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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과 깍두기만 나왔다. 더 없었다. 그래도 꽉 차 보였다. 우환은 숟가락을 들었다. 사람들의 입속을 얼마나 오갔는지 숟가락의 둥근 대가리가 닳아서 얇아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 찾은 식당이었다. 국물을 떠서 먹었다. 금세 사장이 주방장에게 하던 말들이 떠올랐다. 틈만 나면 주방장을 앉혀놓고 떠들던 그 말들이 생각났다. 맛있었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붙드는 맛이었다. 다양한 맛이 느껴지는 것 같진 않은데, 풍부했다. 한 가지 맛으로 깊었다. 고기는 또 얼마나 구수한지. 그 사태였다. 맛있었다. 떠먹고 또 떠먹고 맛보고 또 맛봤다. 밥을 말아서 바닥까지 떠넣었다. |
이종인의 아들은 일진이다. 이름은 이순희.
이종인은 아들과 엇갈린 글을 걷고 있다. 증거가 없다고 했으니 오늘은 나오겠지, 갔는데 이미 내보냈다고 했다. 똑같은 길을 다녀도 마주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아들과 자신이 하필 그런 사이가 됐다. 이 길을 다닌 세월이 수십 년이었다. 그 세월 중, 아들과 걸은 시간은 모두 모아도 1년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종인은 답답했다. 이번에는 아들이 싫어하는 곰탕은 들고 가지 않았다. 어차피 나올 거니까 집에서 먹이면 됐다. 한데, 빈손인 게 괜히 신경이 쓰인다. 식당에 들어서다가 아들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빈손인 게 싫었다. 어디 다녀왔냐고 물어보지도 않겠지만, 그 빈손 때문에 다 들켜버리는 거 같아서 싫었다. |
이우환은 국밥집의 아들의 이름을 듣고는 깜짝 놀란다.
우환이 기억하는 게 있었다. 두 사람의 이름이었다. 이순희와 유강희. 그건 우환이 원장에게 유일하게 한 질문의 답이었다. 우환을 부산의 식당에 두고 떠나려는 원장을 굳이 불러 세워서 물었었다. 18년 만에 처음으로, 부모의 이름이 뭐냐고. 그때 원장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저 두 사람이었다. 두 번이나 확인했다. 두 번 다 같은 이름을 말했다. 아주 잠깐, 우환은 남자의 이름이 왜 이순희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걸 묻고 나면 다른 것들도 궁금해질 게 빤했다. 결군, 빤한 거였다. 원장도 부모를 찾아가라든가, 살다 보면 만나게 될 거다 같은 빤한 말은 안 했다. 대신에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네가 태어난 날, 눈이 많이 내렸다고 하더라. 그러고는 입을 다물었다. |
곰탕집에는 할아버지인 이종인, 아버지인 이순희, 그리고 이우환이 함께 있게 된다. 물론 이우환이 시간 여행을 온 것이기 때문에 이우환은 40대 중년의 남성으로 존재한다. 이종인보다 몇 살 어린 정도의 나이이다. 한편 이순희는 여자친구인 유강희의 말을 듣고, 식당 일을 배우기로 마음을 먹는다.
종인은 앞장섰다. 앞서 걸으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그때마다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돌아볼 때마다 아들은 뒤따라오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아들이 따라나설지 몰랐다. 어쩌면 아들을 너무 철없다고만 생각한 건지도 몰랐다. 어쩌면 아들은 이런 날을 스스로 계획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아들이 먼저 배우겠다고 나섰을지도 모른다. 종인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렸으면서도 좀더 기다릴 걸 그랬나, 잠깐 후회를 했다. 하지만 어쨌든 좋았다. 아들은 큰길을 갈 때도, 골목으로 접어들어도, 왼쪽으로 꺾어들어도, 오른쪽으로 다시 꺾어도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종인은 그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기특해 평소보다 머릴 돌았다. 어쨌든 시장은 저기 너머에 있었다. 시장에 이르니 또 다른 기쁨이 있었다. 만나는 상인들마다, 오늘은 아들이랑 나오셨네, 인사를 했다. 아들이 저렇게 컸었어? 아들이 인물 좋네? 아들이 아빠 안 닮았네? 누구든 한 마디씩 했다. 벌써 아들한테 물려줄 생각하는 거야? 기분 좋은 핀잔을 주는 상인들도 있었다. 아무렴, 아무렴, 모두들, 하나같이 좋은 소리뿐이었다. 종인은 이게 다 내 인생이었구나, 생각했다. 정직한 성격은 시장 상인들간의 거래에서도 그랬다. 종인은 물건과 사람을 보고 거래처를 정했다. 물론 물건이 좋아야 했고, 신뢰가 가는 사람이면 되었다. 물건 값은, 흥정은 했지만, 무리하게 깎지는 않았다. 모든 게 제값이 있는 거였다. 종인은 되도록 값을 정하는 사람이 부르는 값을 믿어주려고 애썼다. 그가 조금 높게 부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
곰탕 끓는 방법을 배운 우환은 돌아갈 생각을 한다. 출발할 때 들었던 방법대로, 임무를 마친 후 시간 여행선과 다신 만나, 배에 올랐다.
배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바다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배 안의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그래야 했다 하지만 한 사림이 깨어 있다.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손을 펴 본다. 그 안에 알약이 있다. 파란색이다. 그 파란색을 40대의 남자가 노려보고 있다. 어둠 속에 그 남자만이 눈을 뜨고 있다. 받는 더 깊어지고, 어둠은 더 짙어지고 있다. 남자는 그 두통을 안다. 먹어야 한다는 걸 안다. 먹지 않으면 더 큰 두통이 그를 죽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두고 온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앞으로의 시간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시간 속에서 가능할지도 모르는 행복에 대해서 생각했다.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소년을, 자신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소녀를, 그리고 그 소녀가 가진 아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세월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왜 한 번도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생각했다. 왜 이제야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지, 생각했다. 바다는 더 깊어지고, 어둠은 더 짙어지고 있다. 남자는 왜 이곳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의심했다. 남자는 왜 자신이 행복해지면 안 되는지, 의심했다. 남자는 왜 여기서 흐르는 시간이 자신의 현재가 되면 안 되는지, 의심했다. 가져가는 기억들은 하찮은 것이었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현재가 있었다. 함께 누리고 호흡할 수 있는 시간이 저 위에 아직 었었다.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알약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손으로 비상벨을 눌렀다. |
우환은 과거에 남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제 이야기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우환은 곰탕 끓이는 것을 배우기 위해 과거로 왔지만, 잃어버렸던 부모를 만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 부모의 10대 모습을 함께 하면서 오해를 하나씩 풀어간다. 곰탕과 같은 따뜻한 가족의 이야기가 시간 여행을 통해 속도감 있게 전개 되는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자신의 아들인 순희와 함께 걸으며, 말했던 종인의 부분을 통해 시간 여행의 소감을 마무리하려 한다.
여행,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가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가는 기분. 늘 마주치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과 새로운 시간을 보내는 기분. 종인은 아무렇게나 여행을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렇게 해도, 망칠 수 없는 기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