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와 레드, 길에서 만난 두 개의 미국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 연재를 시작하며
홍은택(ehpk3) 기자
어릴 적 자주 듣던 말로 ‘미국은 거지도 미제를 먹는다’는 말이 있다. 월남전으로 미제 물건이 쏟아져 들어오던 때 미국 것에 대한 동경을 압도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지금은 미제에 대한 선호가 많이 떨어졌지만 미국에 대한 동경은 여전히 반미주의라는 또 다른 흐름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에 대한 감정이 세계에서 가장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는 나라이면서 나라의 규모에 비해서는 미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과 방문객을 보내는 이상한 나라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100만명이 넘는 한국인이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와 그 주변 지역은 향후 10년 안에 한국인 인구가 150만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한 메트로폴리탄 지역에는 한국인 인구가 끝없이 밀려들어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1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두 배 가까이 불어났다. 한국인이 미워하는 미국은 어떤 미국이고, 한국인이 기를 쓰고 오려고 하는 미국은 어떤 미국인가. 그리고 진짜 미국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국인도 알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한국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외국인한테 설명해야 할 상황을 생각하면 그 어려움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에 대한 탐험은 계속돼야 한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곧 한국에도 닥치기 때문이다. 이른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이다. 다른 말로 아메리카나이제이션(Americanization)이다.
서유럽 만한 땅덩어리가 하나의 나라로, 단일 시장으로 형성된 미국은 자본의 천국이다. 미국에서 전국적 규모의 자본을 축적한 거대 자본들은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미국에서 받는 똑같은 대우를 강요한다.
한국이 외환위기에서 지불한 대가가 바로 그것이다. 국제통화기금과의 차관 연장 협상에서 자본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잃었다. 그래서 한국은 미국 사회처럼 될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와 팝송의 영향만이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자본의 방임을 전제로 사회가 조직되고 운영되는 원리가 미국을 닮아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의 미국은 어떻게 보면 작은 규모에서 미래의 한국이다. 지금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힘센 나라이지만, 가장 잘 사는 국민이 미국인은 아니다. 가장 많은 부를 생산해내지만 선진국 중에서는 가장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나라다. 사회의 안정을 지탱해준 중산층은 점점 엷어지고 직업은 고소득 기술 영업직과 저임금 시간제 서비스직으로 양분되고 있다.
제조업은 중국으로 이전하고 새로 떠오르는 하이테크 산업은 영어권인 인도로 이전하고 있다. 자본은 더 높은 이윤과 더 높은 생산성을 수확하지만 노동계급에게 돌아오는 것은 삭감된 임금 또는 실직이다. 그 결과 사회적 재화의 배분이 극도로 왜곡되고 부익부 빈익빈은 심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영향을 처음으로 받는 곳은 묘하게도 미국이다. 미국의 노동계층이다. 반어적으로 말해서 아메리카나이제이션의 최초 피해자는 아메리칸이다.
최근 미국에서도 마치 새로운 발견인양 노동계급의 고통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근로빈곤계층(working poor)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마치 80년대 한국 대학생들이 했던 것처럼 저임금 시간제 노동자로 ‘위장취업’을 한 뒤 체험담을 쓴 바바라 에런라이히의 'Nickel and Dimed'가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아예 제목을 <근로빈곤계층(The Working Poor)>이라고 붙인 데이비드 K 시플러의 책도 주목받고 있다.
미국 사회의 의제는 ‘사커 맘(Soccer Mom)’ 대신 ‘버거킹 맘(Burger King Mom)’으로 바뀌고 있다. 전자는 자녀들을 축구 연습에 데려다 주는, 교외에 사는 안정지향적인 중산층 주부를, 후자는 버거 킹이나 맥도날드처럼 시간제 저임금을 주는 직장에 다니면서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독신여성을 뜻하는 말이다. 이런 여성들의 25%가 극빈자로 분류되고 있다.
선거철이 되면서 이들의 복지와 권리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 근로빈곤계층이라는 말 자체가 미국 사회 건국의 정신과 모순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는데도 빈곤계층으로 남아 있다고 하면 그 사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원래 사회적 성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열심히 일하면 괜찮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뜻도 포함된 개념이다. 그러나 미국은 더 이상 노동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사회로 가고 있다. 단순히 자본의 문제만은 아니다. 미국 사회에 팽배한 '개인주의와 부는 신의 은총'이라는 칼뱅주의적 종교적 전통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다른 말은 자본 방임주의이다. 이 자본을 첫 번째로 견제해야 할 곳도 미국이다. 미국 내에서 견제가 걸리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고삐 풀린 자본을 견제하기 힘들다. 과연 그런 움직임들이 조직화되고 커지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더욱 더 자본 방임주의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는가. 그것이 2004년 대통령 선거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미국 사회의 양극화는 종종 '블루 아메리카(Blue America)'와 '레드 아메리카(Red America)'라고 표현한다.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에서 민주당 후보가 이긴 지역은 파란색, 공화당 후보가 이긴 지역은 붉은 색으로 표시한 데서 보편화한 개념이다.
보통 공화당은 잘 사는 사람들을 대표하기 때문에 레드 아메리카는 세계화의 흐름을 주도하면서 성공한 계층을 의미하고, 블루 아메리카는 세계화의 흐름에 뒤처진 노동자 농민 계층을 지칭한다. 레드 아메리카만 보고 미국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필자는 2004년 여름 주로 블루 아메리카를 다녔다. 지난 선거에서 민주당이 이긴 지역을 다녔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또 미국에서도 세계화의 흐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을 다녔다는 말이다.
향후 십수 회에 걸쳐 그 족적을 연재한다. 이 기록은 엄격히 말해 전통적인 기사 형식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단순한 기행문도 아니다. 그 중간쯤이다. 전통적인 기사 형식이 아니라고 해서, 기사로서의 객관성과 진실성을 무시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명기해두고 싶다.
미국 거지는 더 이상 미제가 아닌, 중국제를 먹는다.
*** 홍은택 기자는 <동아일보>에서 사회부-정치부-국제부 기자로 일했으며 노조위원장을 지냈다. 현재는 미국 미주리대학 저널리즘 스쿨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으며, 미국의 라디오 프로그램 <글로벌 저널리스트>의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출처 : 오마이뉴스 2004/08/02 오후 10:41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no=180334&;rel_no=1&menu=c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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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울음소리 사라진 미국의 중심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 1] 캔자스주 레바논에 가다
홍은택(ehpk3) 기자
<오마이뉴스>는 오는 11월 2일로 예정된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에 체류중인 홍은택 기자의 미국 심층취재기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를 주2회꼴로 연재합니다. 홍은택 기자는 <동아일보>에서 사회부-정치부-국제부 기자로 일했으며 노조위원장(2001년)을 지냈습니다. 현재는 미국 미주리대학 저널리즘 스쿨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으며, 미국의 라디오 프로그램 <글로벌 저널리스트>의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 2000년 미국 대선에 이어 2004 미국 대선은 양극화되고 있는 미국 사회를 보여준다. 미국 사회내 블루(blue)와 레드(red)의 대립은 단지 서로 의견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서로를 증오하는 수준까지 심화되고 있다. 이 같은 양극화는 정치는 물론 지역, 인종, 경제, 문화, 심지어는 스포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 원인은 묘하게도 세계화(globalization)에 있다. 세계화의 엔진이자 진원지인 미국이야말로 세계화의 영향을 가장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크게 받고 있다. 어느 때보다 치열한 선거전이 예상되는 2004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사회의 양극화된 이면을 현장취재한다. 블루와 레드는 미국대선 개표때 주별로 민주당이 이긴 지역은 블루, 공화당이 이긴 지역은 레드로 표현한 데서 착안한 것이다.... 기자 주 =================================================================
대평원(Great Plains)을 달리는 기분은 매우 저조하다.
사우스 다코다에서 90번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달리다 281번 지방도로를 만나 남쪽으로 우회전했을 때에는 눈이 다 시원했다. 고속도로에서 모텔과 주유소, 패스트푸드 체인점들의 입간판들만 상대하다가 아기자기한 작은 마을들을 통과하면서 다양한 경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는 속도를 손해 보는 만큼 더 많은 경치를 완상(玩賞)할 수 있다는 계산이 바로 나왔다.
대평원(Great Plains)을 달리며
맥도날드의 골든 아치도 없었다. 아무리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이라지만 일곱 시간을 계속 달리는데도 골든 아치가 없기로는 모하비 사막이후 처음이었다. 그 시간 동안 차는 일직선으로 남하해 사우스 다코다 주를 넘어서 네브라스카에 들어섰고 네브라스카를 넘어서 캔자스에 들어 왔다.
그러나 사람도 없다. 대낮인데도 대부분의 마을에서 인적을 찾기 힘들다. 밀과 옥수수가 쨍쨍한 햇볕을 받고 있는 마을 너머 들판에도 사람들은 없다. 여기가 바로 ‘대평원’이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밀의 절반, 그리고 소고기의 60%를 생산하지만 인구는 갈수록 줄어들고 마을들은 버려져 사막을 빼고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희박한 곳이 되고 있다.
원래는 로키 산맥에서 빗물에 씻겨 내려온 흙이 영겁의 세월 동안 쌓이고 쌓인, 로키 산맥과 나란히 남북으로 달리는 초지였다. 우크라이나에서 건너 온 터키 레드 위트(Turkey Red Wheat)라는 밀 품종의 재배에 성공하면서 초지는 미국은 물론 세계적인 곡창지대로 탈바꿈했다. 위로는 캐나다의 앨버타 주에서부터 아래로는 텍사스에 이르기까지 12개 주의 전부 또는 일부가 이 지괴에 속한다.
이 대지가 개간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은 1862년 링컨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진 홈스테드법(The Homestead Act)에 있다. 이 법은 21세가 넘은 시민이거나 시민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160에이커(65헥타르)의 국유지를 공짜로 나눠 줬다. 조건은 5년 동안 집을 짓고 살면서 농토를 개간해야 한다는 것이다. 2백만명이 이 법의 혜택을 입어 2억7천만 에이커(1억9백만 헥타르)의 땅을 가져갔고 대평원은 곡식의 파도로 출렁거렸다.
'먼저 본 사람' 위에 '더 빨리 간 사람' 있다
미국은 ‘종종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나라다. 오클라호마 주에서 홈스테드법이 적용 됐을 때인 1889년에는 무려 5만명이 출발선에 섰다. 4월 22일 낮 12시를 기해 총성과 함께 나팔이 울려퍼지자 일제히 말을 타고 마차를 타고 또는 걸어서 인디언이 추방된 땅으로 달려 나갔다. 땅에 말뚝을 박아 자신의 소유가 됐음을 표시했다. 미국 식민의 역사가 그렇듯 먼저 도착한 사람이 좋은 땅을 차지했다. 미국은 선착순 사회다.
