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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차: 2016년 8월 9일(화)
피우지 숙소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7시에 버스에 올라 출발하였다. 피우지에서 3일 밤을 보냈으니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안녕이다. 매번 해가 뜨기도 전에 이동하게 되니 모두들 힘들다는 얘기가 저절로 나온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에 더 많은 것들을 봐야만 하는 일정이니 어쩔 수 없이 따라 주어야한다.
우리의 가이드님은 센스 있게 버스에서 스마트 폰을 검색하여 음악을 들려준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1858~1924)가 작곡한 오페라 투란도트(Opera Turandot)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를 감상하였다. 이탈리아 출신의 오페라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년생)와 팝페라 가수 안드레아 보체리(1958년생) 등이 부른 노래가 유명하다. 아침부터 음악을 들으니 하루가 즐겁게 진행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안드레아 보체리가 부른 '네순 도르마'(공주는 잠못이루고)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로마 근처의 피우지에서 출발하여 오늘은 북쪽을 향해 달릴 예정이다. 가이드님의 설명에 의하면 이탈리아 남부지역에는 주로 올리브나무와 소나무가 많고, 북부지역에는 포도나무와 사이프러스(편백나무 과)가 많이 분포한다고 한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남북 간 기후의 차이로 인하여 나타나는 식생의 분포일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차창 밖을 보면서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
이탈리아의 행정구역을 살펴보면 모두 20개의 주로 구성되어있다. 오늘 우리가 이동하는 길은 모두 5개 주를 거쳐 간다고 하며, 그 길이는 대략 700km 라고 한다. 견학보다는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이 길 것 같다. 로마를 지나면서 로마는 확실히 분지상의 도시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나지막한 구릉으로 둘러싸인 로마는 한 때 서양 세계를 지배하며, ‘모든 길은 로마로 통(通)한다’ 는 말을 만들어낸 유서 깊은 도시이다. 로마가 포함된 라치오 주(Regione Lazio)를 지나 이제 움브리아 주 (Regione Umbria)에 들어선다. 여기는 ‘페루자’라는 도시가 주도(州都)이며,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활약했던 한국의 국가대표 축구선수 안정환이 이곳에서 프로축구선수로 뛰었던 곳이다. 또한 이곳은 인성교육을 강조하며 아동교육에 크게 이바지했던 마리아 몬테소리(1870~1952)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경작지에는 여러 가지 작물이 심어져 있지만 샛노란 해바라기가 눈에 들어온다. ‘해바라기’(Sunflower: 소피아로렌 주연)라는 영화가 이곳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여 더 정감이 간다. 해바라기는 여기서 사료용으로 키운다고 하며, 하루 일조량을 충분히 채우면 고개를 숙이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해바라기는 해만 바라보는 식물로 알고 있는 우리들의 상식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업을 이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며, 직업의 귀천의식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진학률이 우리나라처럼 높지 않고 현재 14%에 머문다고 한다. 대체로 직업 간 임금격차가 크지 않으니, 굳이 힘들여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세금부담도 우리나라보다 높지만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포함한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으니 행복지수가 높을 것 같다. 교육제도를 보면 학생들은 대개 오전수업만 학교에서 받고 집에 돌아오게 되며, 중학교 과정까지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학생들의 수업량이 세계 최고인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는 거의 없을 것 같다. 이런 부러운 얘기가 그저 이탈리아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북서부 유럽 국가들이 오랜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높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탈리아 사람들이 무척 부러워지면서 한편으로 한국에 산다는 사실에 절망감이 생겨난다.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이 ‘헬 조선’을 외치는 이유를 우리 기성세대들이 곰곰이 생각해보고,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근본에서부터 개조해야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권력과 자본이 분산되는 사회, 소수보다는 다수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 정의가 바로 세워지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주어지는 사회, 이런 사회를 꿈꾸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유럽을 포함한 선진 국가를 열심히 체험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절감하고 우리보다 앞선 나라들의 시스템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소비성 여행이 아닌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도 한번쯤 고민해 볼 수 있는 생산적 여행이 되었으면 한다.
