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노래가사는 인현왕후의 심정을 그려낸 가사인것 같네요.
15세 어린나이에 중전에 올라 숙종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슬하에 자식 하나 두지 못해 장희빈의 아들이 세자에 책봉되고...
정말 인현왕후는 비운의 여인인가 봅니다.
뒤늦게서야 숙종은 인현왕후를 그리워 하게 되죠?
역시 전처가 좋은 걸 왜 모르나... 옛날이나 지금이나...똑같네!!!
국사 공부도 할겸....
그냥 올려봤습니다.
<인현왕후 민씨>
"...희빈 장씨 처음으로 왕자를 탄생하니 상께서 지나치게 사랑하심은 이를 것도 없고, 왕후도 크게 기뻐하사 어루만져 사랑하심을 당신이 낳으신 친자식과 같이 하시니, 장씨가 자기 분수를 지키고 있었더라면 영화 가득할 것이로되 문득 참람한 뜻과 방자한 마음이 불일 듯하니, 중궁의 성덕과 용색이 일국에 솟아나고 인망이 다 돌아가고 있음을 시기하여 가만히 남몰래 제거하고 대위를 엄슴코자 하니 그 참람한 역심이 더하여 날마다 기색을 사펴 중궁전을 참소하기를..."
(인현왕후전)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여기서 인현왕후는 유교적 덕목을 갖춘 모범적인 인물로, 장희빈은 이러한 인현왕후를 시기하여 참소를 그치지 않은 나쁜 여자로 그려져 있다. 이 책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 덕택에 인현왕후는 조선 최고의 모범적인 여인상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숙종이 민씨를 쫓아낸 이유 중의 하나가 투기라는 내용이 (숙종실록)에 남아 있는 것을 보아 이는 인현왕후를 지지하는 당파적 입장이 반영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인현왕후가 추앙받게 된 것은 (인현왕후전)작자의 공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 특이한 점은 인현왕후가 폐출될 때 소론측 인물들의 목숨을 건 폐비 반대를 매우 장황하고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쓰여진 연대가 정조 재위기간이라는 것을 감안해보면 소론 집안에서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는 혐의점을 둘 수도 있다.
<배후에 포진해 있는 서인 세력들>
숙종은 왕후 세 명에 폐왕후 한 명 그리고 일곱 명의 후궁을 거느리며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다. 이중 첫 왕비인 인경왕후 광주 김씨는 열살이 되던 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동갑인 숙종과 가례를 올렸다.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된 김씨는 2년 후인 1676년에 정식 왕비의 책명을 받았다.
서인 집안 출신 김씨는 시어머니, 시할머니 등도 모두 서인 출신인데다 친정도 건재하여 남인들의 득세 속에서도 별 탈 없이 국모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왕비로 책봉된 지 4년 후인 1680년 10월 갑자기 천연두를 앓아 발병한 지 8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씨는 슬하에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를 두었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김씨의 시신은 경기도 고양읍 신도읍 용두리 서오릉에 홀로 안장되었다.
인경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 다음으로 맞이한 왕비가 인현왕후 여흥 민씨다. 민씨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시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인 김우명의 역할이 컸다. 서인 집안 출신인 민씨를 적극 추천하여 성사가 되었던 것이다. 민씨는 1667년 4월 23일 서울의 서부 반송방 사저에서 태어나, 생모 송씨를 일찍 여의고 계모 조씨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병조판서인 아버지 민유중은 서인이면서도 노론의 중진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민씨가 왕비로 간택되었을 때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쫓아낸 궁녀 장옥정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1659년 8월 9일 중인 장현과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옥정은 복창군과 인연을 맺은 당숙의 주선으로 궁궐에 들어온 궁녀였다,. 옥정의 조사석 처가의 여종으로, 남편이 죽은 후 수시로 조사석의 집을 드나들어 항간에서 조사석과 내연의 관계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쫓겨난 장옥정은 궁궐로 다시 들어갈 날을 꿈꾸며 지냈다. 그리고 자의대비 조씨의 조카인 신씨 집에 자주 드나들며 자신의 신세를 하소연하였다, 신씨는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아들 승선군의 아내로, 현 조정 세력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다. 승선군이 효종 때 역모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는 데 다 자의대비 조씨 또한 서인 세력이었으나 그녀의 집안은 제대로 출세하지 못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의견이 잘 맞았고 신씨가 장옥정의 하소연을 자의대비 조씨에게 전해주면서 조씨도 장옥정에게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관계로 해서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장옥정은 그날로 궁궐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숙종은 그때부터 장씨만을 찾았다. 민씨가 잉태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숙종이 장씨만을 총애하자 불안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숙종에게 후사를 보기 위해 후궁을 들일 것을 권했다.