하지만 미국의 이면은 오클라호마 주의 별명 ‘더 빨리 간 사람(Sooner)’에서 잘 나타난다. 총성이 울리기 훨씬 이전부터 미리 가서 말뚝을 박아 놓은 사람들이 많았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선착순이지만 실제로 금싸라기 땅은 가장 천박한 분배의 원칙인 선착순마저 어긴 사람들이 차지했다. 그 사람들을 ‘더 빨리 간 사람(Sooner)’이라고 불렀고 그게 주의 별명으로 정착했다.
필자가 대평원을 달리는 이유는 캔자스 주에 있는 레바논(Lebanon)에 가기 위해서다. 레바논에는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제외한 미국 본토 48개 주의 중심이 있다.
레바논을 찾아낸 것은 그냥 호사가적인 충동에서였다. 미국을 여행하면서 미국의 지리적 중심을 밟는 것은 어떨까. 필자만 그런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문호 존 스타인벡은 1960년 미국 여행을 기획하면서 미국의 중심이 어딘지 알아내기 위해 원시적인 방법을 썼다.
그가 여행 후 펴낸 <찰리와의 여행>(Travels with Charley)에 따르면 그는 미국 지도를 동쪽과 서쪽 끝이 만나도록 반으로 접었다. 그랬더니 접히는 선은 노스 다코타와 사우스 다코타, 네브라스카, 캔자스, 오클라호마, 텍사스를 지나갔다. 필자가 타고 내려온 길이 얼추 그가 접은 선 상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281번을 타고 남하하다 네브라스카 주를 넘어서 캔자스에 이르자마자 레바논에 조금 못 미쳐 미국 지리상의 중심에 대한 안내판이 보였다. 191번 도로로 우회전해서 1.5km쯤 가자 이 도로가 끝나고 피라미드 모양의 탑이 나타났다. 탑 위에는 성조기와 캔자스 주기가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탑 중간의 표석에는 'The Geographical Center of the United States· LAT 39' 50"·LONG 98' 35"(미국의 지리상의 중심. 위도 39도50분 경도 98도35분)'이라고 적혀 있다.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사우스 다코타 주 케네벡의 캠프장에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출발해서 하루 종일을 눈을 마비시키는 오렌지 빛 밀밭을 어지럽게 뚫고 온 끝에 미국의 중심을 밟았다.
그런데 탑을 마주보는 곳에도 뭔가 기념물이 있다. ‘WELCOME TO THE CENTER OF THE USA’라는 검정색 문구가 새겨진 나무 판자가 세워져 있었다. 세월에 바래 얼룩이 묻은 것처럼 흰색 바탕의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졌고 문구는 자간 대칭과 행간 균형이 잘 안 맞아서 마치 “이런 델 왜 보러 왔느냐”고 조롱하는 듯했다. 김이 팍 새는 순간이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어쩌면 쇠락해 가는 미국의 중심에 대한 상징으로는 이 나무 판자가 더 적합한 듯했다.
탑 옆에는 기독교 국가답게 ‘US CENTER PRAY CHAPEL’이라는 이름의 예배당이 있었다. 들고 다닐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작은 예배당이었다. 사이 좋은 사람들이면 여섯 명, 그렇지 않으면 네 명이 앉으면 꽉 찰 듯싶다. 그것으로 지리상의 중심에 관한 기념물은 끝이었다. 예전에는 근처에 모텔도 있었다고 하는데 문 닫은 지 오래라고 한다.
아직도 '미국의 중심' 레바논에 남아있는 사람
사실 이 지점이 정확한 중심은 아니다. 계산해 보니 여기서 1km쯤 떨어진 쟈니 그립(Johnny Grib)이라는 농부의 돼지 농장에 중심이 있었다. 농장을 개방하면 사람들의 출입이 번잡할 것을 우려한 그립이 한사코 탑을 세우는 것을 반대해 할 수 없이 이 언덕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세계에서 가장 힘 센 미국의 중심을 밀어낼 만큼 힘센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립의 농장 역시 정확한 중심은 아니다. 미국 측지학회에 따르면 허용 오차가 15에서 30km쯤 된다고 한다. 대충 거기인 셈이다. 더구나 지구가 둥글게 굽어있는 점을 감안한 측지학적 중심은 여기서 45km쯤 더 남쪽으로 가야 한다.
레바논의 중심론에 대해 딴지를 거는 마을도 많다. "하와이와 알래스카는 미국 땅이 아니냐, 다 포함시켜서 중심을 따지면 우리"라고 주장하는 마을<사우스 다코타 주의 캐슬 록(Castle Rock)>도 있다. "복잡하니까 그냥 북미 대륙을 기준으로 하자, 그러면 우리"라고 주장하는 마을<노스 다코다 주의 럭비(Rugby)>도 있다.
그러자 미 정부도 모르겠다고 자빠져 버렸다. 미 정부의 측지기관인 U.S. Coast and Geodetic Survey의 수석 수학자인 오스카 애덤스는 “사실 중심이 어딘지 꼭 짚어낼 결정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니 우리보고 어느 주, 나라, 대륙의 지리상의 중심을 가려내라는 강요에 가까운 요구는 무시하는 게 가장 낫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한 바 있다.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마을들의 등쌀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수학자가 그런 글을 썼을까 동정이 가는 얘기다. 그는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미국인 특유의 외교적 화술을 구사한다. “이것은 모두가 다르지만 모두가 옳을 수 있는 문제다.” 서로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마을들에게 "그래, 그렇게 주장해도 무방하다. 나는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런 마을들의 공통점은 다 대평원에 속하면서 다 못 산다는 점이다. 그래서 필자와 같은 호사가들의 발길을 불러들여 단 돈 몇 달러라도 떨구고 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중심임을 주장한다. 인구가 적기는 하지만 중심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몇몇 지도에는 마을 이름이 올라가는 영광을 얻기도 한다.
레바논은 인구 300여명의 작은 마을이다. 항상 300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여기서 살고 있는 필리스 벨(75)은 “인구가 800, 900명 일 때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대공황이 일어난 1929년에 태어난 벨은 이곳에서 나오는 지역 신문 <레바논 타임스>의 발행인이다. 그녀는 대공황 이후 황진의 시대(Dust Bowl days)로 불리는 1930년대 가뭄과 농산물 가격의 하락으로 많은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오레곤, 워싱턴주로 떠났다고 말했다.
이농 현상은 그 이후로 어느 한 순간 멈춘 적이 없었다. 이곳에 하나밖에 없던 레바논 고등학교는 1984년 문 닫았다. 초등학교는 8년 뒤인 92년에 문 닫았다.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이 마을의 평균 연령은 52세다. 아기의 울음 소리를 들은 지 오래다. 99%가 백인이고 22.1%가 극빈자다.
공장도 떠나고 아이의 울음 소리도 사라졌다
학교의 폐쇄는 주민들에게 고통스런 기억으로 남아 있다. 곧 대가 끊기겠구나 하는 불길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마을도 하나의 생명이다. 레바논 도서관의 사서인 에스더 델리몽(71)은 레바논 고교의 마지막 졸업 앨범을 책꽂이에서 꺼내 보여 주면서 “우리 아이가 고교의 마지막 졸업생이었다”고 말했다. 앨범은 기만적이다. 이 마을에 언제 그렇게 아름다운 소녀 소년들이 득실득실했는지 상상이 안 된다.
여기에 온 덕분에 한반도 지리상의 중심이 어딘지도 알게 됐다. 강원도 양구군이다. 도서관에는 임경순이라는 양구군수가 같은 중심이라고 해서 들렀다가 놓고 간 차 숟갈 세트가 전시돼 있다.
마을이 쇠락한 원인은 농사를 지어서는 수지가 안 맞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을 팔고 가면 농지의 소유는 더욱 소수에 집중되고 그럴수록 더욱 소규모 가족농이 설 땅은 좁아진다.
또 다른 결정적 타격은 의료기기를 만드는 백스터(Baxter) 공장의 철수.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백스터는 정맥 주사관을 생산했다. 이 공장에서 작업 공정 담당 엔지니어로 일했던 델리몽은 “한 천명이 일하는 큰 공장이었다”고 회상했다.
미국 농부들은 오래 전부터 농사만 지어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근처 공장을 다녀 수입을 보전하곤 했다. 백스터는 이 일대의 농부들에게는 생명의 젖줄 같은 직장이었다. 그러나 1985년 공장은 싱가포르와 푸에르토리코로 이전했다. 노동조합이 없었기 때문에 저항도 없었다고 한다. 델리몽은 백스터로부터 받은 많지 않은 주식을 아직도 보유하고 있다.
외국의 집들은 이국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안 좋은 집도 그렇게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집들이 버려진 채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면 더욱 생경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레바논 거리 곳곳에 현관문을 판자로 못질해 막아 버린 상점들과 문과 유리창이 깨진 빈집들이 눈에 띄었다. 시청마저 버려졌다.
미국 기업들이 값싼 임금을 찾아 해외로 이전하면서 단순히 제조업 노동자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님을 레바논의 사례는 말해 준다. 대평원에 흩어져 있던 공장들은 농부들을 농토에서 떠나지 않도록 막아 주는 지지대 역할도 했던 셈이다.
공장이 떠나자 농민도 떠난다. 대평원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그러자 캔자스에는 새로운 형태의 홈스테드가 부활했다. 캔자스주 마키트(Marquette)는 50에이커의 택지를 조성한 뒤 먼저 신청하는 80가구에게 택지를 공짜로 주고 있다. 값으로 따지면 8천달러(960만원 상당). 그러나 이 제도가 시행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아직 20여 가구밖에 신청하지 않았다.
AP통신의 칼 매닝 기자의 기사에 따르면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마을이 캔자스 주에 최소한 10군데나 된다. 뿐만 아니라 네브라스카 노스 다코타 사우스 다코다 주와 같은 데서도 시도한 바 있지만 아직 인구 증가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고 한다. 이유는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마을이 다시 소생하려면 뭐가 필요하느냐는 질문에 벨도 “산업 기반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벨도, 델리몽도 해외로 나간 공장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벨의 딸은 돌아왔다. 레바논 고교를 졸업하고 캔자스 시티에 있는 전력회사에 다니고 있는 딸은 얼마 전 고교 건물을 매입했다. 그리고 매주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이 다니던 고교를 역사도서관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벨도 요즘 매주 한번씩 주민들과 뮤지컬을 연습하고 있다.