차창 밖을 바라보니 구릉성 산지에는 온통 목초지가 조성되어 있다. 양, 염소, 소가 노닐고 있는데 군데군데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 농장이 보인다. 밀을 포함한 곡식, 가축 그리고 과일나무 등 다양성을 갖는 이탈리아의 농업은 식량의 자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상당 부분 농산물을 외국에 수출할 것으로 추측된다. 천혜의 지중해식 온대기후, 풍요로운 농업생산력과 유기농, 높은 평균수명, 낙천적인 국민성,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사회보장제도 등이 어울리면서 이탈리아는 지상의 낙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물론 이 나라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겠지만 우리가 이루지 못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 분명 우리나라보다 선진국이라고 해야겠다.
이탈리아는 농업 못지않게 공업이 발달한 나라이다. 주로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대표적인 공업은 피아트(FIAT)와 페라리(Ferrari)로 대표되는 자동차 공업, 패션의류와 가죽제품으로 대표되는 소비재 공업이 발달하였다. 이탈리아 가죽과 패션의류 제품은 그 품질과 명성이 세계적인데 구찌(GUCCI), 프라다(Prada), 베네통(Benetton) 등이 대표적인 브랜드이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패션 브랜드인 루이비통(Louis Vuitton)도 이탈리아에 공장을 둘 정도로 이탈리아는 숙련된 노동력을 자랑한다.
이탈리아의 농촌을 보면 산꼭대기마다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는데, 대개는 성벽을 조성하여 그 안에 사는 경우가 많다. 외침과 전쟁이 많았던 역사의 흔적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지명에는 성(城)을 뜻하는 이름이 많은데 ‘보르고’라는 접미사가 많다. 이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부르그, 부르크, 부르쥬 등으로 변형되었을 것으로 본다. 우리가 흔히 쓰는 ‘부르주아’(bourgeois)도 원래는 프랑스어로 ‘성안 사람’이라는 뜻인데 지금은 ‘자본을 가지고 노동자를 고용한 부자’라는 의미로 확장된 것이다.
이탈리아는 가톨릭의 나라답게 곳곳에 수도원이 위치하며 그곳에서 피부보호와 피부 치료를 목적으로 제조한 이른바 ‘수도원 크림’이 요즘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여름철 따가운 햇살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피부 화장품인 것이다.
이제 피렌체(영어로는 플로렌스)를 주도(州都)로 하는 토스카나(Toscana)주로 향한다. 유럽인들이 말년에 이주하여 살고 싶어 하는 이상향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자연환경이 거주에 유리한 곳일 것 같다. 이탈리아 국기를 살펴보면 프랑스 혁명 때 제작된 프랑스의 삼색기(三色旗)처럼 3가지 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상당 수 국가들이 3색을 사용하여 국기의 디자인을 하게 되는데, 이탈리아도 여기에 해당한다. 녹색은 자연을 상징하고 백색은 이탈리아 북쪽에 위치한 알프스 산지를 뜻하며, 적색은 그들의 열정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탈리아는 맑은 날씨가 많아 야외활동하기에 적합하다. 여름은 건조하고 겨울은 비가 잦은 이른바 지중해식 온대기후이기 때문에 이탈리아 여행은 여름에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맑은 날씨 덕분에 이탈리아는 음악 분야에서도 아름다운 자연을 소재로 성악이 발달하였고, 천혜의 기후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식재료를 바탕으로 요리 산업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자연환경이 인문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례이니 재미있는 분석이다. 여기에 비해 알프스 이북에 위치한 독일의 경우에는 연중 흐린 날씨가 많아 음악 분야에서는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기악 연주와 작곡이 발달하였고, 실내에서 책을 보고 사색을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하였고 한다. 어느 정도 합리적인 분석이라고 여겨진다.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중간 휴식과 쇼핑을 위해 한국인이 운영하는 특산물 판매장에 잠시 들렀다. 패키지여행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단체 쇼핑 시간이다. 여기서는 올리브유, 와인, 발사믹 식초, 천연비누 등을 판매하였는데, 나는 판매원으로부터 제품의 설명만 듣고 구입하지는 않았다. 한국인이 직접 판매하는 매장이 생겨날 정도로 요즘 한국 관광객이 이탈리아를 많이 찾아오는 것 같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은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이었는데, 이젠 유럽지역을 즐겨 찾아오고 있으니 한국인들의 생활수준이 한층 향상된 것 같다. 이른바 중산층 이상은 나름대로 해외여행을 즐기며 살고 있지만, 아직도 한국의 저소득층은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사람들이 많은 게 또한 사실이다. 소득구조의 양극화는 여행과 레저를 포함한 문화체험의 영역까지 불평등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버스는 다시 힘차게 달리기 시작한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님은 이탈리아의 가죽산업에 대하여 소개한다. 이탈리아 가죽산업의 시작은 토스카나 주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중세 시대 기사들이 착용하는 철제갑옷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가죽으로 갑옷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가죽 산업이 발달하였던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쟁은 산업 발달의 촉매 역할을 하게 된다. 피렌체는 또한 르네상스(14~16세기)시기에 활약한 인물을 300명이나 배출한 도시이기도 하다. 메디치 가문으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문화예술이 융성했던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곳이 바로 피렌체이다.
