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7:13-26
찬송가 406장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솔로몬의 성전건축을 기록한 열왕기상 6장에 이어 7장에는 솔로몬의 궁을 건축한 이야기가 중간에 삽입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성전 주랑 앞 두 놋기둥과 놋으로 만든 바다를 제작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함께 살펴 보시겠습니다.
히람과 놋 기둥(7:13-22절)
(13-14) 솔로몬 왕이 사람을 보내어 히람을 두로에서 데려오니 그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니 놋쇠 대장장이라 이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자이더니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 모든 공사를 하니라
오늘 본문에 놋쇠 대장장 히람이 나옵니다. 그는 솔로몬의 부탁을 받고 레바논의 백향목을 벌목하여 보내었던 두로왕 히람과 동명이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었고,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역대하 2장 14절에 히람의 어머니를 ‘단의 여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단 지파의 여인이었던 히람의 어머니가 납달리 지파 사람과 결혼을 했다가 남편이 죽고 나서 두로 사람과 재혼을 했거나 혹은 단에서 살았던 납달리 지파 소속 사람으로 두로 사람과 결혼을 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 정확한 맥락은 알 수 없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고, 그의 아버지는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히람은 두로에 거주했습니다. 히람은 두로에 거주하면서 어머니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며 언젠가 자신이 어머니의 고국에 갈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놋쇠 대장장이었기에 아버지와 함께 생업을 도우며 놋쇠 대장장으로서 기술을 배워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과 이름이 같은 두로왕 히람의 추천을 받아 이스라엘 솔로몬에게 나아가게 됩니다. 역대하 2장 13, 14절을 보시면 두로 왕 히람(후람)이 솔로몬에게 놋쇠 대장장 히람을 추천하여 보내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람은 떨리는 마음으로 어머니의 고국을 향해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듣기만 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 기물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히람에게는 너무나 큰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과부의 아들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하게 여겼던 이방인을 아버지로 둔 히람은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성전 기물을 가공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은 자기 일에 충성된 자였기 때문입니다. 잠언 22장 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히람은 어찌보면 어머니의 고향에 돌아가 그 나라의 왕인 솔로몬 앞에 서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 기물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게 될 줄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놋쇠 대장장으로 가업을 이어 최선을 다하며 그 분야에 성실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는 두로 왕 히람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스라엘에 가서 성전 건축에 쓰임받는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부르신 자리는 어디입니까? 때론 그 자리가 주목받지 못하는 자리라 생각이 되거나 힘이 들고 알아주는 이 없는 자리라 생각되어 마음이 상할 때가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성실하게 자신이 심겨진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는 자에게 반드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시며 존귀한 자리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특히 히람처럼 연약한 입지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일에 충성된 자를 하나님은 잊지 않고 사용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15-20) 그가 놋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그 높이는 각각 십팔 규빗이라 각각 십이 규빗 되는 줄을 두를 만하며 또 놋을 녹여 부어서 기둥 머리를 만들어 기둥 꼭대기에 두었으니 한쪽 머리의 높이도 다섯 규빗이요 다른쪽 머리의 높이도 다섯 규빗이며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를 위하여 바둑판 모양으로 얽은 그물과 사슬 모양으로 땋은 것을 만들었으니 이 머리에 일곱이요 저 머리에 일곱이라 기둥을 이렇게 만들었고 또 두 줄 석류를 한 그물 위에 둘러 만들어서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에 두르게 하였고 다른 기둥 머리에도 그렇게 하였으며 주랑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의 네 규빗은 백합화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이 두 기둥 머리에 있는 그물 곁 곧 그 머리의 공 같이 둥근 곳으로 돌아가며 각기 석류 이백 개가 줄을 지었더라
히람은 두 놋기둥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는 십팔 규빗으로 이는 8.2m이며 둘레는 십이규빗 곧 5.47m이고 기둥머리는 오규빗으로 2.28m입니다. 이 기둥은 머리에 바둑판 모양의 얽은 그물과 사슬로 장식하였고, 석류와 백합화 모양으로 화려하게 꾸며 장식하였습니다. 백합화는 성경에 기록된 꽃들중에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꽃이며 석류는 과일 중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열매입니다. 특히 석류는 그 끝이 왕관 모양으로 되어 있어 ‘영광’을 나타내는 과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이 두 기둥은 성전을 찾아온 이들을 압도하는 크기와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두 기둥은 마치 사람처럼 이름도 있었습니다.
