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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기]/수필·감상문·기타
2009-09-04 16:11:01
부산행 자전거 여행
2009. 8. 26. / 한산도 도다리 박모철
대학 4학년 여름.
창근이 재중이 병훈이와 자전거로 서울에서 부산 가는 길에 국도변에서 찍은 사진이다.
학기초부터 여름 방학 때 뭔가 색다른 걸 해 보자는 누군가의 제안에 여러 가지 고심 끝에 부산행 자전거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당초 광용이 근록이도 함께 하기로 했으나, 아쉽긴 하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둘은 빠지고 결국 넷만이 가게 되었다.
멀리 서울로 유학 온 촌놈들이 무슨 돈이 있나. 한 달 아르바이트 월급을 탈탈 털어 기아도 없는 사이클을 4만원을 주고 같은 것으로 마련하였다.
출발 일주일 전부터는 신림동에서 서초동까지 땡볕에 매일 연습 주행을 하며 체력도 보강하고 자전거 여행의 묘미를 미리 느껴 보기도 하였다.
출발 전날 함께 모여, 각자 챙겨올 준비물을 점검하였다. 없는 돈에 매 끼니 사 먹고 댕길 수는 없는 일. 삼시 세끼를 모두 지어 먹기로 하고, 바나, 코펠에 고체연료, 쌀, 밑반찬, 카메라 담당을 정하고 각자 우의와 여벌 옷을 챙겨 오기로 하였다. 미리 사 둔 25000분의 1 지도를 펼쳐 놓고 가야 할 코스를 살피며 어디서 하룻밤을 잘 것이며, 언제쯤 부산에 도착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 그저 즐겁기만 한 이야기가 오래 이어졌다.
첫째 날
한여름 뜨거운 날이긴 해도 몹시도 화창했던 그 날.
신림동 재중이 형님댁(?) 앞에서 준비물 점검과 함께 오랫동안 학수고대 하던 부산행 450키로의 대장정 길에 올랐다.
페달을 밟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미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체력 단련을 하긴 했지만 국도를 따라 오르막 길을 몇 번 저어 보니 여간 힘들지가 않다. 기아가 없으니 웬만한 오르막길은 땀을 삘삘 흘리며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야 한다.
오르막이 있으면 정상이 있어 쉬어 갈 수 있으니 좋고, 쉬고 나면 페달을 밟지 않아도 몇 키로는 그저 갈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아직 체력이 남아 수원 들어 가는 내리막 경사 길을 시원하게 질주하여 평지 아래 철도 길을 쏜살같이 통과하는가 싶더니,
아이구야~~, 내 몸이 자전거와 함께 하늘로 치 솟아 철버덕 하며 비포장 도로 땅 바닥에 내동댕이 치며 굴러 떨어진 것이다. 도로에 비스듬하게 난 철로가 가랑비에 젖어 경사 길을 전 속력으로 내려 오던 자전거 바퀴가 미끄러졌던 것이다.
정신이 아찔하여 주위들 둘러 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네 놈 모두 길바닥에 내 팽개쳐져 정신을 못 차리고 눈만 멀뚱거리며 서로를 쳐다 보고 있다.
헌데 네 사람 모두 몰골이 영 말이 아니다. 무릎이 깨진 놈, 팔뚝에 타박상이 난 놈, 옆구리 아래쪽이 심하게 긁힌 놈, 어깨에 피 멍이 든 놈. 게다가 자전거 바퀴는 심하게 비틀어져 거의 못 쓸 지경인 듯 보여 앞으로 갈 길이 막막하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다행인지 등에 멘 색이 완충작용을 하여 몸을 못 움직일 정도로 크게 다친 사람은 없고, 자전거 바퀴도 다시 틀어 맞추니 무리 없이 원상 회복이 될 정도다.
패잔병처럼 길거리에 퍼질러 앉아 찰과상인지 타박상인지 모르지만 상처 부위에 아끼징키를 바르고는 다 나은 듯 털고 일어선다.
서두를 일이 없지 않은가? 이제부턴 여유롭게 산천경개 구경하며 유람하듯 움직이세.
하루 늦게 가면 어떠리.