현지가이드님이 이제 음악 디제이(DJ)로 변신하여 이탈리아와 관련된 음악을 들려주고 그 음악에 대한 배경설명을 해준다. 현지가이드님은 생김새도 개그맨 같고 언변도 뛰어나 탐방객들에게 즐거움과 행복감을 충만하게 해준다. 거기다가 음악에 대한 조예도 있어 감탄을 하게 된다. 관광안내 및 문화해설을 담당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풍부한 지식과 함께 유머감각을 갖추어야만 탐방객들의 만족도를 높일 것 같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다. 현지가이드님이 들려준 음악은 다음과 같다. 내가 평소 좋아하는 칸초네 음악을 이탈리아 현지에서 들으니 느낌이 더 강렬하게 전해진다.
☆토스카나 피사출신의 팝페라 가수, 안드레아 보체리와 영국출신의 가수 사라 브라이트만이 함께 부른 Time to say goodbye
☆이탈리아 베로나 출신의 가수, 질리오라 칭케티가 부른 노노레타(나이도 어린데)
☆이탈리아 칸초네, 게 사라 (Che Sara : 될 대로 되라)
☆그리스 출신의 가수, 나나무스쿠리의 노래
☆에스파냐 노래, 에레스 두(Eres Tu): ‘그대 있는 곳까지’
이제 평야지역을 벗어나 이제 아펜니노 산맥이 다가오면서 고도가 높아진다. 산지에 접어드니 터널도 통과하게 되었다. 드디어 아펜니노 산지에 위치한 도시, 피렌체에 도착하였다. 도시의 특성답게 아르노(Arno) 강이 도심을 관통하며 서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지형적으로는 분지(盆地) 상에 발달한 도시이다. 피렌체는 영어로 ‘플로렌스’라고도 하며 꽃의 도시(Flower City)로 해석 된다. 그만큼 아름다운 도시라는 의미이다. 도심을 관망할 수 있는 구릉지에 위치한 미켈란젤로 공원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꽃의 도시’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건물의 지붕을 덮는 기와가 전부 주황색이라는 단일한 색조로 이루어져 있으니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경관은 마치 꽃이 피어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일설에는 로마제국의 영웅, 카이사르(일명 시저)가 백합처럼 아름다운 도시라고 하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피렌체 근교의 구릉성 산지에는 올리브 농장이 많이 조성되어 있고 멀리 아펜니노 산맥의 산자락이 병풍처럼 북쪽을 가리고 있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현지가이드님의 도움으로 사진이 가장 잘 나온다는 포토 존에 서서 가족별로 사진을 촬영하기도 하였다. 미켈란젤로가 주로 활동했던 도시였기에 이곳에 비록 모조품이지만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조성되어 있었고, 공원의 이름도 미켈란젤로 공원이라 이름 붙였다. 사진 촬영 후 우리는 본격적으로 피렌체 구도심 투어를 위해 걸었다.
피렌체에서 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한 컷~
고즈넉하고 평온한 느낌의 아르노강이 피렌체를 관통한다.
