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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군산 54코스 제3부
시간여행거리-여미랑-근대쉼터-미즈커피-군산내항
20230628
1.군산 시간여행거리의 꼬마열차
시간여행거리로 진입하였다. 구영6길, 먹거리타운, 시간여행거리 - 이 거리는 이렇게 세 개의 거리 지명으로 불린다. 왜 구영길일까? 1910년 영정(榮町)으로 불리다가 1949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개칭된 곳이 군산시 영동(榮洞)이라고 한다. 그래서 옛 舊, 영화로울 榮을 써서 구영길이라 하지 않았을까? 입구의 미도리 횟집부터 시작하여 이 거리를 따라가면 다양한 먹방들이 많다. 그래서 먹거리타운 도로명이 공감된다.
그렇다면 왜 시간여행거리일까? 1899년 5월 개항한 군산 지역에는 근대양식의 건축물이 많다. 특히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곳이어서 인근에 일본식 건축물들이 의외로 많다. 조선은행, 18은행, 미즈상사, 적산가옥, 대한통운 창고 등을 비롯하여 영화동, 월명동 일원에 170여 점의 근대양식 건축물이 산재해 있다고 한다. 근대 건축물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시간을 거슬러올라 1930년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땅을 자기나라 땅인 양 건물을 짓고 거주하던 이 공간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라를 빼앗기고 토지와 미곡을 수탈 당하며 살아야 했던 당대 이 지역민들의 고통과 서러움, 나아가우리 겨레 전체의 통곡에 잠기게 된다. 그래서 이 거리는 군산 1930년대 시간여행거리가 된다.
시간여행거리 입구에서 곧바로 거리 왼쪽 주택 담벽에 사진게시판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사진들과 설명글을 읽으면 개항 이후 군산의 변화 모습과 일본의 수탈 양상, 군산 시민들의 저항 등을 구체적으로 접하며 시간 여행을 떠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얼마 남지 않는 서해랑길 54코스 탐방길이 지금까지 길게 걸어온 시간보다 더 먼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여미랑을 지나간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월명동 일본식 건축물을 2012년에 복원한 여미랑은, 카페테리아, 주점, 특산물 판매점 등 총 10채의 일본식 가옥이 원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심에는 자그마한 연못과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나라를 잃고 서러웠던 시대의 아픔을 되새길 목적으로 잊을 여(悆), 아닐 미(未), 사랑채 랑(廊), ‘여미랑(悆未廊)’이라고 이름을 지어, 현재 일본식 다다미방을 체험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 어느 날 여미랑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지난 시대의 아픔과 새 시대의 희망을 함께 느껴보고 싶다. 그때 여미랑 앞의 미도리횟집에서 식사하고자 한다.
시간여행거리에 월명동 주민센터가 있다. 그런데 '군산시간여행마을' 월명동 주민센터이다. 월명동 주민센터는 월명동 전체를 '군산 시간여행마을'이라고 지정하여 마을을 홍보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는 구불6-1길 '탁류길' 안내도가 몇 곳에 설치되어 있다. 군산이 낳은 최고의 작가 채만식의 <탁류> 소설은 1930년대 세태를 극적으로 잘 그려낸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탁류의 시대를 살아가는 군상들 속에서 한 여성이 착하고 의지 바르게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미두 시장에서 몰락해 가는 정 주사의 삶은 일제강점기 자본주의 삶을 견뎌내는 고통스러움과 패배를 적나라하게 사실적으로 보여 준다. 이러한 <탁류>의 배경지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길이 구불6-1길 '탁류길'인데 서해랑길과는 떨어져 있다. 이 길은 군산 여행을 따로 계획하여 군산 지역을 더 상세히 살필 때 탐방해야 할 것이다.
월명동 주민센터 앞에는 군산 야구의 역사와 군산상고 야구부 이야기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군산 야구와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야구부 이야기는 군산 지역민에게 크나큰 자랑거리이며 자긍심으로 내려온다. 고등학교 야구 최고의 전성시대 70년대를 체험한 스포츠맨이나 일반인들에게도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야구부 이야기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월명동 주민센터 앞 게시판에 이를 소개할 정도이니 군산 시민들의 야구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엄청나게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시간여행거리에서 길손의 마음을 뺏은 것이 있다. 공공미술 프로젝트 '군산사람'의 활동이 그것이다. 월명 우수저류조(빗물을 저장해서 활용하는 시설) 표지판이 붙어 있는 건물이 근대쉼터이다. 군산시에서는 우수저류조의 유휴공간을 휴게공간과 문화예술공연장이 있는 복합 문화쉼터로 재탄생시켰는데, 특히 건물 상부는 '군산 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지붕 모양과 형식을 재현하여 1930년대 건축물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 복합 문화쉼터를 근대쉼터라고 명명하였는데, 이곳에 공공미술 프로젝트 '군산사람'의 작품들이 길손의 가슴에 불길을 놓았다.
공공미술 프로젝트 '군산사람'이 현장에서 군산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여러 뜻깊은 작업 활동을 해내며 예술의 생활화에 노력하고 있음에 감동한다. 공공미술 프로젝트 '군산사람' 메인 작품은 55개의 박스형 캔버스로 구성된 작품 '군산사람'인데, '근대 쉼터' 안쪽 주차장 건물 외벽 전체에 설치되어 있다. 그 벽면에 고정된 인물화는 참여한 군산 시민들이며, 그 작품을 재현하여 참여한 그들에게 선물함으로써 예술의 감동과 생활화를 이룬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예술이 나와 이웃에게 파동쳐 나가 삶의 예술화가 이루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예술이 상층계급의 자본에 의해 판매되는데 반해,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일반 평민들의 생활을 바탕하여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함께 즐기는 동안 그 예술이 각자의 삶에 스며들고 그 스며든 예술이 서로에게 그리하여 모두에게 퍼져나가는 예술을 목표로 한다.
군산이 낳은 훌륭한 시인 고은 시인이 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 시인에 의해 고은 시인의 성추행이 고발되어 대시인 고은의 말년이 위태로워 안타깝다. 시간여행거리에서 3층 건물 벽면에 고은 시인의 '다릿집' 시구가 원고지를 배경으로 적혀 있다. "야들아/ 학교 가서 가만히 앉아 있거라/ 그래야 배 안 꺼진다" 시간여행거리 엔젤커피 2층 벽면에는 고은 시인의 작품들이 적혀 있고 성추행 때문인지 이 작품의 글자들을 분명히 읽어내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올 때 못 본/ 그 꽃"(고은의 '그 꽃') "어쩌자고 이렇게 큰 하늘인가/나는 달랑 혼자인데"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가로되 사랑이더라" 시 구절들이 가슴에 파고 든다. 성추행한 시인의 작품은 삶이 더러우니 그의 작품도 더러운 것, 그래서 버려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똑같은 논리로 친일시인의 작품은 친일 행위를 한 것처럼 잘못된 것이니 그의 작품도 버려야 할까? 이북에서도 이광수의 친일 행위를 비판하지만 그의 좋은 작품은 이미 복권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인간의 삶이 온전히 올바르다면 아무 문제가 없이 훌륭한 삶이다. 고은 시인이든 친일 예술인이든, 그들의 훌륭한 작품은 작품대로 감상하고 그들의 잘못된 행적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기록에 남기면 어떨까? 모든 인간에게는 각자의 공과가 있는 것이다. 이런 판단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
옛 미즈상사의 미즈커피, 옛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의 근대미술관,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야외 전시물, 장미공연장 앞의 채만식 소설 <탁류> 인물 조형물 등을 허겁지겁 살폈다. 아직도 시간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시간여행의 절정은 서해랑길 54코스 종결부에 있다. 군산 내항 부잔교로 가는 길에 서해랑 쉼터가 있다. 쉼터는 간이역처럼 꾸며져 있다. 이 철도가 군산역에서 군산항역까지 운행되었던 철도일까? 지금 이곳은 군산부두역이었을까? 쉼터의 전시물들을 살피고 정면으로 나와서 보니 서해랑 쉼터 간이역에 시간여행 꼬마열차 모형물이 세워져 있다. 꼬마열차는 실제 협궤열차처럼 보인다. 군산역에서 군산항으로 가는 열차 모습이 상상된다. 시간여행 열차는 군산 지역의 1930년대 현실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 같다.
걸어온 서해랑길 부안, 김제, 군산 지역이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감각으로 자리한다. 동진강의 물길을 따라 그리고 만경강의 물길을 따라 군산항으로 모여들던 미곡선 행렬이 분명히 들어온다. 김제 만경강 새창이다리가 놓이면서 만경강 물길이 아니라 자동차로 미곡을이 군산으로 실어갔을 것이다. 호남선은 목포까지 이어지는데 군산은 철도가 없어 익산-군산 간 군산선 철도가 개설되는 이유가 잡힌다. 군산-군산항 철도는 왜 놓였을까? 전주-군산의 전군가도는 벚꽃길이 아름다운 풍경으로만 감각했는데, 일본인 농장주들의 탐욕의 결실이 전군가도라는 것을 알고 나니 지금껏 살아온 길손의 현실이 공허해진다. 목포와 군산 지역은 무엇이 다른가? 모두 일본인 자본가 농장주들이 시가지를 형성하는데 두 지역 농장주의 농작물 종류가 다르다. 목포는 면화 생산지, 군산은 미곡 생산지, 그래서 목포와 군산 시가지의 차이가 생긴 것일까?
