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柳)씨
류씨(柳氏)는 황제 헌원씨(軒轅氏)의 후예로 전하며, 후손 신갑(辛甲)이 기자조선 때 동래하여 평양의 일토산(一土山) 아래서 은거하면서 <일토(一土)>를 따서 왕씨(王氏)로 변성하고 이름을 조명(祖明)이라 고치고 단군왕조에서 치민장(治民長)이 되어 문장과 도덕으로 명성을 떨쳤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쫓겨 평양을 버리고 마한에 은둔하였는데, 당시 <일토초가자왕(一土草家者王)>이라는 동요가 나라안에 떠돌자 이를 두려워한 기준이 일토산 아래에 살던 왕씨들을 모조리 잡아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수긍(受兢)의 34세손 왕몽(王蒙)이 아들 8형제 중 일곱째 아들 [임]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구했는데, 신인(神人)이 나타나 성(姓)을 세번 바꿔야 후손들이 크게 번성한다고 계시하자 왕(王)자의 변형인 전(田), 신(申)으로 고쳤다가 다시 차(車)로 바꾸고 자기 이름을 무일(無一)로하고 아들 [임]은 신을(神乙)로 고쳤다.
그 후 무일의 33세손 승색(承穡)이 신라 애장왕때 좌상으로 국정을 다스리다가 왕의 숙부 언승(彦昇)이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헌강왕이 되므로 아들 공숙(恭叔)과 함께 헌강왕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자 황해도 구월산 아래 묵방동에 은신하고 조모님의 성인 양씨(楊氏)를 모방하여 류(柳)로 고치고 이름을 색(穡), 아들은 숙(叔)으로 고쳤다.
색의 6세손 해(海)가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사재(私財)를 털어 차(車) 1천량을 제작, 군량과 함께 보급하여 고려 창업에 공을 세우고 익찬벽상공신에 올랐으며, 태조 왕건은 <이차위달(以車爲達:차로써 목적을 달성)>의 뜻으로 차달(車達)이란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차달의 두 아들 중 장남 효전(孝全)은 본성인 차씨(車氏)를 잇게하여 종적을 연안(延安)으로 하게 했으며, 차남 효금(孝金)에게는 류씨(柳氏)를 계승하고 본관을 유주로 하였으나 지명의 변천으로 유주가 문화로 개칭됨에 따라 문화(文化)로 칭관하게 되었다
고흥 류씨 (高興柳氏)
고흥(高興)은 전남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려초에 고이부곡이라 하였으며, 1285년에 고흥현,
1914년 고흥군으로 개칭하였다.
고흥류씨(高興柳氏)는 고려 개국후 흥양지방의 호장이었던 류영(柳英)을 시조로 하고, 그의 7세손 청신(淸臣)이 고려 충선왕 때 고흥 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관향을 고흥으로 하게 되었다.
인맥으로는 청신의 손자 장(莊)과 탁(濯), 준(濬)이 유명했다. 장(莊)은 고려 말 어지러운 정국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부모와 함께 천안으로 내려가 일찍이 할아버지 [청신]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얻어온 호도 번식을 적극 장려하여 오늘날 호도는 천안의 명물이 되었으며, [탁]은 <장생포곡>을 지어 악부(樂府)에 올렸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웠던 [준]은 조선이 개국되자 고흥백에 봉해졌으며 한편 맏아들 습(濕)은 태종때 예(禮)·형(刑)·병(兵)·이조의 전서를 역임했고 세종조에서는 우군원수가 되어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그의 증손 충서(忠恕)는 임진왜란 때 권율의
막하에서 무공을 세우고 대를 이어 가문을 명문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어영대장으로 구월산 적을 토벌하여 형조판서에 오른 세웅(世雄)은 흥양군에 봉해졌고, [어우야담]으로 유명한 몽인(夢寅)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조선중기의 설화문학의 대가였다.
한말에 와서는 고흥류씨는 고종 때 척양척왜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중교(重敎)와 항일투쟁에 불구가 되었던 홍석(弘錫), 김홍집의 친일내각 구성에 항거했던 인석(麟錫)과 같은 훌륭한 인물을 배출했고, 철종때 가재를 털어 흥호학교를 설립했던 중권(重權)은 3·1운동 때 유관순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하다가 아내와 함께 순절하였으며, 중화(重和)는 의병대장으로 80여명의 동지들과 은진(恩津) 왕성골에서 왜병을 크게 섬멸하여, 성리학과 예학으로 명성을 떨쳤던 영선(永善)과 함께 고흥류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흥류씨(高興柳氏)는 남한에 총 15,296가구 64,4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
강원도 춘성군 남면 일원, 전남 고흥군 고흥읍 일원, 전북 정읍군 북면, 입암면 일원
충남 천원군 목천면, 광덕면 일원, 전북 고창군 고수면, 신림면, 고창읍 일원
문화 류씨 (文化柳氏)
문화(文化)는 황해도 신천에 속한 지명으로 본래 단군시대의 당장경이었다. 그 후 고구려 때 궐구현으로 고쳤으며 고려초에 유주로 개칭하였고 고려 고종 때 문화현으로 승격하여 조선 때도 그대로 계승되었고, 1895년(고종 32) 신천군에 편입, 문화면이 되었다.