도심을 감싸는 성벽을 통과하여 아르노 강을 건너게 되었다. 이 강은 폭이 그리 넓지 않은 아담한 크기의 강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다고 한다. 강가에는 고풍스런 건물이 즐비하여 강의 수면에 비친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다리를 건너다가 하류에 위치한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 ‘오래된 다리’라는 뜻)의 사연을 듣게 되었다. 베키오 다리는 고풍스럽긴 하지만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문학가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만났다고 전해지는 다리, 그리고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 중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를 잔니스키키의 딸 라우레타가 부르는 아리아로 유명해진 다리라고 한다. 오페라 아리아는 자신과 리누치오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하며, 만일 결혼시켜주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어버리겠다고 아버지를 협박하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어버이날을 즈음하여 방송국에서 이 음악을 들려준다고 하는데, 내용을 알고 나면 어버이들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음악인 것이다.
조수미가 부르는 푸치니의 오페라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우리는 도심의 골목길을 걸어서 성 십자가 성당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성당 건물은 전형적인 고딕양식이었다. 성당 앞쪽에는 피렌체 출신의 문학가 단테의 동상이 서있다. 그만큼 이곳 피렌체 사람들은 단테를 존경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단테는 당시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피렌체에서 쫓겨나고 라벤나(Ravenna)에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던 슬픈 사연이 있다. 그러고 보면 대개 훌륭한 인물들이 고향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징크스가 있는 것 같다. 지역민들은 그 인물의 장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고, 경우에 따라 인물의 약점을 들춰내어 비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단테는 불후의 명작 ‘신곡’(神曲)을 창작함으로써 영국의 셰익스피어와 견줄 수 있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문학가로 추앙되고 있다. 또한 단테는 당시 라틴어 대신에 피렌체의 방언을 사용함으로써 이후 피렌체의 방언이 이탈리아의 표준어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귀족들과 지식인들이 사용하는 공식적인 언어 대신에 민중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다분히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소수 기득권층에 대한 도전이었는지 아니면 민중들에게 자기 작품을 쉽게 이해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는지 생각해본다. 참고로 라틴어는 로마제국 시절에 그리스어와 더불어 공식적인 표준 언어였는데, 서로마 멸망 이후 각 지방의 방언이 발달하면서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로 나뉘고 이들을 통상 로망스어군이라고 한다.
* 성 십자가(Santa Croce) 성당: 피렌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광장에 있는 큰 교회이다. 옆에 부속 건물로 승원 안뜰과 브루넬레스키의 파치가 예배당은 피렌체 르네상스의 정수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프란체스코(Francesco)회의 성당으로 1294년 아르놀포 디 깜비오(Arnolfo di Cambio)의 설계로 지어진 성 십자가 성당 (Chiesa di S,Croce)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성당은 내부의 길이가 115.43m, 폭이 28.23m, 높이가 73.74m로 작지 않다. 베네데또 다 마이아노(Benedetto da Maiano)가 만든 설교단이 아름답다. 성당 안에 도나텔로(Donatello)의 정교한 수태고지, 지오또(Giotto)의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와 죽음”을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이곳에는 나폴레옹의 형인 죠세프 보나파르트의 부인 쥴리 클라리의 무덤이 제단 뒤쪽의 부속 예배당에 자리하고 있다. 성당의 좌측으로는 단테의 동상이 서 있다. 예배당은 276개의 묘석들로 포장되어 있으며 벽을 따라서 호화로운 무덤들이 즐비해 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마키아벨리(Machiavelli), 로씨니(Rossini), 갈릴레이(Galilei), 기베르티(Ghiberti), 알피에리(Alfieri), 포스콜로(Foscolo)등이 이곳에 묻혀있다. 단테(Dante)의 무덤은 기념 무덤으로 그의 본 무덤은 라벤나(Ravenna)에 있다. 이 성당에 딸려있는 부속 수도원에는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의 작품 빠찌가의 예배당이 있다. 산타 크로체 박물관은 치마부에의 십자가 처형상이 소장되어 있으며, 대형 회랑은 브루넬레스키의 설계로 만들어졌으며, 그의 사후인 1453년에 완공되었다.