6월의 아름다운 국토산하에서 1930년대의 군산 시간여행은 빼앗긴 국토의 수탈 장면으로 채워졌다. 그래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자조가 가슴을 후벼판다. 서해랑 쉼터 간이역에서 군산 내항 부잔교(뜬다리)는 엎드리면 무릎 닿을 곳이다. 서북쪽으로 충남 서천과 전북 군산을 잇는 동백대교가 가까이 있다. 서해랑길은 군산 서쪽 해안을 돌아 동백대교 아래로 거쳐 이곳에 도착해야 하는 것이 정상 같다. 그렇지만 그 길은 탁류길이나 구불길 탐방 코스로 잡혀 있다. 서해랑길 54코스 종점 부잔교 옆에서 감격과 슬픔의 두 감정이 가슴에 솟아올랐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다. 걸어도 제대로 걷는 자의 것이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3.03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8분
구영6길 입구에 먹거리타운 홍보판이 세워져 있다. 지금부터는 구영6길 먹거리타운, 시간여행거리를 따라간다.
군산은 1899년 5월 각국 조계지로 개항을 하여 이사청건물, 군사부 청사, 미곡검사소 등 근대양식의 건축물이 많다. 현재는 조선은행, 18은행, 미즈상사, 적산가옥, 대한통운 창고 등을 보수, 복원하여 근대건축관, 근대미술관 등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영화동, 월명동 일원에 170여점의 근대양식의 건축물이 산재하여 있다. 근대 건축물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왼쪽 벽에 개항 이후 군산의 변화 사진과 설명글이 적힌 전시판이 붙어 있다.
1.군산은 평안남도 진남포와 전라남도 목포가 개항된 이듬해인 1899년 5월에 경상남도 마산, 함경북도 성진과 함께 개항되었다. 개항한 군산은 금강 하구에 위치하여 전라북도 관할에 속하였다. 그러나 그 상업권이 전라남도와 충청남도 일부에까지 미쳐 조선 제일의 미곡(米穀) 집산지로서 ‘쌀의 군산’이라 불렸다.
2.군산 내항은 1899년 개항 이후 1905년 대한 제국 정부에 의해 근대적 항구로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09~1915년에는 부잔교 3기를 축조했고, 화물 전용 철도를 금강 기슭까지 연장하였다. 또한 1918~1921년에는 부잔교 1기와 철도 인입선 연장, 강안매축 등을 추진하여 대형 부잔교 3기와 창고, 도로, 철도, 기타 해상 연락 시설 및 육상의 제반 시설을 완공하였고, 기선(汽船) 접안이 가능하게 되었다.
3.전군도로는 호남 평야의 쌀을 군산으로 운송하여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일제의 7개년 사업 중 제1기 사업을 위해 개설하였다. 일본은 당시 전군도로 공사를 위해 경찰력을 동원하여 강압적으로 토지를 매입하였다. 3년에 걸쳐 도로가 건설되어, 1908년 개통되었다. 군산선은 일제 강점기 일본이 호남 평야의 농산물을 착취하기 위해 호남선과 연결할 목적으로 1912년 3월 6일에 개통한 철도이다. 익산시에서 시작한 철도의 종착역이 군산역이어서 군산선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단선철도이며, 총연장 24.7㎞이다. 2007년 12월 31일 군산선 운영이 중지되어 군산선은 폐선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군산의 개항, 근대기 변화의 군산 내항과 교통 시설, 근대기 수탈의 아픔, 한말의 의병장 임병찬, 양명학교와 3.1운동, 옥구 농민항일항쟁, 도시 변화의 모습 등 모두 8개 사진게시판이 전시되어 있다.
군산의 개항 : 대한제국은 자유무역을 통해 경제발전을 도모하고자 1899년 5월 1일 전국 6번째로 군산항을 개항하였다. 개항 이후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본, 프랑스, 러시아, 독일 대표 간에 각국조계장정(各國租界章程)이 체결되었는데 총면적은 572,000㎡로 현재의 해망동, 영화동, 장미동, 영동, 중동, 중앙로1가 지역이다. 이후 원도심은 생활과 상업이 용이한 격자형 도로망이 갖추처지고, 내항은 근대적 항구 기능의 기반시설이 들어섰다.
군산항(내항)은 1905년 대한제국이 8만6천원을 투입하여 강안매축(江岸埋築), 고정잔교(固定棧橋), 육상 소설비(小設備)를 갖추면서 축항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차(1906~1909) : 강안매축, 고정잔교 1기, 육상 소설비 등. 2차(1909~1915) : 철도인입, 고정잔교 3기 등. 3차(1926~1933) : 부잔교 3기, 철도 증설, 창고 3동 등. 4차(1936~1938) : 부잔교 1기, 창고 2동 등
1.전군도로 번영로는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국 최초의 2차선 포장도로(B=7m, L=46.4km)로 1908년 개통되었다. 이 도로는 대부분 일본인 농장을 경유하였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이 길을 대부분 '수탈의 길'이라고도 했다.
2.철도 군산선은 익산~군산을 잇는 24.7km 철도로 1912년에 전북 최초로 개통되었으며, 군산 내항까지 연결된 도로와 철도는 쌀을 수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설되었다.
1.토지 침탈 : 일본의 토지 침탈은 강화도조약(1876년)부터 광복(1945년)까지 반세가 넘는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고리대금업을 통한 토지약탈과 화폐조작을 통한 토지점유를 강행하였고, 나중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라는 국책회사를 통하여 국유지 수탈도 서슴지 않았다. 그 결과 1930년 조선총독부 소유토지는 전 국토의 40%에 해당했으며, 한국 농민은 80% 이상이 자신의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2.쌀 수탈 : 일본은 전군도로와 군산선, 내항을 통해 해마다 쌀 수탈량을 늘려갔다. 그 결과 한국인은 부족한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조, 수수, 콩, 잡곡 등으로 연명하였다.
1.한말의 의병장 임병찬 :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일본에 대한 항일항거 의병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1906년 임병찬은 스승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초모, 군량, 병사훈련 등의 책임을 맡았다. 또한 독립의군부의 편제를 재정비하였으며, 이후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1914년 일본 경찰에 붙잡혀 거문도에 유배되었고, 1916년 그곳에서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2.참회와 참사문비 :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에는 일제강점기 과오를 참회하고 사죄하는 참사문비가 있다. 이 비는 일본 불교 최대 종단인 조동종 스님들이 종교가 식민지배의 수단으로 전락했던 것에 대한 용서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1.호남 최초의 3.1운동 : 세브란스 학생 김범수가 1919년 2월 28일 독립선언서 200장을 영명학교 교사에게 전달하고 이들이 기독교 신자 및 일반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3월 6일 거사하기로 계획하였으나, 4일 새벽 일본 경찰에 교사들이 연행되자 교사 해방시위와 진압에 자극되어 3월 5일 군산경찰서 앞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호남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이다.
2.영명학교 : 군산 최초의 사설 한국인 중등교육기관으로 전킨(W.M.Junkin, 한국명 전위렴) 목사 부부에 의하여 1903년 2월 설립되었다. 선교사가 세운 영명학교는 자랑스러운 군산 3.1운동의 진원지이다. 현재 군산 제일 중·고등학교가 그 맥을 잇고 있다.
일본의 토지 수탈로 한국의 많은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당시 한국인 8할 이상이 농민이었고 그 중 8할 이상이 소작농으로 1년 농사를 지어도 양식은커녕 종자값, 비료값, 품삯도 건지지 못하였다. 1927년 11월 서수면의 이엽사(二葉社) 농장에서 일어난 옥구 농민항일항쟁은 국내 대표적인 소작농들의 저항이었으며, 일본 경찰에 직접 맞서 싸웠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옥구 농민의 소작쟁이(小作爭議, 1927.8.9~1928.9.29)는 군산지방의 3.1운동의 연장선이요, 집단적 항일운동은 일본에 대한 한민족의 도전이요, 조직적인 항쟁은 독립운동이다."(옥구농민의 항일항쟁사에서)
점심 특선은 회코스 1인당 2만 5천원, 2인 이상 주문이 가능하며, 특선탕 1만 5천원, 모듬초밥 2만원이다.
일본식 숙박 시설 여미랑(悆未廊)이 왼쪽에 보인다. 다원파크빌 아파트 왼쪽 길을 따라가면 신흥동 일본식 가옥이 있다.
