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이 허공에 못을 박지 말아라” / 종광 스님
임제 스님, 왕상시 간청에 법석 오르다
상당법문 통해 진리본질 명확히 드러내
진리는 입을 여는 순간 곧 바로 그르쳐
임제 스님의 할은 사량과 분별 끊어내는 활발발한 방편이다.
선불교는 역사적인 질곡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또 이런 상황을 견뎌내야 하는 백성들의 입장이라면 하루하루가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급박한 시절에 성불(成佛)을 하려면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수행해야 한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백성들 입장에서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이때의 불교는 고통에 빠진 사람을 지금 당장 위로하고 고통에서 건져내기 위해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부처가 돼야 합니다. 그것이 선불교의 정신입니다.
상당(上堂)
앞 강의에서 행록의 중요한 부분만을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강의부터는 상당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제록은 서문(序文), 상당(上堂), 시중(示衆), 감변(勘辨), 행록(行錄), 탑기(塔記) 순으로 돼 있습니다.
이중에서 상당은 ‘임제록’의 가장 핵심입니다. 임제 스님의 법문이기 때문입니다.
큰스님들이 법문을 하게 되면 대개 법좌(法座)에 올라 하게 됩니다.
그래서 큰스님들의 법문을 상당법문이라고 합니다.
상당에서는 종지(宗旨)를 거량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대중들에게 깨달음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府主王常侍가 與諸官으로 請師陞座하니 師上堂云,
山僧이 今日에 事不獲已하야 曲順人情하야 方登此座하나
若約祖宗門下하야 稱揚大事인댄 直是開口不得이라
無你措足處니라 山僧이 此日에 以常侍堅請이니 那隱綱宗이리오
還有作家戰將하야 直下에 展陣開旗麽아 對衆證據看하라
해석) 진주부의 주인인 왕상시가 여러 관료들과 더불어 임제 스님을 청해,
법문해 주실 것을 청했다. 이에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산승이 오늘 부득이하게 인정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올랐으나
만약 조사들의 전통에 따라서 큰일을 설명하여 드러내려고 해도
곧바로 입을 열어 말할 수 없으며, 그대들 또한 발붙일 곳이 없다.
그런데 오늘 상시가 산승에게 간청을 함으로 어찌 근본종지를 감출 수 있겠는가.
따라서 만약 지혜로운 이가 여기 있다면 전쟁터의 장수처럼 곧바로 진을 펼치고
깃대를 꽂아 스스로의 경지를 펼쳐 보여 대중에게 그 증거를 제시해 보도록 하라.”
강의) 부주(府主)하는 말은 진주부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중국의 석가장입니다. 당나라 말기가 되면 군벌들이 각 지방에서 세력을 크게 떨칩니다.
왕상시도 그런 군벌 중에 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조주 스님의 어록에는 진주부의 주인이 조왕으로 나옵니다.
이걸 보면 아마도 임제 스님 때까지는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조금 남아있어
스스로 왕이라고까지는 부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상시는 중앙정부의 벼슬인데,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벼슬입니다.
산승(山僧)은 임제 스님이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말입니다.
불획이(不獲已)는 부득이란 뜻입니다. 조종문하(祖宗門下)는
조사선의 전통에 따라 말하자면, 즉 달마대사로부터 나에게 이르기까지
전해진 근본종지에 따라 말하자면 이런 의미입니다.
칭양대사(稱揚大事)의 대사는 일대사(一大事), 혹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말합니다.
일대사인연은 ‘법화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일대사인연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열어 보이시고 깨닫게 해
중생들을 진리 자체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바로 일대사인연입니다.
그래서 일대사인연을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고 합니다.
칭양(稱揚)한다는 말은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또 개구부득(開口不得)은 입을 열어서는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진리의 당체를 설명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진리는 팔만사천리로 날아가 버리고
모든 것을 그르치게 됩니다. 부처라고 말해도 틀리고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라고
설명해도 맞지 않습니다. 선어록에서는 이를 무공철추(無孔鐵鎚)라고 표현합니다.
구멍 없는 쇠망치라는 뜻입니다. 또 진리를 말해 준다한들 듣는 사람도 발 디딜 곳이 없습니다.
진리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인 까닭입니다.
말로 전해 줄 수도 없을 뿐더러 말해줘도 말로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작가(作家)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무언가를 이룬 사람을 뜻합니다.
여기서의 의미는 지혜가 있는 사람, 혹은 눈 밝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임제 스님은 만약 이런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면 전쟁터의 장수가 진을 짜고
깃발을 꽂듯이, 당당하게 나와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라고 말합니다.
한번 거량(擧揚)을 걸어와 보라는 뜻입니다.
전장의 장수라는 용어에서 전쟁과 군웅할거의 살벌한 시대상을 읽을 수 있지만
용맹한 선의 정신을 말해주는 생동감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선, 특히 간화선을 공부함에 있어 3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심(大疑心)입니다.