우리 함께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여름 눈부신 아름다운 강산을 눈으로 즐기러 왔건만,
누군가 힘들고 지치면 덩달아 한 번 쉬고,
지나 가는 시골 풍경이 눈 부셔 한 번 쉬고,
느티나무 아래 모여 앉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정겨워 또 한 번 쉬고,
목이 말라 근처 마을 우물에서 시골 아가씨 얼굴 한 번 보며 쉬고,
국도 옆 그늘진 곳에서 점심밥 지어 먹으며 푸~욱 쉬고.
한 번의 사고로 여유를 되 찾은 우리, 어느덧 해거름이 되어 생각보다 빨리 유성에 도착하였다. 하루 만에 150키로 정도 왔으니 대략 열 시간 잡고 시속 10키로 정도로 온 것 같다.
싸구려 여관을 찾아 시원하게 몸을 씻고 방안에서 대충 밥을 지어 먹고는 세상 모르게 너부러져잠을 청한다. 아니 청할 필요도 없다. 그냥 누우니 거기가 꿈나라다.
둘째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온 몸이 천근 만근 무겁다. 양다리가 몽기고, 어제 자빠진 후유증인지 허리 어깨 팔다리가 성한 게 없다. 밖에는 장맛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느즈막하게 아침을 해 먹고는 입으나 마나 한 얄궂은 비닐 우의를 몸에 걸치곤 빗길을 달린다. 아침엔 움직이기 조차 힘들더니 비와 땀에 범벅이 되고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자 씻은 듯 풀린 느낌이다.
신발에 물이 차고, 속옷까지 흠뻑 적셔도 뙤약볕보다는 빗속을 달리는 것이 훨씬 운치 있고 어린애 마냥 신나기만 하다.
남으로 한참을 가자 비도 그치고 쨍하고 해가 나온다. 땅에서 서멀 서멀 올라오는 습기, 머리 위로 내리 쬐는 태양, 비에 젖은 옷이 마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다시 땀이 스며든다. 차라리 비가 쏟아 질 때가 자전거 타기엔 훨씬 더 나아 보인다.
영동 부근의 어느 시골 마을 입구. 갑자기 피식 하는 소리와 함께 재중이 자전거가 멈춰 선다. 이어 병훈이 자전거도 빵꾸가 나고 말았다. 갈 길이 먼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어디서 수리를 해야 하는데 이런 시골에 수리점이 있을는지 걱정이 태산이다.
마을로 들어서며 이리 저리 둘러 보니 바로 근방에 자전거 수리점이 보인다. 천만 다행이다.
‘아이구~ 인적도 없는 산 속에서 빵꾸가 났더라면 우짤 뻔 했노’
영동을 거쳐 추풍령 고개로 오른다. 페달을 있는 힘을 다해 밟아도 도저히 올라 갈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억지로 자전거에서 내렸다. 잘못 하다간 체인이 끊어질 지도 모른다. 여기부터는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끌고 걸어 올라갈 수 밖에 없다.
정상에 오르면 김천까지 수 키로는 거저 먹기다. 추풍령 고개는 높기만 하다. 정상 인 듯 보이는 곳에 올라 가면 신기루처럼 또 한참 위로 멀어져 간다.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고개. 숨을 헐떡이면서도 누군가 배호의 ‘추풍령 고개’를 부르기 시작하자 모두 합창하며 장단을 맞춘다.
피곤함이 이미 견딜 수 있는 체력 한계를 넘어 선 것 같은데도 아무도 퍼지는 사람 없이 꾸역 꾸역 언덕길을 잘도 올라간다.
정상이다. 뒤쪽은 충청도, 앞쪽은 경상도. 경상북도라 써 붙인 팻말 외에는 양쪽을 구분할 수도 없지만 이곳을 경계로 말씨가 완전히 다르단다. 신통한 일이다. 한쪽에서는 ‘아부지 돌 굴러가유~’ 가 어울린다면, 다른 한쪽에서 ‘에레이~ 쎄가 만발이나 빠질 눔아’ 가 어울리는 충청도와 경상도.
그늘을 찾아 몸을 눕히고 한참을 쉬어도 가자는 사람이 없다. 다를 움직이기 싫을 게다.
훗날 우리 자식들은 아마도 이 길을 자가용을 타고 씽씽 달릴 거라며, 우린 그 때에도 자전거로 이 길을 한 번 더 오자며 지켜 질 지도 모를 약속으로 마음을 다 잡는다.
