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는 한민족의 역사 경전이면서
동시에 종교 경전이요 문화 경전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우리 역사, 문화의 원형을 밝혀 주는 보배로운 사서이다. 특히 환단고기는 다른 사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역사 사실이 많이 실려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의 해제 편에서는 ‘환단고기에서만 전해 주는 새로운 역사 진실’이라고 하여 이를 52가지로 정리하여 밝혀 주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환단고기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6 국선소도의 유래에 대해서 밝혀 준다!
소도제천은 나라 경영의 근본이었다!
庚寅元年(경인원년)이라.
帝命五加(제명오가)하사 擇十二名山之最勝處(택십이명산지최승처)하사
設國仙蘇塗(설국선소도)하실새 多環植檀樹(다환식단수)하시고
擇最大樹(택최대수)하사
封爲桓雄像而祭之(봉위환웅상이제지)하시니 名雄常(명웅상)이라.
재위 원년인 경인(환기 5307, 신시개천 2007, 단기 443, BCE 1891)년에 도해 단군께서 오가에게 명하여 12명산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을 택해 국선소도國仙蘇塗를 설치하게 하셨다. 그 둘레에 박달나무를 많이 심고, 가장 큰 나무를 택하여 환웅상桓雄像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셨다. 그 이름을 웅상雄常이라 하셨다. ( 『단군세기』 11세 단군 조)
蘇塗祭天(소도제천)은 乃九黎敎化之源也(내구려교화지원야)라
소도蘇塗에서 올리는 제천 행사는 바로 구려 교화의 근원이 되었다. (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소도에 대해서는 기존의 역사서에서도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내용이 단편적이라 소도 문화의 전모에 대해서 파악하기가 힘들다. 먼저 국어사전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소도는 삼한 때에,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지聖地. 여기에 신단神壇을 설치하고, 그 앞에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워 제사를 올렸는데, 죄인이 이곳으로 달아나더라도 잡아가지 못하였으며, 후대 민속의 ‘솟대’가 여기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한다. (국어사전)
환단고기에는 소도蘇塗에 관한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우선 소도는 제천祭天의 성지이다. 소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제천 문화를 알아야 한다. 제천은 태고 시대부터 인류가 천상에 계신 삼신상제님을 공경하고 받든 의식이다. 환단고기에서는 환국 때부터 환인이 천신(상제님)에 대한 제사를 주재했다고 한다(主祭天神). 이로 보아 제천 문화는 적어도 9천 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천의 성지인 소도 역시 그것과 궤를 같이한다.
고대 유적을 탐사해 보면 전 세계 곳곳에서 소도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1987년에 일본 오키나와 남서쪽 요나구니섬에서 발견된 해저 피라미드는 약 1만 년 전의 건축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을 150번 이상 탐사한 영국의 헨콕은 “이곳은 대규모 종교 의식이 행해진 장소 같다. 이 구조물이 만 년 전 유적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역사를 통째로 뜯어고쳐야 한다.”라고 했다. 최근 2018년에는 인도네시아 서부 자바의 파당산(Gunung Padang)에서 거석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인도네시아 발굴팀은 “파당 유적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라고 주장했다. 발굴팀은 오래된 구조물의 경우 그 연대를 28,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했다.
소도에서 올리는 ‘소도제천蘇塗祭天’은 고대로부터 국가 경영의 근본이었다. 11세 도해 단군 때 와서 소도 문화는 국가 차원에서 체계화, 대중화되었다. 도해 단군은 전국의 12명산에 국선소도를 세우게 하셨다. 국선國仙이라는 말에서 이 12소도는 국가에서 직접 세우고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도해 단군은 소도 둘레에 박달나무를 많이 심게 하였는데, 초대 단군이 ‘박달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제를 올린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배달을 세운 환웅천황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는데, 그 신단수 역시 ‘박달나무 단’ 자를 담고 있다. 따라서 소도와 같은 종교적 성지는 이미 배달 시대부터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도해 단군은 소도에 심은 박달나무 가운데 가장 큰 나무를 환웅상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웅상雄常이라 하셨다. 초상화나 사진이 없던 그 시절에 나무를 환웅천황이 응감하여 계신 곳으로 여기고 모신 것이다. 도해 단군 때부터 환웅을 모시는 문화가 대중화되었다. 그 흔적이 불가에 남아 있는데 오늘날 사찰에서 누구나 만날 수 있는 대웅전大雄殿이 그것이다.
소도와 함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문화 코드는 경당扃堂이다. 경당은 소도 곁에 세워진 학교로서 나라의 젊은이들을 뽑아서 삼신상제님을 받들고 지키는 성직자로 길러 냈다. 환단고기에는 소도 문화의 발원과 전모에 대해서 밝힐 수 있는 여러 기록이 실려 있다.
17 고조선이 하나라 멸망과 은나라 건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단군조선과 중국 하夏·은殷·주周의 상호관계를 밝혀 준다!
是歲冬에 殷人이 伐夏한대
其主桀(기주걸)이 請援(청원)이어늘
帝以邑借末良(제이읍차말량)으로 率九桓之師(솔구환지사)하사
以助戰事(이조전사)하신대
湯(탕)이 遣使謝罪(견사사죄)어늘 乃命引還(내명인환)이러시니
桀(걸)이 違之(위지)하고 遣兵遮路(견병차로)하야 欲敗禁盟(욕패금맹)일새 遂與殷人(수여은인)으로 伐桀(벌걸)하시고 密遣臣智于亮(밀견신지우량)하사
率畎軍(솔견군)하시고 合與樂浪(합여낙랑)하사
進據關中邠岐之地而居之(진거관중빈기지지이거지)하시고
設官制(설관제)하시니라.