뮤지컬의 제목은 <앙코르>. 화려했던 시절의 부활을 바라고 하는 뮤지컬은 아니다. 단지 시청을 보수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공연은 8월27, 28일 이틀간이다. 살아있는 날까지 제대로 살아보려는 거다.
자료출처 : 오마이뉴스 2004/08/02 오후 11:3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menu=&;no=180336&rel_no=1&back_url=
박물관이 된 맥도날드 1호점을 가다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 3] 레이 크록과 존 레딩의 엇갈린 삶
홍은택(ehpk3) 기자
"들어와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냥 돌아가려고 했다. 맥도날드 1호점은 반들반들한 유리로 밀폐돼 있었다. 바깥에서 한번 둘러보고 가는 건줄 알았는데 건물 옆쪽에 철문이 있고 철문을 열자 면접관처럼 존 레딩(56)씨가 무거운 철제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눈썹이 짙고 눈매가 깊어서 중세의 고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레딩씨는 맥도날드사가 1호점을 원형대로 복원해 만든 박물관의 한 사람밖에 없는 직원이다. 여름인데도 검은 색 콤비에 흰색 셔츠를 받쳐입은 그를 보면 맥도날드 역사에 권위가 있는 학자가 앉아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맥도날드사의 창업자 레이 크록의 개인사에 관해 나지막한 음성으로 풀어서 설명해주는 그의 말은 간결하고도 명쾌했다.
하지만 그의 직책은 맥도날드 박물관의 경비원이다.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오는 관람객들에게 그의 말은 언제나 "들어와요"로 시작해서 관람객이 나가면 "또 오세요"로 끝난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지금은 세계 121개국에 3만1129개 점포를 두고 있는 맥도날드사가 처음 점포를 낸 1호점의 내실이다. 창업자 레이 크록(Ray Kroc)은 자신의 집이 있었던 알링턴 하이츠(Arlington Heights)와 사무실이 있었던 시카고의 중간 지점이었던 데스 플레인즈(Des Plains)에 1955년 4월15일 프랜차이즈 개념의 점포를 처음으로 냈다.
맥도날드 박물관의 경비원
햄버거 고기 굽는 냄새가 나지 않는 햄버거 가게는 수술실과 같다. 동시에 5잔의 밀크셰이크를 만들 수 있는 멀티 믹서와 탄산음료수를 담은 큰 통, 간 소고기를 굽는 그릴 등 모든 장비의 표면은 병원 장비처럼 회색 스테인레스로 처리돼 있고 바닥은 티끌 하나 없는 타일이 깔려 있다. 조명은 하얀 형광등. 크록의 4대 신조인 품질, 서비스, 청결, 가치(QSC & V) 중 청결 만큼은 확실히 지켜지다 못해 마치 살균 소독까지 돼 있는 듯하다.
레딩씨는 "모든 장비가 실제로 84년까지 쓰던 것들이었다"서 "특히 멀티 믹서는 당시 프린스 캐슬사로부터 믹서판매 독점권을 얻었던 창업자 크록이 직접 쓰던 것"이라고 말했다. 마네킨으로 만들어진 남자 종업원들도 조리사들이 쓰는 하얀 모자에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데 수술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여자 종업원은 없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원래 햄버거는 미국에서 떡볶기 오뎅과 같은 식품이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는 19세기 고기를 갈아서 부쳐 먹는 게 유행이었다. 이것이 미국에 건너와서는 20세기 초 빵과 결합돼 햄버거로 탄생했다. 하지만 '빈자(貧者)의 음식'으로 치부됐다. 쓰고 남은 소고기를 갈아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식당에서는 팔지 않았고 공장주변의 좌판에서나 팔았다. 옛날 영등포 공장 벽에 '구루마'를 대고 큰 프라이팬에 떡볶이를 팔던 아줌마들을 생각하면 된다.
첫 햄버거 체인으로 기록되고 있는 화이트 캐슬(White Castle)은 1920년대 햄버거에서 불량식품의 이미지를 걷어내는 데 주력했다. 사람들이 직접 보는 앞에서 그릴에 고기를 구웠고 고기는 하루에 두 번 배달되는 신선육이라고 선전했다. 이미 그 때부터 종업원의 외관에 대한 기업의 통제가 시작됐다.
화이트 캐슬이 1931년에 정한 23가지 종업원 수칙은 첫째 모자가 항상 머리를 덮어야 한다. 둘째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손질해야 한다에서 시작해 여섯 번째 이빨을 닦아야 한다, 아홉 번째 구취를 없애야 한다, 열세 번째 체취가 안 나야 한다를 거쳐 스물세 번째 바지자락이 길 때는 끝을 접어올려야 한다로 끝난다.
햄버거가 급속히 퍼진 배경에는 자동차가 있다. 자동차가 대중화되면서 자동차 여행 중 간단히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에 대한 수요가 생겼다. 특히 자동차가 대량 보급되는 시기에 개발되기 시작한 로스앤젤레스 등 캘리포니아 남부를 중심으로 드라이브인 (Drive-in) 식당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40년대에 로스앤젤레스에는 이미 1백만 대의 차들이 다녔다. 이 수치는 41개 주 전체의 차량보유 대수보다 많은 것이었다.
요즘 미국에서 볼 수 있는 드라이브스루(Drive-through)식당이 건물 창구를 통해 손님의 주문을 받는 것과 달리 드라브인 식당은 손님들이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으면 종업원들이 찾아와서 주문을 받고 음식을 배달했다. 드라이브인 식당들은 손님들을 끌기 위해 주로 짧은 치마를 입은 10대 소녀들(carhops)을 종업원으로 고용했다. 햄버거 맛 때문인지 10대 소녀들 때문인지 드라이브인 식당은 한 때 번창했지만 10대 소녀들을 꼬시러 온 소년들의 푼돈을 노리며 장사를 지속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라치드와 모리스(맥) 맥도날드 형제도 1937년 캘리포니아주 파사디나에 이런 식당을 열었다. 얼마 안 있어 샌 버나디노로 옮겨서도 같은 방식으로 장사했다. 하지만 그렇게 11년쯤 하고 난 뒤인 48년 한 식당에 오래 붙어있지 않는 10대 소녀들에 빌붙어서 장사하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식당 문을 닫았다. 3개월 뒤 새로 식당을 열었을 때는 10대 소녀들 대신 남자 종업원만을 채용했다. 그리고 손님들이 차를 세우고 창구로 와서 주문을 하도록 했다.
처음엔 손님들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여종업원이 오지 않는다고 클랙슨을 빵빵 울려댔다. 맥도날드 형제가 이처럼 손님들한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변화가 받쳐줬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리속도를 높이고 가격을 낮추고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해 냈다. 예전의 메뉴에서 가짓수를 1/3로 줄였다. 나이프와 숟가락 포크도 없앴다. 접시와 유리컵도 종이접시와 종이컵, 그리고 종이 봉지로 바꿨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햄버거를 굽는 사람은 햄버거만 굽도록 한 것(그릴맨). 마찬가지로 햄버거에 드레싱을 바르는 사람은 드레싱만 바르도록 했다(드레서). 주문받는 사람은 주문만 받고 밀크셰이크를 만드는 사람은 밀크셰이크만 만들었다(셰이커). 프라이즈(감자 튀김)를 튀기는 사람은 프라이즈만 튀겼다(프라이 맨). 처음으로 공장의 일관 작업(assembly line)이 식당의 노동 분업에 적용된 것이다. 맥도날드 형제는 이를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Speedee Service System)이라고 명명했다.
미국의 신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1호점의 메뉴판을 보면 딱 9가지만 적혀 있었다. 햄버거 15센트, 치즈버거 19센트, 프렌치 프라이즈 10센트, 밀크 10센트, 루트비어 10센트, 오렌지주스 10센트, 코카콜라 10센트, 커피 10센트, 밀크셰이크 10센트
1955년의 15센트를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2003년 가격으로 환산하면 98센트. 세트메뉴가 아닌 햄버거 가격이 지금도 1달러 안팎이니까 49년 동안 같은 가격이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맥도날드 햄버거는 당시 다른 햄버거에 비해 20센트나 쌌다. 절반 가격도 안 됐다는 얘기다.
맥도날드 햄버거가 생김으로써 노동자 가정도 비로소 외식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하지만 소비자에게 축복일 것 같은 놀라운 가격안정은 바로 노동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맥도날드 형제의 시도는 서비스 산업에서도 노동 특히 기술력 있는 노동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길을 열었다. 언제나 누구나 기계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물건이 나오고 서비스가 마무리됐다. 사람은 가만히 있고 물건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움직였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의 조립 공정이 자동차 대중화와 함께 노동자 중산층 시대를 열었다고 하면 맥도날드의 스피디 시스템은 값싼 서비스와 함께 저임금 시간제 노동의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열심히 일만 하면 괜찮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미국의 신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Work does not work) 열심히 일해도 빈곤에서 탈출할 수 없는 직업들이 속출했다.
레딩씨는 이 박물관이 기술적으로 1호점이 아니라 9번째 맥도날드 패스트푸드점이라고 말했다. 1호점 간판을 보면 이미 1백만 개의 햄버거를 팔았다고 써있다.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이 번창해 캘리포니아 주에서만 이미 8개의 지점으로 뻗어나간 상태에서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를 찾아간다.
이유는 맥도날드 형제가 멀티 믹서를 8대나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티 믹서 주문의 감소에 고민하던 크록은 믹서가 8대나 필요할 만큼 장사가 잘 되는 식당을 보러 갔다가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의 잠재적 가치에 눈을 떴다. 맥도날드 형제들을 설득해 전국적인 프랜차이즈로 키우기로 하고 1호점을 내기에 이른 것. 크록은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매출액의 1.5%를 자신이 갖고 그 중 0.5%를 맥도날드 형제에게 나눠주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맥도날드 형제는 빨리 현금화하고 싶은 욕심에 61년 270만 달러를 받고 맥도날드 햄버거 프랜차이즈에 대한, 상표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크록에게 팔았다. 세금을 제외하고 맥도날드 형제 두 사람은 각각 1백만 달러를 가져갔는데 만약 팔지 않고 그 권리를 그대로 갖고 있었으면 매년 1억8천만 달러를 가져갈 수 있었다. 반면 월급대신 받은 주식을 그대로 갖고 있었던 크록의 여비서 준 마티노는 맥도날드사의 주식을 10%나 보유한 억만장자가 돼서 은퇴했다.
