민영익(1852~1914),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던 해강嗨岡 김규진(1868~1933), 산수와 인물을 잘 그린 백련白蓮 지운영(1852~1935)과 관재貫齋 이도영(1884~1933), 수재壽齋 이한복(1897~1940) 등이 활동하였다.
이들 근대화가들 중에서 안중식과 조석진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던 동양화가들의 대가들인 심산心汕 노수현(1899~1978),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 소정小亭 변관식(1899~1976), 이당以堂 김은호(1892~1979) 등이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근대와 현대회화의 한국적 전통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3. 조선시대 회화의 시기별 화단의 경향과 화풍
1) 조선시대 초기
(1) 도화서圖畵署의 구성과 화원의 시취試取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도화원이 설치되었으며 그 조직도 체계화 되었다. 이를 중심으로 많은 화원들이 배출되었고 초상화, 인물화, 산수화, 영모화, 화조화 등 각 분야에 걸쳐 큰 공헌을 하였다. 도화원은 1463년부터 경국대전經國大典이 편찬되었던 1469년까지의 기간에 도화서로 개칭되었다.
이는 도화원의 등급을 낮추기 위한 것이었으며, 도화서는 종6품아문으로 최하위 기관 중의 하나였다. 그곳의 화원들은 초상화 제작, 궁중의 각종 행사 모사模寫, 풍경사생 등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일체의 회사繪事에 참여하였고 사대부들의 요청에 따라 계회도契會圖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화원의 진급은 시험으로 결정하였는데 일례로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의하면 나이 어리고 총명한 자 중에서 이조吏曹의 당상관堂上官이 출제고시하여 연간 입선작이 많은 자에게는 병조兵曹에 추천하여 일년 기한부로 군직軍職을 주곤 하였다.6)
도화서의 구성이나 조직, 대우 문제 등은 약간씩의 변천이 있었을 것이나 그 대강은 조선초기에 이미 확립되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부터는 큰 세력을 지닌 화원 집안들이 형성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조선후기에 한층 두드러지게 되었다. 아무튼 조선시대에는 체계화 되어진 도화서의 조직이 있었고, 이 기관을 통하여 유능한 화원들이 배출되어 우리나라 회화발전에 기여하였음은 분명한 일이다.
(2) 화단의 제경향과 안견파화풍의 유행
조선초기의 회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곽희파郭熙派 화풍이다. 곽희파 화풍은 조선초기의 산수화단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안견화풍의 토대가 되었으며, 남송의 원제화풍 특히 마하파 화풍이 이에 버금갔었다고 한다.
곽희파 화풍과 마하파 화풍은 이미 고려시대에 전해져 조선초기로 계승되었으며, 이는 지금 남아있는 몇 점에서 미약하게나마 엿보이는데 한중 양국간의 밀접했던 관계로의 추정에서 연유된다. 일례로는, 흑칠금니 소병의 ⌜지장보살도⌟의 배경과 산들의 표면처리, 산록의 뚜렷한 윤곽선, 산등성이를 따라 늘어선 침형세수針形細樹와 치형돌기 등에서 그 자취를 엿볼 수 있다.
15세기 중엽, 안견은 곽희파 화풍을 소화하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서 보듯이 개성이 강한 독자적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도판1) 곽희파 화풍을 토대로 발전된 안견의 화풍은 16세기 중엽까지도 강세를 유지하였고, 16세기 후반에도 이정근 등의 일부 화가들에 의하여 그려졌으며, 17세기 초엽에 이징이 이 화풍을 즐겨 그린 후로는 쇠퇴하였다.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畵風 역시 발전하였는데, 마원馬遠과 유송년의 화풍이 가장 널리 알려지고 수용되었다. 남송원체화풍의 영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전 이상좌 필傳李上佐筆의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를 들 수 있으며,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일각구도一角構圖, 타지拖枝의 송수松樹 등은 마원화풍의 수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도판2)
명대明代의 원체화풍과 절파浙派화풍의 영향은 확실한 구분이 없으며, 북경을 오고 간 명과 조선왕조의 화사畵師와 사인화가들의 손을 거쳐서 전래되어진 작품들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강희안姜希顔은 북경을 다녀온 15세기의 대표적 화가이며 그의 도인이 있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도판3)나 ⌜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 등의 조각난 작은 그림들은 그가 명대의 원체나 절파화풍과 유관했음을 보여 준다.
