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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모임마다 일터마다 다가오는 새 천년의 아침을 위하여 분주한 발길들이 오간다.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설계해 보려는 의지가 어느 세기의 시작보다 진하게 움직이고 있다. 조그마한 직장을 비롯하여 첨단을 달리고 있는 전자 세계에 이르기까지 각양 각색으로 새 천년을 맞이 하려는 몸부림이 대단하다.
그런데 지난 천년과 새로운 천년을 소유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는 이렇다할 움직임이 보이지 아니한다.
특히 우리 나라 안에 가득한 교회의 움직임이 잘 보이지를 아니한다. 한 달이 지나면 만나게 될 새 천년에 내 놓을 설계도를 그리지 않고 있다. 새롭게 전개될 세기의 바다를 저어갈 배의 모습이며 방향이며 도구들이 보이지를 아니한다.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있기에 그렇게도 덤덤한 인상과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오는 세월도 그저 이끌어 주신대로 따라갈 뿐이라는 절대 믿음 때문인지? 아니면 시대적 감각이나 도전의 의혹을 상실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세 천년에 대한 의미부여를 외면하려는 의도인지? 알 길이 없다.
그래도 이것만은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한국교회가 지난 한 세기를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살피는 성찰의 눈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길을 헤쳐 나갈 슬기만은 모아야 한다. 그 중에서도 교회의 존재목적이요 일차적인 사명으로 모두가 수긍하는 설교사역 만은 필연코 한 세기를 걸어 온 길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반성의 시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기를 향하여 눈을 뜨고 우리의 그림을 새롭게 그려야 한다. 그럴 때 부끄러운 기록은 재생되지 않고 새로운 항해의 희열을 경험하게 된다.
1. 어제를 성찰한다.
1) 조선인에 의한 설교가 자리잡기까지
갈보리 산정에서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 땅의 개인과 민족을 구원할 주님이시라는 복음의 선포는 한민족에게는 실로 금시초문의 소식이었다.
수천년의 문화와 전통과는 전혀 다른 외침인데도 귀를 기울이고 듣는 사람에게는 가슴이 설레는 의미와 내용이 가득하였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지고 백성마다 수심만이 가득하던 그 시절에 처음으로 들려지는 그리스도교의 진리였으나 그 내용은 그렇게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하느님’을 상제(上帝)라 부르면서 섬겨오던 우리의 민족이기에 그 진리를 선포하고 풀어주고 구체적으로 삶의 장에 맞추어 이야기 해 줄 때 ‘귀 있는 자들’의 귀에는 기이한 메시지로 들렸고 ‘들어 볼만 한 말씀’으로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그러나 생김새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서툴기 이를 데 없는 한국어로 한국인에게 진리를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목이 메이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외쳐도 감동을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구경거리로 한국인의 눈에 비친 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1889년 우리의 땅에 들어와 솔내에서 초라한 한국집을 구입하여 거기에 기거하면서 한국인의 이웃으로서 언어와 풍습을 배우며 열렬한 전도자로서 지냈던 말콤 펜위크(Malcom. C. Fenwick)는 그가 펴낸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주일마다 매일 애쓰고 호소하고, 눈물로써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언하고, 예수께서 내 영혼에 가져다 주신 평화, 죄 씻고 난 다음의 평화를 외쳤으나 ......저들은 소리높이 웃고 있었다.(The Church of Christ in Corea, pp.49-51)
이러한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설교의 상처를 안고 있던 펜위크는 어느 날 김씨 성을 가진 전도사가 설교 할 때 회중들이 눈물어린 감동에 젖어 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그 때 그는 복음의 선포는 그 나라 사람이 그 나라 백성들에게 외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남기게 되었다.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펜위크와 같은 선교사는 복음의 커뮤니케이션 원리를 누구보다 신속하게 몸으로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모든 선교사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한국인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진리를 깨닫고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진리의 선포에는 유아적 수준을 넘기지 못한 설교자로 취급을 하고 있었다. 비록 자신들의 한국언어 구사에 제한이 있다하더라도 “한국인은 서양 선교사를 하나님처럼 믿는다”는 우월감은 ‘복음의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우선적으로 취급하지 아니하였다.
