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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스크랩 스페인의 두도시 이야기
킴스특허 추천 0 조회 43 09.03.02 23: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travel┃스페인의 두도시 이야기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해 영어 가이드 후안(Joan)을 만났다.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과 같은 미소와 열정을 가진 후안은 한시도 쉴 틈 없이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예술가들을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행 중 한 명이 스페인의 축구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레알 마드리드’ 팀을 자랑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FC 바르셀로나’ 이야기로 화제가 바뀌자 후안의 표정이 일순간 살짝 찡그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스페인의 극심한 지역감정은 우리나라의 ‘영남 對 호남’ 정도를 넘어선다. 그리고 지역감정은 축구를 통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스페인의 바와 광장에서는 바르셀로나의 응원단, 마드리드의 응원단, 그리고 축구 경기로 3분할된 듯한 화면으로 중계를 지켜볼 수 있는 대형 스크린이 마련된다. 축구 못지않게 양측의 반응이 더 재미난 구경거리가 되는 셈이다. 만약 FC 바르셀로나와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가 있는 날은 마드리드 역시 축구 열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자국의 팀인 FC 바르셀로나가 아닌 영국 팀을 응원하는 ‘기현상’을 연출한다.

 

스페인의 로마극장_ 메리다

 

그들 사이에서는 한때 엉뚱한 설문조사도 인기를 끌었다. ‘유럽축구 팬이 가장 빨리 죽는 방법은?’이라는 질문에 FC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 물의를 빚은 루이스 피구(Luis Figo)를 바르셀로나 시내 한복판에서 “I Love Figo”라며 응원하는 것이라는 결과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하니, 그 심각한 지역감정을 쉽게 엿볼 수 있다. 기실, 이런 지역감정의 근원은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세력을 유럽 밖으로 몰아내는 운동인 ‘레콩키스타(Reconquista)’의 중심지였다. 그때만 해도 안달루시아 지역은 이슬람의 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지금의 마드리드가 속한 중부지방에는 카스티야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북동부 지방에는 아라곤 왕국, 그리고 서쪽에는 포르투갈 왕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카스티야(Castilla) 왕국의 여왕이었던 이사벨라 여왕은 왕위계승 문제와 왕권 확립을 위해서 다른 지방의 왕국과 결합이 필요했다. 당시 포르투갈의 아폰소 5세와 아라곤(Aragun)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물망에 올랐다. 국력으로만 보자면 포르투갈 왕국이 아라곤 왕국보다 더 셌지만 젊은 왕이었던 페르난도 2세는 주변 국가들을 흡수하며 크게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이사벨라 여왕은 둘 중에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를 택했고 그로써 에스파냐가 생기게 됐다. 에스파냐의 국력은 더욱 강해졌고 결국 15세기 말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지금의 바르셀로나가 포함된 카탈루냐(Catalonia) 지방은 당시 아라곤 왕국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라곤 왕국이 카스티야 왕국에 흡수되어 버리면서 카탈루냐는 에스파냐에 흡수되었고 에스파냐의 중심지가 마드리드로 옮겨짐에 따라 당시 가장 발전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찬밥신세로 전락한다.

