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처럼 환하게 일어나라’며 집들이 선물로 인기를 끌었던 성냥. 구한말 시절에 인천·부산항을 통해 중국·일본제 성냥이 밀려오면서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성냥은 1885년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 때 외교고문인 뮐렌도로프의 주선으로 1885년 11월 독일계 미국인 조셉 로젠바움이 서울에 성냥공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싼 값의 중국·일본제 성냥에 밀려 파산하고 중국 상인에게 넘겼다는 것.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술(記述)’이란 보고서에는 ‘1886년 인천 제물포에 외국인들이 성냥공장을 설립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제 성냥이 범람해 생산이 중단됐다’고 되어 있다. 서울과 인천 중 어느 곳이 먼저인지는 아직 불명확한 상태다.
기록이 남아 있는 최초의 성냥공장은 1917년 10월 4일 인천 동구 금곡동(당시 금곡리)에 세워진 ‘조선인촌주식회사(朝鮮燐寸株式會社·사진)이다. 일본인 가래영태랑(加來榮太郞)이 사장이던 이 회사는 압록강 하류 신의주에 부속 제재소를 두고 목재를 배편으로 들여왔다. 신의주와 평양에도 공장을 두었던 이 회사는 1921년 직원들을 괴롭히던 일본인 지배인을 쫓아내기 위해 동맹파업을, 1931년에는 여직공 170명이 임금삭감에 항의하는 동맹파업을 잇달아 벌였다. 일본인 감독의 모욕적인 대우에 항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1년에 550여명이 취업, 인천 극빈층을 먹여살리는 역할을 해 ‘동포를 사랑하면 수입 성냥 대신 조선제품을 사용하자’는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패동(佩童)’,‘우록표(羽鹿票)’,‘쌍원표(雙猿票)’ 등의 상표로 하루 2만7000갑(국내 소비량의 약 20%)씩 생산하면서 1950년대까지 존속했다. 뒤이어 1920년 8월 대구 금정동에 (주)동아인촌(東亞燐寸)성냥공장이 생겨 대구지역 토호였던 장직상(張稷相)이 사장을 맡았다.
성냥공장은 이후 전국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해방 이후 인천에는 한국·대한·조선·평안성냥공업사, 대구에는 왕자·백구·사슴표·공작·닭표성냥공장이 들어섰다. 1970년대에는 공장이 300여 개에 달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값싼 중국산 성냥과 일회용 라이터가 등장하면서 치명타를 입어, 지금은 경상북도 의성의 성광성냥 하나만 남았을 뿐이다.
<2011년1월14일자 조선일보에서 발췌>
기린, 유엔, 낙타, 향로, 비사, 아리랑... 이 단어들을 읽으시면서 혹시 떠오르는 물건 있으세요? 잘 모르시겠지요? 지나간 70~80년대 우리 생활 속에서 가장 가깝게 있던 통성냥, 곽성냥들 이름들입니다. 기린성냥, 유엔성냥, 향로성냥, 비사표 성냥. 이렇게 말하니까 금방 눈치 채시겠죠?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석유곤로를 사용하던 시절, 시골이든 도시든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하게 여겼던 물건입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것들이지만 아직도 아주 가끔은 통성냥을 만날 기회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이 성냥 브랜드들이 생산돼 들여오기도 하고, 중국에서 알성냥을 수입해와 국내에서 곽입(槨入)해 파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한 때 전국적으로 300개 넘게 있었던 성냥공장은 이제는 다들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가스렌지와 일회용 라이터의 등장과 함께 역사 저편으로 밀려나고 만것이죠. 더구나 싼 가격에 중국에서 들어오는 성냥들 때문에 이제는 국내에서 만들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80년대 초 성냥공장이 최대 호황을 누렸을 때, 공장마다 1억원 가까운 가격에 사들여 가동했던 반자동 성냥제조기(일명 윤전기)들도 애물단지 취급을 받다가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에 고철값으로 팔렸답니다.
