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물 이철경 선생님은 1914년 목은 이색의 후손인 이만규 선생님과 밀양박씨 현숙선생님의 2남 4녀 중 셋째딸로 강원도 원성군에서 태어나셨다. 네 딸 가운데 각경, 철경, 미경, 세 딸이 우리 한글서예만을 고집한데는 아버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한글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이만규 선생님은 우리말과 글을 온전하게 지키는데 힘쓰셨으며, 딸들의 글씨 공부를 위해 여러가지 자료를 구해주기도 하셨다. 우리말과 글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1930년 12월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이 되셨고 1932년 조선어학회기관의 한글이 속간될때 김윤경, 이강래, 이극로, 이병기, 이희승, 최현배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만규 선생님은 새 시대는 새 여성을 요구한다며 안팍을 통찰하셨고, 온갖상식과 기술을 아는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을 받고 활동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이러한 아버지의 교육이념은 자연스럽게 자녀들에게 전달되었다. 갈물선생님은 보통학교 1학년때 아버지의 서가에서 「신편언문례법」(1917년 김영진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궁체교본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만든 습자책)을 발견한 것이 일평생을 한글서예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된것이다. 한글서예 보급에 힘쓴 선생님은 1958년 아호인 갈물을 넣어 "갈물한글서회"라는 서예단체를 설립하여 중앙공보관에서 제1회 회원전을 열어 궁체 정립의 기틀을 잡기 시작하셨으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서예 작품전시회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 그리고 「궁체 쓰는법」, 「초등글씨본」, 「중등글씨본」, 「한글서예」, 「한글」등 많은 저술은 한글서예의 길잡이가 되었다. 시대적 상황으로 볼때 이철경 선생님은 한글서예에 있어 근ㆍ현대를 잇는 교량적 역할을 하셨으며 오늘날 한글서예의 부흥과 보급에 선도적 역할을 하셨다.
꽃뜰 이미경 선생님은 1918년 12월 개성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의 교육이념을 실천해야한다는 생각을 한 순간도 지울 수 없었던 선생님께서는 규장각 등을 다니면서 우리글씨를 찾아나섰고 윤백영 할머님에게서도 많은 자료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옛글씨 자료를 섭렵하여 그 고유한 성격을 되살리고자하셨다. 꽃뜰선생님의 이러한 자세는 우리글씨를 알리려는 과정을 높이시고 또한 선구의 터전을 마련하셨던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1954년부터 이화여자 중학교에서 10여년간 서예를 가르치셨고 1970년부터 5년간 YWCA와 정원여자중학교 그리고 갈물선생님이 세운 갈물한글서회에서 1995년까지 회원들을 가르치셨다. 저서로는 갈물ㆍ꽃뜰 공저 「한글서예」, 꽃뜰 이미경 쓴 「한글서예」, 시조집 「붓끝에 가락실어」, 「꽃뜰 이미경 서집」이 있다. 갈물, 꽃뜰 두분 선생님의 작품은 국회의사장, 제외공관, 예술의전당, 원광대, 이화여대박물관, 씨애틀박물관, 시카고박물관, 샌프란시스코 동양박물관, 카나다 로얄몬트리올 박물관 등 여러곳에 소장되어 있다. 갈물한글서회는 한문 중심의 서예풍토에서 한글만을 고집하여 궁체 대중화를 위해 노력해왔고 서울시 정도 60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였던 타임캡슐에 갈물한글서회도록이 남기는가 하면 1995년에 141점, 1996년에 60점의 회원들의 작품이 대한민국 제외공관에 기증되어 우리문화의 깊이와 예술정신을 알리는데 일조하였다. 올해로 제45회 전시회를 열게 되었으며 현재 600여명의 회원들이 한글서예보급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갈물 이철경 선생님은 1914년 목은 이색의 후손인 이만규 선생님과 밀양박씨 현숙선생님의 2남 4녀 중 셋째딸로 강원도 원성군에서 태어나셨다. 네 딸 가운데 각경, 철경, 미경, 세 딸이 우리 한글서예만을 고집한데는 아버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한글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이만규 선생님은 우리말과 글을 온전하게 지키는데 힘쓰셨으며, 딸들의 글씨 공부를 위해 여러가지 자료를 구해주기도 하셨다. 우리말과 글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1930년 12월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이 되셨고 1932년 조선어학회기관의 한글이 속간될때 김윤경, 이강래, 이극로, 이병기, 이희승, 최현배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만규 선생님은 새 시대는 새 여성을 요구한다며 안팍을 통찰하셨고, 온갖상식과 기술을 아는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을 받고 활동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이러한 아버지의 교육이념은 자연스럽게 자녀들에게 전달되었다. 갈물선생님은 보통학교 1학년때 아버지의 서가에서 「신편언문례법」(1917년 김영진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궁체교본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만든 습자책)을 발견한 것이 일평생을 한글서예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된것이다. 한글서예 보급에 힘쓴 선생님은 1958년 아호인 갈물을 넣어 "갈물한글서회"라는 서예단체를 설립하여 중앙공보관에서 제1회 회원전을 열어 궁체 정립의 기틀을 잡기 시작하셨으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서예 작품전시회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 그리고 「궁체 쓰는법」, 「초등글씨본」, 「중등글씨본」, 「한글서예」, 「한글」등 많은 저술은 한글서예의 길잡이가 되었다. 시대적 상황으로 볼때 이철경 선생님은 한글서예에 있어 근ㆍ현대를 잇는 교량적 역할을 하셨으며 오늘날 한글서예의 부흥과 보급에 선도적 역할을 하셨다.
꽃뜰 이미경 선생님은 1918년 12월 개성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의 교육이념을 실천해야한다는 생각을 한 순간도 지울 수 없었던 선생님께서는 규장각 등을 다니면서 우리글씨를 찾아나섰고 윤백영 할머님에게서도 많은 자료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옛글씨 자료를 섭렵하여 그 고유한 성격을 되살리고자하셨다. 꽃뜰선생님의 이러한 자세는 우리글씨를 알리려는 과정을 높이시고 또한 선구의 터전을 마련하셨던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1954년부터 이화여자 중학교에서 10여년간 서예를 가르치셨고 1970년부터 5년간 YWCA와 정원여자중학교 그리고 갈물선생님이 세운 갈물한글서회에서 1995년까지 회원들을 가르치셨다. 저서로는 갈물ㆍ꽃뜰 공저 「한글서예」, 꽃뜰 이미경 쓴 「한글서예」, 시조집 「붓끝에 가락실어」, 「꽃뜰 이미경 서집」이 있다. 갈물, 꽃뜰 두분 선생님의 작품은 국회의사장, 제외공관, 예술의전당, 원광대, 이화여대박물관, 씨애틀박물관, 시카고박물관, 샌프란시스코 동양박물관, 카나다 로얄몬트리올 박물관 등 여러곳에 소장되어 있다. 갈물한글서회는 한문 중심의 서예풍토에서 한글만을 고집하여 궁체 대중화를 위해 노력해왔고 서울시 정도 60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였던 타임캡슐에 갈물한글서회도록이 남기는가 하면 1995년에 141점, 1996년에 60점의 회원들의 작품이 대한민국 제외공관에 기증되어 우리문화의 깊이와 예술정신을 알리는데 일조하였다. 올해로 제45회 전시회를 열게 되었으며 현재 600여명의 회원들이 한글서예보급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