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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박동량(朴東亮)
1569년(선조 2) - 1635년(인조 13)
조선 중기에, 경기도관찰사, 호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룡(子龍), 호는 기재(寄齋)·오창(梧窓)·봉주(鳳洲). 박조년(朴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박소(朴紹)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박응복(朴應福)이며, 어머니는 선산임씨(善山林氏)로 임구령(林九齡)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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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전당집 제14권 / 행장(行狀)
금계군 박공 동량 행장(錦溪君朴公東亮行狀)
아! 오창공(梧窓公)이 생각지도 못한 화를 만나 조정에서 내쳐지고 유배를 당한 지 이십여 년인데, 억울한 정황이 명백히 밝혀지기도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 미(瀰) 등이 피 눈물을 흘리며 어쩔 줄을 몰랐으나 미칠 수가 없었는데, 얼마 후에 공의 이력과 계보를 가지고 와서 익성(翊聖)에게 행장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행장이 완성되기도 전에 미 등이 능(陵)에 행차하는 임금을 기다려 수척한 모습으로 땅에 엎드려 글을 올려서 공의 원통함을 하소연하였다.
임금이 담당 관서에 글을 내려 전후의 옥사(獄詞)를 참고하고 대조하라고 하였는데, 담당 관서에서 관례(慣例)에 견주어 자세히 살펴서 논하여 죽은 신하 아무개의 원통한 정상은 미 등이 말한 바와 같다고 여겨 마땅히 억울함을 씻어줘야 한다고 청하였다.
임금께서 특별히 대신들에게 물어보았는데, 영의정 윤방(尹昉) 공과 좌의정 오윤겸(吳允謙) 공이 그의 무고함에 대해 명백히 분변하였다. 임금이 다시 영돈녕부사 김상용(金尙容) 공과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 공에게 논의하게 하였는데, 그들도 두 재상의 의견과 같았다. 얼마 후에 임금이 직접 비답을 내려 그 득실에 대해서 논하였는데, 뜻을 곡진하게 하여 대신들의 논의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공적인 논의가 시행되었고 임금의 은택이 지극하니 공은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동량(東亮)이고, 자는 자룡(子龍)이며, 호는 오창(梧窓)이다. 박씨는 그 계통이 신라의 시조로부터 나왔다. 신라가 멸망한 후로는 여러 박씨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그중 반남(潘南)을 관향으로 하는 박씨(朴氏)가 가장 성대하다.
반남은 뒤에 나주(羅州)에 예속되었는데, 족보에 오를 만한 인물로는 밀직부사를 지낸 수(秀)가 있다. 박수는 판전교시사 상충(尙衷)을 낳았다. 상충은 고려 공민왕을 섬겨 사도(師道)와 곧은 절조가 있었다. 고려가 원나라의 잔존 세력에게 붙고 명나라를 배반한 일에 대해 비난하다가 곤장을 맞고 유배 도중에 죽었다.
상충은 은(訔)을 낳았는데, 은은 우리 헌릉(獻陵 태종(太宗))을 보좌하여 두드러진 공훈을 세워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고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몇 대를 지나 상주 목사 증 이조 판서 임종(林宗)에 이르렀는데, 임종은 이조 정랑 증 의정부 좌찬성 조년(兆年)을 낳았다.
조년은 사간원 사간 증 의정부 영의정 소(紹)를 낳았다. 소는 문학으로 기묘제현(己卯諸賢)에게 크게 인정을 받아 천과(薦科 현량과)에 이름이 올랐으며, 대과에 응시하여 장원을 차지하였다. 사간원에 들어가서는 정도(正道)를 잡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권신들에게 미움을 받아 조정에서 축출되어 생을 마쳤다.
다섯 명의 아들이 모두 어질고 현달하였는데, 삼대(三代)가 추증된 것은 실로 국구(國舅)인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응순(應順)에 의해 추은(推恩)된 것이다. 그 형제 중 넷째가 사헌부 대사헌 응복(應福)인데, 자질과 행실이 충후하고 질박하여 세상에서 큰 덕을 지닌 인물이라 일컬었다.
승지 임구령(林九齡)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는데, 공도 차례로 보면 형제 중 넷째이다. 공은 어려서 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특출했으며, 식견과 도량이 어른과 비슷했다. 세 살 때 천연두에 걸려 거의 죽을 뻔 했는데, 강한 약을 먹였는데도 잘 견뎌내었다. 조금 자라서는 글을 배웠는데, 억지로 독려하지 않아도 스스로 글을 읽었다.
아홉 살 때, 밤에 자다가 갑자기 폭우가 내리고 천둥이 치자, 일어나 의복을 정제하고 앉아서는 ‘옛 사람이 천둥이 칠 때는 반드시 안색을 바꾸었다.’는 구절을 외우며 스스로 경계하니,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여러 숙부들을 따라 여묘(廬墓)살이를 할 때에는 뜻을 먼저 알고서 받들었으며, 일을 맡아서는 민첩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백부 목사공 응천(應川)은 평소 가법(家法)이 엄한데다가 감식안이 있었다. 질문 거리를 만들어 공의 뜻을 알아보았는데, 공이 번번이 이치에 들어맞는 대답을 하자 대성(大成)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겨우 성동(成童)이 되었을 때 벌써 문재(文才)가 성대하게 드러났고, 열일곱의 나이에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이때부터 시험을 치르면 번번이 높은 등수를 차지했다.
기축년(1589, 선조 22),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경인년(1590), 문과에 급제하였다.
신묘년(1591), 승문원에 분관되어 권지정자에 보임되었다. 얼마 있다가 예문관 검열에 천거되었으며, 차례로 대교, 봉교로 승진하였다.
이해 가을, 일본에서 서계(書契)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이 아주 도리에 어긋났다. 선조께서 조정에 나아가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이 일을 명나라에 보고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공은 사관으로 붓을 잡고 입시하였다. 대사헌 윤두수(尹斗壽)는 보고해야 한다고 강력히 청하였고, 좌상 유성룡(柳成龍)은 보고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고수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서로 부화뇌동하여 논란이 많았다.
주장이 분분하여 해가 저물고 나서야 끝이 났는데, 논의를 기록하는 자가 한 마디도 기록하지 못했다. 임금이 주서(注書)가 기록한 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자 승지가 공이 초기(草記)한 것을 애써 찾아 올렸는데, 기록이 아주 상세하였다. 임금이 공의 글씨임을 알아보고 말하기를,
“이는 한림이 쓴 것이니, 경연 위차의 필적이구나.”하였다.
당시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음모를 꾸미는 일이 날마다 심해져 선한 무리들이 쫓겨나거나 유배당하였기에 공과 최기(崔沂)가 겨우 좌사(左史)와 우사(右史)를 맡고 있었다. 논의를 거쳐 이정귀(李廷龜) 공을 천거하였는데 사헌부에서 갑자기 이공(李公)을 탄핵하여 추천을 무효화시키고 아울러 그를 추천한 사람까지 탄핵하였다.
최기는 함사(緘辭)를 올려 온갖 핑계를 대었는데, 공은 이공의 재주가 천거하기에 충분하다고 강력히 주장하다가 결국에는 이로 인해 파면되었다. 겨울에 서용되어 봉교로 복직되었다. 임진년(1592) 정월, 호조 좌랑으로 승진하고 얼마 있다가 병조로 자리를 옮겼다. 4월, 왜적들이 대거 침략해오자 장사(將士)들이 출정하였다.
전투에 필요한 병장기와 갑옷의 수송을 모두 공에게 처리하게 하니 공은 그에 부응하여 모자람이 없었다. 어가(御駕)가 갑작스레 서쪽으로 몽진(蒙塵)을 가게 되었는데,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고 밤이 깊어 사고(四鼓 새벽2시~4시)를 지난 시각이었다. 공은 어가를 호종하여 저물녘 무렵 파주(坡州)에 이르렀는데, 백 리 길을 오느라 모두가 굶주려 있었다.
임금의 행차가 잠시 머물자 공이 동료 낭관 한 사람과 전대를 열어 허기를 면하고 곧 뒤쫓아 갔는데, 어가는 이미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배를 북쪽 해안에 정박한 뒤였다. 나루터에 있는 배를 모두 침몰시키라는 명이 내려져 동쪽 해안에는 단지 배 한 척만 있었는데, 뱃사공이 막 배를 돌리고 있었고 해안과의 거리는 한 자 남짓이었다.
공이 배 안에 사헌부 관원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것을 바라보고는 배로 훌쩍 뛰어 올라 한손으로는 뱃사공을 넘어뜨리고 한손으로는 같은 동료 낭관을 잡아당겨 배안에 태워서 재촉하여 건너갔는데, 이미 한밤중이었다. 임금이 홀로 한 척의 배에 탔는데, 호위하는 군사들은 흩어지고 도망쳐서 위엄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공에게 도승지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어가를 멜 사람들을 불러 모으라고 명을 내리자 공이 손에 횃불을 들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는데, 육십 명을 모아 보고하자 어가가 비로소 출발하였다. 공은 말을 잃어 동료 낭관과 함께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달려 비로소 동파관(東坡館)에 도착하였다.
송도(松都)에 이르렀을 때 공이 판서 김응남(金應南)과 행궁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지키고 있던 병졸이 밤에 놀라서 크게 소리치자 김공(金公)도 갑자기 놀라 헛소리를 하며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였다. 공이 힘껏 붙잡았더니 한참만에야 안정을 되찾고서는 공의 담력과 용기에 탄복하였다.