크록은 자금 형편이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맥도날드 형제에게 270만 달러를 지급하기 위해 빚을 끌어다 썼다가 2000만 달러가 넘는 금융 부담을 졌다. 평소부터 재주는 자기가 다 부리고 맥도날드 형제는 앉아서 돈만 챙긴다고 감정이 안 좋았던 크록은 복수를 꾸미게 된다. 맥도날드 형제는 맥도날드에서 손을 뗀 뒤에도 샌 버나디노의 원래 자리에서 맥도날드라는 상호 대신 '빅 엠(Big M)'이라는 이름으로 식당을 운영했다.
크록은 버젓이 맞은 편에 맥도날드 체인점을 냈다. 마치 한국의 낙지집끼리 벌이고 있는 원조 집 분쟁과 같다. 결과는 원조 집의 참패. 사람들의 발길은 '빅 엠'이 아니라 맥도날드로 몰렸다. '빅 엠'은 고전하다가 닐 베이커 체인점으로 바뀌었고 결국 72년 건물 자체가 철거되는 비운을 겪는다.
74년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지만 역시 어떤 장사를 해도 영업이 안돼 다시 철거의 위기를 맞았을 때 레이 크록 만큼 야심찬 식당 프랜차이즈의 주인인 일본계 미국인 앨버트 오쿠라씨가 나타났다. 멕시칸 치킨 전문 프랜차이즈인 후안 포요(Juan Pollo)를 운영하는 오쿠라씨는 이 건물을 사무실 겸 맥도날드 역사 박물관으로 개조해 쓰고 있다.
맥도날드사는 당연히 이 박물관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박물관 개관 축제에 아무도 보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데스 플레인즈의 박물관을 1호점으로 명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데스 플레인즈 박물관을 따로 성대하게 꾸민 것은 아니다. 박물관은 지상층의 주방에 이어 지하실로 이어졌다. 창고로 쓰이던 지하실은 답답하다고 느낄 만큼 좁았다. 사진 몇 점과 맥도날드사의 선전 비디오 테이프를 감상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매출 400억 달러 맥도날드의 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겸손한 규모였다.
레딩과 크록은 무엇이 달랐나?
그리고 일주일에 사흘만 연다. 목금토. 관람시간도 목금은 오전 10시 30분에서 오후 2시 30분. 토요일에는 4시 30분까지 2시간 더 개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5월 마지막 주부터 9월 첫째 주까지 여름에만 개장한다. 박물관 개장 시간은 정확히 레딩씨의 노동시간이다. 레딩씨는 시간당 11달러를 받는다. 최저임금인 5달러15센트보다 조금 더 받는 수준이며, 맥도날드의 일반적인 종업원들에 비해 많은 편이지만 노동시간이 턱없이 적다. 일요일 다른 곳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시간까지 쳐서 그의 주당 노동 시간은 20시간 안팎이다.
빠지지 않고 꼬박 일한다고 해도 한달 수입은 1000달러가 안 된다. 그 중 방 한 칸짜리 집세로 650달러가 나간다. 과거에는 엥겔계수라고 해서 수입 중 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따졌지만 요즘에는 집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수입의 30%를 넘으면 생활이 어려운 것으로 간주한다. 주 정부에서 주는 실업수당을 보태서 그의 표현대로 부양가족이 없기 때문에 간신히 버티고 산다.
그의 일과는 판에 박은 듯하다. 항상 길 맞은 편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저녁을 먹고 퇴근하고 퇴근한 뒤 그가 즐길 수 있는 여가는 텔레비전 시청밖에 없다. 그와 크록은 고향이 같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크 파크(Oak Park)다. 그와 크록은 학교도 같은 데를 다녔다. 오크 파크 리버 포레스트 고교다. 물론 나이가 44살이나 차이 나기 때문에 직접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가방 끈이 더 긴 쪽은 레딩씨다. 그는 고교를 졸업했고 크록은 고교 2학년에서 중퇴했다.
그는 캔자스에 있는 대학의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육군에 입대한 크록은 끝내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크록은 같은 일리노이주 출신인 월트 디즈니와 같은 부대의 의무병으로 1차 대전에 복무했다. 그리고 재즈 뮤지션으로 커리어를 모색하다 실패하고 세일즈맨으로 미국을 떠돌아다녔다. 반면 레딩은 캔자스의 사우스웨스트 벨이라는 큰 전화회사에 취직해 17년간 자재 담당 직원으로 일했다.
크록은 52세의 나이에 맥도날드 형제를 만나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바람에 일생일대의 기회를 포착했다. 레딩은 5년 전인 51세에 맥도날드 박물관의 경비원이 돼 맥도날드 역사에 대한 설명에서 뒤늦게 영문학도로서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레딩의 인생 유전은 이렇다. 1990년 부인과 이혼한 뒤 부모님이 있는 고향 근처로 오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
하지만 그 때는 경기가 안 좋을 때라서 사무직을 구할 수 없어 야채 배달, 리무진 운전 등 다종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리무진 운전은 수입은 좋았지만 하루에 20시간, 일주일에 6일을 일해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경비원 직은 보수는 낮아도 안정된 직장으로 보여 취직했다. 하지만 무릎 관절염이 도진 탓에 지난해 11월 경비원 직에서마저 해고됐다가 이번 여름을 앞두고 다시 맥도날드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여름이 지나면 또다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 산다.
그는 서류상으로는 맥도날드사의 직원은 아니다. 인력파견업체인 인터 테크 그룹 소속이다. 달리 말해 맥도날드는 회사의 발상지격인 박물관의 하나 밖에 없는 직원조차 파견업체에서 받아 쓸 만큼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신분은 그렇지만 교육은 맥도날드에서 받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그래도 지금까지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모토롤라, 스피고트 캐딜락, 맥도날드와 같은 굴지의 회사에서만 일했다. 어떤 회사가 가장 좋았느냐는 질문에 "어떤 게 좋다 나쁘다 말할 만큼 충분히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의 직업은 건물의 앞을 지키게 돼 있지, 건물 안을 들여다 보게 돼 있지 않다.
크록과 무엇이 달랐기에 인생의 차이가 그렇게 벌어졌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한마디로 '세일즈맨십'이라고 말했다. 크록은 그게 있었고 자신은 없었다는 것. 세일즈맨십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 '남을 설득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맥도날드 형제의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이 세상에 알려진 뒤 숱한 사람들이 맥도날드 형제에게 같이 사업해보자고 제안했지만 결국 그들을 설득한 사람은 크록이었다는 것.
세일즈맨십이 없어서 크록과 같은 큰 인물이 되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없어서 한 달에 1000달러도 벌지 못하는 시간제 저임금 노동자가 돼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러나 다운사이징을 통해 중간관리층이 엷어지면서 시간제 저임금 노동자로 내려온 미국의 많은 화이트 컬러들이 마주치고 있는 현실이다.
박물관에 대한 관람객들의 반응은 좋았다. 지하실에서 만난 올스테이트 보험회사 직원 엘리자베스 바살로씨는 "우리 동네에 있는지는 알았지만 와보기는 처음"이라면서 "놀랍다"고 말했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어달라는 레딩씨의 요청에 따라 방명록을 펼쳤더니 다녀간 사람들이 한 마디씩 적어놓은 평들이 다양했다.
"cool", "awesome", "sweet". "neat"와 같은 감탄사들이 줄을 이었다. 프레드 슐레이징거라는 사람은 "1955년에 와본 적이 있다"고 썼다. 일본 단체 관람객들도 흔적을 남겨놓았다. 6월 26일 도비 맥스웰은 "위대한 역사"라고 적었다. 25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케이 루스 프라이어는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라고, 19일 션과 빌리 오토씨 부부는 "우리 손자와 함께 역사를 나누고 싶었다"고 썼다.
맥도날드는 20세기 후반 역사의 흐름을 좌우한 세계화의 주역이었다. 그래서 세계화로 번역되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을 맥도널다이제이션(McDonaldization)으로 표현하는 사회학자도 있다. 하지만 맥도날드는 어떤 세상으로 인류를 이끌고 가는가.
이미 오후 2시30분 넘었다. 박물관의 문을 닫을 때가 지났다. 관람객들은 많지는 않았지만 끊이지도 않는다. 지금부터는 무보수 연장 근무시간이다. 레딩씨를 풀어줄 때가 됐다. 취재에 응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철문을 열었다. 등뒤로 레딩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와요."
* 맥도날드에 관한 자료는 다음의 저서를 주로 참고했다. 한국에도 번역된 에릭 슐로서(Eric Schlosser)의 < Fast Food Nation > 그레그 크릿서(Greg Critser)의 < Fat Land >, 조지 리처(George Ritzer)의 < The McDonaldization of Socie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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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이 지불하는 맥도날드 성공의 대가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 4] 맥도날드 본사, 오크 브룩을 가다
홍은택(ehpk3) 기자
맥도날드 본사를 가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약간의 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일주 여행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쪽 맥도날드에서 저쪽 맥도날드까지의 왕복이다. 어딜 가도 맥도날드의 골든 아치로 시작해서 피자 헛, 버거 킹, 웬디스, 할리데이 인, 이코노라지, 채널 4 등 프랜차이즈들이 순서만 바꿔서 도열해 있다. 자동차를 몰고 여러 시간을 달려도 도착하는 곳은 언제나 똑같다.
언젠가 기차 침대칸에 누워서 미국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책을 읽다가 졸리면 자곤 했다. 자다가 눈을 뜨면 경치가 바뀌어 있었다. 유람선 여행은 이래서 하는구나 싶었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세계가 내게로 달려온다. 더구나 당시 기차여행은 2월에 미국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것이어서 낮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계절까지 바뀌어 있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뉴올리언즈의 초봄에 출발한 기차가 미시시피강을 따라 북상하면서 반나절도 안돼 겨울로 바뀌었다. 아이오와 주의 평원을 달릴 때는 안전한 거리에서 폭설이 내렸다.
그런데 시카고에서 워싱턴으로 향하는 구간은 마치 뭔가에 씌운 것 같았다. 밤이었는데 잠에서 깨어서 바깥을 내려다 보자 낯익은 맥도날드의 골든 아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잠을 더 자고 일어나서 보니 여전히 골든 아치가 시선을 가로막았다. 기차는 쉼없이 달렸다. 하지만 여전히 골든 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달아나려고 발버둥치는데도 제자리에 머물러있는 악몽과도 같았다.
하지만 스스로 위선적이라는 걸 안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점심을 해결하는 곳은 맥도날드 버거킹 웬디스 피자 헛 아니면 중국식당이다. 값이 저렴하면서도 항상 안전한 선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싫어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끌려들어가는 기분은 더욱 좋지 않다. 하지만 나 역시 맥도날드화된 인간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변화를 바라는 것 같으면서 내심은 변화를 싫어하는, 피상적인 변화는 원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싫어하는, 현실안주형 진보주의자라고 할까.