1686년 2월 조정 대신들은 숙종에게 후사를 보기 위해서는 후궁을 간택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숙종은 장간택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간택된 후궁이 영의정 김수항의 종손 김희홍씨가 있어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장인이 앞장서서 요구하는 바람에 후궁을 의 딸 김씨였다. 숙의에 봉해진 김씨는 그러나 몸이 매우 허약한데다 숙종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숙의 김씨는 처지가 비슷한 민씨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어쨌든 이때만 해도 민씨는 아버지를 비롯하여 쟁쟁한 서인 세력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별 탈 없이 왕비 자리를 지킬수 있었다.
<후궁 장씨에게 빼앗기는 국모 자리>
숙종은 신임하던 서인 강경파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자, 이를 계기로 왕권을 강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인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1688년 1월 숙종은 조사석을 좌의정으로 영입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장씨가 아들, 즉 훗날의 경종을 낳자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더욱 깊어졌다.
그런데 이때 장씨의 어머니 윤씨가 산후 조리를 해주기 위해 옥교를 타고 궁궐로 들어오다 사헌부 관리에게 옥교를 빼앗기고 여덟 명의 노비가 치죄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천인인 윤씨가 옥교를 탈 수 없다는 논리였으나, 딸이 내명부 2품이었으므로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들은 숙종은 장모나 다름없는 윤씨를 능멸한 것은 곧 자신을 능명한 것이라며 서인에 대한 공세를 본격화했다. 이 사건의 용의자인 지평 이익수와 이언기를 파직시킨 것이다. 그러나 서인측의 반발로 두 사람을 복직시킬 수밖에 없었던 숙종은, 대신 아들을 위해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3개월밖에 안된 아들을 원자로 책봉할 것을 선언했다.
서인이 대부분인 대신들은 당연히 이에 반대했다. 민씨가 아직 젊은데 q빨리 결정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숙종은 "내 나이 서른이 되어 겨우 얻은 아들"이라며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경종을 원자로 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함과 동시에 장씨를 내명부 정 1품 희빈으로 봉하였다.
이때 낙향해 있던 송시열이 원자를 정한 것은 성급한 조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는 결국 서인들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숙종은 원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서인들을 몰아내고 남인을 등용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송시열을 삭탈관직시켜 제주도로 유배보내고 영의정을 파직시키는 한편 남인을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이어 송시열의 상소를 미온적으로 처리했다는 이유로 대사간 등을 갈아치우는 등 조정에서 서인 세력들을 거의 몰아낸 것이다.
재등장한 남인들은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극형에 처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숙종은 답변 대신 민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중궁은 투기하는 버릇이 있소. 장희빈이 숙원으로 있을 때 중궁이 김수항의 종손녀인 김귀인과 한패가 되어 과인을 원망하고 장숙원을 질투한 실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소. 하루는 중궁이 나에게 말하기를 꿈에 선왕. 선후를 뵈었는데 그대와 귀인은 복이 많아 자손의 번창함이 선조 임금 eo와 같을 것이나 장숙원은 앞으로도 아들이 없고 복도 없으니 만약 궁중에 오랫동안 있으면, 경신환국 후 원한을 가진 사람들과 결탁하여 망칙한 일을 꾸며 나라에 해를 끼칠 것이라 하셨다는 것이오. 예전에도 질투하는 왕비가 있기는 했지만 어찌 감히 선왕. 선후를 빙자하여 내 마음을 움직이는 계교를 꾸밀 수 있단 말이오? 숙원에게 자식이 없다면 어찌 원자를 낳았단 말이오?"
