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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야43 원문보기 글쓴이: 고야
기요미즈테라(清水寺) 버스정류소에서 내려
절 방향으로 조금 가다 보니
길이 두 갈래다..
많은 사람들이 오른쪽 길을 가고
우리는 왼쪽 길을 택했다.
오른쪽은 가깝지만 가파르고
왼쪽은 완만한 경사와 볼거리가 더 풍부하다는
오 회장의 설명이다.
짐작컨데
오른쪽 길은 넘어지면 3년 안에 재앙이 찾아온다는 속설이 있는
산넨자카,
왼쪽 길은 예쁜 기념품과 전통 의상 등을 파는 가게가 많은
기요미즈자카(清水坂)가
아닌가 싶다.
(사카(坂)는 언덕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오사카(大阪)는 큰 언덕인 셈이다)
양쪽 모두 10분 정도 걸으면
청수사의 입구인 데바문 앞에서 만난다.
♣ 기요미즈테라(清水寺)
입구 데바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삼층탑이 있다는데
천막으로 가려있디.
보수 증이었다.
본당 가는 중간에는
도인이 신었다는 철로 된 일본나막신(げた)과
철 지팡이가 전시되어있다.
이걸 들면 운이 좋다 해서
젊은 친구들이 안간힘을 쓰는데
보통 무게가 아닌가 싶다.
초봄의 날씨가 아침부터 변덕스럽더니
눈발이 세차게 내리다 그치다 반복한다.
사실 일본에 와서
그리 화창한 날이 없었나 보다.
가지고 온 얇은 옷은
아직도 배낭 속에서 잠자고 있다.
도중에
재미로 길흉을 점치는 제비
오미꾸지(おみくじ; 100엔)를 뽑아 보니
점괘가 흉(凶)이어서 줄에 매달아 놓고
본당으로 간다.
(길한 점괘는 가져가고 흉한 점괘는 태우거나 줄에 매단다)
기요미즈테라(清水寺)는
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인
798년에 세워진 절로
절 전체에 걸쳐
못이 하나도 사용되지 않았다 한다.
교토 여행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방문지인
기요미즈데라는
' 깨끗한 물'이라는 뜻으로
순수하고 정갈한 사원이다.
이 사원의 본당은
좀 특이하게
절벽에서 튀어나온 곳까지 기둥을 박아
10m 높이 위에 우뚝 서 있다.
사원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위태로워 보이지만
막상 들어서면
탁 트인 전망에
가슴까지 시원해진다는데
오늘은
안개로 뿌연 시내 모습만 보인다.
큰 무대와 본당은
에도시대(江戸時代;1603~1867)에
많은 참배객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졌다.
일본의 속담 중에
과감히 사물을 결단하는 것을
‘기요미즈의 무대로부터 뛰어 내릴 생각으로’
라고 한다는데,
실제로 17여 년간 234명이 뛰어 내렸고
생존률은 85.4%였다고.
이 후
이를 정부가 금지하는 목책을 세워 방지하면서
거의 사라진 풍경이 되었다 한다.
지슈신사(地主神社)는
사찰 내의 본당 바로 뒤에 있다.
인연을 맺어 주는 신(縁結びの神)을
모시는 신사로
커플 여행자에게 인기가 많아
연애운을 점치고 기원하는 이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란다.
본당 옆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왼쪽으로
오토와폭포가 있다.
흘러 내리는 세 줄기 물은 각각
지혜,
건강,
장수
를 의미하며
기원하는 물을 받아 마시면
효험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욕심을 부려
세 가지 물을 모두 마시면
불운이 따른다고
전해진다.
(기다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배려하는 차원인 것 같다.—내 생각)
내려가는 길은
기요미즈자카.
늘어선 양 옆의 가게를 구경하며
시식음식 맛보기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청수사 탐방을 사양한
두 명의 尹 여인과
10시에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정종 한 잔에 당고(だんご;경단) 한 꼬치!!
기다리는 지루함을
일시에 날려버린다.
‘안녕하세요’
라고 한국말 한 마디 하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다른 말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어서 오세요. 따라 해 보세요”
“오소 오세요”
“오소 아니고 어서”
“오소”
“에~이! 그만 둬!”
재미있는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말을 익히고 있다는 아줌마에게서
한류 열풍의
열기를 느낀다.
그 사이에
약속시간을 넘긴 두 尹이 나타났다.
