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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南海) 설흘산(雪屹山. 488m)을 가다.
글 쓴 이 都 寅 高 枓 永
11월22일, 기상(起床)하니 주위는 어둑 어둑하고 날씨는 차다.
절기(小雪)는 어김없이 다가 와 초겨울의 날씨를 느낀지도 오래며, 거리는 황량(荒凉)하고 쓸 쓸하다. 가로수의 노란잎들은 지고, 지다남은 잎들이 대~롱~ 대~롱~ 늦가을 초겨울의 정취(情趣)를 동시에 느낌니다.
차에 오르니 통로가 비좁다. 남해 설흘산(雪屹山)은 인기도 좋아서 동참 인원이 넘쳐난다.(56명)
영산(靈山) 휴게소에서 조식(朝食)을 하고, 마산 방향으로 내 달으니... 저만큼 왼편으로는 비슬지맥(琵瑟支脈)의 연봉(連峰)들이 아침 햇쌀에 찬란히 빛나도다!
간단한 진행을 마치고, 차내는 홍총무(부회장)님의 노래교실로 화기(和氣)가 넘쳐나니... 차는 어느새 사천시(泗川市)를 지나 창선교(昌善橋)를 건너서 남해섬으로 들어선다. 이제 남해도(南海島)는 더 이상 섬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2003년에 창선교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노량진의 남해대교(南海大橋)를 통해서만이 남해도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오늘날은 창선도(昌善島)를 지나 남해도(南海島)로 접근이 더 용이(容易)해서 이락포(李落浦)와 충열사(忠烈祠)의 역사 현장을 잠시나마 답사할 수 없슴이 아쉬워... 간략하게 역사적 사실을 옮겨 봅니다.
선조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왜적을 크게 무찌른 뒤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왜군은 재침(再侵)의 기회를 노리고자 가등청정의 첩자(諜者) 요시라의 이간책(離間策)으로 이순신과 조선 조정을 갈라 놓는데 성공한다.
인하여 선조29년(1596) 2월에 이순신은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 끝에 사형을 받게 된 것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의 반대 상소(上疏)로 사형이 면죄(免罪)되어 4월1일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나라의 사태가 급박 해지자, 그는 다시 사면복권(赦免復權)되어 12척의 배로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왜군을 대파(大破)하며 연전연승(連戰連勝)을 하여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나라를 구하신다.
선조31년(1598) 8월에 도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병으로 죽어, 순천 신성리에 주둔한 고니시 유기나가 부대가 본국으로 돌아갈 바닷길을 열어 줄 것을 명나라 해군제독(海軍提督) 진인에게 뇌물을 주어가며 부탁한다.
이에 진인은 왜병을 고이 보내 줄 것을 이순신에게 협박 하다시피 이야기 하였으나, 충무공(忠武公)은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설득시켜 선조31년(1598) 11월 19일 고니시 부대를 구하기 위해 출동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와 노량(露梁) 앞바다에서 결사의 전투를 벌인다.
그는 조(朝), 명(明) 연합함대(聯合艦隊) 150척으로 왜선 500여 척을 불사르거나 바다에 침몰시켰다 하며, 직접 북채를 잡고 두드리며 진두 지휘하다 적의 유탄에 맞아 최후를 마치니... 그의 나이 54세였다.
명나라 해군제독 진인도 그를 평하여 “유경천위지지재(有經天緯地之才)요, 보천욕일지공(補天浴日之功)이라” 하여 그를 칭찬하고 통곡하였다 한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宣祖)는 특사를 보내 조문(弔問), 시호(諡號)를 충무(忠武)라 내리고,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의 호를 주어 덕풍군(德豊君)에 봉했으며, 우의정(右議政) 및 좌의정(左議政)을 추증(追贈) 하였다.
평범했던 한 인간에서 영웅(英雄)의 길로 살다간 그에게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 했던가...? 간신(奸臣)은 살아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지만, 충신(忠臣)은 죽어서 만세(萬世)에 그 향기(香氣)를 전(傳)합니다 그려!