듣고 있던 조정대신들은 아연실색하였다. 왕비를 폐출한다는 것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먼저 우부승지 이시만이 중전마마께 불만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서서히 진정 시키실 일이거늘 어찌 밖으로 드러내냐며 반대하고 나섰다.
남인들은 이러한 숙종의 말에 복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숙종은 우부승지를 파직시키고 송시열의 사사를 허락한다는 명을 내렸다. 즉 민씨의 폐출과 송시열의 사사를 맞바꾼 것이다. 송시열은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 정읍에서 사사되었고 이를 계기로 서인 세력들은 사사, 삭탈관직, 유배 등을 통해 정계에서 모두 축출되었다. 이어 숙종은 3월, 남인의 주장에 따라 서인들이 신앙처럼 여기던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서 출향시켜 버렸다.
이후 조정에서 서인 세력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어, 민씨는 외로운 처지가 되고 말았다. 더구나 민씨 폐출에 대해 남인들의 합의를 얻어낸 숙종은 민씨와 친하게 지내던 숙의 김씨를 먼저 폐출시켰다. 죄목은 민씨와 함께 장희빈을 투기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씨의 생일 다음날, 내수사와 각궁에서 축하하기 위해 올린 공상단자를 물리친 후, 대신과 2품 이상 중신들을 불러놓고 민씨를 폐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이에 모여 있던 조정대신과 중신들은 폐비의 불가를 간곡히 전하였다. 그리고 80여 명의 전직 관료 및 재야 유림들이 폐비에 반대하여 상소를 올리는 등 안팎으로 철회하라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자 숙종은 상소문을 써서 올렸던 오두인, 박태보 등을 각각 의주와 진도에 위리안치시켰다.
이제 민씨를 지켜줄 만한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민씨는 폐비의 절차도 없이 일반 평민이 타고 다니는 소보교를 타고 궁궐을 나섰다. 민씨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상궁 한 사람과 시녀 두어 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역대에 쫓겨났던 왕비들과 달리 민씨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얼굴 표정에도 변함이 없었다. 외가와 친가 모두 예학을 숭상했던 집안에서 자란 민씨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궁궐문을 나섰던 것이다.
숙종은 5월 2일, 민씨의 본곁에 있는 가례 때의 교명, 책보, 장복 등을 몰수하여 불태워버리고 그 이틀 뒤에는 폐비의 출내를 태묘에 고하고 그 교지를 중외에 반포하였다. 이로써 민씨는 궁궐에서 완전히 축출당했다.
<다시 찾은 국모 자리>
민씨를 폐위시킨 숙종은 즉시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고, 장씨의 아버지 장형을 중인에서 양반으로 승격사켜 옥산부원군으로 봉했다. 이리하여 장씨 집안은 최고의 명문가로 떠올랐고, 남인들과 손잡고 정국을 뒤흔든 장씨의 오라버지 장희재의 집앞에는 줄을 대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편 민씨는 친정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를 비롯한 친정 식구들을 모두 백부 집에 거처하도록 하고 혼자 안국동 별궁에서 지냈다. 이곳이 오늘날 풍문여고 자리에 있는 감고당이다. 죄인 아닌 죄인 생활을 시작한 민씨는 스스로를 책망하며 지냈다. 우선 사람들의 내왕을 일체 금하고 내 . 외문을 닫아걸었다. 죄인이니 어떤 방문객도 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 정당을 버리고 아랫채로 내려앉았다. 뿐만 아니라 아랫채 방도 과분하다면서 뚫어진 문에 창호지 한 장 바르지 못하게 하고, 안마당의 잡초도 그대로 둔 채 우물과 변소 다니는 길만 남겨놓았다. 당시 쫓겨났을 때가 초여름이라 뽑지 않은 잡초가 순식간에 우거져 집안은 폐옥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항간에는 서인들이 만들어 전파시킨 것으로 의심되는 노래가 떠돌기도 했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일세
철을 잊은 호랑나비
오락가락 노니느니
제철 가면 어이 놀까
제철 가면 어이 놀까
여기서 미나리는 민씨를, 장다리는 장희빈을 가리킨다.