김천까지는 페달 밟을 일도 없다. 간간히 브레이크를 잡아 가며 나무 그늘 사이로 이어진 길을 여유롭게 달린다.
산모퉁이를 바로 돌아가니 뜻 밖에도 길가에 반가운 팻말이 하나 섰다. 송학사.
김태곤이가 노래한 그 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상관없는 일이다.
틈만 나면 기숙사 방에서 기타 치며 함께 부르던 그 노래.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둥둥둥두~ㅇ 산 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무얼 그리 갈래 갈래 깊은 산 속 헤매나……’
긴 여름 해는 지고 길에 이미 어둠이 깔렸다. 오늘도 150km 이상 달린 것 같다.
병훈이 외삼촌 집을 찾아 대구 시내로 향했다. 여관방에서 자려고 했으나 병훈이가 우겨 그리로 가기로 한 것이다.
외삼촌 내외가 흉한 몰골의 우리를 반기긴 했지만, 쑥스럽고 미안하긴 어쩔 수 없다.
저녁을 얻어 먹고 우르르 명동으로 나갔다.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기도 그렇고 피곤하긴 해도 여기까지 와서 대구 시내 구경은 하고 가자는 게 대세다. 대구는 기차 타고 지나가 본 것 외는 올 일이 없는 곳이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명동으로 들어 가니, 거리를 밝힌 네온 사인 불빛에 제법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가 명동인가 싶더니 불과 100미터도 걷지 않아 번화가가 끝나 버린다. 다시 되돌아 와 봐도 별게 없다. 서울 명동을 생각했다가 약간 허무하단 생각이 든다.
셋째 날
병훈이 덕분에 편안하게 잠도 자고 아침까지 맛있게 얻어 먹고 다시 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다리를 혹사해도 자고 일어나니 또 할만하다. 온몸이 뻐근하긴 해도 몸에 땀이 나고 열이나니 뭉쳤던 근육이 다시 부드럽게 풀리는 듯 하다.
국도변 시골은 어디를 가도 정겹다. 아직까지 초가집이 더 많고 돌담 흙담도 흔하다. 지붕 위에 호박 넝쿨이 기어가고 마당에는 감나무 하나 정도는 섰다. 어느 마을이나 입구에는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 느티나무가 동네 사람들뿐 아니라 오가는 길손도 쉬어 가기에 그만한 곳이 없다.
목이 말라 물 한 모금 얻어 먹을 생각으로 낙동강 지류 변 어느 시골 마을에 들렀다. 물 한 모금 얻어 마시러 왔다는 말에, 나무그늘 아래 평상에서 부채를 흔들며 더위를 식히던 할머니 한 분이 당신 손자인 것처럼 시원한 우물물을 한 바가지 떠서 앵기며,
“아이고~~ 이 떠분데, 오데서 오는 총각들이고? 서울 부잿집 아~들인가배?”
땀에 범벅이 되어 새 까맣게 탄 우리를 뭘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인지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예?”
“아이구 할무이도…… 다 부산 촌놈 들입니더. 방학이라 자전거로 서울서 부산 가는 기라예”
“부산까정 자장구 타고 간다꼬? 그것도 서울서?”
순진 무구한 시골 할머니 눈에는 새로 산 자전거가 뭔가 값 나가는 물건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동전 백원도 귀하게 여기시던 우리 할머니를 생각해 보면 무리도 아니다.
긴 겨울방학 끝에 한 학기 등록금과 책값, 용돈을 챙겨 집을 나서던 내 뒤를 쫓아 나오시며,
‘아가! 돈 안 모지라나? 백원 더 주까?’ 하시며 쌈지 주머니를 뒤적이던 우리 할머니 모습이 겹쳐 떠오른다.
1학년 여름 방학 때 추억이 있는 밀양을 지난다.
천황산 사자평의 고사리 국민학교 분교에서의 밤하늘은 고향 한산도의 밤하늘처럼 기억 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뿌연 우유를 뿌린 듯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질러 흐르던 은하수와 하늘 가득 촘촘히 박힌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가슴 가득 밀려오던 감동의 밤하늘.
얼음골에서 수박 깨 먹다가 막차를 놓쳐 모기 떼 습격을 받으며 과수원에서 잠 못 이루었던 밤.