숙연한 마음으로 앉은 자리를 다시 고쳐 앉으니... 차는 구~불~ 구~ 불~ 임포리(荏浦里) 고갯길을 넘어 돈다.
사촌(沙村)을 지나 출발기점인 선구(仙區)마을에 이르니 시계는 벌써 11시를 넘어 있다. 마을 어귀 주차장에서 최대장의 구호 아래 간단한 준비운동으로 몸을 풀고 산 오르니... 선두와 후미가 끝간데를 모르겠다!
10여 분을 오르니 부산에서 온 부길산악회(釜吉山岳會) 회원님들이 합세를 하고, 나중에는 대전에서 또 한팀이 합류(合流)되니... 좁은 능선길에 진행이 더디고 남산님들을 찾기도 쉽지않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오를수록 시야는 넓어져 광활하게 펼쳐지는 남해 바다가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고, 왼편으로는 임포마을과 산야(山野)가 어울어져 늦가을의 정취를 맛볼 수 있어 참으로 장관이다.
30여 분을 올라 전망(展望)이 좋은 바위에서 선구(仙區)마을을 내려다 보니... 거대한 거북이가 응봉산을 등에지고 바다로 기어 들어가는 형상이다.
해안가 얕은 바다에는 낚시하는 조각배들이 셀 수 없이 떠 있고, 저만큼 깊은 바다에는 대형선박이 여러 척(隻) 보인다. 그 너머로 수평선은 하늘에 맞닿아 더는 볼 수 없으며...점점이 떠 있는 섬들은 옹기종기 정다워 보인다.
모두들 탄성(歎聲)을 지르며... 기념촬영에 여념이 없으시다! 오늘도 디카맨 황부회장님, 김해진님, 취산님 까지 사진촬영에 바쁘시다.
새벽에는 차던 날씨가 낮에는 포근하고 바람 한점 없으니... 늦가을 산행날씨로는 더없이 좋으며, 등산길 왼쪽으로는 단풍으로 물든 산간지방과 우측으로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푸른 바다를 동시에 조망(眺望)할 수 있어 천혜의 절경이다!
30여 분을 더 올라 칼바위 능선에 이르니... 눈에 잡히는 경치는 절정이요! 모진 풍우(風雨)에 씻기우고 닳아서 능선은 말 그대로 칼날처럼 예리하고 앙상하게 뼈가 드러나 있어. 보는 눈은 즐거우나 걷기에는 여간 조심스럽지 않도다!
모처럼만에 참석한 구슬님의 친구분은 그동안 연습을 많이 하셨는지 잘도 걸으시고, 무량덕보살님은 친구 한분을 더 모셔 와 오늘은 삼총사다.
최대장은 선두로 나아가고, 중간은 필자와 최형달 부대장이, 후미는 황부회장님이 진행을 도우며 무전기로 연락을 주고 받는다.
칼바위 능선의 좋은 풍광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여러 회원님들에게 사진촬영을 해 드리니... 디카(디지탈카메라)로는 왕초보라 잘 나올지 걱정이 앞선다.
다시 응봉산 정상으로 나아가니 이정표에 0.9Km라 적혀 있고 경사도 상당히 가파르다. 이제 몸도 어지간히 산(山) 기후에 적응한 후라 한결 걷기에 수월하다.
얼마를 올랐을까? 따뜻하고 전망 좋은곳에 박태옥님, 고장석님, 이태만님, 구슬님과 그 친구분, 김진여심보살님, 천가희님 등 여러명이 함께 쉬는데... 고장석회원님은 지난주에 결혼한 장남이 신혼여행에서 어제 돌아와 오늘 새벽에는 문안인사(問安人事)를 받고 왔다면서... 싱~글 벙~글 웃으며 가져 온 약밥을 골고루 나눠 주신다.
이런 저런 여담(餘談)으로 얼마를 쉬다, 가파르게 이어지는 능선을 올라 정상에 도착하니... 선착객(先着客)들이 기념촬영에 줄을 서 있어, 한참을 기다려서야 남산님들의 단체촬영이 가능하다.