여미랑은 군산시가 2012년 월명동에 새롭게 조성한 시대형 게스트 하우스이다. 일제강점기 월명동에 조성된 일본식 가옥을 복원, 나라를 잃고 서러웠던 시대의 아픔을 되새길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여미랑’[悆(잊을 여), 未(아닐 미), 廊(사랑채 랑)]은 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하룻밤 묵으면서 만든 추억도 함께 잊지 말자는 의미이다. 여미랑 숙박체험관은 2012년 10월 29일부터 민간임대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여미랑[구 고우당]은 2013년 7월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는 우수 숙박 업소인 굿스테이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굿스테이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대표적 관광 인프라인 숙박 시설의 경쟁력을 높이고 건전한 숙박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제정한 고유 브랜드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곳이었다. 2012년 일제강점기 당시의 월명동 일본식 건축물을 복원한 것으로, 나라를 잃고 서러웠던 시대의 아픔을 되새길 목적으로 건립된 곳이다. '여미랑'은 전라도 사투리의 '여미랑께'를 표현한 이름으로 오래된 친구의 집을 뜻하는 말이다. 이곳 '여미랑'은 2012년 당시 민간에 위탁하였고 일본식 다다미방을 체험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총면적은 2929㎡으로 카페테리아, 주점, 특산물 판매점 등 총 10채의 일본식 가옥이 원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심에는 자그마한 연못과 정원을 조성하였다. '여미랑'은 2013년 7월 한국 관광 공사가 주관하는 우수 숙박업소인 '굿스테이'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굿스테이'는 문화 체육관광부와 한국 관광 공사가 대표적 관광 인프라인 숙박 시설의 경쟁력을 높이고 건전한 숙박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제정한 고유 브랜드이다. 현재 군산시 근대 역사 경관 지구와 더불어 그 인기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으며 이국적인 숙박 체험과 함께 과거 일제 강점기 시대의 아픔을 되새기고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역사의 현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부지 5.920㎡(1,794평)에 시대형 숙박체험관(5동), 근린 생활시설(12동), 근대역사교육관(3등), 건축재생관(1등) 등을 조성하여 1930년대 근대군산 생활모습을 복원한 공간이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곳이며 지금도 인근에 일본식 사찰, 일본식 건축물 등을 볼 수 있다. 1930년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땅을 자기나라 땅인 양 건물을 짓고 거주했던 이 공간에서 나라 잃고 서러웠던 시대의 아픔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닌 우리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근대군산 1930년대 시간여행 코스는 3개 코스 총 12.6km, 3시간 30분이 소요되는 것으로 적혀 있다.
제1코스 총거리 1.6km, 소요시간 30분 : 군산근대역사박물관-구)군산세관-군산근대역사박물관-미즈커피-근대미술관-진포해양테마공원-부잔교-근대건축관-미두장. 제2코스 총거리 2.0km, 소요시간 1시간 : 동국사-근대역사체험공간-신흥동 일본식 가옥-구)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 사택-이성당-군산항쟁관-동국사. 제3코스 총거리 9.0km, 소요시간 2시간 : 근대역사박물관-이성당-근대역사체험공간-동국사-신흥동 일본식 가옥-구)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 사택-구)남조선 전기주식회사-초원사진관-해망굴-구)조선식량영단 군산출장소-근대역사박물관
왼쪽 군산관광안내센터와 오른쪽 다원파크빌 아파트 사이의 길에서 신흥동 일본식 가옥 방향을 살펴 보았다. 중앙 뒤쪽 푸른 구릉 월명공원에는 군산시를 수호한다는하얀 '수시탑(守市塔)'이 솟아 있는 모습이 살짝 보인다.
1.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근대기 동안 군산에 지어진 대표적인 대규모 주택으로 일본인 상류층의 주택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일반 관람객을 위하여 개방되고 있다. 부분적으로 변형된 부분들이 있으나 건축물의 구조와 내·외부 공간 구성, 장식 등에서 원형이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1925년 사용 승인된 것으로 건축물 대장에 기록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군산부 협의회 의원이며 상업활동을 한 ‘히로쓰’가 지은 주택으로 알려져 있다. 1945년 해방 후 적산 가옥으로 구 호남 제분으로 넘어가 한국 제분의 소유로 되어 있다. 수많은 한국 영화가 이 주택에서 촬영될 정도로 일반에 잘 알려져 있으며, 2005년 6월 18일 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수시탑(守市塔)은 군산 원도심 서쪽에 위치한 월명공원 내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수시탑은 돛을 펼친 배의 모습과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형상화했으며, 아랫 부분은 항구 도시답게 배 모형을 상징한다. 높이 28m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전 홍익 대학교 강명구 교수가 설계하였다. 수시탑 정면에는 한문으로 ‘수시탑(守市塔)’을 음각하여 한 글자씩 붙여 놓고 있으며 측면에는 ‘군산시 연혁’과 5개항으로 구성된 ‘군산 시민 헌장’이 석판에 음각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 도로명은 구영6길, 먹거리타운, 시간여행거리이다. 구영이란 무슨 뜻일까? 왼쪽 다원파크빌 아파트 가로등 기둥에 신흥동 일본식 가옥 왼쪽 250m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월명동 전체를 군산 시간여행마을이라고 관광상품화한 것 같다.
1932년 10월 1일 신흥동 일부를 갈라서 전정이라 하였다. 1946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해 월명동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 8월 15일 군산부가 군산시로 되면서 신창동, 중앙로1가동, 금동으로 개칭하였다. 1965년 2월 24일 법정동을 신창동, 월명동으로 하고 행정동을 월명동으로 하였다. 1973년 5월 29일 법정동을 중앙로1가동, 영화동, 장미동으로 하고 행정동을 중앙로1가동으로 하였다. 1998년 10월 1일 행정동 월명동과 중앙로1가동을 통합 월명동으로 하였다가 2008년 2월 4일 행정동 월명동과 선양동을 통합 월명동으로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구불6길의 지선 '탁류길' 안내도이다. 서해랑길은 구불6길 '달밝음길'과 일부 동행했다가 헤어졌다.
전북천리길 중 구불6-1길 탁류길, 총거리 7.5km, 총소요시간 120분. 백릉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지인 군산 원도심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시대 남겨진 역사의 흔적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삶의 애환을 경험하며 과거를 되돌아 보는 길이다.
월명동 주민센터 앞에 군산의 야구 역사와 군산상고 야구부 이야기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1.군산의 야구 역사 : 군산의 야구(野球)는 호남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군산야구 100년사>(2014)에 따르면 개항(1899) 이후 일본인이 대거 몰려오면서 야구 물결이 일기 시작, 전주에 까지 보급됐다. 당시엔 '왜놈 운동'이라 불렸으며 1910년 처음으로 야구 경기가 열렸다. 군산 최초 야구인은 양기준(1896-1975) 씨. 그는 1902년 전킨(Junkin) 선교사가 설립한 영명학교 야구부에서 선두타자로 활약하였다. 졸업 후 구암병원에 근무하던 양기준은 1919년 3·1만세운동(서래장터만세운동)에 앞장서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기도 하다.(조종안의 <군산야구 100년사>에서)
2.전설처럼 전해지는 '역전의 명수' 이야기 : 군산에는 20세기 전설이 된 이름이 하나 있다. 불굴의 의지와 끈기로 1970년대 고교 야구에 돌풍을 일으키며 '역전의 명수' 신화를 창조한 군산상고다. 1972년 7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황금사자기 대회 결승전(군산상고:부산고), 군산상고는 1-4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9회 말 대역전극을 펼치며 5-4로 승리, 우승기를 거머쥔다. 기적과도 같았던 그해 황금 사자기 우승은 영화(제목 :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로도 만들어졌으며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한국고교야구 역사에 전설처럼 전해진다. 군산상고 야구부는 1968년 당시 경성고무(주) 사장이던 이용일 전 KBO총재 대행이 창단하였다. 1970년에는 국가대표를 거쳐 기업은행 에이스로 활약하다 은퇴한 최관수를 감독으로 영입한다. 야구 이론이 정립되지 많았던 시절, 최 감독은 선수들에게 새로운 기술과 전술을 가르쳤다. 한 베이스 더 가는 야구를 정착시킨 것도 그였다. 그 후 역전의 명수들은 해마다 전국규모 대회에서 짜릿한 명승부를 보여주며 결승에 오른다. 최관수 감독 재임 기간(1970~1979) 우승 6회, 준우승 5회의 찬란한 금자탑을 쌓은 선수들은 국내 명문대학과 실업팀, 프로팀 등에 스카우트되어 중심타자로 활약하였다. 그들은 군산의 위상을 드높였고 한국 프로야구 발전에도 이바지 하였다.(조종안의 <군산야구 100년사>에서)
구영6길 시간여행거리 먹거리타운을 따라 군산 내항 방향으로 진행한다. 일본식 주택들이 많다.
맨 끝 동신교회 뒤쪽 동국사를 거쳐 월명로로 나와 월명로를 가로질러 월명동성당 앞으로 왔다. 구영6길이 훤하다.
서해랑길은 월명동 주민센터에서 근대쉼터를 거쳐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으로 이어간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남아 선호 풍습과 아이들의 놀이 문화를 표현했다고 하는데 여자 아이가 측은해 보인다.
