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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제공 :인터파크도서
상권
1.적의 장수 방연을 사로잡다
2.제나라 위왕을 만나다
3.위왕이 용병술에 관해 묻다
4.전기가 진지에 대해 묻다
5.우수한 병사를 선발하라
6.하늘의 기상을 살펴보고 전투에 임하라
7.여덟 가지 진법
8.지형 선정과 전투 대형
9.유리한 형세의 전개
10.병력의 활용
11.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제안
12.목숨을 걸고 싸우는 병사
13.사기를 높이다
14.군대의 지휘 통솔
15.군사력의 강화
하권
1.열 가지 전법
2.열 가지 전술 상황에 대한 질문
3.무장한 전국을 공격하다
4.공격군과 방어군의 역할
5.용병술에 능숙한 지휘관
6.적군의 성격과 그 대응 방법
7.실패를 통해 배우는 승리의 비결
8.장수가 지녀야 할 자질
9.장수의 덕
10.장수의 결점
11.패배를 초래하는 지휘의 문제
12.성을 공격하는 전략
13.쟁취해야 할 작전 목표
14.집중과 분산
15.일반 전술과 특수 전술
/ 출처: 인터파크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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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빈병법(孫臏兵法)은 기원전 4세기 무렵 중국 전국시대의 제나라 장수 손빈(孫臏)이 저술한 병법서이다. 또 다른 명칭으로 제손자병법(齊孫子兵法)으로도 불린다. 덧붙여 1972년 발견 이전에 이른바 손자(孫子)의 병법서에 대해서, 손무(孫武)가 저술 했다는 설과 손빈(孫臏)이 저술 했다는 설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손빈병법(孫臏兵法)이 발견되어, 손자병법은 손무가 저술했고, 손빈이 따로 손빈병법을 저술한것이 확인되었다.
1972년 4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산둥성(山東省)에서 한나라 시대의 무덤이 두 개가 발굴되었다. 즉시 산둥성 박물관(山東省博物館)으로부터 온 전문가가 검증하였다. 후에 은작산 한나라무덤(銀雀山漢墓)라고 칭해지게 되는 이 장소에서 발견된, 죽간으로 된 다수의 서적 중에서 죽간중에 손빈병법이 발견되었다. 서적과 동시에 발굴된 고전(古銭)의 모습과 및 동시에 발굴된 한 무제 원광 원년 역보(漢武帝元光元年歷譜)있었고, 연대가 대체로 기원전 134년에서 기원전 118년으로 추정되었다.
손빈병법은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는 8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이 있지만, 그 후에 한나라시대 이후부터 수당시대 사이에서 실전되었고, 그 뒤에 손빈병법의 실존여부를 의심하다가, 그 이후에 은작산에서 손빈병법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죽간본 손빈병법에는 죽간(竹簡)이 440매, 전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견된 원문에는 21편의 편명이 남아 있지만, 9편의 편명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인 59편이 발견되지 않아 나머지 편목이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다.
/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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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자 |
손빈(孫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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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BC 32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한(漢)나라 때의 묘에서 발굴된 병법서이다. 『손자』의 저자 손무의 자손으로 알려진 손빈의 언행을 모은 것이다. 중국에서 책 이름에 ‘자(子)’가 붙은 것은 ‘○선생의 저서’라는 뜻이다. 따라서 손빈의 병법서도 『손자』가 되지만, 이 병법서는 『손자병법』과 구별하기 위해 『손빈병법』이라 했다.
1972년 4월, 산동성 임기현 은작산(銀雀山)에 있는 전한(前漢) 시대 초기의 묘에서 다량의
죽간이 발견되었다. 그 죽간 더미에서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손자병법』 외에 『손빈병법』이라는 새로운 문헌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나왔다. 그와
함께 발굴된 도기의 형태나 동전의 종류로 보아, 이 묘는 BC 140~BC 11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시기는 진(秦)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성립한 직후이다.
이 발견은 중국의 군사 사상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일 뿐 아니라 전국사(戰國史)에 대한 해명과
진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실상, 나아가 오늘날 중국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유교 비판에 이르기까지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과거
천몇백 년에 걸쳐 여러 가지 억측을 낳았던 『손자병법』의 저자에 대한 수수께끼에도 종지부를 찍게 했다.
그 수수께끼는 춘추전국시대에
‘손자’라는 전략가가 2명 있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 사람은 춘추시대 말기에 오나라 장군이었던 손무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손자로서
약 150년 뒤에 제나라의 장군이 된 손빈이다. 그래서 『손자』의 저자를 둘러싸고 손자가 아니라는 설과 손무는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 손무와
손빈은 동일 인물이라는 설, 『손자』는 손무의 병법을 손빈이 완성시킨 것이라는 설 등 예로부터 많은 견해가 있었다. 그런데 이 문헌의 발굴로
인해 『손자』의 저자는 손무이고, 손빈에게는 다른 저작, 곧 『손빈병법』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기』가 전하는 손빈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손빈은 젊어서 병법을 배웠는데,
그와 동문 수학했던 사람 가운데 방연(龐涓)이라는 자가 있었다. 방연은 위(魏)나라 혜왕(惠王)을 모시는 장수가 되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자신보다는 손빈이 더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계략을 꾸며 손빈을 위나라로 불러들이고는 죄를 덮어씌워 두 발을 자르는 형벌을 내린 뒤
감금해 버렸다.