정상에는 편하게 쌓아놓은 돌탑 한기가 서 있고, 그 앞으로 응봉산(473m)의 표석(標石)이 조그마하게 귀엽게도 세워져 있다.
기념촬영을 마치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북동쪽으로는 앵강만이 언~뜻 언~뜻 보이고, 동으로는 설흘산(雪屹山) 정상봉이 우뚝솟아 봉수대(烽燧臺)로 활용되었슴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너머로 남해도를 지나 사천시(泗川市)로 짐작되는 산능선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망망대해(茫茫大海)가 한없이 펼쳐지니... 아름다운 이 풍광을 내 작은 가슴에 다 담아 가리다!
또 정상 한편에는 막걸리를 팔고 있어 응봉산의 특별한 명물이다! 등산으로 목이 마른 애주가(愛酒家)들은 앞 다투어 너도 한잔~ 나도 한잔~ 잘도 넘어가신다! 벌~컥 벌~컥~ 소리만 들어도 시원한데... 음주자(飮酒者)는 얼마나 더 시원하실까...?
선계(仙界)가 따로 없다 응봉산이 진면목(眞面目)일세
반공중(半空中)에 우뚝 솟아 삼계(三界)를 굽어보니...
삼천대천(三千大千)세계가 육해공간(陸海空間)에 있도다!
얼마를 서 있었는가...? 온 몸에 한기(寒氣)가 느껴져서... 다시 하산길로 접어든다. 설흘산(雪屹山) 가는길은 넓고도 평탄하여 낙엽이 자욱 자욱하며, 정상 주위의 낙엽수(落葉樹)들은 앙상한 가지로 겨울채비에 들어 있고, 오로지 상록수(常綠樹)들만 여여(如如)하게 청청(靑靑)하다.
20여 분을 걸어나려 적당한 장소에서 모두들 도착하는데로 삼삼오오(三三五五)모여 앉아 점심을 드신다.
앉은 자리는 낙엽더미에 쌓여 푹신 푹신하고, 머리 위로는 앙상한 가지들 사이로 햇볕이 쬐여드니... 따사롭기 그지없다!
산에서 먹는 도시락은 언제나 즐겁다! 대자연(大自然)이 주시는 넉넉함과 회원님들의 따스한 정감(情感)이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편안케 하는가 봅니다.
설흘산 정상으로 가는길 주위는 낙엽수가 많아 발아래 감촉이 앞서보다 훨씬 편하다. 20여 분을 걸어 오르니 가천마을과 홍현2리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일부회원님들은 설흘산을 다녀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가천마을로 하산하고, 나머지님들은 정상으로 오르니 갑자기 경사가 심하다.
식후라 등산 속도가 더디다. 한 두 차례 쉬어가며 정상에 이르니, 거대한 봉수대(烽燧臺)가 눈앞에 우뚝하다.
안내판에 설흘산 봉수대는 해발 490m의 자연암반을 기반으로 석축되었으며, 규모는 높이 6m, 직경 7m, 둘레 20m로 조성되었고, 이 봉수는 남해 금산봉수를 받아 내륙의 망운산, 순천 돌산도 봉수와 연결된 것으로 추정한다.
2003년 6월 7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48호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2월 봉수대 주변을 복원정비(復原整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적혀있다. 몇 몇 회원님들에게 봉수대와 앵강만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잠시 주위를 조망(眺望)하니... 북동쪽으로 아스라이 펼쳐지는 앵강만이 남해도(南海島) 깊숙이 파고들어 풍요(豊饒)로움이 넘쳐나고, 지근(至近)한 거리에 절해고도(絶海孤島)인 노도(櫓島)가 물위에 떠 있다.
그 뒤로는 금산(錦山) 38경을 자랑하는 비단산이 웅장하게 펼쳐지고, 미조리(彌助里) 해수욕장 부근에는 밤섬, 떼섬, 사도, 애도, 범섬, 큰섬, 죽암도 등으로 불려지는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어 참으로 이국적(異國的)인 풍경이다.