본 작품 '그때 그 시절'은 의자에 앉아 사탕을 먹으며 빈둥대거나 지나가는 여자아이를 약 올리는 남자아이들, 그리고 엄마 심부름을 나서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표현은 일제강점기에도 남아 있었던 남아 선호 풍습과 시장 주변 아이들의 특이한 놀이문화를 상징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1930년대 건축물을 근대 테마거리에 어울리도록 개조한 공간으로 올해 3월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청춘미가(靑春味家)'는 국토교통부 도시재생 선도사업의 일환으로, 군산시에서 1930년대 기존 건축물을 근대 테마거리에 어울리도록 개조하여 외식사업을 희망하는 청년들에게 사업장으로 제공하는 청년창업플랫폼입니다. '청춘미가'에서의 실전 경험이 성공적인 창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군산시가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시설개요] -위치 : 군산시 구영6길 74-1 -규모 : 연면적 65.08㎡ / 지상1층 -사업기간 : 2017.10.~2018.5.
오른쪽에 근대쉼터 안쪽으로 들어가 살피고 나오기로 한다.
근대쉼터 건물은 빗물을 저장해서 활용하는 시설인 우수저류조이다. 이 공간을 휴게공간과 문화예술공연장이 있는 복합 문화쉼터로 재탄생시켜 근대쉼터라고 명명하였다.
한 도시의 문화 관광 가치를 평가하는 지표 중 '역사성, 문화의 생산과 소비, 자연환경의 접근성, 거주민들의 상호관계성, 그리고 도시의 경관을 담당하는 건축성'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5가지 원칙에서 볼 때 군산시의 문화 관광 가치는 역사성과 건축성 그리고 자연환경성에서 충분히 문화도시로 발전해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는 몇 년에 걸쳐 군산 시청을 중심으로 노력해온 결과이다. 그러나 5가지 원칙 중 나머지 '상호 관계성'과 '문화'에서는 지방의 다른 시·군과 같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문화공동체 감에서는 이번 '007 프로젝트 공공미술작품'을 통해 조금이라도 지역 거주민들의 삶과 그들의 고민 그리고 희망을 담는 작품으로 부족한 사람들의 관계성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공공미술 사업 선정 이후 10월부터 군산에 거주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고 그들의 고민과 희망 등을 사진과 영상 아카이브 작업으로 기초 데이터를 수집하였다. 본 프로젝트 참여 작가들과의 몇 차례에 걸쳐 정리된 결과로 아카이브 소스들을 그래픽화함으로써 군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공공미술 작품의 첫 붓질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픽화된 군산 사람들의 이미지를 준비된 박스형 캔버스에 페인팅하는 과정으로 작품이 완성되었다. 박스형 캔버스는 방부 처리된 목재와 변질되지 않는 '어닝 천'을 활용하여 제작되었고 기초 프라이머 작업, 페인팅 그리고 최종 코팅 과정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작품이 본 프로젝트 메인 작품인 55개의 박스형 캔버스 '군산사람'이다. '근대 쉼터' 안쪽 주차장 건물 외벽 전체에 설치되었고 벽면에 고정하기 전 추가 방수 및 코팅 작업을 진행하여 설치하였다. 전체 면적은 가로 40m 세로 7m의 대형 부조형 벽화 작품으로, 특이점은 각각의 박스형 구조물은 각각 다른 두께로 제작되었으며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이는 가정집에 걸려 있는 액자 사진에서 그 모티브를 가지고 왔다. 그 외 패러디 작품 10종 그리고 가구거리 상징 조형물이 있는데,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미술작품을 패러디한 것으로 미술가들의 노고와 그들이 꿈꾸는 이데아와 사람들과 소통하려 하는 예술가적 기질을 담으려 노력하였다. 이 작품들은 건물 주변 1층에 설치 되었으며, 야간경관을 위해 건물 전체와 패러디 작품을 비추는 조명으로 마무리하였다.
본 프로젝트의 마지막 단계는 모든 과정을 담은 아카이브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는 2021년 2월 19일부터 2월 말까지 '문화공동체 감'에서 운영 중인 전시장에서 전시된다. 주요 아카이브 전시물로는 10호 크기의 '군산 사람' 작품 40개와 그들의 영상 인터뷰를 확인 할 수 있는 QR코드, 주요 텍스트들 그리고 이번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가한 예술가들의 작업 과정과 그들이 생각하는 공공미술의 의미, 작업 등을 담은 1채널 영상물이 전시될 것이다. 참고로 이 10호 크기의 작품은 현장에 설치된 작품과 같은 이미지를 재작업한 작품이다. 전시회가 끝나면 작품의 모델이 되어준 군산시민들에게 각 10호의 작품을 선물하였다. 1차적으로 공공미술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군산 미술인들에게 이번 프로젝트 제작 과정은 인터뷰와 협업을 통해 공공미술의 가치와 상징성, 미술의 사회적 기능성 등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2차적으로는 이번 프로젝트 모델이 되어준 군산시민에겐 직·간접적으로 미술작품이 완성되는 과정과 본인들의 모습이 작품이 소재로 된 것, 작품이 의미하는 부분까지 미술이 가지고 있는 소통의 의미와 시간성까지 느끼게 하는 효과도 도출하게 되었다. 선물로 전달된 작품은 그들의 집에 걸려질 것이며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제작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또한 네트워크로 확장될 것이고 특정 대상지에 작품이 머무르는 것뿐만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확장성을 확보한 미술을 보게 되는 계기가 됨을 확인하였다. 주 최: 문화공동체 감, 총감독: 이상훈, 참여 작가 : 김상훈, 김앵주, 김종민, 민동기, 박승일, 양미연, 이동근, 이정환, 이동영, 윤연희, 정연주, 지순정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군산사람' 작품이 벽면을 채우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제작 : 1498년, 크기 : 880x700cm, 위치 :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의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의 요청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은 가톨릭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마지막 날의 최후의 만찬의 정경을 그린 것이다. 그림은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수도원의 식당 벽화로 그려진 것으로, 1495년부터 제작에 착수하여 1498년에 완성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미완성이라고 불리는 레오나르도의 그림에서 몇 안되는 완성된 작품의 하나이지만, 가장 손상이 심한 그림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과학적 연구가 회화에 응용된 이 그림은 석고에 유채로 그렸기 때문에 그의 생존 중에 파손되었다. 원형의 미는 성 필리포 등의 제작 과정을 보여 주는 소묘에 의존하여 파악해야 한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초기 르네상스의 양식을 개혁하였느냐 하는 것은 카스타뇨와 기를란다요의 같은 제목의 벽화와 비교하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간결하게 그 중심 과제에 육박하였고 또한 극적인 것이다. 그러나 구도나 소묘 같은 기술적 문제뿐만 아니고, 그가 인간의 행동과 정신적 반응에 보여 준 깊은 통찰력은 그의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화면의 초점은 원근법에 따라서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머리 부분에 맞추어 그가 시각상의 중심점을 차지한다. 제자들은 전술한 네 패로 정리되어 전화면이 완전히 육체적·정신적 통일체를 이룩한다. 인물은 전형인의 표현이며 평소 그가 연구한 소묘의 무수한 초상에서 추상하여 보편화한 것이다.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에 그려진 이 만찬의 그림은 기묘한 현실감을 가지고 있다. 이 장면에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한복음 13장 21절)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표시하여 거기에 심한 동요가 일어난다.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 자고 있던 요한이, 레오나르도의 화면에서는 성급하게 그리스도에게 다그쳐 묻는 베드로 쪽으로 머리를 기울여 그것을 듣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같은 자리에서 고립되어 있지 않는 유다는 앞으로 몸을 구부려, 머리는 다른 사도들보다 낮으며 그 표정도 어둡고 애매하다. 그리스도는 흥분한 주위에 휩싸이지도 않고 대오(大悟)한 사람처럼 평온하다. 열두 사람들의 제자들은 세 사람씩 네 패로 갈라져서 그의 몸짓과 동작에 의하여 서로 결합되어 있다.
'군산사람' 패러디 작품이 근대쉼터 벽면을 채우고, 공공미술 프로젝트 '군산사람' 작업 설명안내판이 붙어 있다.
55개의 박스형 캔버스로 구성된 작품 '군산사람'이다. "그래픽화된 군산 사람들의 이미지를 준비된 박스형 캔버스에 페인팅하는 과정으로 작품이 완성되었다. 박스형 캔버스는 방부 처리된 목재와 변질되지 않는 '어닝 천'을 활용하여 제작되었고 기초 프라이머 작업, 페인팅 그리고 최종 코팅 과정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작품이 본 프로젝트 메인 작품인 55개의 박스형 캔버스 '군산사람'이다. '근대 쉼터' 안쪽 주차장 건물 외벽 전체에 설치되었고 벽면에 고정하기 전 추가 방수 및 코팅 작업을 진행하여 설치하였다. 전체 면적은 가로 40m 세로 7m의 대형 부조형 벽화 작품으로, 특이점은 각각의 박스형 구조물은 각각 다른 두께로 제작되었으며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근대쉼터 안쪽을 살피고 바깥으로 나와 근대쉼터 외관을 살폈다. 건물 상부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군산 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지붕 모양과 형식을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선도사업 일환으로 군산시가 조성한 근대쉼터는 우수저류조(빗물을 저장해서 활용하는 시설)의 유휴공간을 휴게공간과 문화예술공연장으로 재탄생시킨 복합 문화쉼터입니다. 특히 건물 상부는 국가등록문화재 제374호로 지정된 '군산 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지붕 모양과 형식을 재현하여 근대 건축 학습의 장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업개요]
-위 치: 군산시 중앙로 185
-규 모 : 연면적 374.66㎡
-사업기간 : 2017. 11.~ 2018. 10.