이럴 때마다 우리의 설교자들의 가슴에는 깊은 상처만 더했었다. 1920년경 이러한 상처를 안고 설교 단에서 외쳤던 이화학당의 신준려의 울먹임은 조선인에 의하여 조선인을 위한 설교가 있기까지의 깊은 갈등과 상처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여성설교자의 외침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宣敎師들이 勿論 朝鮮에 對하야 宗敎로나 敎育方面으로나 만흔 影響을 주엇고 여러 가지 方針으로 指導하야 쥰 事實은 感謝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다 그럿타고는 몰으나 人格을 無視하고 賤待하난 生覺하면 무엇보다도 실슴니다. 참으로 눈물나요 가삼암흠니다, 여러분! 저들의게 全部 責任을 지우지마시고 그들을 依賴마셔요 外國人은 압흔 事情을 모릅니다. (백목강연 1집 - 自省을 促함-)
조금만 발길을 멈추고 반복하여 음미해 보면 나의 자존심이 짓밟힘을 당한 듯 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는 이러한 아픔이 그대로 지속되어서는 안된다는 모진 마음을 먹고 계속하여 호소한다.
그러면 엇지 그들의게만 責任을 지우고 우리는 뒤만 따라 다니겠슴니가? ㅅ도는 言語와 風俗이 갓고 살色이 갓흔 우리는 울 일이 잇스면 갓치 울고 苦生을 當하면 함께 當하고 樂을 누리면 갓치 누리게 되어야만 해요. 내 사? 내일 보도다. 外國人 手下에 잇?거시 죠흐심니가? ??이 便?신지요? (백목강연 1집 - 自省을 促함-)
이러한 울부짖음과 함께 우리의 한국교회가 “한 사람이라도 어서 배우고 어서 알아야 되겠다”는 호소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의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비록 가난하고 일제의 마수에 시달리기 시작한 민족이었으나 오랜 역사와 문화 속에 심어진 민족의 긍지만은 누구에게도 심지어 선교사들에게도 굽히고 싶지 아니하였다.
돌이켜보면 조선 사람이 조선말로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복음을 외치는 설교를 하기까지는 그리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한국의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눈물과 땀방울로 옷깃을 적시면서 밤을 지새우는 기도와 진리를 닦았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의 강단은 이처럼 우뚝 서게 되었다.
2) 민족의 개화와 슬픔을 달래던 설교시대
19세기 말 복음이 들어왔을 무렵에는 이미 국운이 기울고 있던 시대였다.
이 복음을 받아드린 사람들의 가슴에는 나의 구원으로 만족하려 하지 않고 나라의 구출을 희구하였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어느 나라보다 강한 민족교회로서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한 현상은 주일이 되면 그리스도인들의 개인 집이나 예배당에 태극기를 달고 있었다는 기록에서도 입증되고있었다.
이 무렵에 남긴 설교의 기록들은 찾기가 힘든다. 한국교회 최초의 설교집이라고 일컫는 「百牧講演」에 실린 설교들도 모두가 1920년대의 설교들로서 19세기말의 설교들은 아니다.
그러나 이 때의 한국교회 설교들이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져 감을 보면서 하나님의 보호만이 살길임을 선포하고 애국심을 고취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구체적인 예는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던 날 “교회가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양주군의 홍태순 목사가 대한문 앞에 와서 약을 먹고 자살을 하였다”는 기록 등은 이때의 교회가 어떤 심정에 있었는지를 잘 알게 한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청년회가 매월 가졌던 강연회에서는 언제나 애국가를 봉창하고 기도로 폐회했다는 기록 등은 모두가 기울어져가는 나라에 대한 슬픔을 간직하고 나라의 구원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여겼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우리의 초대교회 설교는 단순한 애국만을 부르짖는 설교로 그 특성을 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초기 설교자들은 유교의 문화권에서 형성된 도덕률과 윤리를 기독교적으로 설명하면서 접근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였다는 사실 또한 설교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 예로서 조상숭배와 효의 사상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려는 노력들이 교육과 설교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둘째는, 나라의 패망이 눈에 보이는 시점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깥세상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폐쇄된 우리 민족의 무지함에 가슴 아파 하였다. 글이란 상류계층의 전용물이 되고 문맹은 일반백성의 당연한 현상으로 여기는 시점에서 설교자들은 먼저 민족의 개화와 나라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열중하였다.