고딕양식을 띠고 있는 피렌체 도심의 성 십자가 성당. 왼쪽에 단테를 표현한 조각상이 서 있음.
*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 서유럽 문학의 거장. 인간의 속세와 운명을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그려낸 <신곡>으로 널리 알려졌다. 작품은 지옥·연옥·천국을 여행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작품 속에서 당대 사회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또한 시어로 이탈리아어를 선택해 문학발달과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단테는 시 외에도 수사론·도덕·철학·정치사상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저술들을 집필했다.
우리 일행은 성 십자가 성당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식당에 들러 스파게티와 쇠고기 요리로 점심식사를 해결하였다. 식사 후에 우리는 또다시 걸어서 피렌체의 구도심 곳곳을 둘러보았다. 귀족들이 살았을 법한 대저택의 입구에는 말을 묶었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철제 고리가 벽면에 붙어 있었다. 골목길을 가다가 단테가 살았던 집도 보게 되었다. 돌로 만든 집이어서 그런지 약 700년의 세월을 견디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 골목길을 통과하여 너른 광장이 나타났는데, 그곳에 피렌체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두오모 성당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앞서 보았던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 건물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건물의 규모가 어찌나 큰지 카메라에 한꺼번에 담기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길거리에는 관광객을 위한 마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 피렌체 두오모 성당(Firenze Duomo): 이 건물은 1292년에 지어지기 시작해서 1446년에 완성되었다. 디자인은 아르놀프 디 캄비오가 담당하다가 1334년 지오토가 작업을 계속하였고, 몇 년 후 프란체스코 탈렌티와 라포 기니가 대성당을 완성시켰다. 1436년,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돔을 추가로 건설하였다. 두오모의 정문은 1587년에 무너져 버려서 현재의 정문은 1887년도 작품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원래의 흔적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장식들은 현재 두오모 박물관에 있다. 두오모 박물관에 가면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피에타〉 조각상과 도나텔로의 〈마다레나〉 그리고 베로키오, 미켈로초, 폴라이올로가 세운 제단 등을 볼 수 있다. 두오모 내부로 들어가면 여러 프레스코화가 있으며, 돔에 올라가는 총 계단은 463계단이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대성당)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두오모 성당에서 약 10분쯤 걸어가면 나오는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에는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인 다비드 상과 노예 상이 있다고 한다. 원래 다비드 상은 시뇨리아 광장의 베키오 궁전 앞쪽에 위치하였는데, 작품을 보존하기 위하여 이곳 실내공간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시뇨리아 광장에는 모조품을 세워 놓은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명작인 다비드상의 원작을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우리는 시뇨리아(signoria) 광장으로 이동하여 베키오 궁전 앞쪽에 즐비하게 만들어진 조각상을 감상하였다. 포세이돈 상이 있었고 비록 모조품이긴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도 있었다. 이곳은 피렌체의 핵심지역으로 정치·행정의 중심지였던 것 같다. 우리는 다시 골목길로 접어들어 미켈란젤로가 살았던 집도 살펴볼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초라한 모습이었고 벽면에 붙은 안내판도 작아 가이드님의 설명이 없었으면 그냥 지나칠 뻔하였다.
* 시뇨리아(signoria):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시뇨레(군주)가 다스린 정부. 시뇨리아는 13세기 중엽부터 16세기초까지 이탈리아의 독특한 정부 형태였다. 시뇨리아의 성장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발달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공화제를 채택한 자치도시 내부에서는 치열한 파벌 싸움이 끊일 날이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한 사람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게 여겨졌다. 독재를 면한 지방 예컨대 피렌체 같은 곳에서는 시뇨리아라는 명칭이 그 지방을 다스리는 행정조직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피렌체의 경우에는 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유지했던 것 같다.