미법산수米法山水화풍은 우리나라에 이미 고려시대에 전해졌으나, 최근 일본에서 발굴된 서문보, 이장손, 최숙창 등 15세기 말경의 화가들 작품은 원대元代 고극공의 미법산수화풍과 관련되어 있어, 미법산수가 조선초기의 일부 화가들 사이에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도판4)
당시 대표적 작가였던 안견安堅은 세종과 문종대 전후에 활동한 화원 신분의 화가였으며, 그의 대표작으로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안평대군의 꿈 내용을 그린것이데, 이 작품에서는 이곽파의 강렬한 영향 후에 형성된 그의 필의筆意를 엿볼 수 있으며 환영적 감각으로 묘출해 낸 관념경觀念境의 신비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작품 경향을 안견파라 칭하며 조선시대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조선초기의 손꼽을 수 있는 여류화가로 신사임당을 들 수 있는데, 저명한 이율곡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는 시, 서, 화 삼절三絶로서도 저명하였고 회화에서 특히 초충도草蟲圖를 잘 그렸다.(도판5) 극히 섬세하고도 우아한 우미함을 전개했던 이 초충시리즈들은 여류로서 그가 도달한 정화精華의 경지를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회화사에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 장르를 보여 준 경우라 하겠다.7)
(3) 일본회화와의 교섭
조선초기의 회화는 한일 양국간의 활발한 문화적 교류로 인하여 일본 무로마찌 시대의 수묵화水墨畫 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영향은 우리나라를 다녀간 일본의 승려화가들과 사절단에 끼어 도일渡日했던 우리나라의 화원들, 그리고 일본에 전해진 우리나라의 화적을 통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조선초기의 수묵화와 일본 무로마찌 시대의 수묵화와의 연결을 잘 보여주는 작품중의 하나는 ⌜파초야우도芭蕉夜雨圖⌟이다.(도판6) 이 작품은 본래 권券으로 되어있던 것을 축軸으로 개장한 것인데, 태종太宗 10년(1410)에 봉례사로 도일했던 집현전 학자 양수와 교토, 고산의 시승 16인의 제찬이 있어서 제작연대를 분명히 알 수 있고, 그 경위를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8)
또한 조선화풍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는 일본인 화가 슈우분(周文)과 한국인화가로서 수문秀文의 공헌이 있었다. 슈우분은 쿄토 쇼오고꾸찌(相國寺)를 근거로 장군 휘하에서 어용화가로 활동하면서 일본의 수묵산수화를 대성시킨 선승禪僧으로서, 국왕사國王使를 따라 내조 했다가 조선초기의 회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와 그의 제자들의 작품에 보이는 전경, 중경, 후경의 삼단으로 이루어진 구성과 전경과 중경 사이에 깊고 넓은 공간을 둔 특색 등은 조선 초기회화로부터의 영향인 것이다.
수문秀文은 일본에서는 예부터 조선인으로 전해지던 사람으로 소가파(僧我派)의 비조鼻祖로 알려져 있다.9) 그는 몇 년 전에 발견된 ⌜묵죽화책⌟에 의해 조선초기의 사람임이 밝혀졌으며, 이 화책은 1424년에 그려졌음이 이 책의 끝장 제10엽에서 발견되었다. 이 화책의 대나무는 바위나 언덕처리에 있어 흥미 깊은 양식을 보여주며,(도판7) 박팽년의 ⌜설죽도雪竹圖⌟나 신사임당의 ⌜묵죽도墨竹圖⌟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조선초기의 경향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 15세기 한일관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문청을 들 수 있는데, 문청의 도인이 찍힌 작품들은 산수화와 인물화로 대별되며, 다소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두 한국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그의 작품으로는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도판8)와 ⌜연사모종도煙寺暮鐘圖⌟(도판9) 및 ⌜동정추월도洞庭秋月圖⌟(도판10) 등을 들 수 있다.