셋째는, 성경에 대한 지식의 빈곤이 뚜렷한 유아기의 교회이기에 기독교 교리의 가르침이 설교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넷째는, 많은 설교자들이 민족의 장래를 염려한 나머지 때로는 비 복음적인 설교가 애국심을 등에 업고 회중들과 호흡을 함께 하는 결과를 초래한 경우가 적지 아니하였다.
끝으로, 나라에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는 시대적 현실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현실 도피적이며 내세 지향적인 종말론적 메시지가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하면서“예수 믿고 천당 가라” 는 메시지가 보편화되는 결과도 가져왔었다.
3) 부흥이라는 이름과 메시지의 변화
일본이 1910년의 을사조약을 향한 행진은 우리 민족을 좌절과 절망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군대의 해산을 비롯하여 외교권과 경비권의 박탈은 이미 한 나라로서의 형성요건을 다 잃어버린 상태였다. 한국교회가 가졌던 ‘나라 사랑, 나라 구원’이라는 대 명제는 더 이상 지속하기에는 한계점에 도달하였다. 통한의 눈물과 함성은 말없는 기도 속에서 터져 나왔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애급을 탈출한 출애급기의 기록은 한국교회가 가슴깊이 간직한 소중한 메시지였다. 벌써부터 우리의 설교는 일제의 극심한 검열과 잔인한 핍박에 의하여 설교는 방향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알 듯 모를 듯한 해석으로 검열을 피해 가면서 상처받은 민족의 가슴에 파고들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복음의 선포를 목적하고 이 땅에 있던 선교사들은 일찍부터 한국교회가 개인의 회개와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의 구현보다 ‘애국하는 집단’처럼 발전해 가는데 깊은 우려를 표명한 바 있었다.
이들은 “교회의 예배당은 나라 일을 보는 곳이 아니기에 이곳에서 나라 일을 의논하거나 공론해서는 안된다”는 우려를 1901년 그리스도인 회보를 통하여 표명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바라던 대로 1907년 한국의 교회는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었다. 그것은 국가의 비운을 슬퍼하면서 통회할 것과 하나님의 도움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강조하는 길선주 목사의 절규에 가까운 새벽기도회의 설교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방향을 이미 제시하고 있었다. 평양을 비롯한 도처의 부흥회를 통하여 들려진 메시지는 과거와는 달리 각자의 가슴을 파고 드는 성령님의 임재가 뚜렷하였다.
이러한 대 변화의 역사는 설교가 사회와 개인을 향하여 가던 방향을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설교로 변화를 가져왔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교리적으로 알고 믿었던 성령님의 존재를 체험하면서 신앙의 강도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었다. 이 때부터 설교사역 자체도 설교자 단독의 사역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구로서의 성스러운 사역임을 모두가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설교의 섭시(▩示) 사상이 출현하게 되었다.
섭시란 글자 그대로 성령님이 설교자에게 속삭여 보여주는 메시지를 설교자가 받아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설교사상은
설교자가 성실한 도구로서의 모든 것을 갖추었을 경우 이것은 참으로 소중한 설교신학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많은 설교자들에게 설교자로서 갖추어야 할 지적인 요소와 준비는 뒤로하고 영감 만을 추구하여 기도에 집중하는 설교자들이 등장하게 하였다. 이러한 설교자들에 의하여 설교의 탈선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성경의 영적인 해석이라는 주장과 함께 은유적 해석이 남발되었다. 이와 같은 결과는 후에 설교자가 받은 계시와 연계되어 설교는 예언과 같은 신유의 은사로 변질되었고 때로는 이단의 집단을 형성하여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4) 분열과 상처 속에서 이어진 한국교회 설교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밀어닥친 6.25 동란은 이 땅을 온통 흑암과 혼돈의 세계로 만들었다.