비변사 낭청을 겸하였다가 5월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는데, 대신이 비변사의 일이 중하다는 이유로 공을 정언에서 체직시켜달라고 계청(啓請)하였다. 곧이어 병조의 일을 보게 되었다. 어가가 평양에 머무른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임진강(臨津江)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무너지면서 적병이 날마다 압박해 왔다.
선조(宣祖)께서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떠나야 할지 머물러야 할지 논의하였는데, 모두 함흥(咸興)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공은 우리가 옮겨가면 적병들도 따라서 올 것이라고 하며 윤두수(尹斗壽) 공, 이유징(李幼澄) 공과 함께 패강(浿江 대동강)을 지켜야 한다고 청하여 힘껏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평양 백성들이 갑자기 어가가 떠나려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로 모여 길을 막고 떠들어대며 소리쳐 말하기를, “우리를 버리고 가는 것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다. 차라리 어가 앞에서 죽을지언정 적병의 칼날에 죽을 수 없다.”하였다. 공이 들어가 승지를 보고 말하기를, “민심이 이와 같으니 우선 행차를 정지하고, 위로하여 타이른 뒤에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하니, 드디어 임금에게 여쭈어 나서 정행(停行 행차를 멈춤)이라는 글자를 써서 내걸어 보이자 소란을 일으키던 백성들이 차츰 물러갔다.
어가를 옮겨 영변(寧邊)에 머무르면서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명나라에 의탁하기로 계획하고 광해군(光海君)에게 명하여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분조(分朝)를 만들라고 하였다. 대소신료들 중에는 앞서 이미 달아난 자들이 많아, 분조를 만든 뒤로는 어가를 호종하는 인원이 겨우 십여 명에 불과했으며, 낭관 벼슬은 다만 공 한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공이 이미 육조(六曹)의 통부(通符)를 통괄하고 또 비변사 낭관, 춘추관, 한학 교수, 내승 등의 임무를 아울러 수행하였다.
박천(博川)에 이르자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나무들이 빽빽하였는데, 앞에서 호위하는 사람들이 몹시 적었다. 공은 본조(本曹 병조)의 판서 이항복(李恒福) 공의 말을 따라 어가를 앞질러 선두부대를 이끌고 앞에서 행렬을 인도하였는데, 선조께서 물어서 누구인지 알고서는 더욱 소중히 여겼다.
대사헌공(大司憲公 박응복(朴應福))이 늙고 병들어서 분조에 소속되었는데, 정주(定州)에 이르러 피로로 인해 병세가 악화되어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공이 상소를 올려 머물러 부친의 병구완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손수 비답을 내려 허락하고, 약을 보내주었다.
대사헌공이 그 사실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은 늙고 병들어 임금을 호종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지만, 차마 신의 아들로 하여금 아비를 우선으로 여기고 임금을 뒷전으로 여기게 할 수는 없습니다.”하였다. 공은 결국 어가를 호종하여 출발하였는데, 부친과 이별할 때에 그 슬퍼함이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7월에 이조좌랑 지제교에 임명되었고, 10월에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사무가 더욱 많아졌는데도 위로 상관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전수하며 손으로 쓰고 입으로 응대하는 것이 귀신처럼 신속하자 재상들 중에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소중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가가 오랫동안 의주(義州)에 머물렀는데, 명나라 원병이 출정하자 왜적의 기세가 조금 꺾였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 중에 흩어져 도망쳤던 자들도 점차 돌아와 모여들었다. 올바른 사람을 싫어하는 무리들이 틈을 엿보아 줄을 대어 나아가려고 상소를 올리거나 계사(啓辭)를 올려 몰래 임금의 의중을 살펴 일을 맡은 자들을 음해하였다.
논의가 격해지고 거세어져 그 여파가 문익공(文翼公) 이덕형(李德馨)과 재상 김응남(金應南) 등 몇 명의 공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공은 이조에 있으면서 공정한 자세로 일관하며 그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힘을 써서 문익공 이덕형을 의망하여 도헌(都憲 대사헌)에 임명되게 하였는데,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더욱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공이 결국 휴가를 청하고 조정에 나오지 않자,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약포(藥圃 정탁(鄭琢))와 같은 나이 지긋한 여러 선배 대신들이 글을 보내어 출사하기를 권면하였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의 글이 가장 곡진하면서도 도타웠으며, 몸소 방문하여 세도(世道)를 책임지라고 권면하기까지 하였다.
의주(義州)는 기생이 유명한 도회지인데, 호종하는 신하들은 1년이 넘도록 객지 생활을 한 터라 기력이 없는 노인이 아니라면 기생들과 서로 어울려 노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공은 그런 행태를 달갑지 않게 여겨 공적인 일이 아니면 남의 집을 찾아다닌 적이 없었으며, 어두운 밤에는 매번 문을 닫아걸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계사년(1593) 5월, 성균관 직강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7월에 이조로 돌아왔다. 공은 평소에 중국어를 잘해서 임금을 모시고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였는데 하루에 십여 차례나 만난 적도 있었다. 매번 응대할 일이 있으면 모두 공에게 자문했는데, 친밀한 은정이 마치 한집안의 부자지간 같았다.
공은 외교와 관계된 사령(辭令)에 익숙하고 일을 주선하는데도 민첩하여 명나라 장수중에 그를 눈여겨보지 않는 자가 없었다. 10월에 어가를 돌려 해주(海州)에 머무를 때 승지 자리가 비었는데, 자급을 여덟 단계나 뛰어넘어 공을 승지로 임명하였다. 공이 그 명을 듣고는 두려움에 떨며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차례로 승진하여 좌승지가 되었는데, 그 때 나이가 25세였다.
갑오년(1594), 체직되어 호군 겸 승문원부제조에 임명되었으며, 형조 참의와 병조 참지로 자리를 옮겼다. 가을에 도승지에 임명되었는데, 지신(知申 도승지)은 지위와 명망이 높아 젊은 사람이 맡기에 마땅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숙배하지 않았다. 다시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에 병조 참지에 임명되었다.
을미년(1595), 접반사로 의주(義州)에 갔다가 겨울에 병으로 인해 돌아와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병신년(1596), 호조로 자리를 옮겼으며 재상이 아뢰어 비변사 부제조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공을 위해 특별히 만든 자리였다. 그런데 공이 극구 사양하여 해직되었다.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어 동지사에 충원되어 경사(京師)에 조회하러 갔다.
정유년(1597), 복명한 뒤에 다시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왜적에 대한 경보(警報)가 다시 급해짐에 따라 중전이 대궐을 나가 수안(遂安)에 머물렀는데, 공은 병조의 관리로 호종하였으며 종실로 총관과 선전관을 섭행시켜 시위 부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밤에 마전(麻田) 앞 나루터를 건널 때, 밤은 깊고 배는 작아 궁인들이 허둥지둥 댔는데, 공이 채찍을 잡고 지휘한 덕에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겨울에 도승지로 부름을 받아 돌아왔다. 조정이 남하하여 제천(堤川)으로 가서 명나라 군대와 호응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명나라 장수가 실제로는 임금을 끌어들여 전투를 하려고 한다는 말이 있었다. 임금을 호종하는 대열에 뽑힌 신하들은 모두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으나, 공은 상소를 올려 호종하기를 청하였다.
무술년(1598), 가선대부로 자급이 올랐으며, 전황(戰況)에 대한 보고가 차츰 느슨해지자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외직을 청하여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부임했는데, 고을을 다스린 지 몇 달 만에 고을 사람들이 신명(神明)하다고 칭송하였다. 7월, 대사헌공이 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하자 두 형과 부친이 내린 유명(遺命)을 따라 양주(楊州)의 선영이 있는 곳에 가서 장사 지냈다. 왜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궤연(几筵)과 임씨 부인(任氏夫人)을 모시고 안주(安州)의 시골집에 우거하였다.
경자년(1600), 연안(延安)으로 옮겨 머물렀다. 6월,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하자 공이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장례에 나아갔다. 9월, 공이 호군 겸 총관에 임명되어 조정에 들어갔다. 대신이 요사스런 말을 진정시키지 못하여 산릉(山陵)을 조성하는 일이 기일이 지나도 진전되지 않자, 공이 상소를 올려 그 일에 대해 논하였다.
얼마 후에 대사헌에 임명되어 관리들의 부정을 바로잡자 대각(臺閣)이 숙연해졌다. 신축년(1601), 이조 참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사람을 선발할 때는 한결같이 신중하게 선택하여 반드시 나이가 많고 학덕이 있는 인물을 먼저 선발하였다. 얼마 뒤 동지춘추관사로 임명되어 국조실록을 묘향산에 봉안하였고, 동지경연사를 겸직하였다가 다시 예조에 임명되었다.
6월,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나갔다가 병으로 체직되었는데, 선조(宣祖)께서 어의를 보내어 약을 내리고 수라간의 음식을 하사하였다. 겨울에 완쾌되자 드디어 상소와 전문(牋文)을 갖추어 사례를 올리며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였다.