분위기와 차 맛이 너무 좋아
일어서기가 어려웠다는
두 尹을 앞세워
다시 그 찻집에 갔다.
차 맛이야 어떤지 모르겠으나
주차장이 내려다 보이는
노인 내외의 2층 커피숖.
내부 분위기부터 아~주 고상하다.
온화한 성품이 묻어나고
품위 있어 보이는
깔끔한 두 주인 노인네가
마음에 들었다.
예정에 없는 시간을 좀 잡아 먹었다
♣ 교토국립박물관(京都国立博物館)
기요미즈테라에서
교토역 방향으로 조금 걸으니
박물관이 나온다.
문 앞에 이르니
“이게, 무슨 일? 휴관이잖아!”
교토에 몇 번 와서도
유독 박물관만 못 봤다고
잔뜩 벼르던
윤 국장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운다.
교토국립박물관은
1897년에 개관한 제국박물관으로
1000년에 걸친
교토의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는 소장품이
12,000여 점에 이른다고 한다.
외관은 바로크의 궁전 양식으로
인상적이다.
사실은
나라국립박물관
관람을 했는데도
사진 한 장 없고
무얼 봤는지 기억이 별로 나지 않아
지난 회에
글을 올리리 못했다.
나와 박물관은
궁합이 안 맞는 것일까?
어쨌던 꿩 대신 닭?
박물관 서문 길 건너편에 있는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로 간다.
♣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
33칸으로 이루어진
길쭉한 본당 때문에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는
산쥬산겐도는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건물로
천태종 사찰이다.
1165년에
왕실별궁의 일부로 지어졌으나
화재로 모두 불탄 후
지금의 본당만 재건되었다.
본당 안에는
중앙에 3.4m의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을 두고
양 옆으로 500구씩
모두 1,001구의 금불상이 있다.
사람 실물 크기로
본당 빽빽하게 들어선 불상들이
모두 표정이 각각 달라
그 가운데
만나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반드시 있다고 한다.
천수관음은
많은 손을 가지고
모든 이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구제한다는
민간신앙의 중심에 있는 관음이다.
나는 범생인가? 바보인가?
사진촬영금지를 철저히 지키다 보니
지금까지
거의 모든 실내 전시물의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러니
건물만 보고서
본당에서의 지그시 몸을 조이는 엄숙함을
어찌 느낄 수 있으리오.
마침
자료를 오픈 해준
일광스님의 블로그에서
사진을 한 장 가져왔다.
감사 드리면서.
♣ 미미즈카(耳塚)
산쥬산겐도와
이웃하는 곳에
귀무덤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때,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무장(武將)들이
전공(戰功의 표시로
수급(首級)대신
조선 군민(軍民)의 귀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에 가져와
도요토미히데요시에게 바쳤다.
그 귀와 코를
이곳에 묻어 둔 것이
지금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미미즈카 길 건너편에는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사당인
도요쿠니신사(豊国神社)가 있다.
죽어서도
왜장(倭将)의 곁을
벗어나지 못한 처지가
애처럽다.
버스 편으로 교토역에 다시 돌아 왔다.
역 앞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고
우동집을 찾고 있는데 라멘집이 먼저 보였다.
복걸복이다
하고 들어 갔는데
라멘의 돼지국물 냄새에 졸도할 뻔 했다.
즉시 뛰쳐나왔는데
모두 따라 나온다.
5분도 안 되어서 우동집을 찾았다.
일본의 전통적인 우동집 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일본 전통우동을 꼭 먹어 봐야 한다고
다짐했는데
오늘 드디어 숙제를 푼 느낌이다.
거기다가
어제 나라(奈良)에 함께 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오실장이 한 번 쐈다.
아~ 제일 비싼걸 먹을 껄!
맛있는 것을 먹어서
만사가 편안하다.
오사카로 돌아가기 위해
호텔에 맡긴 짐을 찾아
교토역으로 갔다.
교토역-신오사카역-신사이바시역을 통해
오사카 숙소로 돌아와 짐 맡기고
시텐노지(四天王寺)로 간다.
♣ 시텐노지(四天王寺)
시텐노지는
일본 역사상 성군으로 칭송 받는
쇼토쿠태자[聖徳太子]가 건립한
7대 사찰 중 한 곳으로
불교 중흥을 위해 593년 창건되었으며
처음에는 외국 사신을 영접하는
영빈관으로도 사용되었다,
금당에 안치된 본존은
구세관음[救世観音]이다.