2) 조선시대 중기
(1) 초기화풍의 계승과 절파계화풍의 유행
조선 중기의 회화는 조선 초기에 이룩된 화풍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화풍을 수용하였던 면과 거칠고 강한 화풍을 받아들여 구사하였던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들은 이 시대에 활약하였던 주요 화가들의 작품에서 역연히 읽을 수가 있는데, 이 점에서 제일 먼저 주목되는 화가는 김제金提라 할 수 있다. 양송당養松堂 김제(1524~1593)는 명종(1564~1566)과 선조(1567~1607) 때에 활약한 삼절三絶로 불리워지던 선비화가로 여러 분야의 그림에 정묘하였으며, 타고난 화재畵材로 도화서의 별제別提 벼슬까지 하게 되었다.
절파화풍의 영향을 보여주는 김제의 대표작품으로는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도판11)를 들 수 있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김제의 화풍은 후에 이경윤의 ⌜사호위기도四皓圍碁圖⌟, 김명국의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도판12) 등으로 그 전통이 이어진다. 그의 그림 중 일본에 있는 ⌜한림제설도寒林霽雪圖⌟(도판13)는 안견파화풍의 잔영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며, 김제가 그의 만년에도 전통적 안견파 화풍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16세기의 몇몇 화가들은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와 어느 정도의 연관성 있는 화풍들을 보여주는데, 이의 전형적인 일례가 함윤덕의 ⌜기려도騎驢圖⌟이다.(도판14)
이 그림에서는 머리를 숙여 내리고 다리를 넓게 벌린 채 등위의 무게가 힘겨운 듯 비틀거리는 나귀와, 짐승의 고충은 아랑곳없이 시상詩想에 잠긴 듯 태연하기만한 선비의 모습이 3각 공간 속에 핵심을 이루며 부각되어지고 있다. 이 점이 ⌜고사관수도⌟와 비슷하며, 여기에서 보이는 필치는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보다 좀 더 유연하고 부드럽다.
함윤덕의 ⌜기려도騎驢圖⌟에서 보이는 소재와 구도는 이불해(1529~?)의 전칭 작품인 ⌜기려독행도騎驢獨行圖⌟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불해의 화풍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은 ⌜예장소요도曳杖逍遙圖⌟(도판15)이며, 주산의 묘사에서 남송의 마하파의 양식과 수지법 등에는 북송대 화풍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16세기 절파화풍과 관련되어지는 화가로는 이숭효와 이흥효 형제가 있다. 이숭효의 ⌜어옹귀조도漁翁歸釣圖⌟(도판16), 이흥효(1537~1593)의 ⌜산수도⌟는 김제의 필법을 따르고 있다.(도판17~18)
김제에 이어 16세기 후반의 조선 중기 화단에서 가장 큰 비중을 지니고 활약했던 화가는 낙파駱坡 이경윤(1545~1611) 이다.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는 그림들 중에는 대작인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도판19)가 있다. 이 그림은 산이나 바위가 현저한 흑백의 대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복잡한 느낌을 주지만 공간이 현저하게 확대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그의 다른 화풍은 ⌜주계단안도舟繫斷岸圖⌟(도판20)에서 보여 지는데, 배가 매어져 있는 강가주변의 산수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대각선을 이루는 구도는 조선 초기의 전통을 보여주지만 묵법, 필법, 수지법 등은 절파화풍의 영향을 풍겨 준다.