그런데 국내에서도 아직 남아있는 성냥공장이 있습니다. 경북의성에 있는 5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성광성냥’입니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향로성냥이 생산됩니다. 경상도와 강원도에 꽤나 인기 있었던 성냥 브랜드라고 합니다.
한때 200명이 넘는 젊은 직원들이 있었던 이 공장은 요즘은 10명이 채 안되는 직원들이 성냥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도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한 동네 어르신들이고요. 한때 유행했던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표현은 이제는 ‘성냥팔이 소녀’ 같은 운명이 된 셈입니다.
요사이는 통성냥을 사려 해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골 가게나 장터에서나 찾을 수 있을까. 이마트 같은 대형 할인마트에서는 화재 위험성을 이유로 진열조차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냥 제조업자 입장에서 보면 정말 서러운 이야깁니다.
그래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중에는 여전히 성냥불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냥불 담배가 더 맛있다는 겁니다. 성냥불을 붙이고 연기를 막 빨아들였을 때 맡게 되는 그 유황냄새가 좋다나 어쨌다나요? 가끔은 맘에 쏙드는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면 ‘근사한’ 포켓용 성냥을 얻을 기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레스토랑이나 카페 성냥갑을 모아두었던 대학시절도 생각납니다.
과거 성냥장수가 골목을 돌면서 성냥을 팔고, 시장통에서는 알성냥을 살 수도 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경북의성에 남아있는 '성광성냥'으로 가보실까요?
전국 유일의 성냥공장ㅣ경북의성 성광성냥
- 집안의 신주단지 모시듯… 석유곤로, 부뚜막 위에 놓인 통성냥을 추억하며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 싼데이~”
“이거, 통성냥 한 통에 얼만지나 알아요? 부가세 더해서 겨우 550원 꼴인기라. 나 참, 요새 요구르트 한 병 값이 얼만데…. 그렇게 많던 성냥공장들이 다 문을 닫은 게 다 그 때문이야. 만들면 손핸데, 뭘. 내가 그래도 이걸 붙들고 있으니까 ‘그래도 좋은 시절이 다시 오지 않것나’ 이런 생각인줄 알아? 그게 아냐. 나마저 이걸 놓으면 이제 아무 것도 안남거든. 이제라도 정부가 나서서 이것을 보존한다 의미에서라도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게지.”
경북 의성에 있는 '성광성냥'의 손진국(70) 사장. 이제는 국내에 마지막 하나 남은 성냥공장을 붙들고 있는 그는 마음은 요사이 편치가 않다. 성냥공장이 희귀해지다 보니 마치 박물관 구경이라도 오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취재 요청이 쏟아지긴 하지만 그것마저 이제는 달갑지가 않다.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성냥공장이라고 해서, 방송국이다 신문사다 오겠다고 난리예요. 하지만 다 거절하고 있다는 거 아닌교. 그거 취재해서 나와봤댔자 나와봤자 공장 돌아가는데는 별 도움도 되는 것도 아니고, 이제 다 귀찮아.”
필자가 처음 성냥공장을 취재하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할 때만 해도 그래도 몇 개쯤은 더 남았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곳저곳 전화를 돌려보니 오로지 이곳뿐이란다. 몇 해 전까지 기계를 돌렸던 공장 두 곳도 결국 시절을 견뎌내지 못하고 공장 문을 닫거나, 중국으로 떠나버렸다. 겨우 남아있는데는 중국에서 알성냥을 수입해와 곽입(槨入)을 하는 공장이 경남 진영에 하나 남아있을 뿐이다. 1962년에 설립된 성냥협동조합도 1984년 일찍이 간판을 내렸고, 노동부가 내는 <한국직업사전>에도 ‘성냥갑 제조원’이란 직업은 이미 삭제된 지가 오래란다.
“나라 발전하니까 이제 이건 아닌기라”
유엔 팔각성냥, 기린표 통성냥, 비사표 갑성냥, 제비표 성냥…. 그 옛날 대장간 부뚜막 위에, 혹은 석유풍로 밑에, 안방 호롱불 아래에 정겹게 놓여 있던 그 성냥갑들을 이제는 여간해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시절이 되버렸다. 전기가 귀하던 때는 혹시 물에라도 젖을까 신주단지 모시듯 애지중지 했던 그 통성냥 말이다.