류씨의 유래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류차달의 아들 효금[孝金]으로부터 번성한 후손은 6개의
본관으로 분적되는 데 류차달의 10세손 자성[資成]이 풍산류씨로, 10세손 성간[成澗]이 서산류씨로, 10세손 양재[良梓]가 전주류씨로, 10세손 인비[仁庇]가 진주류씨로, 13세손 해 [해]가
선산류씨로 되었다
문화류씨의 인맥으로는 소감 총(寵:시조의 6세손)의 아들 공권(公權)이 고려 때 정당문학과 참지정사 등을 지내고 문장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언침(彦)과 택(澤)으로부터 크게 두갈래로 갈라져서 문화류씨의 양대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상장군 언침(彦 )의 후손에는 판관 안택(安澤)의 아들 관(寬)이 유명했다. 그는 고려조에서 20년간 벼슬하였고, 조선이 개국된 후 4대의 왕조를 거치면서 35년간을, 도합 55년 동안 주요관직을 지낸 현신으로 명망이 높았다. 특히 그는 우의정에 오를 때까지도 동대문 밖에서 울타리도 없는 초가에 살며 청백함으로 역사를 수놓았다.
관(寬)의 아들 중 계문(季聞)은 세종 때 판한성부사와 형조판서를 거쳐 개성부 유수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권은 참판을 지내고, 손자 담년(聃年)은 중종때 병조판서를 거쳐 한성부 판윤에 올랐다.
부자정승으로 유명한 상운(尙運)은 좌랑 성오의 아들로 대사간과 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그의 아들 봉휘(鳳輝)는 영조때 좌의정에 이르렀다.
1415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던 정현(廷顯)은 문화공 진(鎭)의 아들로 세종이 즉위하자 삼군도통사로 일본 대마도 정벌에 참전했으며 1426년 다시 좌의정에 이르러 치사한 후 4일만에 죽었다.
사육신(死六臣)으로 유명한 성원(誠源)은 세종 때 급제하고 집현전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탄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공(思恭)의 아들 순(洵)은 연산군 때 영의정으로 중종반정에 공을세워 문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문장과 시부에 뛰어나 왕명으로 서거정, 노사신 등과 함께 연주시격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인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관(灌)은 태조 때의 우의정 양(亮)의 6세손이며 장령 정수(廷秀)의
아들로서 소윤이 일으킨 을사사화 때 정순붕의 탄핵을 받아 서천으로 유배 도중 과천에서
사사(賜死)되었다.
권신 윤원형의 세도에 아부하여 윤임 일파를 제거시키는데 성공한 정순붕은 관의 가족들을자신의 종으로 삼았는데, 갑이(甲伊)라는 관의 여종이 죽음을 무릅쓰고 복수를 하였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문화류씨(文化柳氏)는 남한에 총 63,885가구,
267,9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 전남 화산군 동면 언도리, 충북 제원군 청풍면 황석리, 전남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충북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 전북 남원군 수지면 초리, 충남 서산군 부석면 동사리, 전북 김제군 공덕면 황산리, 경북 달성군 다사면 방천동
진주 류씨 (晋州柳氏)
진주(晋州)는 경남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거열성인데 신라 때 거열주, 강주, 진주라 불리웠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진양도호부, 진주목으로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가 되었다.
진주류씨(晋州柳氏)의 시조 류정(柳挺)은 고려조에, 진강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진주를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2세 숙[淑]이 진녕부원군에, 3세 돈식(敦植)은 진원부원군에, 4세 홍림(洪林)은 평장사를 거쳐 진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홍림의 아들 [부]는 진흥부원군, 손자 [간]은 진성군에 봉군되어 6대(代)가 현달하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그 외에도 조선 세조 때 별시문과에 급제한 문통(文通)이 사간을 거쳐 상주목사를 지냈으며 [청천유고]를 저술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맏아들 인귀(仁貴)와 막내 인숙(仁淑)이 뛰어났다.