  1936~1939년까지 벌어진 스페인 내전 당시 바스크와 카탈루냐는 가장 끝까지 저항했고, 독재자 프랑코는 바스크 지방에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카탈루냐는 내전 당시 프랑코에 반대하는 인민정부의 최후 거점이었다. 1939년 1월 프랑코군에게 함락된 카탈루냐는 모든 자치권을 박탈당했다. 1975년 프랑코가 죽은 뒤 국왕 카를로스에 의해 카탈루냐는 가장 먼저 자치권을 획득한 지방이 됐고 카탈루냐어를 지역 표준어로 인정했다. 그렇게 카탈루냐어를 포함해 스페인의 공식 언어는 모두 4가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스페인어라고 칭하는 카스티야어 외에, 카탈루냐어, 서북부 지방의 갈리시아어, 그리고 피레네 산중 소수민족이 사용하는 바스크어 등이 그것이다. 복잡다단한 언어적 특성으로 스페인의 국가는 가사가 없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스페인은 모래 줄로 이뤄진 나라’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스페인’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있지만 줄을 잡아당기면 언제든 그 얕은 모래성은 우르르 무너져 버리고 만다는 의미다. 결코 화합할 수 없는 역사, 두 개의 다른 언어, 또렷한 개성과 스타일로 발전된 문화와 예술까지 그렇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평행선을 걸어 왔나 보다. 지금도 마드리드 사람들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치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아직 한 번도 올림픽을 치른 적이 없다”고 우기고 있고,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난 스페인어도 할 줄 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세에서 지금에까지 이르는 지역감정이 여행자에게는 스페인이라는 곳을 다양한 매력의 나라, 도시마다 개성이 또렷한 나라로 기억할 수 있게 해주니, 여행이란 참 재미난 아이러니인 것 같다.

 

 

 스페인은 문학, 미술, 건축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그만의 색을 휘황히 빛내는 나라임에 틀림이 없다. 그 명성을 입증하는 상징적 존재들은 마드리드 곳곳에서 다양한 예술 공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프라도 미술관,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 소로야 미술관, 낭만주의 미술관, 국립 고고학 박물관 등 대규모의 박물관에서 작은 갤러리까지 다양하다. 그중 꼭 들러 봐야 할 곳은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 이곳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함께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꼽힌다. 또 프라도 박물관에서는 교과서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예술 풍을 주로 배운 대한민국의 여행자들이 스페인의 예술, 예술가에게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통탄하게 만드는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같은 스페인 미술의 3대 거장의 작품을 다양하게 접해볼 수 있어 하루 이상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미술관에 널찍한 공간이 마련된 고야(Francisco de Goya)의 작품 전시공간에서는 스페인의 왕가를 묘사한 초상화뿐 아니라 프랑스 대혁명으로 몰락해가는 사회상을 다룬 풍자화까지도 감상할 수 있다. 프라도 미술관의 고야의 작품 동선을 따라가면 스페인뿐 아니라 고야라는 화가의 인생도 이해하게 된다. 고야는 1746년 스페인 동부지방의 한 벽촌에서 금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화가의 꿈을 키워갔던 고야는 1766년경 마드리드에 입성했지만 아카데미에서 두 번이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그 후 1773년 프란시스코 바이유의 여동생과 결혼한 고야는 3년 뒤 바이유의 후원으로 궁정 화가로 활약한다.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눠진 고야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즉 1771년부터 1794년까지 후기 로코코 시대에는 프랑스의 영향으로 왕조풍의 화려함과 환락의 덧없음을 다룬 작품이 많다. 그 후 다채로운 색채기법을 배웠고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등의 영향으로 차츰 고야만의 화풍을 형성했다. 프라도 박물관에 전시된 이 무렵 그의 대표작은 <카를로스 4세의 가족 The Family of Charles Ⅳ>. 당시 궁정 사회의 인습과 무기력, 허영과 퇴폐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또 그 못지않게 유명한 <옷을 입은 마하 Maja vestida>, <옷을 벗은 마하 Maja desnuda>에서도 에스파냐의 전통적 여성상을 깨고 위험하고 관능적인 여성을 표현했다. 1792년, 중병으로 고야는 귀머거리가 되었고, 나폴레옹군의 에스파냐 침입으로 그 시기 고야의 작품은 어둡고 암울하며 공포스러운 분위기까지도 보인다. 이 때의 고야는 공포와 폭력, 무의식적인 지하 세계, 인간의 내면에 대한 끝없는 성찰을 작품을 통해 여실하게 드러낸다. <1808년 5월 3일 The 3rd of May 1808:The 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이나, 연작판화인 <전쟁의 참화 Los Desastres de la Guerra> 등에서 살육과 광기, 인간의 극도의 폭력성을 화폭에 독특한 화풍으로 재현해냈다. 또 다른 연작 판화인 <변덕 Los Caprichos>, <부조리 Los Disparates>를 보면 고야 특유의 암담함이 에스파냐의 독특한 니힐리즘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그가 자신의 별장인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의 벽면을 꾸민 <검은 그림들 Pinturas Negras>까지도 전시되어 있어 한 예술가의 일생을 스페인의 역사와 더불어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고야를 비롯해 스페인 거장들의 작품을 본 뒤에 마드리드의 휘황찬란한 예술성은 광장 문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마요르 광장은 스페인에서 가장 뛰어난 광장 중 하나로 국왕의 취임식, 투우와 교수형, 종교의식이 집행되어 왔던 곳이며 시벨레스 광장은 도심 한복판 4차선 도로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아름다운 분수가 인상적인데 밤에는 조명이 더해져 낭만적인 광경을 연출해낸다. 푸에르타 델 솔은 태양의 문이라는 뜻의 광장으로 스페인의 분위기를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광장에 늘어선 노천카페에서 강렬한 스페인의 햇살과 여유를 마음껏 누려보는 것도 좋겠다.

