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팔공산 줄기에는 북지장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있고, 맞은편 비슬산 기슭에는 남지장사라는 이름이 붙은 절이 있다.
북지장사 전경
그냥 지장사라는 이름이 붙은 절집은 가끔 볼 수 있지만 방향을 뜻하는 북(北)자와 남(南)자를 붙인 지장사라는 절은 대구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혹시 대구 땅의 사찰비보와 관련이 있는가 싶어 이래저래 탐색하고 물어보았지만 속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하였다.
북지장사를 찾는 데는 이밖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하나는 절집의 경관이 다른 여느 절처럼 불사를 거듭하지 않아 화려하지 않고 그저 꾸밈이 없다는 점이다. 자연스러운 경관과 가람배치가 한마디로 촌스러워서 자주 찾는다.
또 다른 이유는 지장보살을 주존불로 모셨던 특이한 절이면서 질서가 없어 보이는 절집 안에서 진귀한 불교유산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쓰레기더미에서 진주나 장미를 찾는 기분을 느낄 수 있기에 북지장사를 자주 찾는다.
북지장사는 정말 촌스럽다. 가는 길마저 촌스럽다. 북지장사를 갈라치면 동화사 길목인 백안동을 조금 지나면 오른쪽에 자연석 전시공원과 방짜유기박물관을 만난다. 자연석을 수집해 전시한 모습이 꾸밈이 없기에 또한 촌스럽다.
자연석들 중에는 징그럽게도 생긴 남근석이 고개를 내밀고 삐죽 웃기도 한다. 이곳을 지나면 도학마을이 나온다. 도시근교 마을치고는 시골 풍치를 그대로 간직한 마을이다. 옛날로 말하면 절 밑에 있으니 사하촌이다. 촌스러운 마을이다.
좁디좁은 마을 안길을 지나면 곧바로 울창한 소나무 숲을 만난다. 대구근교에서 이처럼 우거진 원시림은 보기 드물다. 숲 사이로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꼬불꼬불한 콘크리트 포장길이 뚫려 있다.
길바닥이나 소나무 모양들도 꾸밈없어 참 촌스럽다. 이곳에 들어오면 대낮인데도 금방 산짐승이 나타날 것만 같은 산골을 연상케 한다. 숱한 등산객들이 북지장사를 찾는 이유를 알만한 곳이다.
숲길을 한참 오르다 보면 협곡과 함께 모롱이길이 시작된다.
북지장사 조산, 북지장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꾸밈없는 절집 경관속엔 진귀한 불교유산이 다양 지장보살이 절터를 정해준 대승의 이상향인 지장도량 '지장보살' 품에 안은 대웅전 조선시대 '불교탄압' 흔적도
그 지점에 큼지막한 조산이 하나 서 있다. 크고 작은 막돌로 돌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북지장사는 변변한 일주문도 하나 없으니 절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는 표적이다. 이웃한 파계사에도 일주문 없이 매표소 뒤쪽에 커다란 조산이 있듯이 우리나라 깊은 산중 절집 길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일주문이 세련되었다면 조산은 촌스럽지 않은가.
조산을 지나 모롱이를 몇 개 돌면 산 밑에 계단식 경작지가 나타나고 그 윗자락에 가정집 대문처럼 생긴 중문이 양옆에 막돌로 쌓은 담장을 끼고 손님을 맞이한다. 울타리며 계단식 경작지가 언뜻 보기에는 산골의 외딴 가정집과 흡사하다. 안으로 들어가 봐도 화려하거나 세련되지 않았다.
단청을 한 작은 법당들과 탑이 있어 절인가 싶지 요사나 부대건물은 오늘날 농촌에서도 보기 드문 판자집 풍경을 자아낸다. 가람 전체가 교란되어 있지만 언제 어떤 변란으로 이처럼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없어진 대웅전 대신 옛 지장전에 대웅전 현판을 달았고, 제자리가 맞는지도 모르는 탑 2개가 동서로 나뉘어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 안 불단에 안치돼 있는 석조지장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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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지장사는 대승의 이상향인 지장도량이다. 구전에는 신라 소지왕 7년(485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지만 동화사 보다 8년이나 먼저 지어진 절인 셈이다.
그러나 남아있는 석탑이나 여러 가지 석재들의 양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 어느 때쯤 창건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이곳에 절집이 들어선 연유를 설명하는 전설이 있다.