시뇨리아 광장의 조각상들. 이곳의 다비드상은 모조품임.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평원
이제 또다시 피렌체의 가죽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페루치(peruzzi) 공방에 딸린 판매장에 들렀다. 다양한 가죽제품을 구경할 수 있었고 가격도 저렴하여 나도 허리띠를 하나 구입하였다. 쇼핑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시간이 남아 부근 광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곳 광장에서 바라보니 점심 먹기 전에 들렀던 성 십자가 성당이 보인다. 사람들과 비둘기가 어울리며 평화로운 느낌을 전해준다. 성당을 배경으로 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성당(聖堂) 앞쪽에는 일반적으로 광장(Piazza: 영어로는 Plaza, 불어로는 Place)이 조성되어 있으니, 성당은 단순한 종교적인 기능만 담당하는 게 아니라 주민들이 모여서 공동체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일종의 아고라(Agora)의 기능도 수행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인들의 관광 코스는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가는 곳마다 한국인들과 만나게 된다. 명소만 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동 경로가 너무나 겹치는 것 같다. 좋은 코스라고 판단되면 여행사마다 공유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때 일본인들이 단체 관광으로 개발한 코스를 이제 한국인들이 답습(踏襲)하는 것이라는 얘기도 듣게 된다.
쇼핑을 마친 우리 일행은 가까운 아르노 강변에 대기하던 버스에 올랐다. 오후 3시 20분경 피렌체를 출발하여 북쪽에 위치한 베네치아를 향한다. 피렌체는 지리적으로 이탈리아 중·남부 지역과 북부지역을 연결해주는 교통의 허브(Hub) 역할을 하고 있다.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부터 근대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전까지 이탈리아는 수많은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이곳에는 피렌체 공화국이 있었던 곳이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으로 이탈리아는 지금도 지방색(地方色)이 무척 강한 편이다.
우리는 이탈리아 등줄기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아펜니노 산맥을 통과하는데, 예전 같으면 험준한 산악지역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고갯길을 이용하였겠지만 지금은 편리한 터널을 통과하게 된다. 아펜니노 산맥은 알프스-히말라야 조산대에 해당하기 때문에 심심치 않게 화산과 지진이 발생한다. 이번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8월 24일 이탈리아 중부지방 움부리아 주에 포함된 페루자 지역에서 진도 6.2의 강진이 발생하여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우리가 귀국한 지 정확히 12일 후에 발생한 지진이니 아찔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우리가 머물렀던 피우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으니. 어쨌거나 아펜니노 산지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상당히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할 것 같다. 이탈리아에 지진과 화산의 자연재해만 없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살기 좋은 곳인데 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일행을 실은 버스는 세계 최초의 대학이 있었던 볼로냐를 통과하고 파도바를 경유하여 베네치아를 향해 달린다. 고속도로 주변 풍경은 또다시 고도가 낮아지고 끝없이 펼쳐진 평야가 나타난다. 이른바 롬바르디아 평원이 펼쳐지는 이곳은 이탈리아의 북동부 지역에 해당하며, 이탈리아 최대의 평야이며 최대의 곡창지대이다. 밀의 경우 3기작이 가능하다고 하며, 사료작물인 유채, 옥수수, 수수, 해바라기 등이 재배되고 있다.
알프스 산맥에서 시작되어 이탈리아 동쪽의 아드리아 해로 흘러가는 포(Po)강은 롬바르디아 평원을 적셔주는 젖줄이라 할 것이다. 길이 652Km로서 이탈리아에서 가장 긴 강에 해당한다. 봄철에는 알프스 산맥의 곡빙하가 녹으면서 강물이 불어나고 홍수가 발생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도시들은 강변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발달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베네치아 같은 해상도시는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일시적으로 불편함을 겪는다고 한다.