17세기 초엽의 조선 중기 화단의 화가로는 나옹懶翁 이정(1578-1607)를 들 수 있다. 그의 전통적인 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산수도山水圖⌟를 들 수 있는데, 이 그림에서 그는 안견파의 전통적 양식을 보여줌과 동시에 다른 일면으로는 절파양식이 가미된 새로운 요소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 17세기에 활약했던 화가로 이명욱, 김상헌, 이영윤 등이 있으며, 이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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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선 중기에는 절파화풍이 가장 널리 유행하였으며, 이와 함께 안견파 화풍 및 마하파 화풍 등이 전통의 맥락을 잇고 있었음을 볼 수 이으며 남종화가 전래되어 부분적으로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영모, 화조 및 기타회화의 발달
조선 중기에는 비단 산수, 인물뿐만 아니라 영모와 화조, 묵죽, 묵매, 묵포도 등에서도 괄목할 만한 한국적 화풍이 형성되었다. 16세기 중엽부터는 동물화가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암李巖의 작품은 그 좋은 예가 된다. 이암의 천진스런 소재의 작품들은 김식의 ⌜우도⌟(도판21)와변상벽의 고양이 그림(도판22)으로 그 전통이 이어진다.
조선 중기의 한국적 화풍은 수묵화조화에도 잘 나타내어지는데 이 그림들은 조속과 조지운의 작품들에서 가장 뚜렷이 볼 수 있다. 사인화가였던 창강凔江 조속(1595-1668)은 매, 죽, 영모와 산수도 잘 그렸으나 현재는 수묵화조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유작으로 ⌜노수서작도老樹捿鵲圖⌟(도판22)가 알려져 있다.
그 외에 그의 작품으로 ⌜수금도水禽圖⌟(도판23) ⌜금궤도金櫃圖⌟등이 있다.
그 외에 ⌜매상숙조도梅上宿鳥圖⌟(도판24)는 조지운의 화풍을 잘 보여주며, 그는 어몽룡,,의 묵매화의 영향을 받아 좀 더 변화시킨 매화 그림들도 남기고 있다.
조선중기의 회화사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이정, 황집중, 어몽룡 등의 우수한 선비화가들이 나와 묵죽, 묵매, 묵포도 등의 분야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는 점이다. 이정의 ⌜묵죽도墨竹圖⌟(도판25)를 일례를 보면 왼편 하단부의 바위로부터 솟아난 대나무가 포물선을 그으며 뻗어있어 우선 구도상의 조화를 보여준다.
어몽룡의 묵매는 ⌜월매도月梅圖⌟(도판26)에서처럼 부러진 굵은 가지와 새로 돋아난 곧고 어린 가지들을 대조시켜 묘사하고 있다. 그 외에 황집중의 ⌜묵포도도⌟(도판27)는 비록 가장자리가 잘려나간 소폭의 그림이지만 그의 포치와 묵법을 짐작케 한다. 이처럼 조선 중기에는 산수화 이외에도 영모, 화조, 묵죽, 묵매, 묵포도 등의 각 분야에서 색다를 화풍들이 발전되었음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3) 조선시대 후기
(1) 전통화풍의 계승과 새 화풍의 태동
조선시대 후기는 남종화, 문인화 등의 화풍이 유행하였으며, 전토의 계승과 새로운 화풍의 태동을 암시하는 일종의 전환기였다. 작가로는 윤두서, 김두량, 변상복, 정선, 김홍도, 신윤복, 강희언, 최북, 강세황 등 거장들이 많이 활약하였으며, 겸제 정선(1676-1759)은 중국 송대의 수묵산수화법과 오파, 절파 등을 자기화하여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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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진경산수眞景山水를 개척함으로서 획기적인 전기를 이룩하였다. 정선은 그의 독특한 수직 수평선을 사용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금강산의 경우 마치 철골鐵骨같은 날카로운 첨필로 수많은 봉우리를 그리고 있으며 간간히 소미점과 같은 길고 짧은 수평적 묵미를 가미함으로써 수직적 필세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10)
그의 대표작으로는 ⌜금강전도金剛全圖⌟(도판28) ⌜仁王霽色⌟(도판29)등이 있으며, 근현대까지 실경산수화를 이루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진경산수를 전개했던 대표적 작가로는 강희언(1710-1764), 김윤겸(1711-1775), 최북(18세기), 김응환(1742-1789), 김석신(1758-?), 정수영(1743-1831), 김홍도(1745-?) 등이 있다.
