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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 /한길아트
반투명의 습자지에 연필로 꾹 눌러 그림을 본떠본 사람은 알 터이다. 모사(模寫)에 힘입어 사물의 크기와 윤곽, 특징을 정확히 집어내는 것만으로도 드로잉이 얼마나 힘차게 살아나는지. 눈의 어림대중과 손놀림만으로 얼키설키 그려낸 스케치에 견줄 바 아니다.
서툰 손재주를 가려주던 이런 습자지의 권능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미술관에 걸린 16, 17세기 서양 화가들의 그림 앞에 주눅들지 않을 재간이 없다. 옷주름의 굴곡진 이랑 마디마디는 물론 인물의 솜털까지 생생하게 살려낸 정밀 묘사는 차라리 섬뜩할 지경이다. ‘어떻게 저런 묘사가 가능할까’라는 경외에 찬 의문은 너무도 자연스런 찬탄이다. 사진기가 없던 시절, 대가들의 손은 그래서 ‘신이 내린 축복’이라 했다.
그러나 여기 그 갈채에 어깃장을 놓는 사람이 있다. 영국 팝아트의 기수 데이비드 호크니는 어느날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고 대가들의 감춰진 비밀을 헤집기 시작했다. ‘명화의 비밀’은 그가 지난 2년간 추적하고, 파헤치고, 수집한 성과물이다. 호크니는 르네상스 후기 이후 사실주의의 극치를 보여준 대가들 작품이 천재성의 산물이 아니라 실상은 거울, 렌즈 같은 광학도구에 힘입은 기술의 개가라고 단언한다.
이 책은 탄생 동기부터 흥미롭다. 어느날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앵그르(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던 호크니의 머리에 뭔가 퍼뜩 스쳤다. 선을 긋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빠르면서도 정확하게 그려낸 앵그르의 그림에 어떤 비밀이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는 예감. 혹시 이미지를 베낀 건 아닐까. 그는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이용해 간결하고 빠르게 그림을 모사하던 미국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을 떠올렸다.
이렇게 시작된 호크니의 연구는 베르메르, 렘브란트, 반 아이크, 할스 같은 플랑드르 화파의 대가들이 사진처럼 정확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 거울과 렌즈를 사용한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판박이 그림의 비밀을 벗겨보니, 렌즈를 통해 3차원 사물의 이미지를 벽면 같은 2차원 평면에 투영한 다음 그 이미지를 종이에 그대로 따라 그렸더라는 주장이다. 그는 카라바지오, 베르미어, 할스, 벨라스케즈, 샤르댕 등 16, 17세기 작가들이
15세기부터 19세기 사이 작품을 살피던 그는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집어낸다. 그림의 사실성이 점진적으로 진화했다기보다는 어느 순간 갑자기 묘사가 치밀해지고 농밀해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 예로 미켈란젤로가 1509~12년에 그린 시스타니성당 천장화의 여인 얼굴과 1514~16년에 라파엘로가 그린 한 초상화를 비교한다. 비슷한 시기이지만 후자의 그림은 견줄 수 없을 만큼 정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솜씨의 격차가 아니라 렌즈의 은덕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적어도 15세기 무렵에 거울과 렌즈가 분명히 존재했고, 이를 이용한 새 기술이 화가들 사이에 전염병만큼이나 빠르게 퍼져나갔다는 가설을 세웠다.
물론 모든 화가들이 렌즈를 사용했다는 건 아니다. 사진기가 발명되기 전까지 화가들은 그저 ‘진짜처럼 보이는 효과’를 얻기 위해 렌즈를 다양하게 응용했다는 숨겨진 사실을 들추고 있을 뿐이다.
미술사를 새로 써야 할지도 모를 호크니의 이런 주장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과학자, 미술사가, 예술관장들의 입씨름으로 이어졌다. “그럼 천재들의 작품이 예술이 아니라 사기였다는 말인가”.
그러나 저자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서양미술사학을 궁지로 내몰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인다. 그는 혹여 독자들이 품게 될지 모를 도그마를 경계하려는 듯 거장들의 예술성을 단칼에 매도하는 성급함 대신 확인된 사실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편집증 환자라 해도 무방할 만큼 작품들을 집요하게 비교하고 뜯어봤다지만, 이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필연적 과정으로 이해될 뿐이다.
실증적 자료로 쓰인 거장의 작품들이 원색 그대로 빼곡히 담긴 이 책은 무엇보다 진실 탐색이 가장 큰 효용이지만 동시에 범부의 ‘습자지 콤플렉스’에 대한 위안이기도 하다.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보면 각 장마다 시원하게 박힌 그림들을 몇번이고 뚫어지게 보지 않을 수 없다. 대조, 확인을 위한 것이지만 이 책이 안기는 또다른 즐거움이자 소득이다. 남경태 옮김. 6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