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오백년동안 최대의 개혁정책 한, 두개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대동법실시와 서원철폐를 들고 싶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는 100년이 넘게 지나서야 전국적으로 실시 된다.
이에 비해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는 단기간에 이루어진 당시로서는 엄청난 개혁정책이었다.
서원철폐(書院撤廢)는 조선 말기 서원의 오랜 적폐(積弊)를 제거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대대적으로 서원을 정리한 사건이다.
전국에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통·폐합하였다.
비사액서원을 우선적으로 정리를 하였고, 사액서원이라도 첩설된 것과 불법을 횡행하는 서원은 모두 철폐되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전국의 1000 여개 사립대학 중 47개만 남기고 폐쇄시킨 것이나 같다.
지금 처럼 교육기관이 없고 유일한 사설교육기관이었던 1000여개의 서원을 철폐한 일은 당시에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를 이처럼 강하게 밀어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서원은 우리나라의 선현(先賢, 옛날의 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 보통 대유학자들이나 스승을 일컫는다)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던 조선의 대표적인 사학교육기관이다.
1543년(중종38) 풍기군수 주세붕이 설립한 백운동 서원(白雲洞 書院)이 그 효시이며, 그 뒤 풍기군수로 있던 이황이 조정에 사액(賜額, 임금이 사당, 서원, 전각의 문 등 이름을 지어서 새긴 현판을 내리던 행위)과 전토(田土)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1550년(명종5) 백운동 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액(額)을 내린 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이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 양성과 선현 배향, 유교적 향촌 질서 유지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했다.
이랬던 서원이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여러 가지 폐단을 드러내게 된다.
서원은 일종의 특권적인 것이 되어 전지(田地)와 노비를 점유, 면세·면역의 특전을 향유하면서 당론의 소굴이 되었다.
유생은 향교보다도 서원에 들어가 붕당에 골몰하였고, 심지어는 서원을 근거로 양민을 토색하는 폐단이 심하였다.
더구나 서원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기 어려운 곳에는 글을 익히는 재실(齋室), 제사만 지내는 향사(鄕祠) 따위가 생겨나 서원 구실을 했다.
이에 따라 유학자의 자손이나 제자들은 그 유학자의 서원을 세우는 것이 가장 든든한 양반 밑천이 되었고, 향촌에서 존경을 받고 행세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리하여 별 내세울 만한 학문적 업적이나 행적이 없는 인물이라도 자손들이나 제자들이 돈푼이나 있고 권력의 줄이 있으면 제멋대로 서원을 세웠다.
18세기에 들어서는 서원이 줄잡아 전국에 1000여개로 불어났다.
유생들은 온갖 특혜를 누리며, “내 스승이 더 훌륭하다”거나 “아무 선생은 소인행동을 보였다”거나 하는 일로 파당을 짓기에 열중했다.
또 원회(院會)니 도회(道會)니 하는 구실로 몰려다니며 무위도식하는 무리로 전락했고, 서원의 원생에 끼지 못하면 행세를 못하는 현실로 변했다.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서원의 증설을 금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서원 중에서도 가장 세도를 부린 곳이 청주에 있는 송시열을 모시는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과 과천(오늘날의 노량진 근처)에 있는 사충서원(四忠書院)이었다.
화양동서원, ‘화양묵패’라고 하면 관·민 가운데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 만큼 관가의 체포영장이나 고지서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관가의 것은 일정 지역에서만 통하지만, 묵패는 전국 어디서나 통하기 때문이다.
화양동서원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에 묵패(墨牌)를 돌렸다.
그러면 관아나 부호들은 그 묵패에 찍힌 내역대로 경비를 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내지 않으면 고을 원은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며, 부호들은 “부모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았다”느니, “부모에게 불효했다”느니, “자식을 잘 가르치지 않았다”느니, 좀 지체가 낮으면 “양반에게 대들었다”느니, “관가에 복종하지 않았다”느니 하는 명목으로 서원의 뜰에 잡혀와 무릎을 꿇게 되었다.