새끼노루 생포 그리고 계속 우리 주위를 빙빙 돌던 어미 노루의 애처롭던 모습……
새끼노루는 그냥 방사해 주고 말았다.
밤이 되어 부산 시내에 도착했다.
자동차 불빛이 어지러운 도심을 달려 서면의 거상 다방으로 향한다. 미리 연락해둔 창덕이와 철수를 보기 위해서다. 다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귀에 익은 Kraftwerk의 Radio Activity의 전자사운드 음악이 실내에 가득 하다.
“빤빤빤빤 빤빤빤빤 빠~ㄴ빤빤 레이디오~ 액티비티……”
방사능이 어쨌다는 건지 가사 내용도 알지 못하면서도 이 부분만 나오면 흥얼거리며 따라 했던 음악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이 늦도록 3일간의 무용담을 번갈아 늘어 놓는다.
아찔했던 사고,
힘들었던 여정,
따뜻한 만남,
소중한 추억.
언젠가 이 길을 자전거로 다시 한 번 오자던 약속, 내년엔 실행에 옮길 수 있을 라나?
2009. 8. 26
(밉상 광요이 회신)
ㅎㅎㅎㅎ 모처라,,,,
2박3일만에 부산까지 갔다고?
내 기억에는 3박4일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밀양 부근에서 하루를 더 묵은 걸로 나는 알고 있지....
같이 가지도 않은 넘이 우째 그리 잘 아냐고??
내가 다른 친구들한테는 같이 간 걸로 썰을 억수로 풀어놨거덩....
특히 상구기는 내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있다 아이가....
그래서 지도 같이 갈 수 있으모 함 같이 가자는 언약(?)까지 했다 아이가...
그래서 내가 니보다 더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ㅎㅎㅎㅎ
니도 알다시피 그때 나 역시 무척이나 가고픈 여정이었는데,,,,
내가 그때 쪼메 몸이 좋지 않아서 스트렙토마이신을 먹고 있을 때라서 (재주이도 잘 알 꺼로??) 같이 하지 못했지...
너그가 첫날 대전까지 가는 날, 나는 열차로 부산을 향하고 있었다.
천안을 지나면서 너그가 그쯤 지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네...
내 기억이 맞다면 8월15일 출발했을 꺼야, 아마도......
그래서 내년에 부산자전거 종주 함 하자꼬???
그래 하자!! 미리 날부터 잡아놓자.
2010년 7월27일경 출발해서 8-15(8월1일 5시?)에 교정에서 모이든지?? ㅋㅋㅋ
(병후이 회신)
광용아, 오늘만큼은 내가 니 편이 되어 주께.
모철이가 소설을 썼다더니 정말 소설이네, 사실과 다른 점이 너무 많아서, 과학도인 내 눈에는 너무 시려서 그냥 지나가지 못하겠다. 이것이 사료로 남아도 곤란하니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술해야 될 듯하여 수정하고자 한다. 문학적인 소양이 풍부한 모철이가 양해해주라.
나도 거의 까마귀 고기 먹은 사람 수준이니, 혹 또 틀린 것이 있으면, 기억력이 우수한 창근이와 재중이가 또 수정해줄 것으로 믿고 적어볼까 한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기는 무슨? 근록이는 누군가 만나러 간다고 빠졌다. 광용이는 아래에 적은 대로 체력이 안되었고, ..
나는 연습 주행 딱 한번 한 것 같은데….
레일에 걸려 넘어진 곳이 수원까지 가지도 못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내 기억에는 시흥 근처 어디였던 것 같다. 우리 모두 넘어진 것이 아니고, 한 명이 넘어졌다. 내 기억에는 창근이다. 모철이 기억대로 신나게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데, 중간에서 꽈당하고 넘어진 것이다.
레일을 직각으로 건너야 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처음으로 배웠다. 기초도 없이 무모한 여행을 시작한 것이지… 요즘 같으면 차가 많아서 국도에 위험해서 가겠나 어디… 사실 많이들 놀랬다. 상당히 다쳤기 때문에 모철이가 지 몸까지 아픈 것으로 기억하는 것 같다. 의기소침했던 것 같다.