선조께서 전문을 읽다가 ‘죽음이 가까워 미천한 목숨을 보존할 수 없는 지경이니, 살 수 있는 방도는 오로지 임금의 크나큰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오래도록 읊다가 이르기를, “문장의 대우(對偶)와 말뜻이 모두 아주 절실하고 마땅한 것을 보니 이 사람이 비록 오래도록 병을 앓았어도 정신은 온전하구나.”하고, 손수 비답을 내려 요양을 하도록 권면하고 외직으로 보임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임인년(1602) 봄, 명나라 사신들이 국경에 이르렀는데, 요구하는 뇌물의 양이 한정이 없어 백성들이 명을 감당하지 못했다. 공을 경기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는데, 일의 처리가 적절하여 중국 사신들의 환심을 얻어 백성의 부담이 덜어지자 온 도내에서 공을 칭송하였다.
막하의 관리 중에 부정을 저지르려다가 공에게 저지당한 자가 있었는데, 도리어 말을 조작하여 공을 모함하니 공이 마침내 사직하여 체직되어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강원도 관찰사로 나아가서 순행하는 여가에 명승지를 두루 방문하였는데, 한 두 명의 지인들을 데리고 술 마시고 노래하며 기분 좋게 유람하였다. 영월군(寧越郡)을 지나는 길에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묘에 술을 올렸다.
조정으로 돌아온 뒤에 경연에 참석해서는 노산군의 묘에 제사가 끊긴 지 오래되고 나무꾼들의 출입을 금지하지 않고 있는 상황을 아뢰고, 중종 임금 때에는 승지 신상(申鏛)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한 일이 있는데 마땅히 폐해진 전례를 시행해야 한다고 아뢰자 선조께서 서둘러 승지를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였다. 가을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체직되어 호조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에 병조로 자리를 옮겼다.
갑진년(1604), 호성(扈聖), 선무(宣武), 정난(靖難) 세 부문의 공신을 책록하는 일이 있었는데, 공이 건의하기를, “우리처럼 고삐를 잡고 수행한 자들도 공로가 있다고 말하는데 생사를 넘나들며 괴롭고 힘들게 전투에 참가했던 자들은 그 노고와 공로가 어찌 만 배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마땅히 무장의 공을 추가로 녹훈(錄勳)하여 전장에서 싸운 이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어야 할 것입니다.”하니, 식자들이 그 의견을 옳다고 생각했다.
정훈(正勳)을 책록하고 나서 원종공신(原從功臣)을 책록할 적에 공은 호종 공신(扈從功臣)과 선무 공신(宣武功臣) 두 분야를 아울러 관장하였다. 선무 공신은 바다와 육지에서 전투에 참가한 경우, 원군을 요청하고 군수품을 조달한 경우, 명나라 장수를 응접한 경우, 명나라에 아뢰어 원군을 파견하는 은혜를 요청한 경우가 이에 해당했다.
그 명목이 너무도 많고 진위가 뒤섞여 하소연 하는 소리가 넘쳐났으며, 문서도 뒤얽혀 어지러웠다. 그런데 공이 자세히 판단하고 분별하여 명백하게 취사선택을 하자 공의 공정하고 분명한 처리에 모두 탄복하였다. 당시에 총애를 받던 재상이 먼저 존호(尊號)를 올리는 논의를 꺼내어 의정부에서 모든 신료들을 이끌고 대궐 문에 엎드려서 임금께 주청하였는데, 선조께서 겸손함을 고집하며 오랜 시일이 지나도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 윤승훈(尹承勳)이 이로 인해 논의를 끝내고자 하였으나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는데, 하루는 공이 공적인 일로 윤공(尹公)의 집에 들렀다. 윤공이 이 일을 공에게 자문을 구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 일은 큰 의리와 관계된 일인데 상공께서는 무엇이 어렵다고 이렇게까지 미루고 있단 말입니까.”하였다.
다음날 윤공이 조정으로 나아가 여러 재상들을 모아 물어보자 사람마다 대답이 달랐다. 그때 마침 공이 뒤이어 들어오기에 재촉해 불러서 물어보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다만 의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고 일을 처리하면 되지 물어볼 것이 뭐 있습니까.”하였다.
공이 말한 의리란 다만 어제의 의논을 펴서 결단하기를 권면한 것이다. 총애를 받던 재상이 대관을 부추겨 영의정을 탄핵하면서 도리어 공이 말한 의리를 증거로 삼자 공은 그 일을 부끄러워하며 결국 사직하였다. 7월에 비로소 공신의 봉상(封賞)을 행하였는데, 공에게는 충근정량 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의 칭호가 내려졌고 자헌대부로 품계가 오르고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으며, 지춘추관사를 겸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여름에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재물 장부를 파악하여 주밀하게 조목을 짜서 수입에 맞게 경비를 지출하는 규례를 마련하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평안도 관찰사 겸 도순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임부인(林夫人)이 둘째 아들을 따라 그의 부임지인 황주(黃州)로 갔었는데, 셋째 아들이 신천(信川)으로 부임해오자 그 사이를 오가는 부인의 행차가 성대하였다.
공이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에 황강(黃岡 황주)을 지나는 길에 가마에다 모시고 왔다. 기경(箕京 평양)과의 거리가 삼사(三舍 90리)가 못 될 정도로 가까웠으므로 번갈아 찾아뵙고 축수(祝壽)하였는데, 자손들이 앞에 가득 했다. 강호(江湖)와 누관(樓觀)을 두루 유람하였는데, 어헌(魚軒 귀부인이 타는 수레)이 매번 행차할 때면 사람들이 발뒤꿈치를 들고 구경하였으며, 세상에서는 성대한 일이라 일컬었다.
공은 문서를 결재하고 일에 대처할 적에 터진 강물처럼 막힘이 없어 몸과 마음을 수고롭게 하지 않아도 지체된 일이 없었으며, 비록 복잡하게 뒤얽힌 일일지라도 눈썹을 찌푸린 적이 없었다. 선비와 무인을 시험하여 흥기하고 성취하게 하였으며, 빈객들에게는 숙소와 음식을 제공하고,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을 구제하는 데 속마음과 행동이 모두 지극하여 각자의 뜻에 만족하도록 해주었다.
사적인 부탁은 배척하고 사절하여 뇌물을 쓸 수 있는 통로를 막아버렸다. 변방을 순시할 적에는 괴로운 일이 없는지 두루 물어보았으며, 변방 초소에 행차를 멈추고는 폐단을 바로잡고 시급한 일을 구휼해주었다. 한 겨울 적의 침입을 경계하고 대비할 때에는 요해처에 얼음을 쌓아 중국에서 빙성(氷城)을 만드는 방식과 똑같이 하였다.
당질(堂姪)인 박엽(朴燁)이 부(府)의 서윤으로 있으면서 관할 지역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자자하였으나 품성이 잔인하여 사람을 예사로 죽였다. 공이 글을 보내어 그를 불러들여 뜰아래에 세워놓고서 수리(首吏 아전의 우두머리)를 먼저 매질했는데도 반성하는 빛이 없자 마침내 조정에 아뢰어 파직시켰다.
절도사 성윤문(成允文)이 총애를 받는 재상과 결탁하여 사납게 굴고 제멋대로 행동하였으며, 마음대로 여러 고을에 몫을 정하여 구리와 철을 독촉해서 징수하였다. 그 첩의 아우가 사람을 죽이고 그의 영중(營中)으로 도망가서 숨자, 공이 관리를 보내 체포하여 다른 고을로 옮겨 수감시켰다. 또 마음대로 여러 고을에 일정한 몫을 배정한 일을 캐물으니 모두 자백하였다. 그 실상을 열거하여 조정에 아뢰어 성윤문이 마침내 파직되자 변방 백성들이 다시 살 길을 얻었다.
정미년(1607) 가을, 임기를 다 채우고 다시 훈봉(勳封)되었다. 무신년(1608), 선조께서 세상을 떠나자 공이 수릉관(守陵官)이 되어 정밀하고 명백히 일을 처리하였는데, 공경과 슬픔이 모두 지극했다. 오직 태부인(太夫人)이 연로하였기에 그리움이 마음속에 응어리져 침식이 편안하지 못했는데, 12월에 임부인(林夫人)이 둘째 아들의 부임지인 충주(忠州)의 관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은 맨발로 능(陵) 밖으로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면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서 조정의 명을 기다렸다. 조정에서는 체직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광해군이 특별히 허락하였는데, 승정원에서 고집하여 조서를 내려 보내지 않았다. 공은 체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이틀도 안 되어 충주(忠州)에 도착했는데, 얼마 후에 서둘러 돌아오라는 분부를 받았다.
공은 재실에 거처하면서 외랑으로 나가지 않은 채 어머니 상과 임금의 상을 만나서 모두 극진함을 다하였다. 태부인의 장례를 치를 때 공은 상소를 올려 하관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기유년(1609, 광해군 1), 선조(宣祖)의 소상(小祥) 때 정헌대부에 올랐고, 가을에 선조의 왕릉을 지킨 공로로 숭정대부에 올랐다.
경술년(1610), 선조의 대상(大祥) 때 숭록대부에 올랐으며 급히 태부인의 상차(喪次)에 돌아가 두 형들과 상복을 입었다.