(21-22)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그 두 기둥 꼭대기에는 백합화 형상이 있더라 두 기둥의 공사가 끝나니라
오른 쪽 기둥의 이름은 ‘야긴’이었습니다. 그 뜻은 ‘그가 세우리라’의 의미입니다. 왼쪽 기둥의 이름은 ‘보아스’인데 이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야긴과 보아스’는 성전 입구에 세워져 성전을 오가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기억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그가 세우리라는 뜻의 야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를 반추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기 까지 모든 순간, 순간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불순종의 역사 가운데서도 사사기의 죄악과 사울, 다윗왕의 범죄함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왕의 시대에 성전건축과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신 결과였습니다. 또한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의미의 ‘보아스’는 자신들을 세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연약하디 연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력한 가나안 백성들을 무찌르고 주변국을 평정하게 된 것은 오로지 능력의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까닭이었습니다. 이 두 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과 연결시켜주는 리마인더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것과 얻게 된 것들이 나의 힘으로 세우고 얻은 것이라 착각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가정이 화목하게 세워진 것, 회사가 성장하는 것,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모두 나의 힘과 능력으로 세워나간 것이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야긴과 보아스를 통해 우리는 광야에 머물던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에 놀랍도록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사랑 때문에 그 은혜로 이 모든 일상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먼 훗날 이 야긴과 보아스는 바벨론의 군사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전리품으로 빼앗기고 맙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야긴과 보아스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어버렸고 그 하나님의 세우심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우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잊고 스스로의 힘과 능력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이 시간 오늘 우리 삶에 두 신앙의 기둥 ‘야긴과 보아스’를 세우시길 축원드립니다. 이어서 히람이 놋으로 성전 바다를 만든 내용이 이어집니다.
놋을 부어 만든 바다(7:23-26절)
(23-26) 또 바다를 부어 만들었으니 그 직경이 십 규빗이요 그 모양이 둥글며 그 높이는 다섯 규빗이요 주위는 삼십 규빗 줄을 두를 만하며 그 가장자리 아래에는 돌아가며 박이 있는데 매 규빗에 열 개씩 있어서 바다 주위에 둘렸으니 그 박은 바다를 부어 만들 때에 두 줄로 부어 만들었으며 그 바다를 소 열두 마리가 받쳤으니 셋은 북쪽을 향하였고 셋은 서쪽을 향하였고 셋은 남쪽을 향하였고 셋은 동쪽을 향하였으며 바다를 그 위에 놓았고 소의 뒤는 다 안으로 두었으며 바다의 두께는 한 손 너비만 하고 그것의 가는 백합화의 양식으로 잔 가와 같이 만들었으니 그 바다에는 이천 밧을 담겠더라
이 바다는 제사장들이 씻을 수 있도록 많은 물을 담을 수 있는 놋으로 만든 기구였습니다. 그 직경은 십규빗인데 이는 4.56m이며 높이는 오규빗으로 2.28m, 둘레는 30규빗 곧 13.68m입니다. 그 가장자리 아래에는 ‘박’모양의 장식으로 꾸몄으며 그 바다의 아래에는 소 모형 열 두개가 각 세 마리씩 동서남북으로 향하여 받히고 있었습니다. 소는 순종과 희생을 상징하며 그 바다의 두께는 한 손 너비만큼 두꺼워 매우 무거웠고 백합화의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안에는 물 이천 밧 곧 45,420L의 물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용량의 물을 담을 수 있었기에 ‘놋바다’라 불리우게 된 것입니다. 이 놋바다는 성전에 많은 물을 보관함으로서 제사장들이 언제라도 자신의 몸을 씻어 하나님앞에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 많은 물의 양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늘 성결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루 세 번 식사의 기도를 할 때 단순히 감사의 기도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과 시간 사이에 혹시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범죄한 것이 있다면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며 우리의 양심과 의지를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말씀의 개혁자들이 되게 해주시길 간구해 보시기를 권면 드립니다. 오늘 본문에 이 놋바다는 훗날 악한 유대왕인 아하스가 놋소에서 내려 돌판 위에 올려 놓고 사용을 하였고 결국 바벨론 군사들에 의해 깨뜨려져 두 놋기둥과 함께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는 야긴과 보아스를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여호와께 성결’ 곧 거룩함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 신앙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 곧 우리를 세우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또한 놋바다의 가득한 물로 자신을 씻어야 했던 제사장들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을 날마다 의지하며 회개와 성결의 자리로 나아가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에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던 히람을 통해 세워진 이 아름다운 놋기둥과 놋바다는 결국 불순종, 변질된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여호와의 성전 기물이 아닌 그저 놋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허물어진 두 놋기둥과 놋바다와 같은 아픔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다시 금 허리 띠를 부여잡고 내 삶에 무너진 야긴과 보아스, 그리고 내 더러워진 양심과 마음을 씻어낼 회개의 놋바다를 회복하실 수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다시금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개혁의 불꽃이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무 배경이 없던 히람을 부르셔서 하나님 성전의 귀한 기물들을 만들게 하신 은혜를 바라봅니다. 히람처럼 우리도 아무런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일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자리에서 성실과 정직으로 삶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히람이 두로의 왕과 솔로몬 앞에 존귀한 자로 부름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 왕되신 주님 앞에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부름받는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의 삶에 야긴과 보아스의 기둥이 무너져 있고 거룩한 놋바다가 깨져 버렸다면 이 시간 다시금 일어나 우리를 세우시는 능력의 하나님과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세상을 이기는 주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두로 왕 히람의 추천으로 솔로몬의 부름을 받은 놋쇠 대장장 히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이스라엘로 왔을지 묵상해 봅시다.
2. 자신의 일에 능숙한 사람이 되기까지 히람이 흘려왔을 땀과 노력을 생각해보며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자리에서 나는 어떤 자세로 감당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3. 야긴과 보아스의 의미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일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묵상해 봅시다.
4.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정결하기 위해 씻고자 많은 물을 채울 놋바다를 구비했던 것을 보며 나는 매일의 삶 가운데 날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기우는 성결의 삶을 추구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 강요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