그 다음부터는 여유있게 가기로 했다는데, 전혀 아니다. 선두에 서 있는 재중이가 천천히 끌고 갈 놈(? 미안)이 아니다. 815까지 경고 등나무 아래에 도착해야 한다고, 오늘 대전까지 가야 된다고, …. 나는 피눈물 흘리면서(?) 끌려갔다. 넘어진 사고가 난 후 약 30분 정도 더 가서 갑자기 배가 고파지네. 그래서, 아, 배가 고프다. 나는 더 못 가겠다. 하고 주저앉아버렸다.
두번째 사고는 내가 쳤따.
나중에 재중이가 배고프다고 못 가겠다는 데 정말 환장하겠더라고 핀잔을 주곤 했다.
이날 비가 오지 않았나. 배는 고프지, 비에 젖어 몸은 오슬오슬 하, 정말 죽을 맛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렇게 대전까지 끌려갔다.
창근이도 비슷했다. 프라이버시를 위해 여기 적지는 않았지만, …
첫날 밤은 유성이 아니다. 대전 시내에 있는 재중이 누님 댁에서 첫 날 밤을 보냈다. 빗물, 차에서 튀긴 흙탕물에 젖은 거지 꼴을 깨끗이 씻고, 누님께서 차려주신 저녁을 잘 먹었고,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둘째날, 여기서부터 모철이와 광용이의 2박3일이냐, 3박4일이냐의 논쟁의 씨앗이 움튼다. 아침에 눈 못 떴다. 점심때쯤 일어났다. 온 삭신이 쑤셔서 가지 말자는 이야기부터, 조금만 가자까지,… 그래서 느즈막하게 출발하였는데, 옥천을 지나면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 기억이 있다. 영동에 도착했을 때는 비는 거의 멎고, 영동은 안개로 기억될 정도로 젖은 기운이 가득했다. 아마 벌써 거의 저녁 무렵이었던 것 같다. 모철이가 이야기 하는 타이어 펑크는 내 까마귀 머리에는 전혀 남아있지 못하다. 첫날은 154 km, 둘째날은 대충 30 km 정도나 갔는지? 영동에 들어서자마자 여인숙부터 찾아서 바로 휴식에 들어갔다. 그래서, 여기서 하루가 더 늘어난 것이다. 광용이 승.
셋째날은 날씨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첫 번째 사진에 모철이 뒤 경계표지에 경상북도라고 되어있네, 여기서부터 경상북도라면 여기가 추풍령고개다. 길이 젖어있네. 내 기억에는 어찌나 완만하게 올라갔던지, 그냥 오르다 보니 추풍령이었다. 내보다 체력도 좋았던 모철이는 이 추풍령고개를 울고 넘은 것 같아서 뿌듯하다. 이 둔한 놈은 고개인지도 모르고 얼떨결에 넘은 추풍령을 눈물 없이는 넘을 수 없는 한강 이남에서 제일 높은 고개로 만든 모철이의 문학적 상상력에 경의를 표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추풍령의 남쪽 사면은 끝없는 내리막길이었다.
대구 들어가기 직전에 팔공산 옆을 넘어가는 높은 고개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전까지는 거저먹고 내려간 것 같다. 송학사 이야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대구에서의 잠은 혼자 사시는 넷째 숙모네 집에 가서 잤다. 넷째 삼촌이 일찍 돌아가셔서 혼자 지내시기 때문에, 또 자식이 없으셔서 우리 형제 중 한 명을 양자하시려고 공을 많이 들이셨기에 특히 반가워 하셨다. 내가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용감한(?) 친구들이랑 자전거를 타고 내려왔다니 그것도 대견하셨을 것이다. 잘 잤지뭐. 그런데, 나는 잔 기억밖에 없다. 시내 나간 기억이 없네.
이 여행이 4학년 때라고? 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휴교하고 기나긴 방학을 지내던 때라고? 글쎄, 난 모르겠다. 졸업하고 첫 해는 우리 모두가 재수했으니 그렇고, 대학가고 처음으로 등나무 아래에 모인다고 열심히 달려내려 간 것 아닌가? 여울목 딸애들이랑 같이 갔던 밀양 표충사 여행이 2학년 때 아닌가?