 

 

 

 
마드리드의 박물관에서 거장들의 예술 감각을 느꼈다면 바르셀로나의 예술 감각은 보다 소담스럽고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유머가 묻어난다. 이곳에서는 천재 건축가 가우디를 비롯해 피카소, 미로 등 스페인 대표 예술가들의 자취가 거리거리에서 느껴진다. 해마다 인구 300만의 항구도시 바르셀로나를 찾는 관광객 수는 약 2,000만 명. 여행자를 끌어들이는 원동력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 그리고 그의 건축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리에 놓인 가로등과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는 건물부터 시민들을 위한 구엘 공원, 거기에 가우디의 상징물이 된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당까지 바르셀로나 전체가 가우디의 작품 전시장이요, 그 작품들로 인해 비로소 바르셀로나는 온전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1852년 구리 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난 가우디는 다섯 살부터 관절염에 시달리며 학교도 자주 빠지게 되고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해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주변의 자연 환경을 관찰’하며 보낸 뒤 바르셀로나대학도 간신히 졸업했다. 그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건축전문학교 시절. 대담하고 혁신적인 설계로 과제물마다 이슈를 만들어냈다. 학업을 마칠 무렵 가우디는 부유한 은행가문 출신의 건축가 구엘(Eusebi Guel)을 만났다. 그 후 가우디의 천재성을 알아본 구엘의 후원으로 돈 걱정 없이 구엘 교회(1894~1914), 구엘 공원(1900~1914)과 카사 밀라(1907)와 카사 바트요(1907) 등 많은 명작들을 쏟아냈다. 사생활이 곧 건축이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던 그는 1926년 교통사고로 사망하며 ‘거짓말처럼’ 이 세상을 떴지만 그의 건축 작품은 지금까지도 바르셀로나에 무한한 영감과 풍요를 선사하고 있다. “나는 나의 영원한 스승인 자연의 순수함을 통해 상쾌한 이미지를 얻는다.” 생전에 그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자연을 ‘형상화’했다기보다는 자연 그대로를 작품과 융합시켰다는 표현이 맞다. 가우디의 오랜 관찰로 열매를 맺은 건축물을 통해 우리는 너무도 당연한 주위의 환경을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얻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할 수 있다. 가우디의 천재성의 절정, 미완성이라는 아련함, 아직도 공사 중이기에 마치 아직도 자라나고 있는 신비로운 숲 같은 느낌, 바르셀로나 사람들을 넘어서 온 인류가 그 완성을 고대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가우디의 건축 철학이 집대성된, 바르셀로나의 상징 같은 존재다. 1882년 착공에 들어갔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가우디가 죽은 뒤 120년이 넘도록 완공을 못하고 아직까지도 후배 건축가들과 기중기가 바삐 움직이며 차곡차곡 성당을 쌓아 올리고 있다. 앞으로도 100년은 더 지나야 완성된 성당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앞으로 성당이 완공되면 우리의 후손들은 애초 가우디가 계획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수난, 영광이라는 정면 장식과 더불어 12제자를 상징하는 12개의 탑,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거대한 돔 탑까지 만나게 될 것이다.