(2) 풍속화의 유행
조선 후기의 회화에서 진경산수와 더불어 크게 주목된 것은 풍속화의 유행이며, 여러 가지 생활상을 묘사한 풍속화는 우리나라 회화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풍속화는 영, 정조시대에 김홍도와 신윤복에 의해 유행되었으며, 소재는 조선후기의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의 서민들 생활의 단면을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김홍도의 대표적인 풍속화로 풍속화첩風俗畵帖의 ⌜서당도⌟(도판30) ⌜씨름⌟(도판31)등을 들 수 있다. 김홍도의 화풍은 그의 아들인 긍원肯園 김양기, 이명기, 김득신 등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전해졌다.
김홍도 화풍의 영향을 받았던 화가들 중에서 그의 것의 진수를 터득하여 일가를 이루었던 인물은 긍재矜齋 김득신이다. 그의 ⌜파적도破寂堵⌟(도판32)를 비롯한 풍속화들은 이런 의미에서 큰 관심을 끈다.
조선후기의 풍속화에서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는 또 다른 화원은 혜원蕙園 신윤복(18세기 중엽-19세기 전반)이다. 그의 풍속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일례로 ⌜연당야유도蓮塘野遊圖⌟(도판33)를 들 수 있다. 또한 신윤복의 인물들은 깅홍도의 인물과는 달리 대체로 얼굴이 갸름하고 의습선은 유연하며 세련된 선들로 정의되어 있다. 신윤복의 여인들은 ⌜미인도⌟(도판34)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다.
신윤복은 그의 풍속화를 산수를 배경으로 전개시키곤 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녀 온 통념과는 달리 ⌜산수도⌟(도판35)에서도 그 나름의 색다른 화풍을 보이고 있다. 18세기 초부터 유행되었던 풍속화는 그 후에 소강한 상태를 보이다가 조선 말기의 혜산蕙山 유숙(1827-1873)을 고비로 그 유행의 꼬리를 감추게 되었다. 유숙의 ⌜대쾌도大快圖⌟(도판36)는 풍속화 유행의 말미를 장식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조선 후기에는 남종화, 진경산수, 풍속화가 크게 유행하였으며, 서양화풍이 수용되는 등 초, 중기와는 다른 경향들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4) 조선시대 말기
(1) 남종화풍의 유행과 이색화풍異色畵風의 대두
조선왕조 말기의 회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남종화풍의 본격적인 유행과 토착화이다. 이에는 당시의 학계와 서화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김정희와 그의 일파의 역할이 매우 컸는데, 그는 실학과 금석학에 큰 업적을 쌓은 이 시대 대표적 학자이자 서화가였다.
김정희의 대표작으로는 ⌜세한도歲寒圖⌟(도판37)와 ⌜묵란도墨蘭圖⌟(도판38)를 들 수 있으며, ⌜세한도歲寒圖⌟는 김정희의 남종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 ⌜묵란도墨蘭圖⌟는 김정희의 전형적인 사란寫蘭과 서체書體를 동시에 잘 드러내어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김정희는 조희룡, 허유, 전기, 권돈인 등의 여러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묵란을 유행시켜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여러 선비화가들이 즐겨 그리게 하였다. 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문인화가로 제일의 화가는 조희룡이다. 조희룡의 대표작인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도판39)는 매우 이채로운 작품이며, ⌜墨竹圖⌟(도판40)에서 보여주는 높은 경지는 그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허유許維(1809-1892)는 원말4대가의 한 사람인 예찬倪瓚이나 황공망黃公望의 화풍을 토대로 자기만의 독특한 화풍을 달성했는데, 대체로 필치가 거칠고 힘차면서도 담백한 느낌을 풍긴다. 이러한 특색은 그의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도판41)에 잘 나타나고 있으며 그의 화풍의 특징은 50대에 더욱 뚜렷해지는데, ⌜산수도⌟(도판42)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화가로 젊어서 요절한 전기田琦(1825-1854)의 작품으로는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도판43), ⌜설경산수도⌟(도판44)가 있다.