손씨가 오래전부터 만들어낸 통성냥 상표는 ‘향로성냥’과 ‘덕용성냥’이다. 이곳 경상도 지역과 강원도의 해안 지역에서는 향로성냥을 특히나 알아주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50년 넘게 긴 세월을 성냥공장과 함께해온 터라 손씨의 속내는 더 복잡해진 것이다.
“만들어봤댓자 계속 적자라요. 이제 종업원 수도 11명밖에 안되는데, 뭐가 신이 나겠어? 종업원들이라고 해봤자 뭐 성냥공장에는 아가씨들이 많은 줄 알겠지만, 지금은 오륙십 된 동네 노인들이 다지.”
그랬다. 과거 60, 70년대에는 이곳 성냥공장에서 젊은이들이 들끌었던 시절이 있었다.
성냥공장이 한국에 처음 생긴 것은 1880년대라지만, 1917년 일본사람들이 인천 금곡동에 세운 ‘조선인촌(朝鮮燐寸)’이 대량 생산을 하면서 성냥이라는 것이 일반인한테도 알려지게 됐다. 인천에 성냥공장이 처음 들어선 것은 압록강 쪽에서 목재 조달이 원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인촌도 당시에 신의주에 제재공장을 두고 나무를 공급 받았다. ‘성냥공장=인천’이라는 명성은 6·25를 전후해서 금곡동과 송림동·화수동 일대 주택가에 성냥공장이 즐비하게 들어섰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래도 성냥의 ‘전성기’를 말하라면 아무래도 1970년대 전후다. 전국적으로 무려 300개가 넘는 성냥공장이 성업하던 시절이다. 성광성냥도 당시는 한 달 매출이 무려 6,000만 환을 넘던 호황을 누리던 시절이다. 그 돈은 지금 돈 가치로 바꿔 말하면 6억 원이라는 거액에 해당한다.
“우리 성광성냥이 아래로는 부산 영덕에서 위로는 강원도 고성까지 안간데가 없었능기라. 바다 가까운데는 아무래도 염분이나 습기가 많아서 성냥이 금방 눅눅해지는데, 두약(頭藥) 알맹이가 까만 우리 성광성냥은 그런 일이 없거든. 두약이 경쟁력이 있었던 셈인기라. 그 시절 도매상들도 제때 성냥을 공급받겠다고 나한테 로비하던 이들이 있었던 시절이여.”
손씨에 따르면, 특히 뱃사람들한테 ‘향로성냥’의 인기는 대단했다고 한다. 배안에서 엔진에 불을 붙이려면 꼭 성냥이 필요했다. 습기가 많은 여름에도 눅눅해지지 않고 불이 잘 켜지고, 불이 한번 붙으면 잘 안 꺼지는 성냥은 향로성냥 뿐이었다는 것이다.
“성냥 꼬다리 끝에 뭍힌 두약에 비밀이 있었는기라. 성광성냥은 검정색 두약을 붙였는데, 그 검정색 두약 안에 연통 안에서 수집한 그을음을 섞어 만들었어. 그게 두약이 물컹해지지 않고 불이 잘붙게 만드는 우리만의 노하우였다고 봐야지.”
집집이 성냥이 필수품이던 시절인지라, 성냥공장이 호황을 누린 시절에는 직원수가 200명이 다 될때도 있었다.
“그때 우리 공장에도 젊은 아가씨가 바글바글했는데, 주문 밀리면 그수로도 모자라니까 공장 주변에 있는 이 집 저 집에다가 성냥갑 붙이는 일감을 늘상 나눠 줘야 했어.”
그래서 지금나이로 오십이 넘은 의성 사람치고 성광성냥 돈을 안 만져본 사람 없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는 사정이 확 달라졌다. 전자 레인지의 등장으로 일반 가정에 성냥 소비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1회용 라이터가 등장하면서는 포켓성냥도 뜸해졌고, 그마저도 중국산 성냥이 들어오면서는 가격경쟁도 안됐다. 말그대로 사면초가의 입장에 빠진 것이다.