  아쉽게도 지금의 여행자들은 정면 장식과 12개의 종탑 중 완성된 8개의 종탑만 볼 수 있다. 성당 곳곳에서는 어리둥절하거나 절로 미소가 머금어지는 가우디만의 철학이 묻어난다. 가우디는 성당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기능은 지키되 거기에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들을 가미해 마치 살아 숨쉬는 듯한 성당을 창조해 냈다. 커다란 옥수수 대가 하늘로 치솟아 있는 듯한 파격적인 모양의 종탑. 그 거대한 첨탑을 장식한 것은 다름 아닌 색색의 과일들이다. 성당 입구에 장식된 예수의 탄생과 수난 장면은 지금까지 제 아무리 예술성이 하늘을 찌른다는 세계 유수의 성당들이 모두 ‘천편일률적이다’고 느껴질 정도로 독특하다. 내부의 천장은 나무줄기처럼 생긴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어 성당 안이 시원한 나무 숲 같다. 종탑은 엘리베이터로도 올라갈 수 있지만 돈을 조금 아끼고 다리품을 팔아 계단으로 올라가보면 그 오묘한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지붕 위에서 바르셀로나 시가지와 함께 성당을 내려다보면 이 성당이 120여 년 간 공사 중인 미완의 건축물이라는 사실이 더 피부에 와 닿는다. 비교적 비싼 돈을 지불하고 이곳을 찾는 수많은 방문자들의 입장료 수입, 익명의 기부자들의 헌금, 가우디의 뜻을 이어받은 후배 건축가들의 노력에 언젠가 가우디의 역작을 완성하는 날, 천국에서 가우디는 행복할까. 또 그때의 바르셀로나는 어떤 마음에 달뜨게 될까.
 
 
 
 
 
 
스페인의 빛나는 예술가들, 장엄한 종교와 대단한 역사도 좋지만 우리는 요리, 와인, 스타일에 대한 스페니시의 열정에 무엇보다 열광한다. 그건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이 원조이든 아니든, 지금 당신이 선 그곳이 마드리드이건 바르셀로나이건 간에 ‘스페인’이라면 어디에서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마드리드의 그랑비아 거리와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광장 주변은 젊은 감각이 넘실대는 쇼핑의 중심가다. 다양한 브랜드 숍을 호핑(Hopping)하듯 순례하는 젊은이들의 손에는 Zara, Mango, Camper, Desigual 등의 쇼핑백이 한 아름 들려 있다. 무엇보다 스페인을 찾는 여행자들이 쇼핑 중심 지구에서 다짜고짜 Zara나 Mango 같은 브랜드부터 찾는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스페인 브랜드의 붐 때문이다. 세계 시장을 누비는 브랜드들은 오랜 전통과 노하우를 자랑하는 고가의 ‘명품’이 대부분이지만 최근에는 그 틈새를 스페인 브랜드들이 최신 트렌드의 디자인을 유지하되 합리적인 가격의 상품, 거기에 명품 못지않은 오랜 전통까지 겸비해 전 세계의 쇼퍼홀릭들을 공략하고 있다. 스페인의 패션거리에서는 세계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Zara의 대형 매장들을 만날 수 있는데 여성복뿐 아니라 남성복, 아동복, 자라 뷰티와 자라 홈 데커레이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아이템들을 만나볼 수 있다. Camper는 스페인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1877년 수제화 전문가 안토니오 플룩사(Antonio Fluxa)가 영국에서 수제화 산업에 성공한 뒤 스페인으로 돌아와 투철한 장인정신을 깃들여 새로운 신발 회사를 탄생시켰다. 캠퍼는 대를 이어온 스페인 최초의 신발 공장으로 전통적인 수공예 방식과 현대적 디자인 감각을 잘 조화시켜 발전을 거듭했다. 한 가족의 비즈니스에서 시작해, 전 세계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슈즈 브랜드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거기에 스페인이 낳은 명품 브랜드인 Loewe(로에베)도 빼놓을 수 없다. 놀랄 만큼 가볍고 부드러운 가죽 제품으로 국내에서도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브랜드다. 최근 패셔니스타들에게 각광받는 Desigual(데씨구엘) 역시 메이드 인 스페인 브랜드다. ‘Not the Same’이라는 모토로 다른 브랜드와는 확실히 차별되는 개성 넘치는 디자인과 스타일을 선보인다. 
 