남해도(南海島)에는 고려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 까지 약 30명 정도가 유배되었는데... 그 중 한사람이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 1637~1692)이다.
그는 외로이 떠 있는 노도(櫓島)에서 삭막한 유배생활을 했는데, 1985년까지만 해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던 오지(奧地)였다고 하니... 그 외로움이야 더 말해 무삼하리요!
본디 삿갓처럼 생겨서 삿갓섬이라 불렸는데, 임진왜란 때 이 섬에서 노(櫓)를 많이 만들었으므로 노도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김만중은 세도(勢道)있는 집안에서 유복자(益兼의子)로 태어나 한때 공조판서, 대사헌, 대제학 등 높은 벼슬자리를 두루거친이다.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 난 아들 윤(昀:景宗)의 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당쟁에서 그가 속했던 서인이 실각하자, 숙종15년(1689) 관직을 박탈당하고 남해도의 노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노도에서 산3년 동안 우리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국문소설인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와 “구운몽(九雲夢)”을 지었으며, 사씨남정기는 숙종이 희빈 장씨에게 빠져 인현왕후(1667~1701)를 폐위시켜 내친 일을 풍자한 내용이다.
그는 지극한 효자(孝子)로서 “구운몽”을 지은 동기도 어머니에 대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구운몽(九雲夢)”은 여덟명의 선녀와 함께 온갖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렸으나 그것은 결국은 덧없는 하룻밤 꿈임을 깨닫고 수도(修道)하여 마침내 극락(極樂)으로 가게 된다는 내용이다.
귀양지에서 어머니 윤씨의 부음(訃音)을 들은 김만중은 “정경부인 윤씨행장”을 쓴 뒤 숙종18년(1692) 56세의 나이로 노도에서 생을 마쳤다.
이 외에도 남해로 유배와 문학작품을 남긴이로는 자암 김구(自菴 金絿. 1488~1534)와 후송 유의양(後松 柳義養. 1718~?)이 있는데, 김구는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10여 년 동안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화전별곡”을 지어 남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일점선도(一點仙島 : 신선의 섬)”라 표현하여 널리 알리기도 했으며, 또한 안평대군, 양사언, 한석봉과 더불어 조선의 4대 명필가로도 손꼽힌다.
조선 영조 때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내다 유배온 유의양도 남해에서 1년 남짓 지내면서 “남해견문록”을 지어 당시 남해풍물을 후세에 전하였다.
노도 마을 사람들은 온종일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한숨짓던 노인 김만중을 “노자묵자할배”라 불렀다고 전하며, 잠시 서포의 시(詩) 한수를 옮겨 봅니다.
아득한 섬들은 구름이 내려앉은 바다 건너에 있고
방장봉래봉(方丈蓬萊峰)은 가까이 있도다.
육친인 형제 숙질과는 떨어져 홀로 외롭게 살건만
남들은 나를 신선(神仙)으로 알겠구나.
서포는 “사씨남정기”를 지어 숙종을 깨닫게 하셨고, “구운몽”을 지어 후세에 효(孝)로써 귀감이 되게 하셨으니... 그 공을 어찌 필설(筆舌)로 다 하리요!
위기(危機)를 기회(機會)로 활용한 선조님들의 지혜와 인내에 삼가 감읍(感泣) 하오며... 그들에서 나 자신의 삶을 아프도록 배웁니다.
얼마동안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 돌계단을 나려오니, 동남쪽으로 조그마한 삼각형의 정상표석(頂上標石. 488m)이 앙증스럽게 세워져 있다.
몇 몇 분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3~40여 분을 나려오니 가천마을에 당도한다. 경사가 심한 산비탈에 조용한 어촌(漁村) 마을이다.
남면 홍현리(虹峴里) 바닷가에 있는 가천마을은 “다랑이논밭”과 마을 어귀에 있는 “암수미륵바위”로 유명하다.