빗물을 저장해서 활용하는 시설인 우수저류조의 유휴공간을 복합문화쉼터로 재탄생시킨 근대쉼터 건물을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건물 상부는 국가등록문화재 '군산 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지붕 모양과 형식을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시간여행거리를 따라 미즈커피와 군산 근대미술관이 있는 해망로를 향하여 나아간다.
걸어온 시간여행거리를 뒤돌아 보았다. 3층 건물 벽면에 고은 시인의 '다릿집' 시구가 원고지를 배경으로 적혀 있다. "야들아/ 학교 가서 가만히 앉아 있거라/ 그래야 배 안 꺼진다"(고은의 '다릿집')
시간여행거리 엔젤커피 2층 벽면에 고은 시인의 작품들이 적혀 있고 고은 시인의 성추행 영향인지 이 작품 구절들을 가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올 때 못 본/ 그 꽃"(고은의 '그 꽃') "어쩌자고 이렇게 큰 하늘인가/나는 달랑 혼자인데"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가로되 사랑이더라"
해망로 건너편에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건물이 있다. 박물관 앞에 있었던 미즈커피는 2012년에 오른쪽으로 옮겨졌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오른쪽 해망로 건너편에 미즈커피와 군산근대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미즈커피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앞에 있었으나 군산근대미술관 옆으로 2012년에 옮겨졌다.
1930년대 건립되어 무역회사로 사용되던 건축물이었으니 2012년에 근대역사박물관 정면에서 이곳으로 이전, 개축하였다. 이 일대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쌀 수탈의 거점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무역회사와 상업시설이 독점하는 거리가 되었다. 1930년대 무역회사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이 건축물을 이전, 개축하면서 카페테리아, 근대문학 소통공간으로 개보수하였다.
구 미즈상사는 근대기에 건립된 목조2층 건축물로서, 일제 강점기부터 상업 건축물로 사용되다가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건립과정에서 위치를 옮겨 새로 지었다. 2012년 이후 임대용 상업건축물로 사용하고 있다. 구 미즈상사는 군산 내항과 군산 원 도심을 가로지르는 국도21호선에 인접하여 군산 근대역사박물관과 백년광장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구 미즈상사는 1936년 건립되었고 2011년 원래의 위치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새로 지었다. 구 미즈상사는 벽체는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하였고 지붕은 모임지붕에 함석을 얹어 마감하였다. 정면 좌측에 주 출입구를 두고 수직창을 설치하였다. 2층의 측면과 후면에서는 일식 주택 건축에서 나타나는 돌출된 목재 창호가 설치되어 있다. 처음 건립 당시 1층은 점포로 사용하였고 2층은 주거 시설로 사용하였다. 건물 내부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연결되며 2층에는 중복도를 통하여 방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2층에서는 구조와 평면 구성, 각종 세부 표현에서 일본식 건축 수법을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 구 미즈상사는 군산 내항의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남동쪽의 해망로 변에 남서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과 인접해 있고 주변으로 군산 근대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을 통해 조성된 여러 시설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현재 카페테리아로 운영되고 있다. 구 미즈상사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축물로서 1층의 상업 공간과 2층의 주거 공간이 복합된, 규모가 크지 않은 상업 건축물이다. 근대 건축 유산을 현재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사례로서 의의를 갖는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구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은 근대기에 건립된 목조건축물로서 일제 강점기에는 은행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상업 건축물로 사용되다가 군산 근대문화도시 조성사업을 통해 전시시설로 수리 및 보수하여 활용하고 있다. 구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은 군산 내항과 군산 원 도심을 가로지르는 국도21호선에 인접하여 군산 근대역사박물관과 백년광장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구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 건물은 1911년 건립되어 1936년까지 18은행으로 사용되었다. 1936년 조선 식산은행에 매각되었고, 1938년 조선 미곡창고 주식회사[1963년 대한통운 주식회사로 상호 변경]에 매각되었다. 수리 및 보수 과정을 거쳐 2013년 이후 전시시설로 사용하고 있다. 2008년 2월 28일 국가등록문화재 제372호로 지정되었다. 구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은 본관 1동과 2동의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근대기 은행 건축의 일반적인 양식에 따라 폐쇄적인 외관으로 계획되었고 부분적으로 인조석을 사용하여 장식하였다. 목조 건축물로 외벽은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되었고 일식 기와를 사용한 경사가 급한 모임지붕으로 처리되었다. 정면에는 출입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3개, 측면에는 4개의 목재 창호를 부설하였고 수직창 상부에는 인방과 반원창을 설치하였다. 본관 뒤쪽으로 우측에는 2층 조적조의 금고 및 창고로 사용되는 건물이 있고 좌측으로는 2층의 일식 목조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조적조 부속건물은 맞배지붕이며 철제 창호를 부설하고, 개구부 위로 눈썹지붕을 설치하였으며, 목조건물은 외벽을 목조 비늘판벽으로 구성하였다. 구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은 군산 내항의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남동쪽 해망로 부근에 남서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해망로와 인접하여 목조1층 규모의 본관[연면적 257.19㎡]이 있고 그 뒤쪽으로 부속건물 2동이 지붕을 맞대고 밀착되어 있다. 좌측의 부속 건물은 목조2층 규모의 관리동[연면적 141.96㎡]이고, 우측의 부속건물은 벽돌조 2층 규모의 금고동[연면적 61.62㎡]이다. 본관 서쪽으로는 구 미즈상사와 인접해 있고 주변으로 근대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을 통해 조성된 여러 시설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현재 본관은 군산 근대 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부속건물인 금고동은 안중근 의사 여순감옥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구) 일본 18은행'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일본 지방은행으로 열여덟 번째 생긴 은행이라 하여 '나가사키 주하치 은행'이라고도 한다. 조선에서는 1890년 인천에 처음 문을 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전국에 지점을 개설하였는데 군산은 1907년에 조선에서는 일곱 번째로 지점을 건립, 군산 지역 최초의 은행 건물이다. 근방에 있는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구) 군산세관'과 함께 일제강점기 일본 사업가들의 한국 진출과 쌀 수탈, 미곡 반출, 토지 강매 등 일제 수탈사를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이다. 이 은행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미곡을 반출하고 토지를 강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금융기관이다. 단층의 은행 본관1동(400.09㎡)과 2층의 부속건물 2동 창고, 사무실(81㎡)로 구성된 이 건물은 동시대 은행 건축의 일반적인 양식에 따라 폐쇄적인 외관으로 계획되었고, 부분적으로 인조석을 사용하여 장식하였다. 수직창 상부의 반원 아치창 부분과 부속건물 2개동은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여 일제강점기 초반에 지어진 은행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광복 후 대한통운 지점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2008년 2월 28일 등록문화재 제372호 '(구) 나가사키(長岐) 18은행 군산지점'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보수·복원 공사를 통해 군산 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미술관동과 금고동, 관리동으로 구성하여 미술관동에서는 군산 및 전라북도 출신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분기별 다양한 주제로 기획전이 개최된다. 금고동에는 근대기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기념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사용되었던 대형금고가 전시되어 있다. 관리동에서는 근대역사경관지구 조성 사업을 통해 수집한 근대기 군산의 다양한 근대건축 부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구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은 1911년 준공되었다. 군산 내항에 인접한 이곳 장미동에는 일제강점기의 금융기관과 공공기관이 많이 모여 있었다.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은 순종 원년(1907)에 처음 개설되었으며, 식민지 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본인들은 이 은행의 자본으로 조선인의 토지를 사들였고, 그 토지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에 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 건물은 1936년 조선식산은행에 매각되었으며, 1938년에는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훗날 대한통운)로 주인이 바뀌었다. 이 건물은 영업장으로 사용하던 본관과 사무동과 금고로 사용했던 부속 건물 2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관이 목조건물이었기 때문에, 금고는 별개의 벽돌 건물로 지어서 본관 후문을 통해 바로 연결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미즈 카페 뒤 장미 갤러리, 그 왼쪽은 장미 공연장이다.
옛 창고 건물[대한 통운 창고]들은 카페테리아인 미즈 카페[1층 98.28㎡, 2층 86.4㎡]와 다목적 소극장인 장미(藏米) 공연장[288.39㎡], 문화 예술 체험 교육장과 전시 공간인 장미 갤러리[1층 144㎡, 2층 144㎡]로 운영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곳은 미즈 카페가 있었던 곳일 것이다. 현재는 근대역사박물관 앞 광장으로 여러 석재 부재들을 전시하고 있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앞에 강관욱 작가가 청동을 재료로 하여 제작한 임병찬 의병장 동상이 조성되어 있다.