하나님이 주신 광복의 기쁨을 안고 미쳐 감사를 표현할 겨를도 없이 밀려온 민족의 또 다른 비극은 교회의 강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설교의 세계는 다양한 정황에 직면하고 그 양태 또한 다양하였다.
먼저, 광복의 기쁨과 함께 두 동강이 난 우리의 땅은 남과 북이라는 두 개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의 교회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야 했다. 일제의 탄압 보다 더 무서운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은 신앙의 자유마저 인정하지 않고 교회의 설교는 공산주의의 선전도구로 전락시켰다. 여기에 응하지 않은 설교자들은 모두가 투옥과 강제 노동과 추방으로 또 다른 순교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
둘째는, 일제의 잔인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한 출옥 목사들의 메시지가 남한의 교회에서는 돋보이고 있었다.
50여명의 순교자들을 감옥에서 배출하고 나온 20여명의 준순교자들의 출옥은 그 메시지부터 달랐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재건이라는 기치를 들고 모든 교회 지도자들과 일제의 그늘에서 살아 온 성도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메시지의 결과는 목사들이 2개월간 또는 40일간 설교를 할 수 없도록 하는 결정을 몇 노회가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셋째는, 동족상잔의 6. 25 동란이 발생하자 많은 설교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국가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회개하지 아니한 연고임을 외치는 설교가 전쟁의 와중에서 널리 선포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손양원 목사가 남긴 절규에 가까운 설교의 한 부분을 1951년 10월에 펴낸 「파수군」에서 만나게된다.
국가적으로는 수도를 빼앗기고, 교회적으로는 성전을 잃었으니 이 어찌 한심사가 아니리요! .... 내가 오늘에 이 죄악상을 말하면 우익에게나 좌익에게나 정치가에게나 경관에게나 교역자 혹은 교인에 욕먹고 매맞고 죽임을 당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대명(大命) 주시니 전하다가 죽드레도 내어찌 안전할 것이겠느냐? 나는 네가 큰 죄악의 원인을 말하겠으니 각각 자기 죄에 비추어서 회개하기를 바란다. 이는 나의 소원이라기 보다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일까
한다.
넷째로, 해방된 교회의 부흥을 외치면서 뜨거운 기도의 회복과 함께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외치는 설교의 시대를 구가할 것을 호소했던 설교의 한 줄기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김응조 목사의 설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종교 교육기관에서는 신신학이니 고등비평이니 하여 쥐꼬리 같은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숭
엄한 전통적 성서 중심 진리를 파괴하며 .....교리나 학설로서 성서를 대신하여 논쟁자찬으로
일삼아 왔다. .....우리는 교파 자랑이나 교리자랑이나 인물 자랑을 그만두고 상하가 다 회개
하고 뜨거운 눈물을 뿌리면서 삼천만 구령운동에 진출할찐저.
다섯째로, 1953년 조선신학교의 설립과 함께 부상한 보수신학과 진보적인 신학의 논쟁은 강단의 메시지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교파의 분열이라는 또 하나의 부끄러운 기록이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성령님의 역사 아래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 보다 자신들의 신학노선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는 메시지가 들리는 기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여섯째로, 개신교의 첫 순교자 토마스 목사의 순교가 있은지 백년이 되던 해인 1965년 민족 복음화 운동은 한국설교에 새로운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었다. 100만명을 상회한 교인들을 대상으로 400명이 넘는 설교자들이 도처에서 설교하는 동안 설교의 형태와 내용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말씀중심의 전통적인 사경회와는 성격을 달리한 설교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주일예배와 같은 엄숙함을 고집할 필요가 없는 순수한 집회로 이어지는 현장이기에 설교자는 자유로웠고 메시지의 전달은 설교자의 뜻대로 달리고 있었다.