한편 그후로 5, 6년이 지나 숙종은 장씨에 대한 애정이 식자 민씨를 폐위시킨 것에 대해 후회하게 되었다. 숙종이 이처럼 동요하고 있을 때, 김만중이 유배지에서 쓴 (사씨남정기)를 한역한 것을 보게 되었다. 이 소설의 배경은 중국이지만 내용은 장희빈에 혹한 숙종이 민씨를 내쫓은 사실을 풍자한 것으로, 김만기의 손자 김춘택이 숙종에게 올린 것이다.
얼마 후 숙종은 지난날을 후회스럽게 되돌아보며 궁궐을 거닐다 한 궁녀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무수리 최씨가 쫓겨난 민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축원을 드리고 있었다. 전에 민씨를 모신 최씨였지만, 사실 이런 행동은 살아 남기 힘든 중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조차도 숙종에게는 민씨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인연으로 최씨는 그날 밤 숙종과 밤을 보내고, 첫아들 영수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이어서 낳은 아들이 연잉군 금, 곧 영조였다. 그리하여 최씨는 무수리에서 일약 내명부 1품 벼슬인 숙빈으로 책봉되었다. 그후에도 최씨는 숙종의 다섯째 아들을 낳았으나 이름을 짓기도 전에 죽었다.
한편 김춘택은 숙종의 마음이 최씨에게 기울어진 것을 알고 최씨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숙종의 유모 봉보부인을 통해 접촉했던 것이다. 또한 궁인의 동생을 뇌물로 매수하여 궁중의 정보를 입수하고, 장희재의 아내와 정을 통하며 장씨 집안과 그 집을 드나드는 남인들에 대한 정보도 얻어냈다. 이외에도 김춘택은 효종의 딸인 숙안공주와 숙명공주도 포섭하였다. 숙안공주는 아들 홍치상이 기사환국 때 사사당했기 때문에 남인들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김춘택은 남인에게 원한을 가진 모든 서인들을 모아 정권을 되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의에 같이 참여했던 김석주의 가인 함이완이 남인들의 회유에 넘어가 이를 조정에 알리고 말았다.
이 변을 들은 숙종이 즉시 역모 관련자들을 심문하도록 하자, 남인들은 이참에 일을 확대시켜 관련된 서인들을 모두 제거하려고 했다. 서인측에서는 급박한 수단을 강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김인, 박귀근, 박의길 등이 나서서 남인측이 역모를 꾀했다고 역으로 치고 나섰다. 장희재가 김해성의 장모로 하여금 숙빈 최씨의 생일날 독이 든 음식을 가지고 입궐케 해,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에 관련자들은 즉시 무고라며 반격에 나섰고, 숙종도 전혀근거없다며 오히려 이들을 금부에 가두었다. 그러나 상황은 역전되고 있었다. 서인들은 역고변이 있은 사흘 뒤 숙종은 서인측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 배후에는 최씨가 있었다. 숙종이 독살설을 물어보자 최씨가 모두 사실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졸지에 남인들은 정계에서 퇴각하게 되고 조정은 서인 일색으로 채워졌다. 뿐만 아니라 숙종은 서인 송시열, 김수향, 김석주, 김익훈 등을 모두 신원시켰으며 문묘에서 배향당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사상적으로도 완전히 복귀시켜주었다. 이때가 갑술년이라 이를 갑술옥사라 한다.
이렇듯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폐위된 민씨도 자연스럽게 복위되었다. 먼저 숙종은 그해 4월 폐비 민씨를 별궁으로 옮겨 늠료(녹봉으로 주는 쌀)를 주라고 명령한 후, 며칠 뒤 장씨를 빈으로 강등하교 민씨를 복위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이어 장형의 봉작도 거두어 불태워버렸으며, 이후부터는 빈이 후비로 승차하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정했다.