그밖의 인물로는 조의(祖誼)의 아들 진(縝)이 형조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쳐 태천,단천, 평창 등지의 군수를 지냈으며, 선조때의 명신 근(根)은 호성이등공신으로 진원부원군에 봉해지고 대제학에 이어 좌찬성에 올랐으나 광해군 때 폐모론을 반대하였다 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
인조반정의 공신 구는 근(根)의 손자로서 진주군에 봉해졌으며, 영(潁)의 아들 명견(命堅)은 숙종 때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냈다. 그의 아우 명천(命天)은 숙종 때 예조판서와 판중추부사를 지냈으나 인현왕후를 모해하려 했다는 무고로 아우 명현(命賢)과 함께 지도(智島)에 귀양갔다 돌아와 벼슬의 뜻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류씨(晋州柳氏)는 남한에 총 17,667구, 72,8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진현리, 경남 합천군 묘산면 가산리, 야로면 하빈리, 경북 상주군 은척면 두곡리, 경남 거제군 둔덕면 방하리, 경남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 경남 합천군 봉산면 봉계리, 황해도 신청군 남부면 서부리
전주 류씨(全州柳氏)
전주(全州)는 전북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 마한의 원산성에서 유래하여, 백제시대에 완산 또는 비사벌, 비자화 등으로 불리우다가 555년에 완산주로 하였다. 그 후 경덕왕 때 전주로 고쳤고, 조선조에 와서는 태조가 선조의 고향이라 하여 완산유수부, 전주부로 개칭하였다가 1949년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전주시로 개편되었다.
전주류씨(全州柳氏)는 문화류씨에서 분적된 계통으로 대승공 류차달의 9세손 순(淳)의 여섯째 아들 양재[良梓]의 증손 습(濕)이 고려말에 전주로 이거하여 완산백에 추봉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로 하고 전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1세조 습의 아들 5형제 중 둘째 극서(克恕)가 고려조에서 보문각직제학과 지제교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빈(濱)과 손자 의손(義孫)이 크게 현달하여 명문의 위치에 올랐다.
한편 판관 경손(敬孫)의 손자 숭조(崇祖)는 성리학을 깊이 공부하여 도학정치를 실현하려는최초의 학자로서 문하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대학자를 배출하여 명성을 떨쳤다.
정유재란 때 연안부사로 활약했던 영길(永吉)은 예조참판에 이르러 치사(致仕)했고, 그의 아우 영경(營慶)은 선조 때 전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선조 말에 영창대군을 광해군에 대신하여 세자로 옹립하려 했으나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경흥에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1985년 경제 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주류씨는 남한에 총 11,365가구, 47,383명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풍산 류씨 (豊山柳氏)
풍산(豊山)은 경북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하지현인데, 경덕왕 때 영안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때에 순주(順州)로 되었다가 후에 지금의 안동군 풍산면에 이르고 있다.
풍산류씨(豊山柳氏)는 고려 때 수주(경기도 부평) 호장을 지낸 류절(柳節)로부터 세계가 이어지고 있으며, 일설에는 문화류씨에서 분적된 계통으로 전한다.
풍산류씨는 1세조 절(節)의 7세손 종혜(從惠)가 조선 태조 때 공조전서를 지내고, 조부 난옥(蘭玉)과 부친[보]가 지어놓고 적선을 베풀었던 관가정(觀稼停)이 있는 하회 마을에서 풍산류씨의 가맥을 계승했다.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공지(公智)의 손자 종개(宗介)가 임진왜란때 전피현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중영의 맏아들 운룡(雲龍)은 인동 현감을 거쳐 풍기 군수로 나가 특히 풍화정치에 선정을 많이 베풀어 유능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아우 성룡(成龍)은 선조조의 명상으로 문장과 학행이 뛰어났으며, 역사의 최대 난국인 임진왜란을 맞아 위국(爲國)을 수습하는데 중임을 맡아 불멸의 훈공을 남겼다.
1542년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외가에서 태어난 성룡(成龍)은 천성이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어려서부터 벼슬하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옮겨 다니면서도 글공부에 열중했다.
스승인 퇴계가 그를 평하기를 '이 사람은 하늘이 내셨다' 라고 하였고, 선조(宣祖)는 '바라보면 자연 경의가 생긴다', 이항복(李恒福)은 '이 분은 어떤 한가지 좋은 점만을 들어 이름 지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회은집]에는 '이원익은 가히 속일 수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가 없다'고 기록하였다.
25세 때 문과에 급제한 성룡은 승문원의 부정자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영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항상 가난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다
성룡의 아들 진(袗)은 광해군때 세마(洗馬)가 되었고, 인조반정후 봉화 현감을 거쳐 지평을지냈으며, 그의 아우 초(初)는 광국호성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한말에 와서는 한일합방의 울분으로 시(詩) 한 수를 짓고 자결했던 도발(道發)이 19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받았고, 신영(臣榮)은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문을 지어 보내고 음독자결하므로써 문벌과 충절의 가문인 풍산류씨의 가통을 살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산류씨(豊山柳氏)는 남한에 총 2,946가구, 11,65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
경북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 광덕동, 경북 안동군 임하면 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