5) 성찰이 필요한 부분들
한국의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설교중심의 교회로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설교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가져오고 있기에 설교의 역사는 한 시대를 말해주는 생생한 증언이기도 하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이지만 그 내용과 형태와 전달의 모습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한다. 그러나 설교는 시대라는 강물에 떠다니는 부표식물이 아니다. 오히려 설교는 혼탁한 시대의 강물을 정화시키고 그 방향을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잡아주는 거대한 힘과 역할을 발휘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설교란 하나님 말씀의 선포요 해석이요 적용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중요한 우리의 설교가 지난 한 세기를 지속해오면서 보여준 자랑스러운 부분이 적지 아니하다. 그 험난한 역경 속에서도 교회를 오늘까지 지탱하고 부흥시켜 온 우리의 설교사역은 분명히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말씀의 전달’ 또는 ‘말씀의 운반’ 사역을 감당한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100년이 넘은 한국교회의 설교역사를 살펴볼 때 적어도 다음의 부분만은 반성의 시각으로 우리 모두의 관심을 모아야 한다.
먼저는, 설교사역을 위한 신학교육의 빈곤이 한국교회 설교 현장을 어둡게 하고 있다.
평양신학교에서 1917년부터 1943년까지 있었던 곽안련(Allen Clark) 교수 외에는 설교학을 전공하여 신학교육에 사역한 교수가 1980년까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설교의 신학과 이론을 터득하지 못한 설교자들이 모방과 창작으로 이 막중한 설교사역을 이어갔다는 결론이다. 이러한 결과는 때로는 성공을 하기도 했으나 탈선도 많아 한국교회를 혼탁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둘째는, 설교는 예배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원칙이다.
회중들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청하게 되는 것이 설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예배는 없고 설교만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 또한 예배학 교육을 받지 못한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문제이다. 또한 우리의 예배는 주일예배나 일반집회가 분간이 되지 못한 상태이다. 예배라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언제 어디서나 집회로 일관되는 우리의 현실이다.
셋째로, 한국교회만이 갖는 특유한 모습은 교회의 모든 모임은 예배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그곳에서는 반듯이 목사의 설교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다.
주일예배를 비롯하여 추도예배, 개업예배, 돌예배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곳이라도 예배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행사가 없다. 그 때마다 목사는 필요한 성경 말씀만 봉독하지를 못하고 반듯이 설교를 해야 한다. 세계의 어느 교회에서도 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이제 설교자의 설교는 주문을 외우는 행사처럼 전락의 위기를 맞고 있다.
넷째로, 초대교회때부터 지적해 온 문제 중의 하나는 설교자가 강연과 설교를 구분하지 못한 문제이다.
지금도 우리의 강단에서는 성경의 본문을 읽어 놓고 모두가 자신의 분석과 경험과 지식을 나열하는 형태가 너무 많다. 봉독한 말씀을 해석해주고 그 말씀이 필요한 회중들의 삶의 장을 들추면서 거기에 적용해 주는 설교의 본분을 지키지 못한다. 마치 설교자가 구상한 그날의 신앙수필 한편을 들려주는 형태이다.
다섯째로,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요 해석이요 적용이기에 그 말씀의 주인은 분명히 성삼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설교의 현장에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말씀의 주인으로 등장하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설교에는 언제나 설교자만이 등장하여 자신의 경험과 견해로 일관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는 ”..줄로 믿습니다.“ ”...기를 바랍니다“ 끝을 맺어 회중들의 ”아멘“을 유발(誘發)시키는 기이한 설교현상을 연출하고 있다.
끝으로, 설교자에게 가장 시급하게 성찰을 구하는 문제는 설교의 도용(盜用)문제이다.
소설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수천 권의 남의 소설을 읽어야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소설가로 문단에 등장하여 자신이 소설을 쓸 경우는 단 한 문장이라도 남의 소설에서 가져올 수 없다. 한 문장이라도 그대로 베끼면 그는 형사범으로 고발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설교자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마음놓고 남의 설교를 그대로 복사하여 설교단에 가지고 올라간다.
그리고 더 거룩한 목소리로 자신의 설교인양 외치는 참으로 부끄러운 연출을 하고 있다.
2. 내일의 설교를 바라본다.
이제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이 새 천년의 문턱을 넘어섰다.
떠 오른 햇살이 이 땅의 예배당 종탑 마다 골고루 비추어 준다. 고요한 강산에 울려 퍼지던 종소리는 새 천년에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주일마다 우리의 예배당 안에서는 새벽부터 밤까지 찬송과 기도의 함성이 터지고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을 찾아 든다.