신해년(1611), 상복을 벗고 나서 다시 훈봉되었으며, 얼마 뒤에 판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상소를 올려 퇴계(退溪 이황), 회재(晦齋 이언적) 두 선정(先正)을 비난하자, 대신과 사유(師儒)들이 연이어 글을 올려 다투어 변호하였는데, 공의 상소가 가장 간절하고도 솔직하여 광해군과 권신들이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임자년(1612) 3월, 봉산 군수(鳳山郡守) 신율(申慄)이 김제세(金濟世)라는 자를 잡아다가 화복(禍福)으로 협박하여 박사를 지낸 김직재(金直哉) 부자와 역모를 꾀했다고 자복시키고는 급히 보고를 올렸다. 김제세는 본래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와 서울 사이를 전전하며 구걸하고 도적질하던 자로, 아무 근거도 없이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내었다.
그래서 평양 사람으로 부사를 지낸 김태좌(金台佐), 정자를 지낸 전벽(田闢), 영남 사람으로 관찰사를 지낸 정경세(鄭經世), 경성(京城)의 사대부인 정호서(丁好恕), 정호선(丁好善), 정호제(丁好悌), 최유해(崔有海) 등이 모두 잡혀 왔다. 김제세가 말하기를, “정호서와 역모를 모의한 것은 모년 모월입니다.”하였다.
그러자 공이 곧바로 말하기를, “정호서(丁好恕)는 그때 연경에 조회하러 갔었다.”하였고, 승지 홍서봉(洪瑞鳳) 역시 말하기를, “신은 그 당시 사신이었고, 정호서는 서장관이었으니, 조정을 떠난 날과 복명한 날을 고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김제세가 말문이 막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정호제이지 정호서가 아닙니다.”하였다.
공이 또 대신의 질문으로 인해 말하기를, “김태좌는 몹시 연로하며 병이 들었고, 전벽은 일찍 대과에 급제하여 이름이 서방(西方)에 알려졌습니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최유해는 나이가 어린 유생(儒生)이라 이문(吏文)에 익숙하지 못하니 다만 구어로 대질신문해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공이 비록 감히 여러 사람들의 원통함을 단번에 밝혀 줄 수는 없었으나 몹시 가슴아파하는 마음은 감쳐둘 수 없었다. 이이첨(李爾瞻)이 대사헌으로서 공과 함께 나란히 엎드려 있다가 눈을 흘기며 바라본 것이 여러 차례였다. 다음날 광해군이 하교하기를, “신하가 역적을 비호하면 마땅히 역모 죄와 동일하게 다스려야 하는데, 판의금부사 아무개는 감히 탑전(榻前)에서 역적을 구해 주려고 했으니, 판의금부사에서 체차시키도록 하라.”하였다.
이이첨은 그의 무리인 조존도(趙存道)에게 공을 붙잡아다 국문할 것을 논청(論請)하도록 하였는데, 광해군은 다만 공의 봉작을 삭탈하도록 명하였다. 겨울에 서용되어 다시 훈봉 되었다. 계축년(1613) 4월,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일어났다.
박응서는 고 재상 박순(朴淳)의 서자로, 서양갑(徐羊甲)의 무리와 결탁하여 죽음으로 결의한 조직을 만들고 상유(上游 한강 상류) 지역에 출몰하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뺏다가, 일이 발각되어 옥에 갇혀 죽을 처지가 되자 살길을 찾았다.
그러자 이이첨의 무리인 이창후(李昌後)가 박응서와 결탁하여 그를 부추겨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받들어 역모를 도모하려 했다고 고변하게 하였다. 그 계략이 교묘하고도 치밀하여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보다 앞서 선조께서 세상을 떠날 적에 손수 교지 두 통을 내려 하나는 광해군에게 주어 자신이 생존해 있을 때처럼 동기간을 잘 보살피라고 하였고, 하나는 일곱 명의 재신(宰臣)에게 내려 주었는데, 다만 유(柳),한(韓), 박(朴), 허(許), 서(徐), 신(申), 한(韓) 등 성(姓)만을 쓰고는 대군이 나이가 어리므로 번거로이 그대들에게 보호를 부탁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일곱 신하를 지목한 사실이 알려지자, 사악한 무리들이 선동하여 이르기를, “내시 민희건(閔希騫)이 유영경(柳永慶)과 함께 임금의 유지(遺旨)를 고쳐 작성하여 재앙을 몇 년 동안 숨겨두었다가 놀랄만한 일을 터뜨리려 하였는데, 결국에는 서양갑의 공초(供招)에 드러나게 되었다.”하였다.
대사간 이지완(李志完)과 헌납 유활(柳活)은 일곱 명의 신하가 거짓 교지를 받고도 스스로 밝히지 않고 달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고 그들의 이름을 사판(仕版 관리의 명부)에서 삭제하자고 논의하였다. 무인 정협(鄭浹)이 거짓으로 자복을 하여 많은 공경대부들을 끌어대었는데, 마치 스스로 고변하는 것 같이 하면서 역시 거짓 교서에 대한 설을 언급하였다.
광해군이 비로소 유지를 받은 여러 신하들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여 연흥부원군과는 어려움을 서로 구제하는 사이라는 것으로 문목(問目)을 삼았다. 공이 신문받을 때에 문목을 받들어 대답을 하면서 연흥부원군과는 정의가 끊어진 사이라고 진술하였다.
정미년(1607) 사이에 선조께서 병석에 누워 오래도록 일어나지 못하자, 무복(巫卜)이 병의 빌미가 유릉(裕陵 의인왕후)에게 있다고 하여 여러 명이 능 아래에 가서 푸닥거리를 하였는데, 이 일을 주장한 궁노(宮奴)와 여무(女巫)는 실제 유릉 생전에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박씨 집안에서 반드시 그들의 죄를 바로잡으려고 했으나 두 사람이 궁궐에 의탁한 몸이라 자칫 그릇을 깰까 염려되어 사람을 시켜 연흥부원군에게 그 뜻을 넌지시 권유하였는데, 연흥부원군이 답을 하지 않자 이때부터 박씨 집안에서 유감스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경술년(1610)에 공의 표질(表姪 외당질) 이현영(李顯英)이 지평이 되어 곧바로 여무(女巫)를 잡아들여 옥에 가두었는데, 이공(李公)이 다른 일로 인해 체직되어 결국 끝까지 다스리지는 못했었다. 공은 신문받을 때에 이르러서도 사실에 근거해서 진술하였으며, 본래 인목대비를 비방하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 승지 신응구(申應矩) 및 선군(先君 신흠(申欽) 역시 그 일을 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공의 본심을 따져보면 하늘에 질정할 수 있건만, 불행하게도 궁중에서 저주를 하였다는 옥사가 연달아 일어났고 흉악한 무리들이 유릉(裕陵)의 일을 뒤섞어서 하나로 만들어 반교문(頒敎文) 속에 집어넣어 구실로 삼았다. 곁에서 보기만 하던 자들은 더 이상 그 일의 본말을 살피지 않았으며, 평소 관계가 좋지 않던 자들은 이 일로 인해 뒤따라 모함을 하여 사실과 다르게 와전되어 결국에는 화를 부르는 빌미가 되었다. 공은 출옥한 뒤에 집안을 정리하여 통진(通津)의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병진년(1616) 가을, 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논의가 다시 거세어졌는데, 유지를 받았던 여러 신하들을 집중 공격하였다. 서신(徐兟)과 송문규(宋文奎)는 이이첨의 지시를 받아 이들의 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정조(鄭造), 윤인(尹訒), 유숙분(柳潚分)은 삼사에 있으면서 합사(合辭)를 올려 귀양을 보내야 한다고 청하였다. 다섯 달이 지나도 의론이 그치지 않자, 광해군이 중도부처(中道付處)하라고 명을 내렸는데, 공은 아산현(牙山縣)으로 옮겼다.
신유년(1621), 사면되어 돌아왔다. 계해년(1623, 인조 1), 금상(今上 인조(仁祖))이 반정을 일으켜서 공의 훈봉(勳封)이 회복되었다. 당시의 의론이 계축년(1613)의 공초에서 있었던 공의 허물을 들추어내어 유언비어가 퍼지고 심지어 공을 위리안치 시켜야 한다고 청하여 강진현(康津縣)에 유배되었다.
공은 견책을 받들고 태연히 운명으로 받아들여 집안에서 옷과 이불을 많이 가져와 죽음을 대비하는데도 얼굴에 어떠한 기미도 나타내지 않고 평소처럼 담소를 나누고 그저 두어 잔의 술을 마시면서, “죄명이 너무나도 치욕스러워 감히 술로 마음을 풀 수가 없구나.”라고 말할 뿐이었다.
을축년(1625), 유배지의 가시 울타리를 거두었다.
정묘년(1627), 부안(扶安)으로 양이(量移)되었다.
임신년(1632), 내지인 충원(忠原)으로 옮겨졌다.
계유년(1633), 감형을 받아 방귀전리(放歸田里)되었다.
십 년의 유배 기간 동안 네 번이나 은택을 받았다. 공은 은혜를 받고 돌아와 서호(西湖)에 전답을 매입하여 그 곳에서 생활하다가 생을 마쳤다. 신관과 정력이 소년 시절과 같았으며 음식을 잘 섭취하였는데, 을해년(1635) 2월, 밤에 잠을 자다가 갑자기 담(痰)이 결려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공은 융경(隆慶) 기사년(1569)에 태어났으니, 향년 67세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모읍의 모원에 예장하였다.