아직 50초입인데, 이렇게 모든 것이 앞뒤가 뒤섞이네. 내가 모철이 기록이 틀렸다고 시작한 짓인데, 내가 더 모르겠다. 모철아, 미안하다. ( )도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요새 이렇다. 모든 것을 일정표에 적어두지 않으면 모른다. 나는 컴퓨터 앞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약속을 잡을 수가 없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젊은 친구들은 내년에 또 하잔다. 끙~~
그렇게 저렇게, 서울서 부산까지 3박 4일 만에 달려왔다. 우리는 분명 기록경기를 한 것이다. 달려 내려오는 길 주변에 명승지가 있으면 들르기도 하고, 개울이 있으면 발 담그고 놀기도 하고, 중간에 하루 정도 천막치고 자기도 하고, … 할 것이 훨씬 더 많았을 것 같은데, 나는 그 점이 여행을 마치고 아쉬움으로 남았었다. 어찌되었든, 나로서는 젊은 나를 확인하기 위한 도전이었고, 최초의 모험이었다. 같이 해준 창근이, 모철이와 혹독하게 끌고 간 재중이,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오늘에 이르러 모철이의 문학적인 감성에 의해 새로 환생한 내 젊은 시절의 기억들은 3박4일의 짧은 기간에도 아기자기하게 재미있는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뿌듯하다. 모철아 고맙다.
2009. 8. 26.
(재중이의 학실한 기억)
드디어 때가 된 것 같다.
모두들 옛 기억을 살리느라 난리인데, 아무도 정확한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
당연히 기록을 해 놨어야 되는 건 데.
아마도 어딘가에 기록이 있을 것 같은데, 이제 이 나이가 되니 어디에 기록을 해 놨는 지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나는 모철이가 보내준 파일을 열어보지 못했다.
내 버전이 낮은 관계인데, 요즘엔 학생들 부려먹기도 쉽지 않아서 그냥 뭉게고 있다.
모철이 소설(?)을 읽지 못했지만 광용이와 병훈이의 메일을 보고 큰 줄거리에 대한 내 기억을 보탤까 한다.
기본적으로 일정과 관련해서는 병훈이 기억이 맞는 것 같다.
- 3박4일 맞다. (원래는 2박3일 할려고 했었는데....)
: 첫 날 -> 대전 내 큰 누님 댁 숙박 (완전히 맛이 갔었음)
: 이튿날 -> 영동 숙박 (아침 느즈막이 출발-다음 장도를 위한 충분한 휴식)
->> 덕분에 2박3일 예정이 3박4일로 되었음
: 삼일째 -> 대구 병훈이 숙모님 댁(참 포근하고 좋았음)
: 마지막 날 부산 도착 (서면 창덕이네 집 바로 옆 다방 최종 집결 및 해산)
- 1980년 맞다고 생각한다.
: 내가 결핵성 늑막염 투약을 끝내고 계획을 진행한 것으로 기억한다.
- 첫번 째 사고지점은 군포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지점이었음.(고개길을 넘어 유명한 불고기집(이름이 생각나지 않네) 지나서 내리막길을 편안하게 내려와서 만난 철길 건널목). 행정적으로는 수원이 맞음.
철길 건널목에서 창근이 자빠지고 나서 연이어 모철이도 슬라이딩 한 것으로 기억함. 창근이는 무릅(?)이 까져서 출혈이 있었고(쪼끔?? 걱정될 정도로) 모철이는 별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창근이의 당시 표정 -> 잘됐다. 여기서 나는 빠지면 되겠다(??)
->> 모두가 달래고 얼르고 해서 계속 대전을 향해 질주(?)를 했음
->> 덕분에 대전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모두가 완전히 맛이 갔었음(비를 흠뻑 맞아서 물귀신 비스무리 했고, 체력적으로도 지쳐서 당시에 사진을 찍어 놨더라면 볼만 했을낀데.. ㄲㄲㄲ
- 추풍령은 정말 쉬웠다.
: 사실 계획을 세울 때는 지도만 보고 추풍령을 넘는 것이 가장 큰 고비라고 생각했었는데, 병훈이 말대로 추풍령인지 아닌 지를 모를 정도로 쉽게 넘었다. 추풍령 남쪽 사면은 당연히 내리막길이다. 김천까지는 노래 부르면서 달렸을 끼다. 오히려 진영을 지나서 김해를 오기 전에 넘었던 "진동고개"가 무지하게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고개를 넘을 때는 자전거를 끌고 걸었던 구간이 있었던 것 같다.
- 우리는 기록경기를 한 것이 아니다.