임병찬의 호는 돈헌((遯軒)이며 본관은 평택이다. 1851년 2월 5일(음력)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광월마을에서 임용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한학을 통달했으며 16세 때 전주 지방시에 급제하여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 병마첨절제사를 역임하면서 농정에 공을 세웠다. 을사늑약(1905)으로 국운이 기울자 1906년 2월 스승인 면암 최익현 선생과 함께 의병(병오창의)을 일으켰다.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지에서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왜적과 싸웠으나 패하여 최익현과 함께 사로잡혀 대마도에 감금되었다. 최익현은 그 곳에서 단식으로 자결하였고 임병찬은 2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경술국치(1910) 직전 고종의 밀지로 종 2품 가선대부가 되고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에 올라 지역을 돌며 항일구국투쟁을 하다 1914년 6월 왜경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세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그 해 6월 임병찬은 거문도로 위배되어 1916년 5월 23일(음력) 단식을 감행하여 마침내 순국하였다. 1962년 정부는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 동상은 임병찬 장군의 강인함과 진취적인 애국 기상을 작품으로 형상화하여 제작되었다.
관람 시간이 안 되어 입장할 수 없지만, 가능했어도 그냥 통과했을 것 같다. 박물관 야외 설치물들을 잠시 살피고 떠난다.
군산시 장미동에 위치한 시립 박물관. 군산 지역의 근대 문화와 해양 문화를 중심으로 군산시가 건립 및 운영하는 박물관이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전통적 물류 유통 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던 군산시의 정체성을 확인하여 현재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전국 최대의 근대 문화유산을 소유한 군산시의 문화적 특징을 관광 자원으로 홍보하고자 건립하였다. 관람객을 위한 전시실 구성은 박물관 1층 입구의 어청도 등대 모형을 시작으로 종합 영상실, 삶과 문화, 해상 유통의 중심지, 해상 유통의 전성기, 근·현대의 무역, 바다와 문화 등을 주제로 한 해양 물류 역사관, 바다 여행, 바닷가 친구들, 바다 도시 군산 등을 주제로 한 어린이 박물관, 근대사 관련 자료실인 근대 규장각실과 근대 도시, 탁류의 시대 등으로 구성된 근대 생활관 그리고 분기별 테마 전시 공간인 기획 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4층이다. 전시관은 해양 물류 역사관, 어린이 체험관, 근대 생활관, 기획 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보유 유물은 4,400점으로 이중 각계각층의 시민, 단체들이 기증한 유물이 2,250여 점이다. 2011년 9월 개관 이후 개관 기념 전시를 시작으로 군산 동국사 소조 석가 여래 삼존상 복장 유물 특별전, 2012년에는 8·15 특별전 우리 땅, 그들만의 축제를 기획 전시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위탁자 : 대한불교 조계종 은적사. 이 탑은 월명공원 수원지 인근에 위치했던 선종암의 탑이다. 고려시대 양식의 3층 석탑으로 1912년 수원지가 건설되며 선종암이 폐찰되자 군산공원으로 옮겨졌으나 원활한 관리를 위하여 1976년 은적사로 이전 관리되다가 2011년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 위탁되었다.
1.전북천리길 중 구불6-1길 탁류길, 총거리 7.5km, 총소요시간 120분. 백릉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지인 군산 원도심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시대 남겨진 역사의 흔적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삶의 애환을 경험하며 과거를 되돌아 보는 길이다.
2.'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 역사를 이야기로 엮어 국내외 도보여행객들이 느끼고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도보여행길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09년부터 엄격한 현장심사를 거쳐 선정하였으며, 구불길(탁류길)은 2011년 선정되었습니다.
3.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은 '역사는 미래가 된다'라는 모토로 과거는 무역항으로 해상물류유통의 중심이었던 옛 군산의 모습과 전국 최대의 근대문화자원을 전시하여 서해 물류유통의 천년, 세계로 뻗어가는 '국제 무역항 군산'의 모습을 보여주는 박물관입니다.
4.꼭 가봐야 할 곳 : (구)군산세관 본관, 신흥동 일본식 가옥, 여미랑 게스트하우스, 동국사 대웅전, 근대미술관, 근대건축관, 군산 내항 부잔교(뜬다리), 채만식 문학관, 이영춘 가옥, 임피역사
5.군산시 금강권 전시장 7개소 :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근대미술관, 근대건축관, 위봉함,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채만식 문학관, 금강철새 조망대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야외 전시물을 잠깐 살피고 서해랑길 탐방길을 이어가기로 한다.
안강망 어선은 주로 조기잡이 어선이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사용하다가 이후 한국인들이 더 많이 이용한 것 같다.
조기·갈치강달어·병어잡이 어선으로 조기파시, 강달어파시 등 바다시장 형성을 주도한 근대선박이다. 사용 시대 : 1930~40년대, 사용 지역 : 우리나라 서남해안(설명안내판)
섷랑길 54코스에서 산복동 금강기맥 산줄기를 거쳐올 때 아직도 산복동-나운동 도로 개설 및 확장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 화석은 전북 군산시 산북동 도로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것으로 발굴이 완료된 화석 표본을 이전해온 것입니다. 국내에서는 매우 드물게 발견되는 보존 상태가 뛰어난 화석으로 천연기념물 제54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발견된 화석은 기존의 조각류(두 발로 다니는 초식공룡) 공룡 뒷발자국보다 형태가 더 뚜렷하게 나타나 있으며, 9개의 뒷발자국뿐만 아니라 앞발자국도 8개가 발견되어 2족 보행이 아닌 4족 보행의 흔적으로 보입니다.
군산시 산북동에서 2013.12.2~2014.2.12 도로공사 중 발견된 공룡 발자국 화석이라고 한다.
이곳은 군산 축산리 지역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원형 집자리(住居址), 돌널무덤(石棺墓), 독널무덤(甕棺墓) 유구와 여기에서 출토된 간돌검(磨製石劍), 간돌화살촉(磨製石鏃), 숫돌(石砥), 민무늬토기(無文土器) 등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유적은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 일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국농어촌공사에서 실시하는 금강(II)지구 농수관로 건설공사부지에서 확인된 것으로 (재)전북문화재연구원에 의해 2005-2006년에 걸쳐 발굴조사되었다. 이 지역은 낮은 구릉과 너른 평야가 발달되어 있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축산리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원형 집자리(住居址) 2기와 돌널무덤(石棺墓) 27기, 독널무덤(甕棺墓) 4기 등 대부분 청동기시대 유구가 확인되었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은 간돌검(磨製石劍), 간돌화살촉(磨製石鏃), 숫돌(石砥), 민무늬토기(無文土器)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축산리 일대에 살았던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돌널무덤(石棺墓)과 독널무덤(甕棺墓)은 고인돌(支石墓)과 함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이다. 돌널무덤(石棺墓)은 움(土壙)을 파고 판돌(板石)을 이용해 건네모(長方形) 형태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여러 매의 판돌(板石)로 뚜껑을 덮은 무덤이다. 독널무덤(甕棺墓)은 독널(甕棺)보다 약간 넓게 움(土壙)을 파고 독널(甕棺)을 세워놓은 뒤 그 위에 편평한 돌을 이용해 뚜껑을 덮은 무덤이다. 축산리에서 조사된 돌널무덤(石棺墓)과 독널무덤(甕棺墓)은 좁은 지역에 밀집되어 분포하고 있지만, 서로 중복되지 않고 일정하게 열을 지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족묘로 볼 수 있으며, 당시 사람들의 내세관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 복원된 돌널무덤(石棺墓)과 독널무덤(甕棺墓)은 축산리에서 조사된 돌널무덤(石棺墓) 가운데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무덤을 이전·복원 하였으며 독널무덤(甕棺墓)은 실물 크기로 복제하여 복원된 것이다.
1.항아리(독, 옹기) : 우리나라 음식과 함께 발달한 항아리는 우리나라의 전통보관용기로 용도와 지역에 따라서 시루, 장독, 약탕기 등으로 구분되어 불린다. 전통가옥에서 평균적으로 항아리를 배치할 때 양지 바른 곳에 돌을 2~3층 쌓아서 1~2평의 높다란 대(臺)를 만들고, 맨 뒷줄에는 큰독, 중간에는 중들이, 앞줄에는 항아리를 늘어놓는다. 가장 큰 항아리는 장독으로 쓰고, 중간크기의 항아리는 된장·막장 등을 담아 두며, 앞줄의 작은 항아리에는 고추장류·장아찌류를 담는다. 현재 전시하고 있는 항아리는 이황세, 강정심님이 제공한 것으로, 개정면에 있는 전의 이씨 본가에서 사용되었던 항아리와 개별적으로 수집한 것이다.
2.항아리의 종류 : 우리나라의 항아리는 제작환경과 제작자에 의해 그 생김새가 각각 다르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자연환경과 음식문화에 따라 지역별로 특징을 가지고 있다.
1)경기도 항아리는 높이에 비하여 배의 폭이 좁고 날씬한 형태가 기본이며 입과 바닥면의 크기가 비슷하고 입구는 낮고 넓은 모양이다.
2)충청도 항아리는 원통형에 목이 길고, 입지름과 밑지름이 거의 동일하여 위와 아래가 일자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3)경상도 항아리는 지역에 따라 어깨선과 배가 잘 발달되어 있는 형식과 몸통 전체가 계란형 형식으로 구분된다. 동일한 특징으로는 바닥면과 입구가 타 지역에 비하여 유난히 좁은 것이다.