한국을 떠나온 지 오늘로서 9일차, 처음에는 시차 때문에 힘들어했지만 이제 시차적응도 완벽하게 된 듯하다. 서울과 이곳의 시간 차이는 원래 8시간인데, 서머타임 제도를 적용하여 7시간 차이가 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제 베네치아(Venezia, 영어로는 베니스) 도착 직전이어서 가이드님으로부터 베네치아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듣게 되었다. 베네치아는 베네토 주에 포함되는 도시로 육지 베네치아와 바다위에 조성된 수상도시 베네치아로 나뉜다. 수상도시 베네치아가 세계유산에 등록된 지역인데, 서기 476년 서로마가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아 멸망한 이후 훈족과 게르만족 등 이민족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면서 그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조성한 수상(水上) 도시이다. 동양의 경우 높은 산에 성을 쌓고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 베네치아 인들은 그보다 훨씬 힘들고 위험한 작업을 선택하여 생존하였던 것이다. 세계적인 희소성을 갖는 수상도시 덕분에 후손들은 오늘날 엄청난 관광 수입을 올리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irony)라고 하겠다. 마치 중국의 만리장성과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당시에는 민중들에게 원성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후손들이 문화유산으로 활용하여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는 상황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베네치아 수상도시는 자연 섬과 인공 섬을 포함하여 모두 118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 섬을 연결하기 위한 다리가 모두 400개 정도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이민족의 침입을 피하기 위하여 수백 년에 걸쳐 피땀으로 조성한 수상도시 베네치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베네치아 인들이 가졌던 불굴의 의지와 노력에 절로 존경심이 생겨난다. 중국의 고사(故事) 우공이산(愚公移山)에 견줄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우공은 산을 옮겼지만 베네치아 인들은 갯벌에 나무 말뚝을 박고 육지에서 돌과 흙을 옮겨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다.
* 베네치아: 아드리아 해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유서 깊은 이탈리아의 도시이다. 한때 지중해 전역에 세력을 떨쳤던 해상공화국의 요지였으며, 오늘날에는 주로 운하·예술·건축과 독특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로 알려져 있다. 베네치아에 있는 많은 운하는 100여개 섬을 이어주는 수로역할을 한다. 베네치아 건축물은 이탈리아·아랍·비잔틴·고딕·르네상스·바로크 양식 등이 모두 나타난다. 수세기 동안 베네치아의 사회·정치 중심지였던 산마르코 광장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광장으로 손꼽힌다. 홍수, 침강, 대기오염 등으로 옛 건축물과 예술품들의 노후화가 계속되어 1960년대 중반에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가 과학적·기술적 방법을 활용해 베네치아 시를 구하자는 전 세계적인 운동을 시작했다.
베네치아의 역사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灣)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6세기 말에는 12개의 섬에 취락이 형성되어 리알토 섬이 그 중심이 되고, 베네치아 번영의 심장부 구실을 하였다. 처음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고, 도시공화제(都市共和制) 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다. 베네치아에는 세레니시마 가문이 있었다. 이 가문은 1202년에 엔리꼬 단돌로 총독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 위해 4차 십자군 지원을 요청한 당시부터 세력을 급속히 확대,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이후 베네치아는 소위 중계 무역 도시, 즉 홍콩과 같이 잘 살게 되었다.
베네치아는 15세기부터 밀라노, 피렌체와 더불어 이탈리아를 장악했으나1797년에 베네치아는 자치권을 잃게 되는데 나폴레옹이 침략해 베네치아를 오스트리아에게 넘겨 버렸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의 주인인 세레니시마 가문은 몰락했고 그러다 1866년 베네치아는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왔다. 문화적으로 살펴보면 베네치아는 주로 비잔틴 양식과 북쪽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고딕 양식, 그리고 이탈리아 중부에서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다.
베네치아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영화로는 ‘이탈리아 잡(Job)’이 있고,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베네치아는 크고 작은 인공 운하가 섬들을 이어주고 있는데, S 대운하라고 부르는 중심 수로와 여기서부터 연결되는 소운하가 골목길처럼 연결된다고 한다. 여기서는 수상택시가 운행되고 작은 수로를 연결해주는 곤돌라(gondola)라고 불리는 작은 배가 있다. 이번 여행에서 수상택시와 곤돌라를 타는 선택 관광이 있는데, 우리 가족은 수상택시를 선택하였다.
베네치아는 요즘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직격탄을 맞고 있다고 한다. 겨울철 우기에 수위가 높아지면서 건물의 가장 아래층이 물에 잠기기도 하여 피해를 본다고 한다. 그래서 아래층은 BAR(카페에 해당) 같은 상점으로 사용하고 생활공간은 2층 이상에서 한다고 한다.
우리는 드디어 저녁 7시경 베네치아 숙소(두칼레 호텔)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은 앞에서 설명한 육지 부분에 해당하는 곳이다. 저녁식사는 7시 30분 경 호텔 내에서 현지 식으로 하였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