일본 불교의 창시자인
쇼토쿠태자가 건립한
일본 최초의 불교사찰이라는 점에서
종파에 구애 받지 않는
와슈소혼잔[和宗総本山, 일본 불교의 총본산]으로
1946년 독립했다.
경내의 주요 건물로는
본당, 목조 오층탑, 이시부타이(石舞台) 등이 있다.
교토역에서
전차를 기다리고 있던 시간이
2시였으니까
오사카 숙소에 짐을 두고
시텐노지에 도착한 것은
4시 반이 넘어서였다.
그러니까
코류지에 이어 두 번째로
입장권 구입을 못해
겉핥기만 하고
돌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사실은
법당 안의 게시판에 걸린
쇼토쿠태자의 친필 액자를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쇼토쿠태자의 말*
「自分が正しと思っても、多数の意見に従いなさ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다수의 뜻에 따르시오'
마쓰시다고노스케(松下幸之助)씨는
그의 저서 [一日一話]를 통해
일본인들의 전통정신 중에서
[화합]의 정신은
지금부터 1400년 전의
쇼토쿠태자의
이 말에 의해서 주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사카(大阪) 난바(難波)역에서
전철로 한 시간 거리에
고야산(高野山)이 있다.
홍법대사(弘法大師) 공해(空海)는
헤이안시대(平安時代)인 819년에
고야산진언종(高野山真言宗)을 열어
수행을 시작했다.
그는 지금도
일본인들에게
많은 숭배를 받고 있으며
홍법대사가 연
고야산에 있는 영지에
참배하는 사람들은
사초로 만든 삿갓에
‘동행 2인’이라는
글씨를 쓰고 다닌다 한다.
어디에 있든,
어디에 가든,
자신은 외톨이가 아니라,
항상 대사님과 둘이라는 의미이다.
대사님이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고 믿는
신앙심이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삿갓이 아닌
‘同行二人’이라 쓰인 표찰을
목에 걸고 다니는 모양이다.
사찰탐방을 마치고
오사카의 중심부인
마나미지역의 난바역 앞으로 간다.
난바역이라는 게
난바역,
JR난바역,,
오사카난바역,
난카이난바역(南海難波駅)
등이 있어
처음부터 확실히 정해놓고 가지 않으면
헤매기 십상이다.
우리가 간 곳은 난카이난바역.
주위에 상가도 많아
쇼핑도 할 겸
자유시간을 얻었다
역 건너편은
깊숙한 골목까지
거의 먹자골목인 것으로 보인다.
책을 한 권 사고 싶었는데
모양새가 책과는 거리가 먼 곳인 듯하다.
아! 그런데 책방이 하나 보였다.
ジュンク堂라는 서점이었다.
굳이
무슨 무슨 책을 사겠다는 게 아니어서
서점 입구의 진열대에서
급히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핸드북 크기의 책
‘세계를 바꾼 10권의 책’
을 510엔을 주고 산 후
가장 가보고 싶었던 일본의 선술집
이자카야(居酒屋)를 찾아갔다.
아쵸천일점(阿鳥千日店)으로 들어갔다.
일본 술 사케를 주문했더니
술이 컵을 넘어
밑 접시까지 고이게 따라 준다.
흡족한 마음에
“아~ 아예 덤(お負け)까지 주네요”
했더니
어떻게 덤이라는 일본말까지 아느냐며
상당히 친근감을 보여준다.
이 젊은 주인의 어머니는
한국사람으로
서울에 살고 있으나
자주 왕래는 없다고 털어 놓는다.
일본에서는
반찬 한 가지라도
엄격하게 돈과 연결이 되는데
이 반쪽 한국사람에게서
진짜 덤으로
꼬치 한 접시를 받고서는
조금은 감격했다.
그래서 술을 한 컵씩 더 시키고,
안주 부족하다고
다시 야채 썰어 덤으로 주고,…
역시 한국식 술집 분위기가
좋은 것이 확실하다.
오사카에 오던 날은
난바역에서부터 물어 물어
걸어서 숙소를 찾아 갔는데
오늘은 우아하게
난바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신사이바시역에서 갈아타고
나가호리바시역(長堀橋駅)에 내려
숙소로 돌아왔다.
모두 즐거웠나 보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4박5일의 마지막 밤.
사시미, 생선초밥 도시락에 아사히 맥주로
건배!!
더 없이 좋은 밤이었다.
내일은 서울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