조선말기의 회화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김정희 화풍과 더불어 이색적인 화풍의 대두이다. 윤제홍의 ⌜송계한담도松契閑談圖⌟(도판45), 석창石窓 홍세섭洪世燮(1832-1884)의 ⌜유압도⌟(도판46) 등은 대표적인 예의 작품들이다.
조선말기에는 이와같은 대표적 화가들 외에도 난초를 잘 그린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과 운미芸楣 민영익(1860-1914), 괴석을 잘 그린 향수 정학교, 나비를 전문으로 그린 일호 남계우 등이 있다.
(2) 근대 및 현대화단으로의 이행
우리나라의 근대 및 현대의 회화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조선 말기의 화가는 오원五園 장승업(1843-1897)이다. 그는 산수, 인물, 영모, 기명, 절지, 사군자 등 다양한 소재를 폭넓게 다루었으며, 산수에서는 남종화풍과 북종화풍도 함께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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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소장의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도판47), ⌜산수도⌟(도판48), ⌜호취도濠鷲圖⌟(도판49)등은 그의 화풍의 예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장승업의 다양한 화풍은 해사海士 안건영(1841-1876)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를 사사한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과 소림小琳 조석진(1853-1920)에게 전해져 근대회화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안중식과 조석진의 문하에서는 심산心汕 노수현(1899-1978),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 소정小亭 변관식(1899-1976), 이당以堂 김은호(1892-1979) 등이 배출되어 우리나라 현대 화단의 기틀을 이루게 된 것이다.11)
4. 결론
한국의 회화는 각 시대마다의 특성을 키우며 발전해 왔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회화분야에서 독특하고 창의적인 독창적인 화풍이 형성되었으며, 우리민족의 우수한 예술성과 창조성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화풍을 보여주는 조선시대의 산수화는 전통적인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으며 전통적 화풍을 토대로 끊임없이 다양한 양식을 추구하고 있다. 외래의 화풍을 받아들일 때에도 전래와 동시에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얼마동안 지켜보는 태도를 취한 후 상당한 유예기간을 거친 후 따르기도 하였으며 수용한 것은 나름대로 소화하여 한국적 화풍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외래화풍의 선별적 수용과 전통의 계승이 한국의 산수화를 한국적인 것으로 살아남게 하였던 중요한 요인으로 믿어진다.12)
한국의 미의식이 눈물을 쥐어짜는 애상의 미나 비애의 미는 결코 아니며, 해학과 유머의 기질이 농후한 밝고 명랑하고 건강하고 낭만적이기도 한 여유의 기질을 여러 풍속화와 영모, 화조도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답답하고 번거로운 것을 피하여 확 트인 여유로운 공간과 경향을 여백과 생략의 기법에서 발견할 수 있었으며 이는 바로 한국적 자연주의로 연결되어진다고 보여 진다.
조선 후기의 미의식을 보다 소박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는 정통회화만이 아닌 민화에서도 볼 수 있는데, 소재가 소박하고 간결하며 솔직해서 우리민족들의 미감과 미의식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우리만의 고유한 해학의 미임을 알게 된다.
때로는 기발하고 환상적이며 천연스러움이 담긴 우리 민족의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이 은은한 미소를 짓게도 하는 것이다. 과거의 우리 미술에 대한 연구와 감상이 새로운 현대적 한국 미술의 탄생과 유행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보며 조선회화에 대한 감상을 맺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