대분심은 내가 본래 부처인데 왜 깨닫지 못하고 번뇌와 고통 속에 살고 있는가에 대한
분한 마음입니다.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 전쟁에 나온 장수와 같이 용맹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깨닫겠다는 결기를 지녀야 합니다.
僧問, 如何是佛法大意오 師便喝한대 僧이 禮拜어늘
師云, 這箇師僧이 却堪持論이로다 問, 師唱誰家曲이며
宗風은 嗣阿誰오 師云, 我在黃檗處하야 三度發問하야 三度被打니라
僧이 擬議한대 師便喝하고 隨後打云, 不可向虛空裏釘橛去也니라
해석) 어떤 스님이 임제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임제 스님이 곧바로 ‘할’을 했다. 그 스님이 예배를 하자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이 스님과는 불법을 논할 만하구나.” 다른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누구의 가풍을 노래하며 누구의 종풍을 이었습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내가 황벽 스님의 처소에 있을 때 세 번 질문하고, 세 번 얻어맞았다.”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 스님이 곧바로 ‘할’을 하고 뒤이어 내리치면서 말씀하셨다.
“쓸데없이 허공에 못을 박으려 하지 말아라.”
강의) 드디어 임제 스님의 할(喝)이 나옵니다.
귀가 멍해지도록 갑자기 지르는 고함입니다.
할의 역할은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을 끊는 것입니다.
오래 전, 당시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백양사 방장이셨던 서옹 큰스님이 당시 영결사를 하시다가 법어 말미에 할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돌아가신 분에게 고함을 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뜻을 따져보는 것은 임제 스님이 말한 것처럼 허공에 못을 박는 허망한 짓입니다.
그럼에도 당시 할의 의미를 살펴본다면 영가가 지니고 있을 억울함,
또 이생에서의 집착(執着)이나 반연(攀緣), 원망(怨望)과 분노(憤怒)를
모두 떨어버리라는 방편이었을 겁니다.
임제 스님의 가풍을 물어보던 스님이 황벽 스님으로부터 가풍을 이어받았다는
임제 스님의 대답에 머뭇거립니다. 아마도 무언가 반박거리를 찾고 있었을 겁니다.
사량과 분별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번뇌와 망상입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은 고함을 지르고 주장자를 내리치며 이를 그 순간에 바로 끊어버립니다.
그리고 허공에 못을 박는 따위의 허망한 짓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有座主問, 三乘十二分敎가 豈不是明佛性가 師云, 荒草를 不曾鋤로다
主云, 佛豈賺人也리오 師云, 佛在什麽處오 主無語어늘
師云, 對常侍前하야 擬瞞老僧이로다 速退速退하라 妨他別人請問이니라
해석) 어떤 좌주가 질문했다.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어찌 불성을 밝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거친 풀밭에 호미질도 하지 않았구나.”
좌주가 다시 말했다. “부처님이 어찌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그 부처가 도대체 어느 곳에 있느냐?”
좌주가 말을 못하자 임제 스님이 말했다. “상시 앞에서 노승을 속이려 하지 말고
속히 물러가라. 다른 사람이 법을 묻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
강의) 앞의 스님이 허망하게 물러나자 경전에 해박한 좌주가 나섭니다.
좌주는 대개 경을 연찬(硏鑽)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아마 강사 스님 정도로 불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좌주가 말합니다. “삼승십이분교가 어찌 불성을 밝힌 것이 아니냐.”
불법의 대의가 이미 경전 속에 다 있는데 굳이 따로 설명 들을 일이 있겠느냐는 그런 말입니다.
여기서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는 경전 속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중국에는 인도에서 각종 경전이 중구난방으로 들어오자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를 교판(敎判)이라고 합니다.
삼승은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을 말하고
십이분교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을 내용과 형식에 따라
12가지로 분류해 놓은 것을 뜻합니다.
어찌됐든 삼승십이분교는 부처님이 평생에 걸쳐 설하신 가르침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좌주의 질문에 대한 임제 스님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거친 풀밭에 호미질도 하지 않았구나.” 한마디로 형편없다는 뜻입니다.
또 한편으로 경전에 대한 지식을 수행이나 깨달음으로 착각하는
좌주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경전은 방편이 될지언정
그 자체로 깨달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좌주는 알지 못하고
“부처님이 어찌 사람을 속이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합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은 “네가 말하는 부처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며 제대로 한방을 먹입니다.
좌주가 말을 잇지 못합니다. 좌주의 근기를 생각하면 당연합니다.
그런데 임제 스님이 하신 질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네가 바로 부처이며 불성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스스로가 부처인데 그것은 알지 못하고 경전 속에서 허깨비와 함께 춤추고 있는
좌주를 일깨우기 위한 자비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