공은 천성이 효성스러우며 우애가 있었고, 일찍부터 영민하고 사리에 통달하였으며, 가정에서 가르침을 몸에 익혔고 널리 물어 아는 것이 많았다. 불의한 일을 만나면 비분강개하였으며, 담력과 지략이 남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낭관 벼슬에서 발탁되어 갑자기 경반(卿班)의 지위에 올랐고, 젊은 나이에 관직을 맡았지만 노련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정신을 집중하여 세부적인 부분까지 잘 처리하자 조정은 공을 굳게 의지하였고, 임금은 자신의 심장과 척추처럼 여겼다. 경연에 입시해서는 계책을 내어 보좌하여 성대하게 중흥의 명신이 되었으며 더욱 아량을 지니고 충서(忠恕)로 다스렸다. 집안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한결같이 온화하고 부드럽게 하였고, 부모님 슬하에서 재롱을 떨 때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다.
두 형들과 지기가 되어 화목하고 막역하게 지냈으며, 큰 형수와 큰 누이를 어머니처럼 모셨다. 사랑하는 마음을 친척들에게까지 미루어 친소를 구분 짓지 않았으며, 친구를 도와줄 때에는 반드시 어리석고 미천한 사람을 먼저 생각하였다. 교제하는 사이에는 마음을 터놓아 꺼리는 점이 없었고, 끊임없이 담론을 이어가며 서로 간의 경계를 허물었다.
평소에 남다른 행동으로 명성을 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물건을 주고받는 일에 엄정하여 오히려 남들이 알까 두려워하였다. 천성적으로 특별히 즐기는 것이 없어 비록 서적이라 할지라도 돈을 주고 구입하는 경우가 없었다. 거처하는 방은 초라하여 곁에 술을 데우는 그릇이나 차를 끓이는 용기도 없었는데, 사용하는 술잔은 임금이 하사해주신 것으로, 백금을 녹여 만든 것이다. 해학적인 말을 잘하였으나 방종한데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술을 즐겼으나 어지러운 상태까지 이르지 않았다.
젊어서 귀한 지위에 올랐을 때에도 스스로 자만하여 남들을 무시하는 생각이 없었으며, 만년에 곤액을 당했을 때에도 우울해하거나 실의한 기색이 없었다. 전리(田里)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낼 적에는 한가로이 즐겁게 바둑과 장기를 두며 촌로들과 자리를 다투기도 하였다.
그러나 위리안치 되었던 3년 동안은 문 밖을 내다본 적이 없었으며, 가시 울타리를 걷고 난 뒤에도 합문을 닫고 깊이 들어앉아 담담히 세상일을 잊고 살았다. 그러나 나랏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을 기울여 정치의 잘잘못을 들으면 번번이 기쁨과 슬픔을 드러내었다.
호남(湖南)의 풍속은 본래 교활하고 사납다고 일컬어졌는데, 공이 그 곳에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며 따랐다. 공에게 한마디 말을 얻으면 나라에서 반포한 법령처럼 믿었으며, 어떤 일이 생기면 반드시 달려가 공을 뵙고 조언을 구했다. 공이 다른 곳으로 옮겨 떠날 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멀리까지 전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공이 떠난 뒤에도 끊임없이 음식물을 보내고 문안을 하였다.
유배지에서 큰 누이와 부인의 상을 당했고, 연이어 아들 유(濰)를 잃었다. 객지에서 홀로 상을 당하면 인정상 견디기가 힘든 법인데, 공은 순리대로 잘 넘겼다. 여러 차례 모함을 받았으나 놀라지도 않고 성을 내지도 않으며 말하기를, “안으로 내 마음을 살펴 스스로 조금의 잘못이 없다면 하늘에게나 사람들에게나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는가?”하였다.
글에서조차도 자신을 변론하고 알아주기를 구하는 말이 없었고, 다만 부령(扶寧 부안)에서 쓴 한 편의 글에 대략 평소의 생각을 약술했을 뿐이다. 일찍이 《자경편(自警編)》과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을 몸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아서 제법 도리를 터득하였고, 만년에는 여러 차례《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자서(朱子書)》를 취하여 깊이 연구하였다.
시문(詩文)을 지을 때 붓을 잡으면 바로 써 내려 갔는데, 시원스러우면서도 정확하고 합당한 것을 으뜸으로 삼았다. 글씨를 빨리 쓰고 잘 썼으므로 혼란스러운 전쟁 시기에 자문(咨文)과 게문(揭文)의 사본이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다. 계산(計算), 감석(甘石 천문), 녹명가(祿命家 점술가)의 이론에 두루 능통하였다. 젊었을 때에는 말을 잘 몰아 나는 듯이 달려 먼지도 일지 않았고, 자유자재로 달리고 멈추었으며, 활쏘기 역시 연습을 하지 않고도 잘했다고 한다.
저술은 흩어져 없어지고, 《분진록(汾津錄)》 두 권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공은 좌승지 민선(閔善)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민씨는 여흥의 망족(望族)으로, 고려 때에 이름난 재상 영모(令謨)의 후예이며, 대대로 벼슬을 하였다. 증조 휘 구(球)는 봉선전 참봉을 지냈다. 조부 휘 세량(世良)은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는데, 청렴하고 정직함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외조부는 의정부우참찬 증 영의정 시림부원군(始林府院君) 이몽량(李夢亮)이다. 승지는 후사가 없이 다만 부인만 길렀는데, 부인은 단정하고 총명하였다. 어릴 때에 《소학(小學)》과 《내훈(內訓)》 등 여러 책을 배워 대의에 통달하였고, 집안에 있을 때는 유순하고 법도가 있어 외삼촌인 이 문충공(李文忠公 이항복)이 항상 여사(女士)라고 칭찬하였다. 박씨 집안에 시집을 가서는 인척들이 번성하여 친척들이 자주 모였는데, 그 사이에서 주선하며 시선을 함부로 두지 않고 온화한 자세로 처신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공은 늘 관서에서 일을 보았고 곧이어 대궐에서 나와 어가를 호종하여 서쪽으로 갔다. 부인은 스스로 죽기를 맹세하고 수저를 물리기까지 했는데, 부모가 억지로 권하자 몇 숟가락을 뜨고는 그쳤다. 게다가 거듭된 신병으로 몸이 상했는데도, 초야를 걸어 다녔고, 항상 입을 닫고서 사람을 물리치고 누운 채 오직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
왜적의 기세가 점차 거세어져 골짝 안까지 쳐들어 왔는데, 함께 피난 가던 사람이 의논하여 남쪽으로 가서 살 궁리를 찾자고 했으나 부인은 의리로 결단을 내리고는 계책을 결정하여 서쪽으로 올라갔는데, 관우(關右 함경도)에서 공을 만났다. 그런 결정은 장부도 하기 힘든 일이었기에 대의에 밝다고 승지공이 칭찬하였다. 이때부터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한 해도 편안히 지낸 적이 없고,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는 일을 부인이 직접 도맡아 했다.
을미년(1595), 공이 명을 받들고 의주로 갔다가 병이 심해지자, 부인이 필마로 급하게 달려가다가 도중에 공의 병이 조금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말을 멈추고서 가지 않았는데, 모두들 부인이 예에 통달하였다고 탄복하였다. 부모가 연로하여 병이 나자 받들어 모시고 수발을 들며 음식과 약을 올렸는데, 정성을 쏟을 수 있는 모든 일에 지극히 힘을 다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상을 치르고 장사를 지내며 제사를 지낼 때에도 슬퍼함과 일을 처리하는 것을 모두 절도에 맞게 했으며, 집안을 다스리고 자식을 훈육할 때에도 모두 예의가 있었다. 계축옥사가 일어났을 때는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애를 태웠고, 계해년(1623)에는 더욱 심하게 애를 태워 결국 을축년(1625), 5월 17일에 강진(康津) 유배지에서 죽었다. 공보다 1살이 적었는데, 향년 56세였다.
장성한 아들과 딸 일곱 명이 있다. 장남 미(瀰)는 선조대왕(宣祖大王)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다. 차남 의(漪)는 문과에 급제해 정랑을 지냈다. 삼남 유(濰)는 어릴 때부터 어른의 도량을 지니고 문재(文才)가 있었는데, 상을 당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사남은 자(澬)이다. 장녀는 대사성 이명한(李明漢)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참봉 홍처심(洪處深)에게 출가하였으며, 삼녀는 참봉 유성오(柳省吾)에게 출가하였다. 금양위의 소생은 세교(世橋)이고, 정랑의 소생은 세래(世來)와 세채(世采)이며, 딸은 어리다. 대사성의 소생 일상(一相)은 수찬이고, 가상(嘉相)은 진사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홍처심과 유성오는 모두 소생이 있으나 어리다. 공이 측실에게서 얻은 아들 하나도 어리다.