한편 왕비로 다시 복위된 민씨는 선천적으로 허약한 데다 6년 간 궁궐 밖에서 생활한 탓에 병이 점점 깊어져 하루가 멀다 하고 누워 지냈다. 민씨는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복위된지 7년 만인 1701년 서른 다섯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경기도 고양읍 신도읍 용두리 서오릉에 숙종과 동혈이분으로 안장되어 있다.
<사사되는 장희빈>
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오라버니 장희재와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일단 장희재는 1696년 남인들과 짜고 아버지 장형의 봉분 속에 흉물을 묻고, 이를 서인 신여철의 짓으로 몰았다. 조정에서는 즉시 장희재의 노비 업동을 소환하여 조사했는데, 말이 오락가락하는 등 전후가 맞지 않았다. 당시 삼정승은 더 이상 심문을 하다가는 장희빈까지 파헤쳐질 것 같아 이를 만류하였고, 숙종 또한 장희빈이 세자의 생모였기 때문에 그 말에 따랐다.
그러다 민씨가 죽자 장희빈과 남인들은 다시 정권 복귀를 꿈꾸었다. 먼저 남인 이봉징이 앞장서서 장희빈은 6년간 왕비에 있었기에 다른 후궁과는 복제가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후궁과 예우를 달리 하면 이를 계기로 장희빈을 복위시킬 계획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엉뚱하게 흘러가 버렸다. 이미 장희빈에게 마음이 떠나 있던 숙종이 이봉징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버린 것이다.
노론측에서도 들고 일어났다. 먼저 갑술옥사에서 큰 공을 세운 김춘택이, 민씨의 죽음은 장희빈의 요사스러운 짓 때문이니 장희재를 두둔하던 인물들은 조정에서 모두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또 숙빈 최씨가 가세하고 나섰다. 최씨는 숙종에게 장희빈이 궁궐 내에 신당을 차려놓고 저주했기 때문에 민씨가 죽었다고 밀고했다. 이를 들은 숙종은 격노하여 우선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는 장희재를 처단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이틀 후 숙종은 장희빈에게 자진할 것을 명했다. 그러자 즉시 입직승지와 홍문관에서 세자의 생모인 장희빈을 보존해야 세자를 보존할 수 있다며 장희빈을 변호하고 나섰다. 숙종은 세자를 생각하여 자진 명령을 거두어 들였으나 관련된 시녀와 무녀들은 계속 추궁했다. 이어 영의정 최석정은 세자와 죵묘사직을 위해 장희빈을 관대하게 처리해줄 것을 세 차례에 걸쳐 청했지만, 결국 숙종은 그를 진천으로 유배시킨 후 다시 장씨에게 자진 명령을 내렸다. 모든 조정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세자 경종은 조정 대신들을 붙잡고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숙종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장희빈은 민씨가 죽은지 2개월 후 마흔세살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장씨의 시신은 경기도 고양읍 신도읍 용두리 서오릉 대빈묘에 안장되었다.
오늘날에는 장희빈을 악녀로 인현왕후 민씨를 현숙한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이렇게 단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평민 출신으로 국모가 된 장희빈은 스스로 적극적인 공세를 펴지 않았다면 출신성분상 민씨와 대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민씨는 당대의 쟁쟁한 명문 집안 출신으로 그녀를 둘러싼 정치세력들이 보위해주었기 때문에 굳이 기를 쓰고 나설 이유가 없었다.
이처럼 신분이 서로 달랐기에 장씨는 적극적으로 숙종의 총애를 얻기 위해 애를 썼고, 민씨는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장씨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사랑을 이용해 신분을 뛰어 넘으려다 좌절한 불운한 조선의 한 여인이었다.
첫댓글 역사는 지나고 보면 재미있는 소설과 같아요.정말 글 잘읽었어요 공부잘 하는 후배같네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