전설인 즉은, 지금의 대구 동촌에 효행이 극진하고 덕과 부를 겸비한 류정선이라는 처사가 살고 있었다.
처사는 풍수대가의 추천으로 지금의 대웅전(옛 지장전)자리를 아버지의 묘터로 점지해 놓았다.
후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묘터를 파헤치니 땅속에 사람모양과 흡사한 돌덩이 하나가 나타났다. 모두가 이상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상주인 류정선 처사 앞에 흰 소복을 한 미인 스님 한 분 나타나서 “나는 지장보살이다. 이 자리는 묘지가 아니다. 이곳에 절을 지어 많은 중생을 계도하여 참된 효자가 되어라” 하고는 사라졌다. 마침 인근의 팔공산 인봉에서 고행수도를 하고 있던 극달화상의 간곡한 설법으로 아버지의 매장을 단념하고 화장하였다. 처사는 바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그 자리에 절을 세운뒤, 사람모양의 돌덩이를 지장보살상으로 조각하여 모시고 절 이름을 지장사라고 하였다.
북지장사는 작은 절이다. 하지만 지장사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전설 얽힌 석조지장보살좌상(대구 유형문화재 제15호)이 제자리를 지키고, 보물 제805호인 대웅전(지장전)과 삼층석탑 2기(대구 유형문화재 제6호)가 눈길을 끄는 절집이다.
석조지장보살은 현재 대웅전 안에 봉안되어 있다. 본래 대웅전 뒤편 땅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옮겨 놓았다. 지금의 대웅전 건물은 본래 지장전이었다. 대웅전이 파괴되자 지장전에 대웅전 현판을 갈아 달았다. 졸지에 지장보살이 석가여래에게 보금자리를 내어준 꼴이 되었다. 그나마 쫓겨나는 신세는 면하고 가장자리를 얻어 둥지를 틀었다.
북지장사 대웅전.
지장보살은 소발을 하고 있으며, 왼손에 보주를 얹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놓은 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머리형태와 손에 쥐고 있는 물건으로 볼 때 지옥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지장보살임에 틀림없다. 법의는 양어깨를 덮은 통견을 하고 있다. 옷주름 조각선이 가늘고 형식화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온화하고 단정한 자태로 미루어 통일신라말기에 조성된 듯 한 불살상이다.
지장보살을 품에 안고 있는 대웅전은 보물답게 평면구성과 짜임새가 아주 이채롭다. 전체적으로 보면 반가의 정자를 연상시키면서 목탑의 변형으로 보이기도 한다. 정면을 1칸으로 하고 측면을 1.5칸으로 하여 앞보다는 옆의 폭을 넓게 하여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단칸이다 보니 기둥사이의 간격이 넓어 창방과 평방이 휘어져 내려오는 것을 방지하고 짜임새를 주기위하여 네모진 사이기둥을 세웠다. 기둥에 의해 나누어진 각 벽면에는 문얼굴을 짜고 문짝을 달았지만 가운데 쌍여닫이로만 출입할 수 있다.
기둥과 지붕 사이에는 다포계의 공포를 짜 올렸다. 앞면과 뒷면에는 4출목에 여섯 틀의 공포를 올렸고, 폭이 더 넓은 옆면에는 오히려 그 수가 적은 다섯 개만 올려, 앞이 더욱 화려하면서 규모 작은 몸채에 지붕이 이례적으로 커 보인다.
작은 집을 크게 보이게 하려는 목수의 생각이 스며있다.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하고 처마 밑은 깊어 보이지만 가분수 꼴이 되어 왠지 불안해 보인다. 혹시나 있을 지붕의 내려 앉음과 불안한 느낌을 해소하기 위해 활주를 세워 처질 듯 한 추녀머리를 받친 것이 특색이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대웅전 처마아래에 있는 `지장사유공인불망비(地藏寺有功人不忘碑)’ 보라. 조선시대가 불교를 얼마나 탄압했는지 실상을 적고 있다.
북지장사 스님들은 종이를 만드는 부역을 했던 모양이다. 글귀 중에 `절의 스님들이 종이를 만들어 관가에 바치는데, 아! 아! 그 수고로움이 견디기 어려워 한 가닥의 머리카락으로 천근의 무게를 지탱하는듯하여 신라시대의 고찰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 아침저녁을 다투는 지경이다’라는 애절한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