: 계획을 세울 때부터, 젊어서 한 번 쯤 평생 기억에 남을만한 행사를 해보자고 한 것이었고, 기왕 할 것 같으면 2박3일에 서울-부산을 자전거로 주파하자고 한 것이었다. 1주일 정도 걸려서 쉬엄쉬엄 진행하는 경부 자전거 여행도 물론 가능한 것이었지만, 기왕이면 젊은 날의 추억을 남기기 위해서 일반인으로서는 조금 무리가 되는 일정으로 계획을 한 것이었고 결국에는 모두 뜻을 함께(자의 반 타의 반???) 한 것이다. 추억을 남기기 위한 여행(?)이었지 결코 기록경기가 아니었다.
병훈이의 주장은 당시에도 고집스럽게 시도 때도 없이 제기되었었다.
** 당시에 체력을 좀 회복하고 달리는 중간중간에 나중에 이 코스를 다시 한 번 시도하면 어떻겠냐는 얘기들이 있었다.
물론 자동차와 함께 쉬엄쉬엄 달리는 방법까지 제안하면서...
** 이제서야 당시의 얘기를 현실화(?)하자는 제안이 나온 것 같다.
다시 함 해볼래??
$$ 이상이 모철이의 소설을 아직도 읽지 못하고 광용이와 병훈이의 의견을 보고 정리한 내 기억이다. 모철이의 상상력을 존중해줘야 된다고 생각한다.
$$ 이제, 사건의 주인공 창근이의 기억을 보태주기 바란다.
(도다리의 생각)
재중아,
진짜 재중이 니 글을 읽고 보니 니가 내 유일무이한 친구다.(이건 니만 읽어 보고 소문 내지 마라) 딴 놈 들은 머시 어쩌고 저쩌고 도대체 말 도 안되는 이야기를 나름대로 소설을 써 보내는데 아 그라모 지가 먼저 씨지 그랬나? 그자?
(병후이 회신 II)
봐라 바로 꼬리 내리네. 봐라 수원 맞제?
그게 기록 경기지, 달리 뭐 기록경기라고 이름 지워진 것이 있나?
그래도, 재중이 기억이 최고네.
어제 보고 추억을 일깨워준 모철이가 고마워서 주저리 주저리 썼다. 그냥, 우리가 쓰면 모철이처럼 황 못친다.
다시 하면 나는 뒤에서 차 타고 비상등 켜고 천천히 따라가께. 내 역할은 정했다. 안전이 최고거든, 내가 보호해주어야지. 굳게 다짐해본다.
(병훈이 주장에 대한 도다리의 반론)
1. 빗길 사고
빗길에 기차길에 미끄러져 자빠진 곳이 수원이 아니라 시흥 부근이며, 다친 사람도 창근이 하나 뿐이라며 거품을 문다. 그러나 학실한 것은 나도 그때 사정없이 자빠져서 옆구리 뼈가 보일 정도로 타박상을 입었고 그 상채기는 정말 오랫동안 증거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똥 창근이가 전활해서는 그땐 학실히 지 혼자 다쳤고, 내가 다친 곳은 또 다른 데란다. 둘이 밀어 부치니 거기서는 똥창그니 혼자 다친 걸로 잠정 결론을 짓는다만 나중에 부산 김서방 얘기도 들어보고 최종 결론을 짓기로 하겠다.
2. 첫날 밤은 어디?
첫날밤이 유성이 아니라 대전 재중이 누님 댁이란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워낙 병훈이의 주장이 그럴 듯 하니 일단 접수하겠다. 이것도 재중이 예기가 더 학실 하리라고 본다.
3. 추풍령 고개
그래? 병훈이 니는 별 힘도 안들이고 올랐단 말이지? 내가 니보다 체력이 셋는 데도 불구하고 니는 전혀 힘이 안 들었다니 정말 이상하네. 혹시 내가 추풍령 고개 직전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거 아이가?
인터넷을 디비 보니 추풍령의 해발 고도가 221m라고 나와 있는 걸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 오르막이 험한 재는 아닌 듯싶다. 그러나 추풍령이 한강이남에서 최고봉이라 주장한 적은 엄따. 각성하라!
4. 2박 3일 이냐 3박 4일이냐?