 
 패션과 함께 눈여겨봐야 할 것은 스페인의 음식문화다. ‘축제의 나라’답게 스페인에는 다양한 술과 음식이 발달해 있다. 스페니시의 열정을 더욱 화르르 타오르게 하는 두 가지 촉매는 강렬한 태양과 바로 이 질 좋은 ‘와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와인은 스페인의 일상에서 ‘물’처럼 자주 마시는 생활에 밀착된 음료다. 스페인은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세계 3대 와인 생산국으로 꼽히는데 실상 스페인은 프랑스보다 훨씬 앞선 기원전 1000년께 페니키아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후에 로마인들을 통해 새로운 포도 재배 기술이 전래되면서 본격적으로 와인 기술이 발전했다. 하지만 세계적인 수준의 와인이 생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이탈리아에 비해 대외적인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그 이유는 스페인산 와인은 대부분 자국 내에서 소비되므로 수출량이 적기 때문이라는 것. 현재 스페인에는 전국 60여 곳에 이르는 포도산지에서 우수한 품질의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니 시간이 허락된다면 와이너리 투어로 스페인 와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꼭 하루 종일의 투어가 아니라도 맥주보다도 값이 싼 와인을 매 끼니마다 즐겨보며 스페니시의 열정을 충전해보자.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각종 과일이 동동 떠 있는 도수가 약한 와인인 스페인산 샹그리아를 술술 넘길 수 있다. 스페인 요리도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스페인식 해물볶음밥인 빠에야, 새끼돼지 통구이인 코치니요 아사도는 꼭 먹어 봐야 할 요리다. 스페인 사람들은 시간이 나면 바르(Bar)에 모여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술과 함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타파스(Tapas)는 어쩌면 매일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다양하고, 스페인에서만 맛볼 수 있는 다채로운 식재로의 조합이 미각은 물론 호기심까지도 자극한다. 원래 ‘타파스’는 작은 그릇 뚜껑을 뜻하는 말이다. 작은 뚜껑과 같은 접시에 안주가 될 만한 음식들을 조금씩 담아 내 온다. 안달루시아 지방이 원조라고는 하지만 스페인 어디를 가든지 밤이면 밤마다 ‘타파스 바’에서 아기자기하고 먹음직스러운 핑거 푸드를 즐기며 생활 속에 묻어난 떠들썩한 스페인의 열정을 가장 손쉽게 만나볼 수 있기에 타파스 바 그 자체가 여행의 손꼽히는 즐거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Travel Information
마드리드 가는 법_대한항공에서 인천~마드리드 직항편을 주 3회 운항한다. 비행시간은 13시간 30분 정도.

바르셀로나 가는 법_현재 바르셀로나 직항편은 없다.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까지는 국내선을 이용한다. 1시간 가량 걸린다.

프라도 미술관_입장료 6유로(화~토요일 18:00~20:00, 일요일 17:00~20:00 무료입장) www.museodelprado.es

꼭 봐야 할 가우디 작품 Best 4_
1. 사그라다 파밀리아_입장료 8유로 www.sagradafamilia.org
2. 구엘 공원_입장료 무료 http://barcelona.arounder.com/park_guell

3. 카사 바트요_입장료 17유로 www.casabatllo.cat
4. 카사 밀라_입장료 8유로 www.fundaciocaixacatalunya.org
 
 

 

 

<출처;tong.nate.네이트 우수 블로그 왕관이예요justin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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