4)전라도 항아리는 평야지대가 발달하여 가장 안정적인 형태로 달항아리 모양이다. 어깨에서 배에 이르는 완만한 곡선이 부드러우며 바닥면보다 입구가 조금 넓어 조형적 안정감과 풍만함이 뛰어나다.
5)제주도 항아리는 환경의 영향으로 타 지역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깊어 물을 길어 나르거나 소량의 물을 저장하기에 편리한 항아리가 발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세대제지 공장 크레인 운영 모습과 크레인 운영 도면이 사진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명칭: 천장 주행용 기중기, 시기 : 근대(1940년대), 크기 : 8mx2.5m×1.6m 무게 : 5t
1.국내 제지산업의 상징 : 광복 이후 군산의 산업은 '경성고무', '백화양조', '한국합판' 그리고 '세대제지' 등에 의해 성장해 왔다. 특히 제지회사 세대제지는 신문용지를 생산하였는데 공장가동이 중단되면 전국의 신문발행도 멈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회사였다. 세대제지는 1944년 일제강점기에 문을 연 '북선제지' 군산공장에서 시작된다. 북선제지 군산공장은 해방 후 미군정에 접수되었다가 정부 수립 후 민간으로 매각되어 1954년 '고려제지' 로 상호를 변경하였고, 이후 경영난을 겪게 되자 1973년 군산출신 향토기업인 고판남(1912~1998) 회장이 삼성과의 인수 경쟁에서 이기고 고려제지를 인수하여 세대제지가 탄생하게 된다. 이 당시 세대제지는 국내 신문용지 생산을 주도하였고, 전국적인 우수기업 평가를 받았다. 이후 1985년 '(주)세풍제지사업본부', 2003년 현재의 '페이퍼코리아'로 상호명을 변경하여 이어져 왔다.
2.국내 유일의 제지산업용 천장 크레인 : 본 천장 크레인은 1944년 '북선제지' 군산공장이 들어설 때 일본에서 가져다 설치한 초대형 천장크레인이다. 설치 형태를 보면 천장에 서로 마주 보는 벽을 따라 레일을 부설하고 레일에 이동하는 하중을 지지하는 크레인을 걸치고 있다. 크레인에 쇠줄을 감아올리는 장치를 갖춘 작은 쇠바퀴가 달린 차체가 설치되어 갈고리 모양의 고리를 내려서 중량물을 끌어 올리는 원리이다. 크레인의 주행과 크레인 위 이동용 차체의 가로 움직임을 적당히 조절하면 그 건물 내의 어느 곳으로나 화물을 운반하고 작은 것은 사람이 지상에서 수동 쇠사슬로 운전할 수 있다. 본 천장 크레인은 용접이 아닌 리벳을 사용하여 제작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 군산 내항의 부잔교 제작 방식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야외 전시물과 유적을 살피고 서해랑길 탐방길을 따라간다.
채만식 소설 「탁류」의 주요 인물 조형물과 수탈 당하는 조선 빈민층 모습의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조각가 나상옥이 2013년에 제작한 작품이다.
수탈의 상징인 부잔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거주했던 토막집에 살던 빈민층의 모습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하루하루 힘든 생계로 시름에 잠긴 부모의 손을 잡고 위로히는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열망을 표현하였다.
장미공연장 입구 뜰에 채만식 소설 「탁류」에서 선악의 극을 이루는 두 인물 남승재와 장형보 주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채만식 소설 「탁류」에서 환경을 극복하는 가장 긍정적인 인물로 시대의 지도자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금오병원 조수로 근무하는 가난한 의사지망생으로 마음이 착해 돈 없는 사람을 무료로 치료해 주고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초봉이 시집간 후 의사가 되어 그녀의 동생인 계봉과 사귀게 되지만 초봉의 운명을 동정하며 그녀를 도우려 한다. 혼탁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다른 이들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숭고한 정신을 잃지 않는 인물로 묘사된다.
채만식 소설 「탁류」에서 팥쥐 엄마나 놀부의 성격과는 차원이 다른 악질적 악마의 전형적 인물다.
추악한 용모와 탐욕스러운 성격을 지닌 꼽추로 친구인 고태수를 이용해 돈을 벌었다. 고태수를 함정에 빠뜨려 죽이고 초봉을 겁탈 하여 그녀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다. 이후 약방 주인 박제호의 첩이 된 초봉을 빼앗아 아내로 삼은 뒤 학대를 일삼다가 결국 그녀에게 맷돌로 무참하게 살해 당한다.
1899년 5월 1일 개항 이후 군산은 호남지역 토지와 쌀 수탈의 거점 항구가 되었다. 쌀 곳간을 의미하는 장미동(藏米洞)에 위치한 이 건축물은 1930년대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에서 쌀을보관했던 창고였다.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이 건축물을 2012년도에 다목적 공연장으로 개보수하였다.
장미공연장 옆에 장미갤러가 있다.
겉보기에 잘 나가는 은행원이지만 실은 공금을 회령해 미두와 주색에 탐식하는 난봉꾼이다. 사기와 횡령을 언제 들킬지 몰라 전전긍긍하면서도 대출금을 미끼로 정 주사를 유혹해 초봉을 아내로 맞이한다. 쌀가게 주인인 한참봉의 아내 김씨와 간통을 하다 장형보의 밀고로 남편에게 들켜 맞아 죽는다.
채만식 소설 「탁류」는 대조되는 두 자매 초봉과 계봉을 통하여 여자의 일생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세태소설이다.
1.계봉 : 초봉의 동생으로 S여학교(당시 가정여학교)에 다니며 똑똑하고 야무진 성격을 가졌다.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하며 남자들에게 끌려 다니는 언니와 달리 서울에 올라와 백화점 점원이 되어 진취적으로 삶을 개척하는 한편, 승재에게도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하여 연인 사이가 된다. 자신의 소신과 의지를 가지고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신여성으로 그려진다.
2.정 주사 : 서천에서 전통교육인 서당과 신교육인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군청의 고원으로 들어가나 적응하지 못한다. 이후 땅과 집을 처분하여 군산으로 오게 되지만 미두장 투기로 재산을 탕진하게 된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초봉을 고태수에게 시집 보내고, 딸의 고통에도 아랑곳 없이 계속 미두에 빠져 산다. 시대의 희생자이기도 하지만 딸을 희생시켜 자신의 탐욕만을 채우는 무능한 가장이기도 하다.
3.초봉 : 정주사의 맏딸이며 청순한 외모로 주변 남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그녀는 남승재를 좋아하지만, 가족을 위해 고태수에게 시집을 간다. 이후 박제호와 장형보의 노리개로 전락하면서도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전통사회에 순응하는 여인이나 자기 운명 파탄의 원인이 장형보임을 알고 본인의 비극적 삶을 마감하고자 그를 살해한다.
1930년대의 세태소설을 대표하는 박태원의 「천변풍경」과 쌍벽을 이루는 채만식의 「탁류」는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조선인의 고통스런 삶을 박태원의 「천변풍경」보다 더 극적으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1.소설 「탁류」는 1930년대 최고의 풍자소설가였던 이 고장 군산 출신 채만식(1902년~1950년)의 작품이다. 1937~1938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로 식민자본주의의 탁류에 빨려 들어가는 초봉이의 비극을 통해 당대 사회의 부조리함과 인간군상의 타락상을 특유의 풍자로 적나라하게 고발하였다.
2.소설 「탁류」 줄거리 : 미두에 손을 댔다가 몰락한 정주사의 큰 딸인 초봉은 그녀를 시집보내 장사 밑천으로 삼으려는 부모의 강요로 평소 호감을 가졌던 가난한 의사 지망생 남승재가 아닌 겉보기에 잘 나가는 은행원이지만 실은 공금을 횡령해 미두와 주색에 탐닉하는 난봉꾼 고태수와 결혼한다. 고태수는 결혼 전 하숙했던 쌀가게의 주인 한참봉의 아내 김씨와 간통을 하였으나 결혼 후에도 김씨를 만나다 친구이자 추악한 용모와 탐욕스런 성격을 지닌 곱추 장형보의 밀고로 한참봉에게 죽음을 맞이한다. 고태수가 죽음을 맞이하던 그즈음 초봉은 장형보에게 겁탈당하고 서울로 온 후 아버지의 친구인 박제호의 첩으로 전락하였다가 다시 장형보의 손아귀에 떨어진 끝에 그를 살해하고 만다. 한편 초봉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던 남승재는 의사가 되어 그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하는 초봉의 동생 계봉과 사귀게 되고 언니 초봉의 딱한 사정을 듣고 난 후 그녀를 돕기로 마음먹지만 이미 장형보를 살해한 초봉과 만나게 된다.
군산 근대역사문화 공간의 중심지를 뒤돌아본다. 수탈의 건축물 앞 그 공간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조형물이 처연하다.
군산 로컬푸드 직매장은 지역 농가가 생산한 신선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소비자에게 직접 제공함으로써 지역의 농가에는 안정적인 판로와 소득을, 소비자에게는 품질 좋은 먹거리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운영한다고 한다.