새천년에는 모든 분야가 거대한 변화를 가져온다는데 설교의 세계에는 어떻게 될것인지 궁금해진다.
에밀 부루너(Emil Brunner)의 말대로 지구가 존속되는 한 설교는 지속될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설교가 오늘의 형태로 일관할 것인지 아니면 변화의 어떤 물결을 알것인지 알고 싶다. 여기에는 아무도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설교란 인간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 분이 토기장이로서 토기 그릇인 우리의 설교자들을 어떻게 사용하실 것인지 아무도 예측 할 수 없다. 오직 그 분의 손에 있을 뿐이다. 오직 세미(細微)한 예상이 있을 뿐이다.
1) 신령한 은사에 머문 설교자
지난 한 세기 동안 교회가 동서양에서 지속해 오는 동안 우리의 관심을 끌어 온 것은 설교를 비롯한 모든 교회의 활동을 오직 성령님의 신령한 은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어온 교회들이 왕성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름하여 오순절 계열의 교회이다. 이 계열의 설교의 특징은 뜨거운 기도와 명상 가운데서 얻어진 환상이나 설교의 구상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성령님의 인도에 따른 설교로 내 놓은 경우이다.
이러한 설교현상은 오는 세기에도 결코 중단되지 아니할 것이다. 오히려 구원의 완성기에 접어들면서 종말론적 신학과 설교의 내용이 성령님의 지시 또는 계시와 연결되어 우리의 한국교회에 많이 등장되리라 본다. 거기에 더하여 새로운 천년에 주님의 재림이 임박해 옴을 강조하는 메시지에 많은 회중들이 움직이게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여기에 대한 부정이나 평가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자들에게 매우 큰 위험부담은 설교자 개인의 생각과 성령님이 주시는 설교의 구상 또는 환상과의 구분을 정확하게 구별하기 힘들다는 문제이다. 수많은 설교자들이 성령님의 이름으로 권위 있는 설교를 구사했으나 훗날 그것이 모두가 한 인간의 환상에 불과하였음을 알게된 적이 많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뜨거운 기도 생활에 열을 쏟운것 만큼 활자를 통한 진리의 터득에도 땀을 흘려야 함이 타당하다.
2) 개혁가들의 설교형태의 고수
종교개혁가들은 대부분 회중들이 자신들의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주고 풀어주는데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한 까닭에 개혁들은 곧 강해설교자들이었다는 말을 하게된다. 실질적으로 모든 설교는 강해 설교여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들에게 읽어주고 풀어주고 회중들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 설교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기에도 이 설교의 원칙을 지키려는 설교자들은 한국 강단에 대단히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형태의 설교가 가장 쉽고 준비의 부담도 적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딘 로빈슨(Hodon W. Robinson)이 말한 강해설교의 정의를 새 세기에 설교를 지속할 설교자들은 가슴에 언제나 안고 있어야한다. 설교학 교수인 그는 강해설교란 선택한 성경구절을 문맥에 비추어 역사적, 문법적, 문학적으로 연구함으로 얻어진 말씀의 개념을 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칠 때 성령님은 본문 말씀에 나타난 개념을 먼저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시키시고, 그 다음에 설교자를 통하여 회중에게 적용시킨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러한 정의를 받아 드린다면 오는 세기에도 강해설교의 길을 걷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모두가 땀흘리는 기도와 말씀의 연구가 있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3) 종교 수필을 설교와 혼돈한 설교자들
지난 세기에 많은 설교자들은 종교개혁이 있을 당시와 같이 환경의 변화가 많았고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차이도 뚜렷하기에 설교에 새로운 형태를 구사하는데 노력하였다. 그것이 바로 주제설교(Topical Preaching)이다. 한 때는 이 설교가 비성경적 설교라고 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설교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따라 성경의 본문을 정하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전개했기 때문이다.
오는 세기에도 회중들은 성경을 마음껏 읽고 연구할 수 있다.