사충서원의 서독(書牘)도 그에 못지않았다.
사충서원에서 편지를 보내면 누구랄 것 없이 그 편지대로 시행해야 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앙의 사법기관인 형조나 한성부에 잡혀가기 일쑤였다.
서원에 종사하는 하인배까지 서원의 특권을 고스란히 누렸다.
곧 군역 · 부역을 면제받는 것이다.
돈푼깨나 있는 상민들은 이 원노자리를 사서 군역 · 부역을 면제받았고, 실제 서원에서 일하지도 않으면서 이름만 걸어 놓는 경우도 있었다.
그 수가 얼마인지 확인할 기록이 없으나 상당한 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원의 횡포는 그 서원에 모시는 인물이나 그 서원 계통의 위력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전국에 걸쳐 자행된 폐단이다.
서원은 사회적 부정, 정치적 비리의 온상이었다.
더구나 권력을 끼고 자기네 계통의 정치적 지위를 누리기 위해 조정 일에 시비를 걸거나 붕당을 짓는 일로 조정과 민간이 평온할 날이 없었다.
이러한 서원의 폐단은 영조 대에도 있었고, 서원을 정리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영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1727년(영조 3년) 음력 12월 11일에 삼남에 어사를 파견해 증축한 서원을 조사하고 한 사람에 대해서도 여러 개 첩설한 서원에 대해서 모두 훼철하라고 명하였다’고 전해진다.
개혁군주 정조 또한 서원의 폐단을 잘 알고 있었으나 본인이 호학을 했고 유생들의 강력한 반발을 우려해 손을 대지 못하였다.
정조의 손자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시절 서원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서원정리를 하려 했지만 외척세력 관료와 유생들의 강력반발로 미루다 스물 두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처럼 역대 왕들도 못한 일었지만 효명세자의 못다한 꿈을 이뤄주고 싶은 조대비를 업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가 단행된 것이다.
뒤에 조대비가 있었다고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의 강력한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림이나 유생들의 단체 행동과 건의가 국가 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조선시대에 서원철폐는 이들의 강력 반발이 뻔한데 흥선대원군이 강경 진압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은 강행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에게 유생들의 강력 반발보다 더 큰 것은 서원과 조선이 가지고 있는 사상적 배경이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운영의 사상적 배경으로 삼는 나라였고, 서원은 성리학의 이상이 실천되고, 성리학을 가르치며, 각종 의례를 통해 성리학의 대가들을 기억되는 장소였다.
이런 조선에서 왕도 아닌 섭정 실권자가 서원을 철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는 성리학적 이상국가 구현을 위해서 서원이 제 구실을 못한다고 파악했으며, 성리학의 성지(聖地)를 없애더라도 제대로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흥선대원군은 유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 까지는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국가 재정과 군역, 당쟁의 폐단이 서원이라고 생각하고 집권 직후부터 서원에 대한 개혁을 지속하였던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서원을 부수고 신주를 땅에 묻어라.'라고 명했다.
흥선대원군의 뛰어난 결단력이 아니고는 누구도 해내지 못할 일이었고, 그 영단으로 몇백 년의 고질이 사라졌다.
흥선대원군이 실세하고 난 뒤 유생들이 화양동서원을 다시 재건하는 따위의 운동을 벌인 것만 보아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가 얼마나 강경했는지를 알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그의 개혁정치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책이 서원철폐로만 끝나지 않고 유교 중 성리학 폐단까지 척결하고 새로운 신문물인 서양과학을 받아 들이는 개국정책까지 이어졌으면 조선 말기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흥선대원국의 개혁정치는 쇄국정책이라고도 불리우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마무리가 완전 퇴색 되고 구한말의 어지러운 상황이 벌어져 일제에 의해 나라까지 빼앗기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