백년광장 쉼터정자에서 아침을 먹었다. 군산 내항 쪽을 바라보니 왼쪽에 배수펌프장 건물이 있고, 그 뒤쪽에 충남 서천과 전북 군산을 잇는 동백대교가 보인다.
백년광장에 임영경 작가의 2010년 작품 '길 111 of 수근'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일제시대 쌀 수탈의 이동경로가 된 군산의 뱃길과 그 주변에서 회한의 삶을 실었던 부두 노동자의 삶의 길을 표현하고, 그 중 항구 노역자 생활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웠던 박수근 화백을 통해 길의 의미를 재조명하였다."하는 작품 설명이 붙어 있다.
백년광장 쉼터정자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하는데 그쳤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구불6-1길 '탁류길' : 길이 6km, 산들길 1시간40분. 길이 보여주는 군산의 근·현대사.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출발하여 군산근대역사박물관까지 걷는 짧은 길에 군산의 근·현대사가 상세히 담겨있다. 일본강점기때의 국도복합영화관 건물이 남아있고, (구)조선은행과 옛 세관 등 수탈의 시대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이 건물들은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권위와 당당함을 과시하려는 의도였으리라.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은 군산의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공간이니 꼭 방문해보자. 선양동 해돋이공원 전망대에 오르면 오른쪽은 금강하굿둑이, 아래에는 개복동 비탈길이 보인다. 개복동 비탈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개복동 예술의 거리가 보인다. 군산의 옛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4코스 : 군산근대역사박물관-850m-해망굴-1070m-신흥동 일본식 가옥-300m-초원사진관-350m-이성당-800m-동국사-900m-선양동해돋이공원-610m-개복동예술인의거리-1120m-군산근대역사박물관
서해랑쉼터는 간이역이다. 이 철도가 군산역에서 군산항역까지 운행되었던 철도일까? 쉼터에 들어가 게시물들을 살펴 보았다.
길이 19.6km, 소요시간 6시간 30분, 난도 보통.
코스소개
코스개요
-보존 가치가 높은 다양한 습지식생환경으로 야생 동식물의 중요한 서식처인 군산호수를 지나는 코스
-마을을 잇는 골목길을 지나 호수둘레길을 걸으며 숲길, 논길, 호숫길을 두루 지날 수 있는 코스
관광포인트
-과거 상수원 보호지역으로 자연생태계가 온전히 보전되어 있는 '군산호수'
여행자 정보
-시점: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 새창이다리
교통편) 김제공용버스터미널에서 21번 버스 승차 '신창'정류장 하차
-종점: 군산시 옥산면 당북리 와당마을버스정류장
-군산호수 둘레길 초입은 갈대밭으로 가을이면 은빛 장관을 볼 수 있음
길이 11.6km, 소요시간 4시간, 난도 보통.
코스소개
코스개요
-군산의 역사와 문화, 자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코스
-일제 강점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군산의 골목에서 문화와 예술을 느낄 수 있는 코스
관광포인트
-벚꽃과 단풍이 아름답고 정상에서는 금강과 서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도심 속 공원 '월명공원'
-수산물의 중심지인 해망동과 군산시내를 잇던 130m 터널 '해망굴'
-대한제국 때 지어진 유럽 양식의 붉은 벽돌건물 '옛군산세관'
-군산의 근대문화 및 해양문화를 주제로 한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일본 나가사키 지방은행의 군산지점이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초기 건축물 '군산근대미술관'
여행자 정보
-시점: 군산시 옥산면 당북리 외당마을버스정류장
교통편) 군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42, 43, 44번 버스 승차 '쌍용예가아파트'정류장 하차
-종점: 군산시 장미도 진포해양테마공원
-종점에 위치한 군산근대역사문화거리는 볼거리가 풍부하고 식당 등 편의시설이 많음
길이 14.9km, 소요시간 5시간, 난도 쉬움.
코스소개
코스개요
-근대 역사거리를 걸으며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생생히 만나볼 수 있는 코스
-추억의 영화 촬영지에서 아날로그 감성의 매력에 빠져드는 코스
관광포인트
-일제강점기에 간조시에도 선박을 접안시키려 만든 '뜬다리부두'
-최무선 장군의 진포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개관한 '진포해양테마공원'
-마을을 관통해 기차가 지났던 옛 철길을 따라 마을의 흔적과 카페 등이 생긴 '경암동철길마을'
-군산의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구암역사공원'
-군산 출신의 소설가 채만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채만식문학관'
-금강하구의 자연생태계를 보전하는 교육의 장 '서천군조류생태전시관'
여행자 정보
-시점: 군산시 장미동 진포해양테마공원
교통편) 군산신외버스터미널에서 1, 8, 9번 버스 이용 후 근대역사박물관 정류장 하차
-종점: 서천군 장항읍 신창리 장항도성장 입구
-군산근대역사문화거리와 금강하굿둑관광지를 지나는 코스로 식당과 편의시설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음
서쪽(西)의 바다(海)와 함께(랑) 걷는 길. 서해랑길은 전남 해남 땅끝전망대에서 인천 강화를 연결하는 109개 코스 1,800km의 걷기 여행길로, 서쪽(西)의 바다(海)와 함께(랑) 걷는 길을 의미합니다. 서해랑길 따라 천천히 걷다보면 서해안의 개펄과 섬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아름다움이 모여 있는 길, 코리아둘레길은 동·서·남해안 및 DMZ 접경지역 등 우리나라 외곽의 걷기여행길을 연결하여 구축된 약 4,500km의 초장거리 걷기여행길이며, '대한민국을 재발견하며 함께 걷는 길'을 비전으로 '평화, 만남, 치유, 상생'의 가치를 구현합니다.
정면에서 서해랑 쉼터 간이역을 뒤돌아보았다. 시간여행 꼬마열차 모형물이 실제 협궤열차처럼 보인다.
제3차 축항 공사[1926년~1933년]가 시작되는 1920년대 중반부터 군산역을 장미동의 세관 부근[현재 한국 전력 군산 지점 뒤편]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1926년 군산부[군산시]는 12월 조사에서 인구 2만 2537명에 물자 집산액 2억 원, 무역액 7천만 원, 적출미 1백 5십 만석으로 집계되자 군산역 이전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1927년 8월 ‘부역(府駅) 확장 조사 위원회’를 설치한다. 이어 타당성 조사와 현장 답사를 마치고 공사를 시작, 1931년 8월 1일 군산항역 역사(駅舎)가 준공되어 영업을 개시한다. 군산역은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으나 군산항역은 간이역으로 개찰구만 있는 작은 규모의 건물이었다. 1930년대 군산항역~전주 구간을 오가는 열차는 경전철로 불리는 협궤 열차였다. 편도 1시간 40분 소요됐고, 요금은 1원 40전[당시 부두노동자 쌀 한 가마 운반비 1전]이었으며, 하루 왕복 4회 운행하였다. 주로 일본인들이 이용했던 군산항역은 1943년 12월 1일 화물 운송 기능을 군산 부두역에 넘겨주고 문을 내린다. 군산 부두역은 군산시 장미동[일제 강점기 미곡 검사소 부근]에 있었던 철도역으로, 화물만 취급했다. 일제가 원활한 물자 수송을 위해 군산항역 대안으로 개설한 역이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폐쇄됐으나 마루보시[丸星], 미창 등이 수하물 작업장으로 사용하다가 1970년대에 중단되고 건물이 헐렸으며 2012년 주차장 공사로 선로 시설이 모두 철거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군산 내항 부잔교(뜬다리)가 있는 곳으로 나간다.
군산 내항 부잔교 앞에서 서북쪽을 바라보니 동백대교가 보인다. 왼쪽의 건물은 배수펌프장이다.
군산 내항 부잔교 옆에 서해랑길 54·55코스 안내도가설치되어 있다.
서해랑길 54코스 종점&55코스 시작점에 군산 내항 역사문화 공간 설명안내판, 시간여행마을 포토존, 서해랑길 54·55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옆에 부잔교(뜬다리)가 있다.
군산 내항 철도와 군산 내항 호안 시설을 포함하는 이 공간을 군산 내항 역사문화 공간이라 이른다.
군산 내항 역사문화 공간은 군산 내항 뜬다리 부두(부잔교), 군산 내항 호안시설, 군산 내항 철도, 군산 구)제일사료주식회사 공장, 군산 경기화학약품상사 저장탱크를 이끈다. 군산 내항 역사문화 공간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대한제국의 개항 역사를 알 수 있는 구)군산세관 본관, 둘째, 일제강점기에 행해진 수탈의 역사를 증명하는 군산 내항 철도와 군산 내항 뜬다리 부두(부잔교), 셋째, 광복 이후 대한민국 산업화를 볼 수 있는 군산 구)제일사료주식회사 공장, 군산 경기화학약품상사 저장탱크 등이다. 군산 내항 역사문화 공간은 근대 항만의 역사, 근대 산업화 시기 어업과 산업 생활사 등 대한민국의 항만 역사를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뜬다리부두는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간조와 만조의 수위 변화와 무관하게 대형선박 접안을 위해 조성된 시설이다.
서해랑길 54·55코스 안내도 오른쪽 기둥 위에 서해랑길 55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서해랑길 54코스 탐방을 마치며 기념한다.