맥도날드 본사에는 골든 아치가 없다
이번 미국 여행지를 결정할 때 첫 번째로 맥도날드가 떠올랐다. 끝없는 세포분열을 통해 미국을 프랜차이즈하고 나아가 전세계에 촉수를 뻗치고 있으며 나의 취향과 체질마저 보수화시키고 있는 이 괴물의 정체를 모르고는 미국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심장부를 쳐들어가지 않고서는 어떻게 자료만으로 맥도날드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가자.
오후 4시가 돼서야 일리노이 주 오크 브룩(Oak Brook)에 있는 맥도날드 본사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지 못했다. 처음엔 맥도날드 본사에서 파는 햄버거 맛을 보기 위해 꾹 참고 운전했다. 그런데 고속도로 290번에서 빠져 나와 루트 63번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다 31번가를 만났을 때 좌회전해야 할 걸 우회전해버렸다.
길을 찾느라 시간이 지체되자 마음이 간사해지기 시작한다. 오크 브룩에 있는 아무 맥도날드에서나 햄버거를 먹으면 어떤가. 맥도날드 본사가 있는 동네의 햄버거 맛이 어떤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동네엔 그 흔한 맥도날드가 없다. 파운틴 쇼핑 몰이라는 곳에 들어갔더니 맥도날드 비슷한 패스트 푸드점도 없다. 오크 브룩은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 중 60개 기업의 본사나 지사가 있는 오피스 전원도시. 경비원이 출입문을 지키는 고급 주택촌들이 하늘 높이 자란 숲 속에 숨어있다.
그렇게 헤매다 보니 어느 새 맥도날드 본사 건물 중 하나인 8층짜리 맥도날드 플라자에 도착해버렸다. 그런데 이게 맥도날드 건물인지 긴가민가했다. 맥도날드의 상징, 골든 아치가 없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맥도날드 본사를 찾는 것은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세계 곳곳에 솟아있는 골든 아치가 본사 건물에는 얼마나 높이 솟아있을 것인가. 멀리서 그것을 길잡이 삼아서 따라오면 본사 건물에 당도하지 않겠는가.
골든 아치는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토마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이 만들어낸 ‘골든 아치의 분쟁 예방 이론(Golden Arches Theory of Conflict Prevention)’이라는 그럴듯한 얘기의 소재이기도 했다. <올리브 나무와 렉서스>라는 그의 책에 따르면 지금까지 골든 아치가 들어간 나라끼리 전쟁하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골든 아치가 마치 평화의 전령인 것처럼 보이는 이 주장은 곧장 깨졌다. 미국 매릴랜드대의 사회학자 조지 리처는 저서 < McDonaldization of Society >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이 이미 맥도날드가 들어간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어쨌든 그처럼 이론에도 등장하는 골든 아치가 본사에는 없다.
그 이유를 추론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골든 아치는 맥도날드의 창업자 레이 크록이 그토록 미워한 맥도날드 형제의 작품이다. 맥도날드는 60년대말 회사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리차드 맥도날드가 본래 고안한 식당의 디자인을 바꿔버렸다. 이 때 골든 아치마저 없애버리고 했다. 그러나 디자인 변경에 따른 소비자 반응을 조사하기 위해 채용한 심리학자겸 디자인 컨설턴트 루이스 체스킨(Louis Cheskin)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는 골든 아치가 소비자의 무의식에서 프로이드적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골든 아치 한 쌍을 보면 큰 가슴이 연상되기 때문에 엄마 맥도날드 젖가슴의 이미지로 소비자들의 무의식에 각인돼 있다는 것. 솔깃한 그의 설명 덕분에 골든 아치는 철거의 운명을 피해 오늘날에는 교회의 십자가보다 더 유명한 야외 조형물 중 하나가 됐다. 그의 말을 듣고 다시 보면 아치가 큰 가슴을 닮은 것 같기는 하다.
본사 건물 1층에 있는 맥도날드 햄버거에서 '넘버 6 BIG N TASTY' 세트 메뉴를 주문했다. 3달러30센트에 세금 22센트 모두 3달러52센트다. 싼 편이다.
이 식당은 두 가지 점에서 지금까지 가본 수많은 맥도날드와 달랐다. 먼저 탄산음료 외에 주스와 스포츠 음료도 같은 가격에 선택할 수 있고 대중소 구분 없이 맘껏 따라 마실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식탁과 의자가 붙어있지 않았다. 마치 진짜 식당처럼 의자를 뒤로 길게 뺄 수도, 바짝 붙여 앉을 수도 있었다. 조화이기는 했지만 빨간 장미 한 송이가 식탁마다 놓여있어 제법 진짜 식당 같다. 다른 맥도날드에 가면 식탁과 의자가 붙어있어 거리조정이 안 된다. 필자처럼 다리가 긴 사람으로서는 공부할 때도 하지 않는 정좌를 하고 햄버거를 먹어야 한다. 더구나 의자는 딱딱하고 초를 발라놓은 것처럼 반질반질하다. 인체공학적으로 이처럼 일부러 오래 앉아 있지 못하도록 설계된 식탁과 의자는 매우 드물다.
리처 교수는 그게 바로 맥도날드가 노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빨리 일어나야 손님들의 회전이 빨라진다. 빠른 회전은 많은 매출, 높은 수익을 의미한다.
그게 패스트 푸드다. 원래 자동차 여행 도중 가볍게 빨리 먹기 위해서 패스트 푸드가 나왔지만 패스트 푸드가 보편화되면서 패스트 푸드의 속도에 사회가 좇아가는 양상이 돼버렸다. 일례로 점심 시간은 더욱 더 짧아진다. 남들이 패스트 푸드를 먹고 일찍 오후 업무를 시작하는데 여전히 점심을 먹고 있다면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다른 의미에서 속도전을 촉발하기도 한다. 맥도날드에 소고기를 납품하는 미 최대의 소고기 가공업체 IBP의 도살장에서는 시간당 4백 두의 소가 도살된다고 한다. 만약 시간당 3백 두의 소를 도살하는 업체가 있다면 이 업체는 IBP보다 소고기 가공 원가가 높기 때문에 맥도날드사에 대한 납품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만약 시간당 5백 두의 소를 도살하는 업체가 나타난다면 IBP로서는 기를 쓰고 도살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를 도살하고 가공하는 작업에는 지금도 일일이 사람의 손이 가야 한다. 날카로운 큰 칼을 쥔 손이 빨라져야 한다. 그러다 보면 더 많은 부상을 입게 되고 때로는 사람이 도살되는 일마저 일어난다. 그게 실제 미국 육가공 공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맥도날드라고 해서 속도를 조절하지는 못한다. 운전석에는 앉아 있지만 끊임없이 다른 차의 속도를 곁눈질해야 한다. 맥도날드는 더 이상 미국 내에서 최대 가맹점을 가진 프랜차이즈가 아니다. 최대 가맹점을 가진 프랜차이즈는 버거킹도, 웬디스, 캔터키 프라이드 치킨도 아닌, 가장 후발주자인 서브웨이다.
미국 최대 프랜차이즈 가맹점은 맥도날드가 아니다
맥도날드보다 10년 늦은 1965년에 생긴 서브웨이는 2001년 12월31일을 기준으로 미국 내에서 1만3247개를 기록, 맥도날드를 148개의 차이로 제쳤다. 서브웨이는 미국 내에서 매년 1천 개 꼴의 파죽지세로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늘려가고 있는 반면 맥도날드는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다.
서브웨이의 성장비결 중 하나는 칼로리가 적은 샌드위치다. 서브웨이의 대변인은 제러드 포글(Jared Fogle)씨. 그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회사를 대변한다. 포글씨는 하루에 서브웨이 샌드위치 2개만 먹으면서 1년 동안 꾸준히 운동량을 늘린 결과 무려 110kg을 뺐다고 선전하고 있다.
오타가 아니다. 110kg. 웬만한 여성 두 사람의 체중을 뺐다. 그렇게 하고도 그의 몸에는 87kg이 남았으니 원래 몸무게가 얼마였을까. 그는 세계에서 가장 뚱뚱한 국민인 미국인의 새로운 우상이다. 일년 열두 달 365일 강연요청이 쇄도한다. 더 살이 안 빠지는 게 궁금할 지경이다.
서브웨이 성장의 비결이 꼭 샌드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서브웨이의 특공대원들은 ‘개발 에이전트(development agent)’. 개발 에이전트는 서브웨이 직원이 아닌, 독립적인 세일즈맨들인데 이들은 샌드위치가 아닌,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판다. 한 가맹점을 개점할 때마다 가맹점 신청자로부터 프랜차이즈 가맹비의 절반, 그리고 이 가맹점이 매년 내는 로열티의 1/3을 가져가며 가맹점의 권리가 다른 사람한테 넘어갈 때는 권리금의 1/3을 먹는다. 이들은 매월 가맹점 확장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서브웨이 본사에 부족분만큼 물어내야 하기 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가맹점을 늘려갈 수밖에 없다.
서브웨이 가맹비는 10만 달러로 주요 패스트 푸드 프랜차이즈 중에서는 가장 낮다. 하지만 매년 내는 로열티는 매출의 8%로 가장 높다. 쉽게 가맹할 수 있기 때문에 가맹점 주인 중 이민자들이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서브웨이는 공항, 편의점, 운동장, 병원, 비디오 대여점 등 구석구석 조그만 틈만 있어도 파고 들어가 맥도날드와 다른 선발 업체들을 포위해 버린다.
최근 맥도날드가 긴장하는 빛이 역력하다. 새로운 경쟁자들의 도전도 도전이지만 무엇보다 비만과 당뇨의 원인을 제공하는 패스트 푸드의 원흉으로, 그리고 미국 자본 침투의 첨병으로 찍혀서 세계 곳곳에서 보이코트와 심지어는 폭탄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올해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슈퍼사이즈 미(Supersize me, 나를 극대화하라)> 역시 맥도날드에게는 중성자탄 같은 것이다. 감독 모건 스퍼로크(Morgan Spurlock)가 스스로 30일 동안 맥도날드 제품만 먹은 체험을 기록해 만든 이 영화는 호주와 같은 곳에서는 다큐멘터리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영화에서 그의 몸무게는 한달 동안 11kg이나 늘었고 콜레스트롤 수치가 168에서 230으로 치솟았다. 뿐만 아니라 불면증, 가슴 두근거림, 설탕 중독 등의 고통을 호소했다. 맥도날드는 당초 이 영화를 무시했다. 영화를 보면 스퍼로크가 맥도날드측에 집요하게 인터뷰를 신청하지만 15번 동안 전화를 걸어도 회답이 없다.