“남해똥배” 란 말이 있듯이... 1950년대 후반까지만 하드래도 이곳 사람들은 여수시내 똥을 거두러 다녔던 똥배가 적지 않았으며, 그 거름으로 논밭을 가꾸어 비교적 기름진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가천마을은 지금 환경미화작업에 한창이며, 마을길도 넓히고 “암수바위” 부근에도 깨끗이 단장되어 고풍스런 멋이 많이도 사라졌다.
“미륵바위” 주변에는 수백년의 해 묵은 단풍나무와 천리향(千里香)이 자라 있고, 동백나무와 모과나무 등을 심어 성역화 하고 있슴이 한눈에 알아 보겠도다!
안내판에 이 곳 사람들은 암수바위를 “미륵불(彌勒佛)”이라 부르며, 숫바위를 숫미륵, 암바위를 암미륵이라 일컫는다. 숫미륵은 남성의 성기와 닮아 있고, 암미륵은 임신하여 비스듬히 누워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영조 27년(1751)에 남해 현령(縣令) 조광진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내가 가천에 묻혀 있는데, 그 위로 우마(牛馬)가 다녀 몸이 불편하니 꺼내 세워주면 필히 좋은일이 있을 것이다.” 하여 관민(官民)을 동원하여 캐 내어 “미륵불”로 봉안 하였다고 한다.
어민들은 지금도 바위를 발견한 날인 음력 10월 23일 을 기해 제사(祭祀)를 지내면서 마을의 안녕(安寧)과 많은 고기가 잡히기를 기원(祈願)하며, 또 아들 딸을 빌면 점지해 주신다고 한다.
남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역에는 풍요(豊饒)와 다산(多産)을 비는 입석(立石)이 많아 우리의 전통신앙(傳統信仰)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 만물신(萬物神)의 습속(習俗)이 있음을 짐작합니다.
여러 회원님들에게 “암수미륵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촬영(寫眞撮影)을 해 드리고 다시 보니, 그새 “옥동자(玉童子)”를 점지 하셨나 보다! 가천 “미륵바위”의 영험(靈驗)함을 눈으로 보면서... 주차장에 이르니 따끈 따끈한 하산주(下山酒)로 모두들 오늘의 피로(疲勞)를 풀고 계신다.
이해수 전회장님은 반색을 하며 그간의 전후사정(前後事情)을 토로 하는데... 가천마을 주변에는 어느 곳에서도 하산주를 끓이거나, 심지어는 가져온 도시락도 함부로 먹을 수 없어서 하산주 준비에 어려움이 많았음을 알려 주시고, 친구의 친구분 소개로 어렵게 관리사무실을 빌려 하산주를 편히 드실 수 있게 되었다고 하신다.
돼지고기 찬조까지 해 주신 이회장님과, 아침밥을 찬조해 주신 김규섭님, 현금 10만원을 찬조해 주신 이판태님, 떡을 찬조해 주신 안병섭님, 지난주 혼사축하(婚事祝賀)의 보답으로 5만원을 찬조해 주신 고장석회원님 등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올 때 차내에서 배운 노래를 옮겨 봅니다.
* 고 마 운 당 신 에 게 *
노래 김명규, 지 도 김상규
당 신 만나서 걸어온 세~~ 월
그 길을 돌아~보니~ 바람도 불었고
눈비도 왔지만 그리운 추억이~ 라 오
나 때문에 힘들었던 고마운 당신~이~여
남은 내인생 곱게 접어서 당신께 드리고
싶소 내마음을~ 받아주~어~~요~~~~
단기 4342년(서기2009) 11월 22일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설흘산(488m)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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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회장님! 글솜씨와 함께 디카 솜씨도 대단 하옵니다~~~~~~~아 부럽다.......^^*
졸문 읽어시느라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구슬님의 격려에 힘이 남니다. 친구분이랑, 조여사님, 세분이서 연습많이 하셔 등산에 꼭 참석 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가고푼 설흘산.... 산행기가 살아 숨쉬고 있네요..사진까지 곁 들이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지요...역사 문화 많이 배우고 갑니다.
황부회장님 덕분에 사진 배워서 이렇게도 한번 시도 해 봄니다. 남산의 발전과 활성화에 애쓰심에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