성경이 회중들의 손에 없었던 개혁가들의 시대와 설교의 형태가 동일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들은 회중들의 삶의 장과 가까운 문제를 주제로 하여 그 주제를 자신의 지식과 경험의 시각으로 분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흥미 있는 예화를 연결하고 어느 부분에서 본문과 연결시키면 한편의 설교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설교는 냉정하게 따지면 성경의 개념에 근접해 있는 한편의 종교 수필로 한정하기에 적당하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의 설교 사역자들은 다음의 사항만은 마음에 간직해야 한다. 그것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많은 회중들은 설교자가 시사평론가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만담가이기를 거부하리라 본다. 스트워트(James Stewart)의 말대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나오는 회중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허기가 저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의 푸른 초장을 갈망한다. 새로운 세기에도 결코 최신 시사뉴스나 사건이 설교가 되어 회중들을 먹이는 애처로운 일이 발생되어서는 안된다.
4) 첨단의 전자문화에 승선한 설교자
끝으로 설교의 전달 형태의 변화를 전망해 본다.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선구자 마샬 맥루한은 커뮤니케이션의 시대를 셋으로 분류한다. 하나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메시지를 교류하는 형태이다. 둘째는, 얼굴과 활자를 맞대고 메시지를 받는 시대이다. 셋째는, 얼굴과 전자매체가 마주 대하고 메시지를 주고 받는 시대이다. 현대는 분명히 전자시대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거의 모든 기관들은 인터넷이나 영상매체를 도구화하는 경향이다.
새로운 세기에도 설교 사역은 여전히 얼굴과 얼굴을 서로 쳐다보면서 메시지를 교류할 것인지 아니면 전제 매체를 통하여 설교사역이 지속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미 지금도 설교자가 앞에 서 있는데도 거대한 스크린을 앞에 펼치고 설교를 하는 현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는 화면에 메시지를 띠우는 컴퓨터의 프리센테이션 시스템을 활용하는 경우를 본다. 이러한 현상은 확산될 가능성이 많다. 서로가 자신의 교회가 현대화의 물결에 뒤지지 아니했다는 모습을 보이려는 의도와 함께 새로운 시도들을 하게 되리라 본다.
그러나 이것 또한 커뮤니케이션의 이론에 비추어 볼 때 문제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입을 통한 언어는 45%의 효과를 거두고 신체언어인 얼굴을 보면서 소통하는 메시지는 55%에 이른다는 연구보고는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 설교자의 감정의 교류는 영상이나 기타의 전자매체로서는 감소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설교는 예배 가운데서 발생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살아 있는 한 하나님의 존전에서 설교의 행위는 엄숙히 지속되어야한다. 이런한 원칙과 환경을 지키면서 이어 나갈 수 있는 전자매체의 활용은 대단한 효과를 거두게 되리라 전망한다.
맺는 말
한 세기를 넘기면서 생각해본 한국 설교의 회고와 성찰과 전망이라는 주제는 분명히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본란에서는 그러한 만족을 주지 못한 채 끝을 맺고 있다. 한국교회는 그 초창기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성언(聖言)이라 일컬었고 설교는 그 성언의 전달이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한 설교사상 때문에 한국교회는 지금도 설교사역을 가장 소중한 사역으로 우러러본다. 그러나 새 천년에 들어선 설교자들이 성언운반일념(聖言運搬一念)의 설교정신을 갖추지 못한다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어두워진다. 포사이드(Forsyth)의 말대로 교회는 설교와 함께 일어서든지 아니면 쓰러지든지 하기 때문이다.
칼빈이나 발트가 동일하게 말한데로 설교란 설교자라는 한 인간을 통하여 그 날의 회중들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개혁가들은 교회를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지고 성례전이 진지하게 집례되어지는 곳”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두 기둥이 되는 사역은 당연히 성령님의 힘으로 이어져야 함을 그들은 강조한다. 교회란 성령님의 역사 아래서 이루어졌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교회에 대한 기본 교리가 오는 세기에도 살아있어야 한국교회는 살수 있다.
한국 교회는 숱한 역경 속에서 솟아 오른 교회이다. 이미 타고 있는 교회의 촛대가 옮겨지지 않고 오는 세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어 주면서 계속 타올라야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며 기도의 제목이다.
<출처: 새능력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