필자도 여기 오기 전 맥도날드 본사에 인터뷰를 신청했지만 일주일 만에 온 회답은 한국 맥도날드를 통해 취재목적을 밝히고 새로 절차를 밟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고 찾아왔다.
맥도날드 플라자에서 차로 5분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맥도날드 캠퍼스가 펼쳐진다. 남북으로는 31번가와 22번가 사이, 동서로는 루트 63번과 요크 로드 사이의 10만평 대지에 자리잡은 이 곳에는 햄버거 대학과 하이야트가 운영하는 호텔, 또 다른 본사 건물이 있다.
특히 햄버거 대학이라는 이름이 멋있다. 햄버거라는 식품 하나를 소우주로 생각하고 연구하고 가르친다면 세상이 얼마나 다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가득 차 있게 되는 것일까. 담배 대학도, 연필 대학도, 심지어는 가위 대학도 생길 수 있는 것 아닌가.
미국의 어느 대학 못지 않은 아름다운 캠퍼스다. 울창한 숲과 뱃놀이를 할 만큼 넓은 호수를 끼고 있다. 캠퍼스 내 두 줄기의 도로는 각각 로널드 레인(Ronald Lane), 크록 드라이브(Kroc Drive)로 명명돼 있다. '로널드'는 맥도날드가 어린이를 겨냥해 개발한 어릿광대 캐릭터 로널드 맥도날드에서, '크록'은 창업자 레이 크록의 이름에서 따왔다.
대학과 호텔 사이에 있는 호수는 '레이크 프레드(Lake Fred)'라고 불린다. 프레드는 크록에 이어 맥도날드의 2인자였던 프레드 터너의 이름이다. 정확한 지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날의 맥도날드는 터너 없이는 상상하기 어렵다.
맥도날드 햄버거는 모스크바 맥도날드든, 시카고 맥도날드든 익히기 전의 무게가 1.6 온스(약 44.8g)이어야 한다. 햄버거 안에 들어가는 간 소고기의 지름은 3.875 인치(9.8425cm), 빵의 지름은 조금 작아서 3.5 인치(8.89cm). 햄버거 고기의 지방 비율은 19%로 통일돼 있다.
이처럼 햄버거의 품질이 규격화돼 있기 때문에 맥도날드 본사에서 먹는 햄버거든,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먹는 햄버거든 맛이 같다. 이 같은 통일성이 맥도날드 성공의 원인이다. 낯선 음식을 접할 때의 불안감이 맥도날드에는 없기 때문이다. 최선의 선택은 아니지만 항상 무난한 선택은 된다. 이것이 나의 식성을 보수화시키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처럼 제품 표준화의 가치에 일찍 눈 뜨고 피클의 두께까지 통일한 사람이 터너다. 후에 크록에 이어 2대 선임 회장에 오른 터너는 1958년부터 회사의 운영과 직원 훈련 매뉴얼을 만들어 거의 모든 것을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도록 했는데 75쪽이었던 이 매뉴얼이 지금은 700쪽이 넘는다. 이 매뉴얼의 별명은 ‘성경’이다.
700쪽에 달하는 맥도날드 '성경'
햄버거 대학도 터너 회장이 자신이 직영한 매장이었던 엘크 그로브 빌리지(Elk Grove Village)의 지하실에 만든 훈련 센터에서 시작된 것이다. 햄버거만 죽자 사자 연구하는 데는 아니다. 그러니 담배 대학이나 가위 대학도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지금은 30여명의 교수진이 맥도날드 매니저들과 예비 점주들을 대상으로 매장관리에서부터 장비관리, 인사관리 품질관리 고객관리 등 햄버거 매장 운영에 관한 모든 것을 22개 언어로 가르칠 수 있다. 2주 과정을 졸업하면 ‘햄버거학(hamburgerology)’의 수료증을 받는다. 지금까지 6만5천명이 이 대학을 다녀갔다. 시드니 뮌헨, 도쿄, 홍콩, 상파울로, 런던에도 ‘분교’를 두고 있다.
‘학생’들은 호수 위로 난 구름다리를 건너 ‘라지(lodge: 오두막집)’라는 소박한 이름의, 하지만 하룻밤의 숙박료가 세금 포함 175달러(약 20만원)인 호텔에서 묵는다. 객실 수가 218개나 되는 이 호텔은 일반인도 투숙할 수 있다. 실내 수영장과 헬스 클럽, 이태리 식당, 대연회장 등을 갖추고 있다.
호텔 복도에는 맥도날드 콤보 세트를 정물화로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수채화로 그린 이 그림은 마치 캠벨 수프 캔을 그린 앤디 워홀의 그림처럼 우리가 물신화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햄버거는 그냥 무난한 선택 정도가 아니라 그 미학을 감상하면서 먹는 대상으로 올라섰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이 호텔의 로비에서 만난 흑인 여성 티나 그레인은 “햄버거 대학에서 비즈니스 리더십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하루에 9시간씩 수업을 듣지만 중간에 휴식이 있어서 일하는 것보다는 수월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텍사스 주 위니에 있는 맥도날드 햄버거 가맹점의 매니저. 처음 크루(crew)라고 부르는 일반 종업원에서부터 시작해 근무조의 조장, 보조 매니저를 거쳐 지금의 자리까지 오는데 13년이 걸렸다. 맥도날드 한 가맹점의 평균 종업원수는 50명 내외. 이중 조장, 보조 매니저, 매니저로 이뤄지는 간부진은 5명 안팎이다. 그녀는 “그야말로 밑바닥에서부터 빡빡 기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며 활짝 웃어보였다.
그녀는 원래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엔지니어로 일하다 항공 스튜어디스를 거쳐 맥도날드에 들어왔다. 맥도날드 종업원들의 기준으로 보면 이례적인 경력이다.
어떻게 해야 당신처럼 매니저가 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누구나 열심히 하면 될 수 있다”고 바로 대답했다. 곧 성공학에 대해 한바탕 늘어놓을 기세다. 그래서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견제성 질문을 재차 던지자 “뛰어난 관리 기술만 있으면 된다”고 답했다. 두 대답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뛰어난 관리 기술이 생기느냐고 더 묻지는 않았다.
얼마를 받느냐고 묻자 “돈이란 항상 부족한 것 아니냐. 불평하지는 않는다”면서 끝내 털어놓지 않았다. 패스트 푸드 체인의 매니저들의 평균 연봉은 2만3000달러 수준(2002년 기준)으로 높은 편은 아니다. 그녀의 꿈은 지역의 감독관(supervisor)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감독관이 되기 위해 대학에 등록해 스페인어를 배워야겠다고 말했다. 지금은 스페인어를 모르고는 영업도 관리도 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텍사스에는 남미에서 온 이민자(Hispanic)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미국 내 맥도날드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 중 6분의 1은 영어가 오히려 외국어다. 가끔 맥도날드 햄버거에서 세트 메뉴를 고르지 않고 복잡한 주문을 하면 종업원이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다. 보통은 자기 영어에 문제가 있는 줄 알고 부끄러워하게 되는데 사실은 저쪽 영어가 더 문제일 수 있다. 넘버 원, 넘버 식스 등의 맥도날드 잉글리시(McDonald English)로만 대화가 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본사에 있는 맥도날드 햄버거 식당에서 만난 엔리케씨가 그런 경우다. 멕시코에서 이민 온 그는 식당을 청소하는 일을 맡고 있다. 햄버거를 먹는 도중 눈길이 부딪힐 때마다 받아주는 미소가 부드럽다.
다가가서 몇 마디 대화를 이어나면서 그가 시간당 8달러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필자가 놀라는 표정으로 꽤 많이 받는다고 말하니까 아홉 손가락을 펴면서 지금까지 9년 동안 일해 왔는데 그게 뭐 많으냐고 말했다. 그는 올해 65세다. 그의 바람은 앞으로도 계속 안정적으로 청소하는 것이다. 북미 대륙의 맥도날드에는 노조가 없다. 그리고 지금 기자가 둘러 보고 있는 본사에는 노조 결성을 와해시키는 기동타격대가 있다.
햄버거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자. 이 아름다운 호수에 연한 그림 같은 햄버거 대학이 맥도날드 제품과 직원을 표준화시키는 역할을 해왔지만 맥도날드가 주도해온 마케팅의 혁신에 기여한 흔적은 많지 않다. 판매량을 늘리는 고전적인 마케팅 방법은 한 개의 값에 두 개를 팔면서 한 개 값을 살짝 올리는 것이었다. 이 방법을 쓰면 옷이나 책, 가구 등 어떤 제품도 판매량이 늘었다. 하지만 음식에는 소용이 없었다. 한번에 먹을 수 있는 양이 제한돼 있어서 그런 탓도 있지만 근본 원인은 딴 데 있었다.
극장의 수입은 팝콘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팝콘의 판매 마진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60년대 극장 체인 밸러밴(Balaban)에서 일하던 데이비드 왈러스타인(David Wallerstein)은 팝콘 판매가 부진한 원인을 분석했다. 한 상자 값으로 두 상자를 준다고 해도 사람들은 손사래를 저었다.
왜 그럴까. 그는 어느 날 사람들이 두 상자를 쥐면 너무 탐욕스러워 보이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럼 한 상자로 만들어 버리는 게 어떨까. 그는 팝콘 상자를 두 배로 크게 만든 점보 사이즈 팝콘을 내놓은 뒤 가격은 조금만 올려서 내놓았다.
그렇게 첫 주가 지난 뒤 판매량을 조사한 결과 왈러스타인은 스스로도 놀랐다. 팝콘 판매량이 는 것은 물론이고 코카콜라와 같은 탄산음료의 판매도 급증했다. 팝콘을 많이 먹으면 짜니까 음료수도 자연 많이 먹게 된다. 음료수의 판매 마진도 팝콘만큼 크기 때문에 마케팅 효과는 두 배가 아니라 거의 4배가 됐다.
맥도날드로 이직한 왈러스타인은 그 경험을 되살려 70년대 초 큰 사이즈의 프렌치 프라이를 제안했다.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다. 레이 크록마저도 사람들이 프렌치 프라이를 더 먹길 원하면 두 통을 시킬텐데 굳이 큰 사이즈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왈러스타인은 사람들이 프렌치 프라이 통의 바닥까지 긁어서 먹는 것을 보면 분명 더 먹길 원하지만 새로 한 통을 주문하지 않는 심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맥도날드가 마지 못해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대자 프렌치 프라이를 내놓았다. 사이즈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맥도날드 성공의 비결은 '슈퍼사이징
1960년대 피츠버그에 있는 맥도날드의 점주였던 짐 델리가티(Jim Delligatti)가 햄버거 두 개를 붙여서 만든 빅 맥도 비슷한 마케팅 개념이었다. 먹으면 더 들어가게 돼 있는 게 ‘위대한’ 배의 속성이다. 그렇게 한번 대자로 사이즈를 확대해 놓으니까 점점 더 들어갔다.