“이 게 한국에 남은 마지막 성냥 제조기야”
(사진)성광성냥의 손진국사장이 성냥불로 담배불을 붙이고 있다.
그는 호주머니에 늘 포켓용 성냥을 넣고 다닌다.
50년 동안을 성광성냥과 함께 해왔지만, 손씨가 처음부터 성광성냥을 경영해온 것은 아니다. 전란 통에 피난을 다녀와 1954년 열여덟 나이에 처음 들어온 곳이 이 성냥공장이었다. 성광성냥은 본디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세웠는데, 손씨는 그때 종업원으로 일했다. 초창기부터 이곳 일을 해왔던 터라 나중에는 회사의 주주로 참여하게 됐고, 결국 공장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나라가 발전하니까 이제 성냥은 아닌기라. 자동으로 점화되는 가스 레인지가 나오고, 쇠죽 끓여 먹이다 생육을 하고, 불 때는 아궁이에 보일러 들이고… 생활이 이리 바뀌었으니…. 그래도 배운 게 성냥 만드는 기술뿐이니 어떡하겠어.”
저녁참에 찾아간 성광성냥 공장의 분위기는 말그대로 절간처럼 조용하다. 공장위로 아름드리 나무들이 쌓여있는 재재소가 눈에 띈다.
“옛날에는 축렬기에 성냥개비를 꽂고 손으로 일일이 나무 꼬다리에 약을 묻혔어. 그러다가 윤전기와 축렬기가 반자동화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는데, 이것이 성냥공장한테는 오히려 사양길 가는 것을 재촉한 셈인기라.”
그는 “그때 과잉생산되면서 전국 성냥공장이 덤핑 경쟁을 벌여 스스로 제 무덤을 팠다”고 회고한다.
아닌게아니라 손 사장은 1980년쯤 한 대에 8,000만 원이나 하던 윤전기(반자동 성냥 제조기)를 두 대씩이나 공장에 들였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과잉투자를 한셈이다. 그것은 성광성냥 뿐만이 아니었다.
작은 성냥을 만드는 회사지만 뜻밖에도 성냥공장의 생산라인은 엄청나게 길고, 크고 복잡한 규모다. 겉은 슬레이트와 양철 지붕을 얹은 낡은 건물이지만 각 동마다 미각기·왕발기·성냥제조기·축렬기·건조기 라고 불리는 집채만큼 큰 기계가 곳곳에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난해 7월에 1,000t짜리 윤전기를 방글라데시에 한대 팔았어. 문 닫으면 다 고철 값이니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넘기고 말았지. 정말 마음이 아팠지만 어쩌겠어. 아마 지금 우리 공장에 남은 윤전기와 축렬기가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성냥제조용 기계일 거야.”
요새는 가끔 절집이나 일부 잡화상이 통성냥을 주문해 오지만, 생산량 대부분은 광고업자들의 주문에 의존한다. 한 달 매출이 2,000만 원이면 그래도 잘한 축이란다. 접객업소를 대상으로 한 광고성냥과 케이크 성냥이고, 그나마 주문이 그치면 1주일씩 기계를 세우고 사람을 놀릴 때도 많다.
손씨는 지난 과거를 떠올리며 “업자들끼리 하는 말이 그 시절에는 정전이 자주 됐는데, 서울 시내에 정전이 한 번 되면 갑성냥 3만 갑이 팔린다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오래된 공장이긴 하지만 요즘에는 가끔씩 초등학생들이 고철같은 성냥공장에 견학을 오기도 한다. 그때마다 손씨는 신이 나서 아이들 앞에서 성냥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늘상 주머니에 담고다니는 ‘포켓용 성냥’(단가 23원짜리)을 꺼내 담뱃불을 붙여 문 그는 “성냥 하는 사람이 라이터 쓰겄어?”라며 맥없이 웃었다.
사진 권태균ㅣ 김현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