여러 사람 특히, 같이 가지도 않은 대머리 마저 3박 4일이라고 주장하고, 하룻밤 더 잔 곳까지 들먹이며 상세한 기억을 덧붙이니 더 할말이 없다. 내가 생각해도 2박 3일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5. 기찻길 사고 후 재중이가 더 밀어 부쳤다
그 놈 참 나뿐 놈이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그기 밀어 부칠 상황이가? 재중이 니도 늦긴 했지만 반성하라!
6. 4학년 때냐 언제냐?
1, 2학년 때는 분명이 아이다. 내가 ROTC 여름 훈련을 마치고 간 게 분명하고 저 사진에 내 머리 봐라. 너그들은 장발이지만 내 모리는 깍두기 아이가!
7. 경고 등나무 아래엔 갔었나?
절대로 안 갔다. 가자고 했는지는 몰라도 아님 재중이 혼자 갔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이 간 적이 없다. 증그를 대라 증그를……
8. 과연 숙모집인가?
야! 삼십 년 전에 하룻밤 잔 데가 숙모집이모 어떻고 외삼춘 집이모 우떻노. ㅆㅂ
하이턴 너그 친척집에 가긴 갔잖아~
9. 과연 명동엔 갔었나?
글세 아직도 내 기억 속엔 대구 명동거리 네온 불빛이 훠~ㄴ 한데…… 그기 너그 숙모집 화장실 불빛이었나?
10. 그래 다들 한 마디씩 던져주니 기분이 좋다. 우쨋던 간에 내년 여름에 가긴 가자.
이번에 뱅후이 니가 잘 기록해 봐라. 그 당시에도 니가 조그만 수첩에 깨알 같이 적긴 적었던 기억이 난다. 니 혹시 거거 숨카놓고 보면서 기억을 더듬은 척 한 거 아이제?
(안 가보고 큰소리 치는 밉상 강요이의 회신 II)
에라이 모처라...
그 파일 저장할 때 1997-2003 버전으로 저장하몬 될 낀데...
ㅉㅉㅉ 무조건 저장만 누지리니 2007버전으로 저장 돼가~~
머리 나뿐 재주이가 몬보자나......
그래 재주이를 위해서 2003버전으로 저장한 넘을 첨부한다.
잘 봐라...
1) 3박4일은 맞았는데 밀양이 아이고 영동이었네...
2) 모처리 니 상처는 다른 데서 다친 거 맞다. 그때 다친 아~는 창그이고......
재밋네......
다 읽어본 재주이가 뭔 소릴 할지 사뭇 궁금타......
(도다리 댓글)
역시 옛말 하나도 틀린 기 엄따. 서울도 가보지 않은 놈이 이기잖아.
(재중이 회신 II)
그래도 광용이가 제일 이해력이 좋네.
내가 모철이 한테 그 정도 회신을 했으면, 바로 알아 들었어야지.
하기야 아래 사람 시켜서 해야될 일이니 쉽지는 않았을끼다. 내 처럼.....
소설과 각자의 기억 더듬이 결과를 읽고 몇 마디 덧붙인다.
- 나는 절대 선두에 서지 않았었다. 그러니 내가 끌고 갔다는 말은 정정해주기 바란다.
- 사실은 맨 뒤에서 밀어부친 것이다.
- 솔직히는 맨 뒤에서 누가 처지면 어쩌나, 다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달렸다. ㄲㄲㄲ
- 대구의 명동진출사건에 대한 기억은 나도 없다. 모철아! 창근이 꼬시봐라.
- 경고 "등나무"에 집합하지 않았다. -> 병훈이 말대로 목표는 그랬었다.
- 한 가지 새롭게 떠오른 기억은 병훈이가 얘기한 "팔공산 주변" 고바우다. 그 때도 힘들게 올랐었고 자전거를 질질 끈 구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마지막으로 "구포다리"를 만났을 때의 감격(?)이 떠오른다. 해냈다는 기쁨과 함께 친구들이 자랑스럽게 여겨졌었다.
** 다시 한 번 모철이의 상상력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부 사실이 분명한 부분에 대해서는 수정보완이 있으면
좋겠다.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직접 당시의 여행기(결코 기록경주가 아니었음)를 재작성 해 주기 바란다.
** 내년(2010)이면 무모했던(?) 경부 자전거 여행 30주년이 된다.
모철이 제안대로 다시 한 번 시도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아이디어를 내봐라.
** 모철아, 덕분에 오늘 하루가 흥분되었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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