이해 겨울, 은殷나라 사람이 하夏나라를 치자 하나라 왕 걸桀(BCE 1818~BCE 1767)이 구원을 청하였다. 13세 흘달 단군 임금께서 읍차邑借 말량末良에게 구환(동이)의 병사를 이끌고 전투를 돕게 하셨다.
이에 탕湯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군사를 되돌리라 명하셨다. 이때 걸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보내어 길을 막고 맹약을 깨뜨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마침내 은나라 사람과 함께 걸을 치는 한편, 은밀히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보내어 견군畎軍을 이끌고 낙랑樂浪 군사와 합세하여 관중의 빈邠⋅기岐 땅을 점령하여 주둔시키고 관제官制를 설치하셨다. ( 『단군세기』)
고대의 요순 시대 때부터 중국은 진명천자眞命天子 단군천황의 명을 받는 제후국이었다. 하나라 우임금 역시 동방 조선으로부터 ‘홍범구주’를 전수받아 백성을 홍수의 피해로부터 구원해 냈고 새로운 왕조를 건국할 수 있었다. 하나라의 멸망과 은나라의 건국에도 단군조선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역사의 나침반이 하나라와 은나라 사이에서 요동칠 당시, 동방 천자가 하나라의 손을 들어주었을 때 은의 탕이 무기력해졌고, 반대로 은나라의 손을 들어주자 비로소 은나라가 승리를 거두고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구환의 병사에서 구환은 구이九夷를 말한다. 구이는 동이東夷가 9개 종족으로 벌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중국 왕조의 개창사를 보면 중국은 동방 단군조의 천명을 받듦으로써만 그 역사의 종통권,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환단고기는 중국의 하夏·은殷·주周 왕조와 단군조선의 역학 관계를 잘 보여 준다. 그들이 단군조선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친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단군조선은 동아시아의 문화, 사상의 중심지였고 정치 제도의 종주국이었다.
18 신라 화랑 제도의 기원에 대해서 밝혀 준다!
화랑은 단군조선의 국자랑에서 유래했다!
戊戌二十年(무술이십년)이라 多設蘇塗(다설소도)하사 植天指花(식천지화)하시고
使未婚子弟(사미혼자제)로 讀書習射(독서습사)하사
號爲國子郞(호위국자랑)하시니라.
國子郞(국자랑)이 出行(출행)에 頭揷天指花(두삽천지화)하니
故(고)로 時人(시인)이 稱爲天指花郞(칭위천지화랑)이라.
재위 20년 무술(단기 571, BCE 1763)년에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으셨다. 미혼 소년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셨다. 국자랑이 밖에 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천지화랑이라 불렀다. ( 『단군세기』 13세 흘달 단군 조)
신라 삼국 통일의 원동력은 누가 뭐래도 화랑花郞일 것이다. 환단고기는 화랑의 기원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 준다. 단군조선 시대의 국자랑, 천지화랑에서 화랑이 나왔다. 국자랑이 소도 곁 경당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혔다는 문구로 보아 이들은 삼신상제님을 모시는 제천의 일꾼들이자, 우리 고유의 삼신 수행법을 실천하는 구도자들이었다. 국자랑들이 머리에 천지화를 꽂은 것처럼 신라의 화랑들은 머리에 깃털을 꽂았다.
국자랑의 기원은 배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 환웅이 백두산 신시에서 건국을 선포할 때 함께 온 제세핵랑군 3,000명이 역시 국자랑이었다. 환단고기에서는 이들이 삼신상제님을 모시는 삼랑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護守三神(호수삼신)하야 以理人命者(이리인명자)를 爲三侍郞(위삼시랑)이니 本三神侍從之郞(본삼신시종지랑)이오
三郞(삼랑)은 本倍達臣(본배달신)이니 亦世襲三神護守之官也(역세습삼신호수지관야)니라.
삼신을 수호하여 인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郞이라 하는데, 본래 삼신을 시종侍從하는 벼슬이다. 삼랑三郞은 본래 배달倍達의 신하이며,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을 세습하였다. ( 『태백일사』 「신시본기」)
삼국 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화랑 제도를 운영했다.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先人, 백제의 무절武節이 그것이다. 특히 고구려 조의선인의 경우 국가 상비군으로서 외적이 침입했을 때 든든한 안보 버팀목 역할을 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이 유명한 조의선인이었고 그들은 삼신 수행법을 실천하는 도인이었다.
화랑도는 대한해협 너머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환웅천황의 화상이 모셔져 있던 후쿠오카의 히코산英彦山에는 도사들이 마늘을 먹으며 도를 닦았다는 동굴 49(7×7)개가 있다. 그 도사들이 닦던 도를 수험도修驗道라 했는데 그 계율은 화랑도와 같았다고 한다(김향수, 『일본은 한국이더라』).
또 삼시랑三侍郞이라는 문구를 잘 살펴보면 일본의 사무라이侍의 원형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삼시랑의 삼三이 ‘사무’로, 랑郞이 ‘라이’로 변형되고 핵심 글자 시侍 자가 사무라이의 일본 글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랑의 전통은 다시 고려 시대의 선인仙人 또는 재가화상在家和尙, 윤관이 9성을 정벌할 때 있었던 항마군降魔軍 그리고 대몽 항쟁對蒙抗爭 때의 삼별초三別抄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 뒤로 명맥이 쇠잔하였으나 조선 말 동학이 출현하면서 30만 동학군으로 계승되었고, 참동학 증산도에 와서는 후천개벽을 준비하는 삼랑선三郎仙 조직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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