아! 선조(宣祖)께서 양육하여 후세에 남겨준 신하들이 성대하다고 일컬어졌으나 계축년(1613)과 무오년(1618)에 이르러 일망타진 되었는데, 유명(遺命)을 받은 신하들이 제일 먼저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가 곧바로 시골로 내쫓겨갔다. 아울러 선왕이 직접 내린 교지를 두고 조작하였다는 말까지 했으니, 아마도 천지와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니 주태부(周大傅)가 했던 일을 하고자 한들 될 수 있었겠는가! 간악한 흉적들의 손에서 살아남은 한 두 명의 구신(舊臣)들은 새 조정의 은혜를 입었는데, 공의 자질과 국량으로 낭묘(廟廊 의정부)에 있었더라면 임금을 보필한 공적이 반드시 한 시대의 이목을 새롭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화를 입어 결국 종신토록 좌절을 겪었다. 임금의 은명이 비로소 죽은 뒤에 미쳤으니, 어찌 명이 아니겠는가! 익성(翊聖)은 어릴 때에 공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지금은 이미 머리카락이 성성해졌다. 그릇되게도 글을 짓는 일을 맡아 오직 아첨함도 없고 넘침도 없는 것으로 은혜를 갚으려 하니, 오직 입언(立言)하는 군자들이 채택하여 지(志)와 명(銘)을 지어 무덤을 꾸미기를 바라노라. <끝>
[註解]
[주01] 금계군 …… 행장 : 이 글은 박동량(朴東亮, 1569~1635)에 대한 행장이다. 박동량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룡(子龍), 호는
기재(寄齋)ㆍ오창(梧窓)ㆍ봉주(鳳洲)이다.
[주02] 오창공(梧窓公)이 …… 년인데 : 박동량이 1612년(광해군4)에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 문외출송(門外黜送)
을 당한 뒤로 겪었던 20여 년간의 유배생활을 말한다.
[주03] 신라의 시조 :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말한다.
[주04] 기묘제현(己卯諸賢) : 1519년(중종14)에 남곤(南袞), 심정(沈貞)을 위시한 훈구 대신 일파에 의해 참화를 입은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신진 학자이자 정치가들을 말한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우리나라 정통 성리학
의 계승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주05] 옛 …… 바꾸었다 : 공자의 일을 말한다. 《논어》 〈향당(鄕黨)〉에, 공자의 행동을 말하면서 “천둥이나 바람이 거세면 안색을 고치
셨다.[迅雷風烈, 必變.]”고 하였다.
[주06] 내용이 …… 어긋났다 : 일본이 명나라를 치려고 조선에 길을 인도해 달라고 한 일을 가리킨다. 일본이 명을 정벌하기 위해 길을 내
달라고 요구한 일 때문에 명나라에 주청사를 보내면서 이전에 일본국 사신 현소(玄蘇) 등이 와서 이야기한 내용을 인용한 부분에 그
사실이 보인다. 《宣祖實錄 24年 10月 24日》
[주07] 함사(緘辭) : 관원이 공무상 중대한 과오를 범한 경우에 그 사실을 서면(書面)으로 진술하여 올리는 봉서(封書)이다.
[주08] 대신이 …… 논하였다 : 《선조실록》 33년 10월 21일 기사에, 박동량이 의인왕후의 인산에 관해 상소한 내용에 보인다. 박동량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 산릉으로 저현산 보다는 독장(獨墻)이 쓸만한 곳이며, 박자우(朴子羽)가 요망한 말을 했을 때 만일 대신
들이 의연하게 대처해 물리쳤더라면 국사가 어그러지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주09] 빙성(氷城) : 야전 축성 방식으로, 겨울철에 흙이나 모래를 쌓아 놓고 물을 부어서 얼려 만든 성이나 얼음을 쌓아서 만든 성을 말한
다.
[주10] 광해군과 …… 생각하였다 : 《병산집(屛山集)》 권11 〈금계군박공시장(錦溪君朴公諡狀)〉을 참고하면, 박동량의 상소가 광해군
과 권신들의 심기를 가장 크게 건드렸기 때문에 그들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주11] 박응서(朴應犀)의 옥사 : 계축옥사(癸丑獄事)를 말한다. 이해에 조령(鳥嶺)에서 잡힌 도둑 박응서(朴應犀), 서양갑(徐羊甲) 일당
을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 등이 꾀어 그들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역모하였다고 무고하여 화옥이 일
어났다. 이로 인해 김제남은 사사(賜死)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은 강화도(江華島)에 유폐(幽閉)되었다가 죽었다. 《燃藜室記述
卷20 廢主光海君故事本末 朴應犀之獄》
[주12] 다만 …… 쓰고는 : 《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 2일 기사를 참고하면, 일곱 명의 대신은 유영경(柳永慶), 한응인(韓應寅), 박동량
(朴東亮), 서성(徐渻), 신흠(申欽), 허성(許筬), 한준겸(韓浚謙)이다.
[주13] 그릇을 깰까 염려되어 : 《한서(漢書)》 〈가의전(賈誼傳)〉에 나오는 투서기기(投鼠忌器)의 준말이다. 쥐에게 돌을 던져서 때려잡고
싶으나 곁에 있는 그릇을 깰까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임금 곁의 간신을 제거하려 하여도 임금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한다는 말이
다.
[주14] 궁중에서 …… 옥사 : 《광해군일기》 5년 5월 16일 기사에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박동량이 박응서(朴應犀)의 옥사(獄事)로 공초
를 받다가 김제남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것을 증명하려다 영창대군의 하인들이 의인왕후의 능에서 저주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다고 말한 사실로 인해 대북파들이 이를 빌미로 저주 사건은 인목대비와 김제남의 소행으로 몰았던 일을 말한다.
[주15] 임금은 …… 여겼다 : 《서경》 〈군아(君牙)〉에 “지금 그대에게 당부하노니, 그대는 나를 도와 나의 다리와 팔과 심장과 허리가 되
어, 옛날에 하던 일을 이어 그대의 조고를 욕되게 하지 말라.[今命爾, 予翼, 作股肱心膂, 纘乃舊服, 無忝祖考!]”라는 말이 나온
다.
[주16] 계축옥사(癸丑獄事) : 광해군 5년(1613)에 대북파(大北派)가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 박응서의 옥사
라고도 한다. 이해에 조령(鳥嶺)에서 잡힌 도둑 박응서(朴應犀), 서양갑(徐羊甲) 일당을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 등이 꾀어 그들