1960년대 200 칼로리였던 프렌치 프라이가 70년대말에는 320, 90년대 중반에는 450에서 90년대 후반 540 지금은 610 칼로리까지 치솟았다. 그 동안 과체중이거나 비만이던 미국인의 비율은 인구의 25%에서 지금은 과반수가 넘는 61%로 올라갔다.
아마 인류 역사상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한 나라 국민의 체형이 집단적으로 비틀린 경우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단지 패스트 푸드의 문제만은 아니다.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혁신은 세트메뉴의 개발. 버밍햄 맥도날드의 점주였던 맥스 쿠퍼(Max Cooper)의 작품이다. 가격을 더 이상 내릴 수도, 비용을 더 이상 줄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윤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은 매출을 늘리는 것이다.
극장이 팝콘으로 돈을 벌듯이 햄버거 식당은 음료수와 프라이로 돈을 번다. 햄버거를 팔아서 남는 돈은 얼마 안 된다. 1975년 쿠퍼는 햄버거를 판매 마진이 높은 음료수, 프라이와 한 꾸러미로 파는 게 어떨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표준화와 통일성을 중시하는 맥도날드 본사는 그의 파격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독립기념일을 기해 빅 맥과 음료수, 프라이를 결합한 콤보 메뉴를 내놓았다. 대히트였다. 지금은 모든 맥도날드 그리고 버거킹과 웬디스와 같은 다른 패스트 푸드 체인도 모두 세트 메뉴를 쓰고 있다.
이 변화를 미국 패스트 푸드 업계에서는 '수퍼사이징(supersizing)'이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햄버거와 프렌치 프라이 중 하나만 먹던 사람도 세트 메뉴를 선택한다. 햄버거와 프라이 두 개를 따로 사는 것보다 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세트 메뉴를 고른다. 그렇게 점심을 먹었다고 해서 저녁을 거르지는 않으니까 칼로리 섭취량은 비약적으로 늘 수밖에 없다.
콤보 메뉴나 빅 맥은 물론 생선 샌드위치(Filet-o-Fish)와 에그 맥머핀(Egg McMuffin), 아침 식사메뉴도 모두 본사가 아닌, 한 가맹점에서 개발돼 효과가 입증된 뒤 본사를 통해 전 가맹점으로 확산됐다. 내친 김에 맥도날드의 메뉴에 대해 한 가지만 더 얘기하고 넘어가자. 치킨 너게츠다. 이 제품은 밑에서가 아니라 위에서 내려간 상의하달식의 개발 과정을 거쳤다.
1979년 레이 크록으로부터 회장직을 넘겨받은 레이크 프레드의 주인공 터너는 육류 납품회사였던 키스톤 푸드(Keystone Foods)의 간부를 불러서 엄지 손톱 크기의 뼈가 없는 닭고기 제품을 개발해보라고 제안했다. 당시는 소고기나 돼지고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방이 적은 닭고기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을 때였다.
닭고기 상품화의 필요성을 일찍 깨달은 터너 회장의 제안에 따라 키스톤사의 실험실은 맥도날드 소속 과학자들과 협력해 6개월 만에 맥너게츠를 개발해냈다. 맥너게츠가 대성공할 가능성이 보이자 맥도날드는 공급을 늘리기 위해 최대 닭 가공회사인 타이슨(Tyson)사를 끌어들였다. 타이슨은 가슴만 비대한 새로운 닭 품종을 개발해, ‘미스터 맥도날드’라고 명명했다.
맥너게츠의 공식 데뷰는 1983년. 맥도날드는 단번에 미국 내에서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다음으로 큰 닭고기 구매회사가 됐고 그 이후 9년만인 1992년 미국 내에서 소비되는 육류 중 닭이 소를 처음으로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건강에 더 좋은 것으로 보였던 맥너게츠의 지방산 분포가 닭고기보다는 소고기에 가깝다는 하버드대의 연구결과가 나왔다. 한 온스당 너게츠에 포함된 지방은 햄버거에 비해 두 배나 되는 것으로도 밝혀졌다.
어쨌든 폭증하는 닭고기 소비를 충족시키기 위해 닭을 대량생산하는 체제가 들어섰다. 그러자 언제나 대량생산시대가 되면 그렇듯 닭을 키우던 농가들은 기업농에 밀려 폐가가 돼버렸다. 이미 패스트 푸드 햄버거의 등장에 따라 소고기 수요가 늘면서 목축업도 대기업화되고 미국의 영원한 상징인 카우보이들이 거의 멸종지경이 이르게 된 것에 이은 미 농가의 또 다른 타격이었다.
수요가 늘어날수록 그 물건이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사람들의 생활이 오히려 궁핍해진다는 것은 역설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자본주의적 역설이다. 에릭 슐로서는 이것을 합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에 빗대 설명했다. 합성의 오류는 개인적으로는 타당한 행동을 모두가 다 같이 할 경우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될 때 쓰인다. 혼잡한 콘서트에서 자기만 잘 보려고 일어서면 모두 다 일어서 모두가 다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게 비근한 예다. 저축을 장려해서 모두 저축만 하고 소비를 안 하면 경제가 망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슐로서는 미국 농민들이 서로 더 싼 가격에 더 많은 농산물을 더 빨리 생산하려고 경쟁하다 보니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모두가 죽게 되고 대기업만 살아남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합성의 오류로 설명하는 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방치해두면 독점화되는 경향을 띠고 있는 자본주의의 내재된 특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맥도날드가 세계 최대의 패스트 푸드 회사가 된 것은 바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가맹점의 독립적인 실험을 허용하고 수용할 줄 아는 유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으로서의 맥도날드에 대한 평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맥도날드 성장에 따른 다른 부문의 희생이 너무나 크다. 그 일차적인 대가는 미국인들이 갈수록 비만해지는 몸으로 치르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숲에 파묻힌 맥도날드 캠퍼스에서 피폐화되는 농촌과 획일화되는 식성과 문화, 산처럼 커지는 미국인의 체형이 잘 보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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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에 탈산업화가 남긴 깊고 긴 상처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 5] 제너럴 모터스의 본거지 플린트
홍은택(ehpk3) 기자
미시간 주 플린트(Flint)는 세계 최대의 기업이었던 제너럴 모터스(GM)의 본거지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마이클 무어의 '고향'으로 더 유명할지도 모르겠다.
영화 <화씨 9/11>을 보면 무어는 자신의 고향 플린트에서 해병대원들이 신병을 모집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가난한 흑인 청소년들만 주로 '꼬임'에 넘어간다. 이라크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애간장 끊는 사연도 플린트 발이다.
반면 무어의 첫 영화 <로저와 나(Roger and Me)>는 전적으로 플린트에 관한 것이다. 1986년 11월 제너럴 모터스의 회장 로저 스미스가 3만 명이 일하는 플린트 공장을 멕시코로 이전한다고 발표하는 것을 계기로 플린트가 겪고 있는 실직과 빈곤의 아픔을 그린 영화다. 제목이 그렇게 붙은 것은 영화 전편에 걸쳐 로저 스미스 회장이 플린트 시내의 참담한 실정을 보게 하도록 무어가 스미스와의 접촉을 시도하는 과정이 나오기 때문이다.
DVD로 빌려본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 영화는 플린트에서는 상영되지 않았다"는 자막이 나온다. 이 문구에 잠재된 메시지는 플린트에서는 이 영화를 보이코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플린트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는데 불만을 품은 플린트의 상인들이 그렇게 한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영화를 봤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격한 반응에 깜짝 놀랐다. 플린트 도심에 있는 미시간대 플린트 캠퍼스의 사회복지학과 캐슬린 워얼(Kathleen L. Woehrle) 교수의 연구실. 워얼과 찰스 베일리(Charles W. Bailey) 등 두 명의 교수와 얘기를 나누던 중 가볍게 그 부분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베일리 교수가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베일리 교수는 이곳에서 30년 이상 살아왔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무어를 본 기억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여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머쓱해진 필자가 말을 더듬거리며 "그럼 영화가 상영됐느냐"고 물었더니 워얼 교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기술적으로 플린트 시내에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이제는 한 군데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시 경계를 조금 벗어나면 극장이 여러 군데 있긴 한데 거기서 <로저와 나>를 상영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마이클 무어와 플린트
플린트 내에 극장이 없으니 영화를 상영할 수 없다. 그걸 마치 극장이 있는데도 상영이 안 되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은 관객을 오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구 12만 명이 사는 도시에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하나도 없다는 것 자체도 GM이 빠져나가고 난 뒤 도시가 겪는 아픔을 웅변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생활고를 겪고 있는 한 여인이 토끼를 키워서 식용으로 파는 장면에 충격을 받는다. 그 여인이 직접 토끼를 죽여서 껍질을 벗기는 장면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비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로 자주 인용되는 이 에피소드에 대해서 두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완 동물을 고기로 먹어야 할 만큼 플린트가 몰락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무어가 극단적 사례를 일반적인 현상처럼 묘사했다는 것이다.
무어는 엄격히 말해 플린트 출신이 아니다. 그는 플린트 남동쪽에 있는 데이비슨(Davison) 출신이다. 그는 데이비슨 시의 역사상 최연소 교육위원과 최연소 전임 교육위원의 기록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는 18세에 교육위원에 당선돼 22세에 연임에 실패했다. 그의 업적은 고등학교마다 흡연구역을 설치한 것. 화장실에서 피우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니까 아예 건물 바깥에 합법적인 공간을 마련해주고 거기에서 피우라는 뜻에서였다.
나중에 다른 도시에서 만난 미 환경보호청(EPA)의 공무원 매트 페인은 무어가 교육위원이던 시절 데이비슨에서 고교를 다녔다면서 "우리는 흡연구역을 '흡연 부두(smoking dock)', 거기에 들락거리는 아이들을 '부두의 쥐새끼들(dock rats)'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이는 무어다운 독특한 발상이었지만 재선 실패의 원인이 되고 만다.
무어의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GM에 다녔다. GM과 플린트가 동의어와 마찬가지였으니까 무어가 플린트 출신이라고 주장해도 무방한데 굳이 그를 플린트 출신이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플린트의 마지막 남은 존엄마저 무어가 무너뜨렸기 때문"이라고 베일리 교수는 말했다.