그러나 손빈은 우연히 제나라 사자가 위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의 수레에 숨어 탈출했다. 제나라 장군 전기(田忌)는
손빈을 군사로 맞이했다.
이윽고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략했다. 조나라는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자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제나라 왕의
명을 받은 장군 전기는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돕기 위해 달려가려 했다. 그때 손빈이 말렸다.
“무작정 싸움에 뛰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적의 허점을 찌르고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 위나라는 정예 부대를 조나라에 파견했기 때문에 나라 안이 텅 비어
있을 것입니다. 이 틈을 타서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을 치면 자연히 조나라를 돕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작전을 실행한 결과,
과연 위나라 군대는 조나라 수도의 포위망을 풀고 귀국을 서둘렀다. 제나라 군대는 계릉(桂陵)에서 귀환하는 위나라 군대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13년 뒤, 이번에는 위나라가 한(韓)나라를 쳤다. 이에 한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장군 전기는 이번에도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공격하려 했다. 그 소식을 접한 위나라 장군 방연은 급히 군대를 돌려 제나라 군대를 추격했다.
손빈은 전기에게
계책을 일러 주었다.
“위나라 군대는 용맹하여 우리 군대를 깔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적의 기세를 역이용해야 합니다. 우리
군대의 숙영지에서 아궁이의 수를 오늘은 10만, 내일은 5만, 이틀 뒤에는 3만으로 점점 줄이는 것입니다.”
추격하던 위나라 장군
방연은 아궁이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제나라 병사들이 나약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우리 땅에 들어온 지
사흘밖에 안 됐는데 반 이상이 도망을 치다니······.”
그래서 방연은 본진을 남겨 둔 채 기병부대만 거느리고 제나라 군대를
추격했다.
저녁이 되어 방연의 부대가 마릉곡(馬陵谷)에 접어들었는데 커다란 나뭇가지에 무슨 글자가 적혀 있었다. 손빈이 적어 놓은
것이었다.
‘방연, 이 나무 아래서 죽다.’
방연이 무슨 글자인지 궁금해 횃불을 밝혀 읽으려고 했을 때, 매복하고 있는
제나라 병사들이 일제히 노(弩)각주[1] 를 발사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위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방연은 “기어이 그놈에게 당하고
말았구나”라고 탄식하며 자결했다. 이렇게 하여 제나라 군대는 대승을 거두고, 위나라의 태자 신(申)을 포로로 잡아
귀환했다.
이때부터 손빈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그 병법도 뒷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사기』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근래 발굴되어 해독된 『손빈병법』은 1만 1,000자로, 『손자병법』의 약 2배에 달한다. 30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편명이 밝혀진 것은 「금방연(擒龐涓)」과 「위왕문(威王問)」, 「진기간루(陳忌間壘)」, 「찬졸(纂卒)」, 「월성(月城)」,
「팔진(八陳)」, 「지보(地葆)」, 「세비(勢備)」, 「행찬(行纂)」, 「살사(殺士)」, 「연기(延氣)」, 「관일(官一)」, 「십진(十陳)」,
「사간(士間)」, 「약갑(略甲)」, 「객주인분(客主人分)」, 「선자(善者)」, 「오명오공(五名五恭)」, 「장의(將義)」, 「장패(將敗)」,
「기정(奇正)」으로, 모두 21편이다.
1편인 「금방연」(방연을 잡다)은 『사기』에도 기록되어 있고 마오쩌둥의 논문에도 인용되어
있는데, 특히 ‘위나라를 포위해 조나라를 돕다’[위위구조(圍魏求趙)]라는 전략을 기술한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손빈의 병법에서 유명한 아궁이에
대한 일화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적을 속이기 위해 아군의 나약한 부장을 희생양으로 삼은 과정 등 처참한 내용이 들어 있다. 또한 『사기』에는
방연이 자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책은 “포로로 잡았다”라고 적고 있는 점, 제나라와 위나라의 전투 연대 등 전국시대의 역사에 대해
종래의 사료와 차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손빈병법』의 내용은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손자』가 오랜
세월에 걸쳐 정리되어 오늘날과 같은 정치한 고전으로 완성된 데 비해, 이 책은 고대 병법을 소박한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소수로 다수를
이기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방법’은 『손자』와 다를 바 없지만, 공격을 중시한다는 점이나 진지전(陣地戰)을 논하고 있는 점 등은 이
책의 특징이라 하겠다. 예를 들면, 『손자』도 공성(攻城)을 논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택할 수밖에 없는 하책(下策)이라고 한
데 비해, 『손빈병법』은 적진의 성격에 대응하는 공격법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도시의 발달과 철제 병기의 진보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승패의 원인과 작전 지도 요령, 지형과의 관계, 사기의 고무, 장수의 조건 등을 논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대립물의 상호 전환’이라는 변증법적 사고가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 출처: 절대지식 중국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