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역모하였다고 무고하여 화옥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김제남은 사사(賜死)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은 강화도(江華島)에 유폐(幽閉)되었다가 죽었다. 《燃藜室記述 卷20 廢
主光海君故事本末 朴應犀之獄》
[주17] 주태부(周大傅)가 …… 있었겠는가 : 주태부(周大傅)는 주발(周勃)을 말한다. 한 고조(漢高祖)의 개국 공신으로, 여 태후(呂太
后)가 죽은 뒤 여록(呂祿) 등 여씨들이 난을 일으키려 하자, 주발이 북군(北軍)을 지휘하여 역적들을 다 체포해서 목을 베었다.
《史記 卷57 絳侯周勃世家》 <끝>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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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錦溪君朴公東亮行狀
嗚呼。梧窓公罹罔遷謫餘二十年。幽枉未白。遽就窀穸。其孤瀰等。血泣遑遑。靡所逮及。間具履行系牒。屬翊聖爲狀。狀未成。而瀰等候上幸陵。纍然扶服伏道左。上章叫冤。章下所司。參對前後獄詞。讞覆比詳。以爲故臣某冤狀。如瀰等言。請宜昭雪。上特詢大臣。領議政尹公昉,左議政吳公允謙洞辨其誣。上再命領敦寧府事金公尙容。昇平府院君金公瑬議。又如兩相議。久之。上以手批論其得失。而旨在委曲。依大臣議施行。公議伸矣。澤至渥矣。公可以瞑矣。謹按公諱東亮。字子龍。梧窓其號也。朴氏系出羅祖。羅社旣屋。諸朴散居四方。而受籍於潘南者爲最大。潘南後隷羅州。其可譜者曰密直副使秀。秀生判典校寺事尙衷。尙衷事高麗恭愍王有師道。直節抗言。附元裔倍皇明之非。杖流道卒。寔生訔。佐我獻陵著勳勞。位左議政錦川府院君。諡曰平度。屢傳至尙州牧使贈吏曹判書林宗。林宗生吏曹正郞贈議政府左贊成兆年。兆年生司諫院司諫贈議政府領議政紹。紹以文學見重於己卯諸賢。引寘薦科。乃就恒試占魁甲。入臺垣。秉正不撓。卒爲權壬所螫。廢斥而死。有丈夫子五人。皆賢而貴。三代之贈。實國舅潘城府院君應順推恩也。其第四出曰司憲府大司憲應福。質行忠樸。世稱長德。聘贈承旨林九齡之女。生公。公於序亦在第四。公自在孩提。穎拔出群。識量類成人。三歲染痘幾殆。能強進瞑眩之劑。稍長受書。不煩課讀。九歲夜寢。忽遇暴雷雨。起整衣坐。誦古人必變之節以自警。人咸異之。從諸父廬墓。先意奉承。執事敏恪。世父牧使公應川家法素嚴。且有鑑識。設問以觀公志。公對輒當理。期以遠到。纔成童文譽藉甚。十七發解。自是試輒高等。己丑中生員。庚寅釋褐。辛卯分隷承文院補權知正字。俄薦藝文館檢閱。序陞待敎奉敎。是年秋日本書契誖甚。宣廟御朝。引群臣論奏聞當否。公以史官。秉筆入侍。大司憲尹斗壽力請奏聞。左相柳成龍執不可奏。諸臣互相和附。辭說紛然。日晏乃罷。而記注者不能記一語。及上徵注書記注。承旨強索公所草以進。收錄詳盡。上認之曰。此翰林書經筵位次筆也。時機栝日甚。善類逬竄。公與崔沂僅備左右史。議薦李公廷龜。憲府遽劾李公削薦。而幷及擧者。崔沂緘辭。頗涉推諉。而公乃盛言李公才地合薦。竟以是罷免。冬敍復奉敎。壬辰正月。陞戶曹佐郞。尋移兵曹。四月倭寇大至。將士出征。兵甲轉輸。皆取辦於公。公應副無缺。西狩之擧。出於倉卒。天又大雨。夜四鼓。下公隨駕暮抵坡州。路且百里。上下餒乏。上爲小留。公與同舍郞一人。發橐茹糗。追至則駕已渡臨津。船艤北岸。有令鑿沈津船。東岸只有一船。篙工捩拖離岸丈餘。公望見舟中有憲官列坐。一躍而登。一手拉倒篙工。一手援同舍郞入船。相趣而進。夜已深矣。上獨御單舸。環衛散亡。無復威儀。命公同都承旨李恒福召收擔夫。公手一炬。行且呼。得夫六十人以報。車駕始成行。公失馬。與同舍郞幷騎一驏馬。始達東坡。至松都。公與判書金應南直宿行宮。衛卒夜驚大噪。金公亦倉黃驚囈。排門欲出。公力持之。良久乃定。服公膽勇。兼帶備邊郞。五月拜司諫院正言。大臣以備邊事重。啓遞正言。仍兵曹。駕留平壤月餘。臨津師潰。賊鋒日逼。宣廟召群臣議去住。皆以咸興可往。公以爲我往寇亦往。與尹公斗壽,李公幼澄。請守浿江。爭之不得。平壤民猝聞大駕將出。相率遮路。叫噪亂擊曰。棄我而去。是殺我也。寧死於駕前。毋飽賊刃。公入見承旨謂民情如此。須姑停行。慰諭然後方可發也。遂稟經。書停行字揭示。亂民稍退。駕次寧邊。決渡遼內附計。命光海奉廟社主分朝。大小臣僚。先已遁去者多。分朝之後。扈從大駕。僅僅十餘。郞屬止公一人。公旣綰六曹通符。又兼備邊郞春秋館漢學敎授內乘等職。至博川。天黑樹密。前衛單甚。公從曹判書李公恒福騎。掠御馬過領。前茅先導。宣廟問知爲某某。益重之。大憲公以老病屬分朝。到定州。勞𠫷暴下。臥不能起。公疏乞留侍。手批許之。賚以成藥。大憲聞之。蹶然而作。疏陳臣老病不任從上行。不忍臣之子先父而後君也。公遂扈大駕而發。辭決之際。悲動左右。七月授吏曹佐郞知製敎。十月陞正郞。事務轉殷。上承下授。手書口酬。渙然若神。宰相無不器重之。車駕久住義州。天兵出援。賊勢小戢。朝臣之散去者稍稍來集。醜正之徒。窺覬媒進。或投疏或進啓。陰嘗天心。以惎當事者。論議憤激。勢將波及於李文翼公德馨,金相應南等數公。公在銓地持平其間務在鎭靜擬授李文翼以都憲。喜事者滋不悅。公遂謁告不出。先輩長者如梧陰,藥圃諸公。貽書勸駕。而牛溪先生書。最爲宛篤。至躬自過存。勉以世道之責。義州爲狹耶都會。從行朝士。久客經歲。自非篤老。胥不免狎遊。公鄙之。非公事。未嘗造請。昏夜則輒閉門不出。癸巳五月。移成均館直講。七月復吏曹。公素習華語。從上接對天將。日或十餘遭。每當酬酢。悉咨於公。恩意款密。有若家人父子。公嫺於辭令。敏於周旋。天將無不目屬之。十月回鑾次海州。承旨缺。超公八階授之。公聞命震惕。累辭不許。序至左承旨。時年二十五矣。甲午遞授護軍兼承文院副提調。轉刑曹參議兵曹參知。秋拜都承旨。以知申地望崇重。非年少所宜據。不拜。復授刑曹。俄拜參知。乙未以接伴使赴義州。冬以病還拜兵曹參議。丙申移戶曹。相臣啓授備邊司副提調。爲公特設也。力辭獲解。以成均館大司成。充冬至使朝京師。丁酉復命。拜兵曹參議。倭警復急。中殿出次遂安。公以兵官扈行。用宗室攝摠管宣傳官。糾率侍衛。夜濟麻田前津。夜深船小。宮人相失。公杖箠指麾。賴以利涉。冬以都承旨召還。聞朝廷將南下堤川。策應天兵。而謂天將實欲挾上戎行。從臣之與選者咸有懼色。公拜疏請從。戊戌加嘉善階。賊報稍緩。爲親老乞郡。得延安府使。爲政數月。吏民稱神明。七月大憲公病不起。與二兄從治命。返葬于楊州先塋。以寇亂未靖。奉几筵及林夫人。寄寓於安州村舍。庚子移駐延安。六月懿仁王后上昇。公扶衰赴臨。九月公除以護軍兼摠管入朝。以大臣不能鎭定妖說。山陵之役。愆期未就。疏論之。俄拜大司憲。糾正官邪。臺端肅然。辛丑移吏曹參判。一意愼簡。必先耆宿。尋以同知春秋館事。奉安國朝實錄于妙香山。兼同知經筵事。還拜禮曹。六月出爲京畿觀察使。病𠫷辭遞。宣廟遣御醫。齎藥餌輟御廚以賜之。至冬而穌。遂具疏與牋陳謝。且乞郡。宣廟讀至牋文與死爲隣。莫保蟻命。可生之道。專荷鴻恩之句。諷詠良久曰。對偶語意。俱極切當。斯人雖久病。精神不減。手批勉以將息。不許外補。壬寅春。詔使涖境。賂金之窾大啓。民不堪命。拜公京畿觀察使。措處獲宜。得華人歡。而民力用紓。一道稱之。幕官欲行非道。見沮於公。反造言中之。公乃辭遞。拜禮曹參判。冬出爲江原道觀察使。巡歷之餘。遍訪名區。携一二布衣故人。觴詠甚適。過寧越郡。釂魯山墓。曁納節侍經席。進啓魯山之墓香火久斷。斧斤不禁。中廟嘗遣承旨申鏛致祭。宜擧廢典。宣廟亟遣承旨祭之。秋拜都承旨。遞拜戶曹。俄移兵曹。甲辰錄扈聖,宣武,靖難三功臣。公建議吾輩執羈靮者。猶謂之功。出生入死。辛勤戎馬者。勞績何翅萬倍。宜加錄武將。以慰戰士心。識者韙之。已錄正勳。當收原從。公兼綰扈從宣武兩局。宣武則水陸征戰。請援輓漕。接應天將。籲奏祈恩。色目如毛。眞贗混淆。號訴塡咽。文簿轇轕。公曲加辨別。取舍不紊。胥服其公明。時倖相首發上尊號之議。政府率百僚伏閤而請。宣廟執撝謙。久而不許。首揆尹承勳欲因此停論而未決。一日公以公事詣尹公第。尹公以是諮公。公曰。此爲大段義理。相公何難而持難至是。翌日尹公赴朝堂。集諸宰詢之。言人人殊。公適後至。促召問之。公笑曰。但觀義理所在處行之。何用問爲。公之所謂義理。特申昨日之論。