플린트는 헨리 포드가 처음으로 자동차 대량 생산시대를 연 디트로이트에서 불과 109km 북쪽에 있다. 윌리엄 듀런트(William Durant)가 듀런트-도트(Durant-Dort) 마차 공장을 접고 1908년 당시로서는 신기술인 자동차 공장을 과감히 세우면서 플린트는 비약적인 성장을 시작했다. GM이 포드를 추월해 세계 최대의 자동차 기업이 되면서 플린트는 디트로이트를 제치고 자동차의 메카가 되기도 했다.
"플린트는 약속의 땅이었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끝없이 밀려들었다. 한 때 인구가 20만 명이 넘었다."
베일리 교수는 시내 곳곳을 차로 안내하면서 플린트에 대해 설명했다. 그 역시 약속의 땅을 찾아온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어릴 적 남부에 살았다. 어느 날 부친이 사냥 갔다가 총기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그곳에서 살 수 없어 삼촌이 있는 이 곳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베트남 전에서 다리를 다쳐 학업 외에는 다른 직업을 가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약속의 땅 플린트의 몰락
산업공동화 또는 탈산업화(deindustrialization)라고 하면 감쪽같이 산업이 빠져나가는 게 연상되지만 그 산업을 품어왔던 도시에 깊고 오랜 흉터를 남긴다. 산업화가 도시의 환경을 파괴한다고 하면 탈산업화는 도시의 생명을 파괴한다. 가슴이 미어진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작기계와 건물들이 무성한 잡초 속에서 나뒹구는 모습은 공동묘지가 떠오르게 한다. 근대화의 공동묘지.
플린트 시내에는 뷰익 시티(Buick City)라고 불리는 넒은 구역이 있다. GM을 대표하던 차종인 뷰익의 세계 본사와 조립공장이 있던 곳이다. 세계 본사는 2층 밖에 안되지만 건물의 한쪽 변이 도로의 한 블록을 차지할 만큼 넓다. 지금도 쓰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여전히 단정했다. 수천 개의 사무실이 있을 법한 그 건물이 통째로 비어있다. 이런 곳에서 술래잡기를 한다면 절대 술래가 돼서는 안 된다.
뷰익 조립공장은 물론 더 크다. 주차장의 끝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아스팔트 평원을 이루고 있었다. 질긴 잡초들이 뚫고 나와 아스팔트를 파란 풀로 뒤덮는 자연의 도배공사가 진행 중이다. 건물 주변에 세워진 몇 대를 제외하고는 차가 없다. 거대한 허공이다. 인생이 아니라 공장의 덧없음이다.
"어마어마한 공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게 바뀌기는 하지만 이렇게 극적으로 바뀔 수가 있는 것인가."
베일리 교수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그는 종종 이곳에 오면서도 항상 감회에 젖는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저 외면하지만 나는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 위해 이곳에 오곤 한다."
플린트 시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아이들을 키우기 좋은 도시'로 선정됐고, 어떻게 뽑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행복한 도시(the happiest city)'로도 뽑혔다고 한다. 영화 <로저와 나>에 삽입된 도시의 퍼레이드와 축제의 기록 필름을 보면 그 들뜨고 행복한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노동자들은 풍족한 삶을 누렸다. 노사가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묘하게도 미국 노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승리로 기록되는 1937년 파업의 결과였다. 우리는 바로 그 역사적 현장으로 가고 있다.
노동자 중산층 시대를 연 파업
베일리 교수는 시보레(Chevrolet) 엔진 공장으로 안내했다. 사우스 시보레 에버뉴(South Chevrolet Avenue)의 공장 서벽에 ‘The FlINT SIT-DOWN PLANT NO.4(플린트 연좌농성 공장 제 4호)’라는 미시간 주 사적 표지판이 붙어있다. 여기가 바로 1936년 말부터 시작된 GM과 자동차노조연맹(United Auto Workers Union, UAW)의 힘겨루기가 절정을 이룬 곳이다. UAW는 대공황 이후 악화된 근로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AFL(American Federation of Labor : 미국 노동총연맹)과 독립해서 설립된 조합이다.
GM이 UAW를 인정하지 않자 UAW 소속 노조원들은 36년말 애틀란타에 있는 피셔 보디 공장(Fisher Body Plant)에서부터 시작한 파업을 캔자스 시티를 거쳐 플린트에 있는 피셔 보디 제1호 공장으로 확대했다. 노조원들은 노조가 없거나 조합의 힘이 약한 다른 공장으로 일감이 옮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공장에 진을 치고 농성을 벌였다. 공장에 진입하려는 경찰, 무엇보다 회사의 경비원, 스파이들과 무력 충돌이 있었지만 공장을 빼앗기지 않았다. 물론 당시는 노동자에 우호적인 프랭클린 루즈벨트 민주당 정권의 시절이었다.
노조원들이 동조 시위를 요청하자 디트로이트 시내 캐딜락 광장에 15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뜨거운 호응에 힘입은 노조원들은 37년 2월1일 시보레 엔진 공장인 제4호 공장, 바로 표지판이 붙어 있는 이 공장을 점거하는 데 성공했다.
4호 공장이 점거되면 엔진 공급이 중단되기 때문에 전국에 있는 시보레 공장들이 멈춰야 한다. 표지판에 따르면 노조원들은 성동격서의 양동작전을 구사한 것으로 돼 있다. 인근 제9호 공장에서 연좌 농성을 벌여 구사대원들을 그 쪽으로 유도하고 노조의 여성 기동타격대(Women’s Emergency Brigade)가 외곽에서 피켓 시위를 하는 가운데 4호 공장을 장악했다. 공장을 되찾으려는 사측의 최루탄 세례에 볼트, 너트 투척으로 맞서는 불퇴전의 공방전 끝에 열흘 만인 2월11일 GM이 UAW를 단체교섭의 상대로 인정함으로써 48일간의 연좌 농성 파업은 막을 내렸다.
이후 UAW와 GM의 단체협상으로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들도 자동차를 살 수 있는, 노동자 중산층 시대가 미국에서 열렸다. 자동차 회사들은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늘어남에 따라 더 많은 차를 팔게 됐다. 73년 오일 쇼크가 첫 충격이었다. 큰 차를 만들어내던 미국 회사들은 일제 소형차에 밀려 거의 부도 직전까지 갔다. 그리고 80년대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시대가 도래하자 싼 임금을 찾아 멕시코로, 노조가 약한 미국 남부로 앞다퉈 공장을 옮겼다.
플린트 공장 노동자들에게 18달러를 줬던 시간당 임금이 멕시코에서는 80센트에 불과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UAW의 비타협적인 고임금 고수 전략이 공장이전과 실직을 불러왔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베일리 교수는 전했다.
공장 엑서더스는 그 막강한 제4호 공장도 막을 수 없었다. 기계가 멈췄다. 공장 안에는 정적이 감돈다. 이 육중한 엔진 공장들이 그냥 햇볕을 받으며 고철과 콘크리트 덩어리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벽에는 미국 노동운동의 찬란한 훈장을 달고서. 플린트의 GM에서는 8만 명이 일했다. GM이 공장을 이전하면서 노동자들은 따라가거나 퇴직 수당을 받고 전직했다. 영국 언론인 데이비드 코언(David Cohen)의 저서 ‘CHASING THE RED, WHITE, AND BLUE’에 따르면 연간 4만 달러에서 6만 달러를 받던 플린트 내 5만 개의 일자리가 연간 8천 달러에서 1만2천 달러를 받는 저임금 서비스직으로 바뀌었다.
수입의 격감은 인종 분포의 역전을 가져왔다. 8대2였던 백인 대 흑인의 비율은 지금은 흑인이 6대4의 비율로 더 많다. 백인들이 빠져나가니 흑인의 인구 비율이 늘어난 탓. 자연스럽게 미국 사회가 제도적으로 그토록 막으려고 노력했던 인종 분리(segregation)가 일어났다. 교외의 백인과 도심의 흑인. 그걸 도너츠 현상이라고 부른다.
대량해고에서도 흑인들의 피해가 더 컸다. 연재 첫 회에서 미국은 선착순 사회라고 썼지만 이 원칙은 상황이 안 좋아질 때는 후착순으로 바뀐다. 집단해고의 원칙은 가장 늦게 들어온 사람이 가장 먼저 잘린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연공서열을 존중하는 것인데 흑인들의 피해가 컸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잘 살던 플린트였지만 지금은 어린이의 40%가 절대적 빈곤층에 속한다고 베일리 교수는 말했다. 워얼 교수는 초등학교 4곳에는 거의 학생 전원이 무료급식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공장의 이전은 '대학교육을 안 받고도 중산층에 들어갈 수 있는 시대'의 끝을 의미한는 것.
무위로 돌아간 플린트의 안간힘
플린트 시가 몰락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를 되찾겠다는 집념이 눈물겹다. 관광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80년대 400객실 짜리 초호화 하얏트 리젠시 호텔을 1400만 달러를 들여 도심에 지었다. 호텔 맞은 편에 쇼핑몰과 놀이공간이 함께 있는 워터 스트리트 전시관을 세웠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플린트 강변에 1억 달러짜리의 오토월드 실내놀이공원(Autoworld)을 조성했다. 모두 2억 달러가 소요됐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도시의 추락은 멈추지 않았다. 전시관은 6개월 만에, 놀이 공원은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전시관은 미시간 대학이 헐값인 6만 달러에 사서 지금도 식당과 사무실로 쓰이고 있지만 오토월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토월드가 있던 자리에는 역시 대학 건물이 들어섰다. 16층짜리 매머드 호텔인 하얏트는 라디슨에 인수됐다가 리버프론트를 거쳐 지금은 캐릭터 인으로 바뀌었다.
베일리 교수는 "시가 투숙률 50%를 보장해주기로 하고 호텔을 팔았기 때문에 시민들의 혈세가 이 호텔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예컨대 손님들이 객실의 30% 밖에 차지 않으면 나머지 20%는 비어 있어도 시에서 돈을 내줘야 한다. 그러니 시 자체도 버티기 어렵다. 시 재정도 파탄이 나 주 정부가 시의 재정을 2년간 대신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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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땅에서 퍼왔다. 참 아이러니 하지 세계화의 일차 피해자가 미국의 서민들이라니..... 어제 일요스페셜에서 미대선 다루던데, 부시를 지지하는 측과 부시를 증오하는 측이라고 하더군 케리 지지가 아니라 (ㅡ,.ㅡ)
낼 또 이어서 올릴께 사실 나도 읽고 있는 중이거덩, 좀 길긴해도 재미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