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시 황포구 남창로 100롱 5호
上海市 黄浦区 南昌路 100弄 5号
1911년 신규식이 상하이 망명 후 거주 및 활동했던 건물
신규식은 1880년 2월 22일 충북 문의군 동면 계산리에서 아버지 신용우와 어머니 전주 최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이며, 호는 예관(睨觀)이다. 신규식은 향리에서 전통적인 한학교육을 받았다. 이후 1896년 상경하여 1898년 관립한어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독립협회에 적극 참여하면서 관립한어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하지 못했다.
관립한어학교를 그만둔 신규식은 1900년 9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전술학·군제학·병기학 등 군사학과 외국어를 비롯한 다양한 신학문을 접했다.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1902년 7월 육군보병참위에 임관됐다. 문무를 겸비하고 근대문물과 사상을 습득한 신규식은 육군무관학교 졸업 후 육군 참위로 진위대와 시위대 등에서 수습과정을 마치고 1905년 시위대 제3대대에 배속되었다. 같은 해 일제로부터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신규식은 음독자결을 시도했다. 다행히 집안사람들이 발견하여 생명을 건졌지만, 오른쪽 눈의 시신경이 마비되고 말았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재차 음독자결을 시도했으나, 대종교 종사 나철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신규식은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압록강을 건너 안둥현(安東縣)을 지나 사허진(沙河鎭), 라오양(遼陽), 선양(瀋陽), 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도착했다. 베이징에서 조성환을 만나 당시 중국 정세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이후 다시 베이징을 출발하여 톈진(天津), 산둥성(山東省), 칭다오(靑島) 등을 거쳐 1911년 봄 상하이(上海)에 안착했다.
신규식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혁명운동을 전개하던 중국지사들과 적극적인 유대 및 강력한 협력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신규식은 이름을 신정(申檉)으로 고치고 쑨원(孫文)의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한 후 천지메이(陳其美)를 따라 1911년 10월 우창혁명(武昌革命)에 참가했다. 이 과정에서 천지메이의 주선으로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내 ‘어양리(漁陽里) 5호(號)’에 집을 마련하여 중국 혁명지사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어양리 5호에서 거주하던 시기 맞은편에는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의 주역이자 중앙서기에 선출되었던 천두슈(陳獨秀)가 살고 있었다. 1915년 천두슈는 신문화운동을 위한 『신청년』의 편집장으로 이곳 어양리에서 잡지를 발간했다. 현재 『신청년』을 발간했던 장소가 보존되어 있다. 이 잡지는 본래 『청년잡지』라는 이름으로 1915년 9월 창간됐다가 1916년부터 『신청년』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중국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호소했다.
신규식은 중국 혁명지사들과 교류를 통해 상하이 지역에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아 나갔다. 1912년 박은식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 동제사를 결성했고, 상하이 한인 청년들의 교육을 위해 1913년 프랑스 조계지에 박달학원을 설립했다. 1915년에는 중국인들에 의해 조직된 환구중국학생회에 가입하여 상하이를 거쳐 해외로 유학하는 학생들에게 학교를 알선했고, 1917년 조소앙 등 독립운동가 14명이 상하이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제의한 「대동단결선언」을 함께 발표했다.
신규식은 1919년 3월 한민족의 독립이 선언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주도했다. 이후 1922년 지병으로 순국할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무총장, 국무총리대리, 외무총장 등을 맡아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