以勉夬斷。倖相嗾臺官劾首揆。而反以公義理之說爲證案。公恥之。遂引入。七月始行功臣封賞。賜公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之號。超階資憲封錦溪君。兼知春秋館事。未幾。拜議政府右參贊。夏拜戶曹判書。挈擧財本。綜理微密。欲定經費量入爲出之式。遽拜平安道觀察使兼都巡察使以去。林夫人曾隨仲子黃州牧任所。叔子守信川。來往有煒。至公按節關西。路繇黃岡。以板輿移奉。箕京相距不三舍而近。遞進稱壽。兒孫滿前。樓觀江湖。遊跡殆遍。魚軒每出。士女聳觀。世稱盛事。公裁決酬應。沛如江河。不勞神觀。事無惉滯。雖盤錯交値。未嘗皺眉。程士校武。興起成就。館穀賓客。周濟親舊。情文俱至。各厭其意。斥絶私干。賄竇遂塞。巡閱邊徼。延訪疾苦。弭節亭障。興滯賑急。深冬警備之辰。積氷於要害之地。一如天朝氷城之制。堂姪燁爲府庶尹。赫赫著治聲。而性酷嗜殺。公檄致之。立庭下爲杖首吏。而猶不悛。則啓罷之。節度使成允文結援倖相。鷙而橫。擅自分定於列邑。督徵銅鐵。其妾弟殺人。亡匿其營中。公發吏搜捕。移繫他邑。且詰擅自分定之故。俱自首伏。列其實狀以聞。允文竟絀。邊氓獲蘇。丁未秋秩滿。復勳封。戊申宣廟棄群臣。公爲守陵官。精白將事。敬戚交至。唯以太夫人年高。思慕鬱結。寢食爲損。十二月。林夫人以疾棄養於仲子忠州牧之衙舍。公徒跣出陵外。呼天擗踊。以候朝旨。朝議不許遞。而光海特許之。政院執不下。公聞遞音奔去。不二日達忠州。已而有旨促還。公處齋室。不出外廊。方喪天喪。兼致其極。太夫人將葬。公拜疏視窆而還。己酉宣廟初朞。進階正憲。秋用拜陵恩進階崇政。庚戌宣廟再朞。進階崇祿。馳歸太夫人喪次。與二兄守制。辛亥服闋。復勳封。尋兼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鄭仁弘疏詆退溪,晦齋兩先正。大臣師儒連章爭辨。而公疏最切直。上下交憾。壬子三月。鳳山倅申慄捕得金濟世者。脅以禍福。誘使自伏。以與前博士金直哉父子謀逆。馳遞上之。濟世者本行丐偸兒。流轉兩西圻輔之間。籍人姓名。詿謬無據。而平壤人前府使金台佐,正字田闢,嶺南人 前觀察使鄭經世,京城士大夫丁好恕,丁好善,丁好悌,崔有海等咸被逮。濟世謂與丁好恕謀逆。乃在某年某月。公卽言好恕其時赴京。承旨洪瑞鳳亦言臣爲使臣。好恕爲書狀官。辭朝復命日月可考。濟世語塞而曰。是好悌。非好恕也。公又因大臣之問。言金台佐篤老沈病。田闢早捷大科。名聞西方。又言崔有海年少儒生。不閑吏文。直須以口語置對。公雖不敢遽白諸人之冤。其痛惻而至隱之者。不復自閟。李爾瞻以大司憲。與公分席。偶伏睨睇者累矣。翌日光海下敎曰。人臣護逆。宜同逆律。判義禁某。敢於榻前營救逆賊。其遞金吾。爾瞻使其黨趙存道論請拿鞫。光海只命削爵。冬敍復勳封。癸丑四月。朴應犀之獄起。應犀者。故相淳之孼產也。與徐羊甲輩結爲死黨。出沒上游。殺越人于貨。事覺就囚。從死求生。爾瞻之徒李昌後與應犀有連。乃唆使上告延興府院君金悌男欲奉永昌大君謀不軌。其所排定巧密。人無能脫者。先是宣廟賓天之日。下手敎二通。一以畀光海視同氣如予在時。一以畀七宰臣。只書姓字柳,韓,朴,許,徐,申,韓。而大君幼沖。煩卿等保護。以此七臣之目行。而群兇煽俑。謂閔閹希騫與柳永慶矯作遺敎。譖蠱積年。駴機垂發。而卒發於羊甲之招。大司諫李志完,獻納柳活論七臣奉矯旨。不卽辨明。甘心承順。削去仕版。武人鄭浹誣伏。廣引公卿大夫。有若自上變者。而亦及遺敎之說。光海始命逮受遺諸臣。以與延興水火相捄爲問目。公之置對。承問目爲辭。陳其曾與延興情誼阻隔之狀。蓋丁未年間。宣廟寢疾彌留。巫卜謂疾祟在裕陵。群往陵下作禳事。而宮奴女巫之主張其事者。實裕陵時受恩人也。朴氏闔門必欲正其罪。而兩人托跡宮禁。有忌器之嫌。使人微諷延興。延興不答。自此朴氏恨之。庚戌公之表姪李公顯英爲持平。立捕女巫囚之。李公用他事遞職。不果究治。及公置對。據實指陳。本無語犯宮闈之端。李文忠恒福,申承旨應矩洎吾先君。亦不以是爲異。原公本情。可質天日。而不幸宮中咀呪之獄繼起。兇賊以裕陵事滾成一端。拈入頒敎。以爲藉口。傍觀者不復究其事之本末。生平不相悅者。因起而下石。傳訛爽實。遂爲禍階。公出獄之後。捲歸通津田廬。丙辰秋廢大妃之論復熾。以受遺諸臣爲注。徐兟,宋文奎受爾瞻旨。投疏請罪。鄭造,尹訒,柳潚分據三司。合辭請竄。五月猶不止。光海命中道付處。遷牙山縣。辛酉宥還。癸亥今上反正。復公勳封。時議追咎癸丑供辭。蜚語騰聳。至請圍籬安置。配康津縣。公承譴怡然唯命。家人多齎衣衾。以備身後。而無幾微見色。談笑如平日。但飮酒數杯而止曰。罪名汚衊極矣。不敢用酒自寬耳。乙丑撤籬。丁卯量移扶安。壬申內徙忠原。癸酉放歸田里。十年之間。四蒙宥典。公乃戴恩而歸。買墅於西湖。倘徉卒歲。而神觀精力如少年時。飮啗甚健。乙亥二月夜寢。忽覺痰壅。竟不淑。公生於隆慶己巳。得年六十有七。某年某月某甲。禮葬于某邑之某原。公孝友天植。英達夙成。服訓家庭。博問多識。遇事忼慨。膽略過人。當壬辰之難。起自郞署。驟躐卿班。妙年當官。作事老成。精神所到。條達節解。廟堂倚以爲重。君父視如心膂。入侍經幄。出贊機籌。蔚然爲中興名臣。而尤有雅量。濟以忠恕。居家接物。一於和巽。膝下之戲。便若孺兒與二兄自爲知己。塤篪莫逆。長姊丘嫂。事之如母。推愛族姻。無間親疏。撫恤故舊。必先愚賤。交際之間。洞達無礙。談論纚纚。撤去畛域。平生以矯激近名爲恥。嚴於辭受取予之節。而猶恐人知。性無玩好。雖書籍亦不購求。居室蕭然。傍無酒槍茶鼎之屬。所御一叵羅。卽上所賜白金鎔造者也。善謔而不至於縱。喜酒而不及於亂。早貴絶自驕慢人之念。晩阨無佗傺無憀之色。在田里與鄕人處。于于然驩笑博奕。有野老爭席之趣。而處籬中三載。未嘗窺外戶。撤籬之後。猶閉閤深居。淡然與世相忘。而惓惓宗國。聞朝政得失。輒形憂喜。湖南之俗。素稱狡悍。而公居之。人皆敬服。得公片言。信如甲令。有事必走謁扣質。及其移去。莫不出涕遠將。後亦餽問不絶。謫中遭長姊及夫人之喪。子濰繼亡。羈孤憂戚。人理之所不堪。而亦能理遣。屢遭機辟。不驚不慍曰。點檢吾心。自無些累。俯仰何怍。雖文字之上。亦無自辨永知之語。而扶寧一編。略述其素蘊而已。嘗以自警編,名臣言行錄爲律身之本。頗有所得。晩取心經,近思錄,朱子書。溫澤者數矣。其爲詩文。操筆立就。以暢達精當爲宗。能疾書姿媚。搶攘之際。咨揭寫本。多出公手。旁通計算甘石祿命家言。少善御。絶塵如飛。磬控隨意。射亦不習而能云。所著放失。汾津錄二卷藏于家。公娶左承旨閔善之女。驪興望族。高麗名相令謨之後。代有冠裳。曾祖諱球。奉先殿參奉。祖諱世良。承政院左承旨。以淸直聞於世。外祖議政府右參贊贈領議政始林府院君李夢亮。承旨無嗣。只育夫人。端莊聰睿。幼受小學內訓諸書。能通大義。在室婉娩有度。舅李文忠公每稱女士。旣歸朴氏。姻戚衆盛。合族頻煩。而周章其間。不妄瞻視。穆然自持而已。壬辰之變。公常在省治事。仍自闕下扈駕而西。夫人以死自矢。至却匕箸。父母強之。數呷而止。且重身病困。徒步草澤。恒閉口屛臥。唯以不自決爲恨。賊勢漸熾。殆遍峽中。同爲避地者。議欲南歸取食。夫人斷以義理。決策西上。會公於關右。其指畫有丈夫所不能及者。承旨公稱其曙於大誼。自是轉徙寄寓。無一歲寧居。仰事俯育。夫人身任之。乙未公奉使龍灣病甚。夫人匹馬馳赴。中途聞公病少愈。卽止不入。咸服其達禮。洎父母老而疾病。奉引起居。飮食藥餌。凡所以致其誠者。無所不用其極。而喪而葬而祭之。戚易中節。肥家訓子。率有禮意。癸丑之禍。憂懼煎熬。至癸亥尤甚。竟以乙丑五月十有七日卒于康津謫居。少公一年。年五十有六。男女長成者七人。男長瀰。尙宣祖大王第五女貞安翁主。封錦陽尉。次漪。文科正郞。次濰。少具長者度。甚有文。不勝喪早死。次澬。女長適大司成李明漢。次適參奉洪處深。次適參奉柳省吾。錦陽之出曰世橋。正郞之出曰世來,世采。女幼。大司成之出曰一相修撰。曰嘉相進士。餘幼。洪處深,柳省吾皆有所出而幷幼。公側出男一人亦幼。噫。宣廟養育貽遺。號稱彬彬。而至癸丑戊午。盡之一網。而受遺諸臣。首被逮繫。旋加放逐。幷與先王手敎而謂之矯作。其不畏天地鬼神矣。雖欲爲周大傳之所爲。其可得乎。一二舊臣之不死於奸賊之手者。獲沾新化。而以公之才之器。置諸廟廊。其贊襄之績。必能新一代耳目。而無妄之菑。遂至終身挫閼。渙汗之恩。始及於身後。豈非命也。豈非命也。翊聖自在齠齔。受公之賜。今已種種矣。謬當文字之役。唯以無諂無溢。爲報塞之地。惟是立言之君子。採擇而爲志若銘。以賁泉隧云爾。<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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